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것처럼 상기된 기자가 배우들이 올 것으로 예상되는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봐. 자네 설마 여기 기자로 와 있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알아.”
“정말로?”
“응.”
“내 말 듣고 있기나 해?”
“응.”
이제는 대답마저 무성의했다.
쯧. 이 녀석 오늘 오는 배우들 중에 좋아하는 배우가 있나 본데?
“자네 생각은 어때? 정말로 아시아 감독들이 상을 휩쓸어 갈 것 같나?”
“이번에 동아시아 3국의 감독들이 모였어. 전부 칸에 온 적 있는 사람들이지. 이번에는 유례없을 정도로 아시아와 이슬람권 국가들의 작품이 모였어. 세계 영화 시장이 바뀌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중심에 나는 한국이 있다고 생각해.”
정신 놓고 있는 줄 알았더니 꽤 날카로운 분석이잖아?
기자로서의 본분을 다하라고 말하기 위해서 한 질문인데 예상보다 더 진지한 대답이 돌아오자 물어본 기자가 얼떨떨한 얼굴로 호응했다.
“어, 응. 그렇지. 요즘 할리우드만 봐도 그렇잖아. 동양인들의 배역이 다채로워지고 있어. 영화시장의 규모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지.”
“나도 동의해. 그리고 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나는 그 중심에 한국이 있다고 생각해. 정확하게는 두 배우가 그 중심이지.”
“으응? 아. 혹시 그 배우들 말이야?”
짐작이 가는 바가 있어서 내가 아는 그 배우냐는 뉘앙스를 풍기자 상대방의 열렬한 반응이 따라왔다.
이건 열렬함을 넘어서 흡사 광기… 같은데?
“맞아. 배우 지연과 오지한이지. 그 옛날 오스카에서 오지한이 상을 받았을 때부터 나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서. 그가 백인들의 잔치인 오스카를 바꾸고 할리우드를 변화시킨 거야. 그 콧대 높은 마벨이 그를 위해 자리를 비워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그리고 지연도 배우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어.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봐. 고작 한국에서 드라마 몇 편, 할리우드에서 영화 몇 편이 다야. 다 합쳐도 다섯 작품이 될까 말까지. 그런 사람이 칸에 왔어. 이게 뭘 뜻하는지 알아?”
번들거리는 눈으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기자를 보고 다른 기자가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하지만 다른 쪽에 두었던 시선까지 돌린 채 가까이 다가와 말하는 기자는 그의 심정을 알아주지 않은 모양이다.
광기어린 시선을 피하고 싶어서 기자가 재빨리 대답했다.
“뭐, 뭘 뜻하는 건데?”
“앞으로의 영화계는 두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일 거야. 이미 흐름은 만들어졌어.”
뭘 흐름까지야.
아직 지연의 배우 필모그래피는 검증되지도 않았는데.
뭐, 그녀의 움직임으로 시작된 ‘메리골드’ 운동은 정말 아름답긴 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두고 봐. 이번에 칸에서 증명될 거야. 그녀의 진가가.”
“그래.”
대충 대답해준 기자가 눈빛이 광기로 물든 기자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그러고 보면 저 기자는 예전부터 오지한을 주목해 왔었던가?
작년에 프랑스에서 열린 지연의 메리골드 콘서트에도 취재하러 간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한국의 두 배우에게 푹 빠진 모양이라며 기자가 다시 카메라를 점검했다.
“왔다!”
누군가의 외침으로 카메라 렌즈가 총구처럼 한 곳으로 겨눠졌다.
월드 프리미어를 앞둔 배우들이 레드카펫에 모였다.
“와아.”
“미쳤다.”
직업상 많은 유명인을 봐 왔지만 저들만큼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같이 촬영한 팀인 듯 단정한 머리와 몸에 딱 맞는 수트를 입은 남자들이 보였다.
칸에 처음 오는지 긴장한 얼굴로 눈만 이리저리 굴리는 사람들의 중심에 그녀가 있었다.
목을 감싸는 새틴 소재의 민소매 드레스는 민들레처럼 눈부셨다.
노오란 드레스는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으며 민들레 꽃잎처럼 풍성했다.
등은 과감하게 파여 있었으며 가슴을 덮는 시스루에는 색색의 꽃들이 잎사귀와 함께 수놓아져 있어 지연이 꽃밭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게 했다.
본인도 이곳이 처음이면서 여유로운 얼굴을 한 채 다른 배우들을 토닥이고 있었다.
압도적인 미모, 압도적인 아우라.
수많은 별이 모인 프랑스 칸이었지만 사람들의 포커스를 강제로 맞춘 것처럼 모두의 시선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미모와 아우라에 기자들과 팬들이 홀린 듯이 감탄사를 뱉으며 셔터를 눌렀다.
“꺄아아악!! 연! 여길 봐줘요!!”
“연! 사랑해요!! 꺄악!!!”
여기저기서 자신을 봐달라는 아우성에 지연이 팀원들을 달래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슬로우를 건 것처럼 자신들을 돌아보는 지연에 팬들이 자지러지듯이 비명을 질렀다.
지연이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런 커다란 자리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본 거.사 팀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지연을 쳐다봤다.
그들의 시선을 느낀 지연이 좀 웃으라는 듯이 팔뚝을 톡톡 두드렸다.
“선배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안 떨리세요?”
“우릴 좋아하고 환호해 주는 사람들인데 왜 떨려요. 그리고 제가 아는 사람이 말해준 건데 칸에 가는 것만으로도 축제 같을 거라고 말해주셨어요. 우리는 지금 축제에 와 있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별로 안 떨릴 거 같은데요?”
지연이 요정같이 싱그러운 얼굴로 웃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이 점점 부드럽게 풀려갔다.
“그렇네요. 생각해 보니 저흰 지금 축제의 현장에 와 있는 거였죠?”
“축제를 특등석에서 즐긴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역시 지연 씨는 대단하네요.”
태석과 강해성 감독이 존경이 담긴 시선으로 지연을 쳐다보았다.
지연은 그 옆에서 울 것 같은 얼굴로 레드카펫이 깔린 극장 앞을 쳐다보는 진종명 배우도 빼놓지 않고 챙겼다.
“진 배우님!”
“아. 네.”
지연의 부름에 종명이 돌아봤다.
눈가를 쓰는 거친 손에 지연이 그의 손을 잡았다.
“메이크업 지워져요.”
“그렇겠네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눈물이 흐를 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세요.”
진종명 배우가 지연의 말을 따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아침 드라마에서 불륜남이나 망나니 재벌 2세 역할만 맡았던 그가 언제 이런 곳에 다 와 보겠는가.
다시 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종명이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새기겠다는 듯이 눈에 힘을 부릅 줬다.
“진 배우님. 곧 입장한대요.”
“네.”
“여기 오세요. 나란히 서야죠.”
“죄송합니다.”
“뭐가요? 진 배우님도 우리 거.사 팀 중 한 명이잖아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지연의 말에 종명이 잠시 멈칫했다.
나도 이 영화의 일원.
이런 훌륭한 영화에 나도 있었다.
지연의 말에 종명이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저도 거.사 팀이죠.”
“우리 진 배우님이 너무 긴장하셨군요.”
“선배님 얼른 오세요. 입장해야 한대요.”
“갑니다.”
스태프의 신호대로 ‘거부할 수 없는, 사랑’ 팀이 레드카펫을 밟았다.
그들의 뒤를 함성과 플래쉬가 뒤따랐다.
* * *
밖에서 이어진 갈채가 안까지 이어졌다.
배우와 감독의 등장에 극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맞이했다.
관객들에게 정중히 인사한 거.사 팀이 자리에 앉자 월드 프리미어를 보러 온 사람들도 자리에 앉았다.
상영관이 어두워졌다.
어두운 화면이 서서히 밝아졌다.
누군가의 등으로 가로막혀 있던 화면이 서서히 물러나면서 전체를 조명했다.
그곳은 재판장이었다.
카메라가 판사를 비췄다.
[피고인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판사의 말에 카메라가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황토빛 옷을 입은 사람이 여성인지 죄수복을 입고 있어도 마른 몸을 알 수 있었다.
서서히 올라가던 카메라에 창백한 피부가 보였다.
조금 더 올라가자 핏기 없는 입술이 드러났다.
마침내 카메라가 피고인의 얼굴을 비췄을 때 극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저는 살고 싶었습니다.]
생기 하나 없는 얼굴로 죽은 눈동자가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 상영됐다.
279. <거부할 수 없는, 사랑>(1)
화면이 바뀌었다.
“연희야!”
“미안! 내가 너무 늦었지!”
“그래! 너 때문에 영화 시작했겠다! 얼른 가자!”
친구가 연희의 손을 잡고 뛰었다.
약속 시간에 늦었지만 연희는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면서 웃고 울었다.
약 2시간 동안 웃고 우느라 지친 두 사람이 상영관을 나왔다.
“아. 재밌었다.”
“우연희 또 울었대요.”
“내가 뭐!”
“세상에 코미디 영화를 보고 우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그치만 개를 잃어버린 줄 알고 목줄 잡고 우는데 어떻게 안 울어!”
“그 뒤에 개장수가 나타나서 날라차기 하는 바람에 눈물이 쏙 들어갔지.”
조금 전에 봤던 영화 감상을 늘어놓던 두 사람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미리 봐두었던 가게로 향했다.
SNS에서 맛집이라고 올라온 가게였다.
“여기 예약 잡느라 힘들었어.”
“그래. 예약하느라 고생했어. 하여튼 예전부터 당첨운은 좋았단 말이야.”
“그 당첨운이 로또에도 왔으면 좋겠는데.”
“꿈이 너무 큰 거 아니야?”
“뭐 어때.”
연희가 꿈도 못 꾸냐며 입을 삐죽였다.
그러다 잠시 배고픔을 못 이긴 청년들이 가게로 뛰어갔다.
* * *
영화관 다음 코스로 SNS에서 유명한 맛집을 찾은 연희와 민정이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고 배를 두드렸다.
“아! 이건 인증해야지.”
“좋은 생각이야.”
요리가 나왔을 때 미리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렸다.
너무 배가 불러서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배부르게 밥을 먹었으면 수다를 떨어야 했다.
마치 정해진 코스인 것처럼 두 사람이 카페로 향했다.
여기서도 인증샷은 빠지지 않았다.
“내일 또 지긋지긋한 월요일이라니. 월요일 없어졌으면.”
“그럼 화요병이 생기겠지.”
“아. 퇴사하고 싶다.”
“취준 때는 취직하고 싶었잖아.”
“취업하자마자 퇴사하고 싶은 게 직장인의 본성이야.”
연희와 민정이 내일로 다가온 월요일을 걱정하며 수다를 떨었다.
평범한 하루
평범한 일상
평범한 친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에 스크린을 보고 있던 관객들이 자신의 경험을 떠올린 듯 푸근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민정아 이거 봤어?”
“어디 어디?”
연희가 폰 화면을 민정의 코앞에 들이대었다.
잠시 액정을 본 민정이 연희를 어린애 보듯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거 이번에 새로 나온 피규어!”
“너 아직도 애니 좋아하니?”
“뭐 어때. 마법 소녀는 여자들의 로망이야.”
“퍽이나. 너는 생긴 건 연예인 뺨치게 생겨서 어째 하는 행동은 7살 먹은 내 조카랑 비슷하냐.”
“취미에는 나이도 국경도 없는 법이에요.”
월급을 애니 굿즈 사는 데 꼬라박는 친구를 한심하게 쳐다본 민정이 빨대를 쪽 빨았다.
* * *
주말에 친구와 함께 놀고 충전을 한 연희는 다시 직장인으로 돌아왔다.
아침도 못 먹고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한 연희는 직장에서 적당히 요령도 피우고 동료들이랑 식사도 같이 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요일 구별이 없는 쳇바퀴 같은 직장 생활.
오늘도 다른 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연희는 집 앞에 택배 상자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어? 이거 뭐야.”
내가 뭘 시켰던가?
주소와 전화번호, 받는 이가 전부 맞았기에 연희는 주문했던 게 늦게 온 모양이라면서 택배 상자를 안으로 들고 들어왔다.
상자를 두고 폰으로 배달을 시킨 연희가 씻고 나왔다.
씻는 것도 귀찮았지만 지금 씻지 않으면 저번처럼 안 씻은 채로 잘 게 분명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털고 나오던 연희의 눈에 택배 상자가 들어왔다.
“맞다. 택배.”
집에서 반찬을 보내주기도 해서 택배는 오는 즉시 바로 뜯어보는 편이었다.
물론 아이스박스가 아니니 먹을 건 아닐 거다.
수건을 목에 걸친 연희가 가위를 가져와 택배를 뜯었다.
택배 안에는 뽁뽁이로 포장된 무언가가 있었다.
“이게 뭐지?”
가위로 뽁뽁이마저 마저 뜯은 연희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이번에 새로 나온 프리티큐티 머메이드 피규어잖아!”
지난 주말에 민정이랑 같이 놀러 갔을 때 보고 사려고 월급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분명한 건 이 택배는 내가 시킨 게 아니었다.
그럼 혹시 민정이가?
연희의 얼굴에 참을 수 없는 감동과 기쁨이 새어 나왔다.
“뭐야. 서프라이즌가?”
받은 감동만큼 바로 연락해줘야지!
연희가 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야아. 너 뭘 이런 걸 다 보냈어.”
-무슨 소리야?
“시치미 떼기는. 저번에 내가 이거 갖고 싶다고 해서 보내준 거야?”
-얘가 벼락을 맞았나. 너 진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영문을 모르겠다는 친구의 음성에 연희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라? 진짜 아닌가?
연희의 얼굴에 민망함과 의아함이 떠올랐다.
“프리티큐티 신상 피규어 네가 보낸 거 아니야?”
-헛소리하지 말고 끊어. 나 오늘 밤샘이다.
뚝
민정이 가차 없이 통화를 종료했다.
밤샘이라 예민한가 보네.
까칠한 친구의 반응에 연희가 송장을 살폈다.
“보낸 사람 최*정. 민정이 맞네. 자기가 보내놓고 까먹은 건가?”
연희는 민정이 지금 밤샘 때문에 까먹을 것 같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며칠 뒤, 이번에는 회사로 무언가가 도착했다.
생일 축하 카드가 함께 동봉된 케이크와 꽃다발이었다.
* * *
“우 대리님. 축하드려요.”
“예?”
“오늘 생일이시죠?”
“아아. 맞아요.”
중소기업이라도 경조사와 4대보험은 챙겨주었다.
사내 메일에 이번 달 생일인 사람 중 내 이름을 보고 알았나 보다.
그런데 며칠인지까지 나오던가?
연희가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생일을 축하하던 사람 뒤로 다른 사람이 다가왔다.
“세상에. 우 대리님 애인 있어요?”
“아니요?”
“어머. 그럼 썸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