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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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서로를 보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 배우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서로를 보고 술 한잔할 수도 없었겠지.

그런 부자의 옆으로 강해성 감독의 오랜 지기인 팀장들이 찾아왔다.

“형님. 아들이랑 둘이서 뭘 그리 얘기하고 있소.”

“너희들 왔니?”

“기율이 너는 뭐하냐. 형님 술잔 안 뺏고.”

“안 그래도 아까부터 아버지 잔에 물만 따르고 있었습니다.”

당당하게 술잔빼기를 했다는 기율의 말에 팀장들이 눈을 끔뻑였다.

어릴 때부터 느꼈지만 이 녀석도 예사 녀석이 아니었다.

형님이 촬영장에 데리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었는데.

팀장들이 기율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화제를 돌렸다.

“저는 솔직히 강해성 감독님이 현장에 복귀한다고 해서 엄청 놀랐습니다.”

“나도, 나도.”

“우리 형님 현장 복귀 안 하는 줄 알았는데 복귀할 줄이야. 나도 엄청 놀랐당께.”

“나도 엄청 놀랐잖아.”

소담에서부터 해성과 함께 일했던 스태프들이 복귀한 강해성 감독을 보고 뒤늦게 심경을 털어놓았다.

제작까지 워낙 순식간에 진행되었고, 회포를 풀 틈도 없이 진행되느라 이제야 얘기할 수 있었다.

밑에 있는 녀석들이 술에 절어 하하호호 하는 사이 각 팀의 우두머리들끼리 모여 찌개 국물을 나눠 먹었다.

얼큰한 된장찌개 국물을 한 숟갈 먹고 수저를 내려놓은 조명팀 감독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우리가 소담에 있을 때,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냐. 있는 꼴, 없는 꼴 다 봤었지.”

“나 그래서 형님이 블레스랑 계약했다면서 계약서 들고 왔을 때, 솔직히 또 사기당한 건 아닌가 의심했다니까.”

“어? 형묵이 너도?”

“강철이 형님도?”

같은 생각을 했다며 오디오 감독과 조명 감독이 서로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솔직히 사기당해서 이 바닥 떴던 형님이 업계에서 가장 유명한 탑엔터와 블레스를 등에 업고 나타났을 때, 이 형님이 또 어디서 사기당한 게 아니라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진짜 계약서대로 진행되고 돈 걱정 없는 환경에 뛰어난 배우들이 모여들자 팀장들은 그제야 해성의 복귀를 실감했다.

“아무튼! 형님. 잘 왔소.”

“우리 불러줘서 고맙습니다, 감독님.”

“덕분에 우리 애들한테 제가 큰소리칠 수 있었습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그리고 돌아오신 걸 축하드립니다.”

돌아온 걸 축하한다는 말에 해성이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며 잔을 들었다.

“늦었지만, 날 믿고 와 줘서 고맙다. 남은 작업 힘내 보자고!”

“쨘!”

“쨘합시다!”

“잔 들어!”

“형님만 들면 돼요.”

복귀를 축하하는 건배가 울리려는 때,

“안 됩니다. 다들 물 드세요.”

기율이 모두의 잔을 뺏어 손에 물컵을 들려주었다.

“….”

“….”

“….”

“형님. 아들 하나 겁나 잘 키우셨네요.”

“물 마시자.”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아들이랑 같이 촬영하는 현장에는 단점도 있었다.

해성이 아쉬운 손길로 물컵을 들어 올렸다.

* * *

“끄응.”

어젯밤 거.사 팀들과 함께 크랭크업 기념 회식을 가졌던 지연이 침대 위에서 힘겹게 눈을 떴다.

술을 잔뜩 마신 지연이 침대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 인기척을 느낀 지한이 지연의 방에 들어왔다.

“일어났어?”

“으응.”

“누나. 어제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어?”

일어나지도 못하는 누나를 보고 지한이 꿀물을 탄 컵을 들고 침대로 다가왔다.

그러게 말이야.

내가 회귀 전에도 술로 죽을 것 같았던 게 손에 꼽는 사람인데 어제는 나도 모르게 조금 달렸지 뭐야.

지연이 걱정하는 동생의 눈치를 보며 컵을 건네받고 꿀물을 마셨다.

“하아. 살 것 같다.”

“다음에는 이렇게 마시지 마. 나 어제 진짜 깜짝 놀라는 줄 알았어.”

“미안.”

“말로만?”

“각서 쓸까?”

“은주 누나가 해장국 사 왔어. 그거 먹고 각서 쓰자.”

일단 먹이고 쓰게 하는 거구나.

누구 동생인지 아주 잘 배웠어.

지연이 아직도 서랍 속에 고이 보관되어 있는 백지 각서들을 떠올리며 동생의 태도를 칭찬했다.

267. 고향에서 온 소식(1)

촬영 때문에 지한이가 아침 일찍 집에서 나가고, 지연은 한숨 더 자러 들어갔다.

푹 자고 일어난 지연은 점심이 다 되어서야 개운한 얼굴로 일어났다.

평소에 지연이 일어나는 시간이 새벽 5, 6시라는 걸 생각하면 숙면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에서 깬 지연이 아침보다는 편안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끄으으으으.”

침대에서 상체만 일으킨 지연이 하늘 높이 기지개를 켰다.

굴욕 하나 없는 얼굴로 상쾌하게 팔을 뻗는 지연의 모습이 한 편의 광고 같았다.

지연이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쳤다.

혹시라도 잠을 방해할까 봐 꼼꼼하게 커튼을 쳐 놓은 동생의 배려가 느껴졌다.

윽. 진짜 앞으로는 그렇게 안 취해야지.

어제는 너무 달렸어.

만취해서 몸을 못 가눈 적이 회귀 전후 통틀어서 손에 꼽을 정돈데 어제 그날이 하나 더 추가됐다.

눈부신 햇살 속에서 지연이 반성하고 있을 때 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애옹

지연이 자는 사이 옆에 다가와 나란히 누워 있던 모짜가 울음소리를 냈다.

내 인기척 때문에 잠에서 깼는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모짜가 입을 쩌억 벌리고 하품했다.

포악한 이빨이 참으로 귀엽군.

지연이 피식 웃으면서 침대로 돌아갔다.

“어이구. 우리 모짜. 언니 때문에 깼어?”

지연의 말에 모짜가 눈을 깜빡였다.

잠에서 깨려는 듯 눈을 깜빡이며 하품을 늘어지게 하던 모짜가 내 이곳저곳을 관찰했다.

아이고. 어젯밤에 도대체 내가 어떤 모습이었길래 애가 이렇게 걱정할까.

“모짜야. 언니 이제 괜찮아.”

애옹!

“정말인데.”

지연이 모짜와 코를 비비며 작게 웃었다.

멀쩡한 지연의 행동을 본 모짜가 안심했는지 지연의 얼굴을 핥으며 머리를 비볐다.

좋아. 우리 애 기분도 풀어줬으니 배를 채워볼까.

모짜를 품에 안고 거실로 나온 지연이 자연스럽게 TV를 켰다.

띠리링

TV 켜지는 소리에 시원한 그늘에게 낮잠을 자던 인절미의 귀가 쫑긋 섰다.

움찔거리던 인절미가 눈을 뜨더니 하품을 쩌억 하며 마약방석에서 일어나 소파로 걸어왔다.

“우리 집 애들은 어쩜 이렇게 하품하는 게 다 똑같을까.”

우리 넷이서 나란히 하품하는 것을 본다면 우리가 가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연이 뿌듯한 심정으로 소파 위에 몸을 동그랗게 만 인절미의 옆에 모짜를 내려놓았다.

“밥 먹을래?”

와웅

“그래. 밥 먹자. 배고프지?”

지연이 일어나서 아이들 그릇에 사료를 부었다.

물그릇까지 확인한 지연이 아이들을 불렀다.

“밥 먹자.”

지연의 부름에 아이들이 소파에서 내려와 자기 그릇 앞에 왔다.

“흠. 오늘 밥맛은 어떠신가요?”

장난스러운 지연의 물음에 아이들은 귀를 쫑긋 움직이고 마저 식사했다.

대답할 틈도 없다니.

만족스러우신가 보군요.

지연이 흐뭇하게 웃으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엌으로 들어간 지연이 간단하게 파스타를 만들어서 거실로 들고나왔다.

몰랐는데 해장에 파스타가 좋더라고.

후루룩

얼큰한 파스타를 먹으며 지연이 TV를 봤다.

커다란 스크린에 오래된 예능 프로그램이 재방송되고 있었다.

야외 버라이어티계의 전설이자 지금도 출연진들을 바꿔가며 수명을 이어가고 있는 K본부의 간판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전설적인 예능 프로그램의 여행장소를 본 지연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저기 많이 변했네.”

옛날 모습이 남아 있었지만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서 그런지 기억하던 모습이랑 조금 바뀐 곳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고향의 모습에 지연이 그리운 얼굴로 화면을 보다가 채널을 돌렸다.

자신이 그리워하는 건 고향이 아니라, 저곳에서 보냈던 즐거운 추억이었다.

“혜민이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혜민이는 지연의 초등학교 친구였다.

전학을 가고 나서도 한동안 연락을 계속했고, 데뷔 때는 축하한다는 문자도 받았다.

그 이후에는 나도, 혜민이도 바빠서 연락이 뜸해졌는데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희랑 선미는 지금쯤이면 대학원에 있겠네.”

이번에는 인연이 없었지만, 지난 삶에서는 절친이었던 친구들.

마지막에는 좋지 않게 연을 끊었던 옛 친구들의 이름에 지연의 눈이 가라앉았다.

잠시 과거로 침잠하던 지연이 고개를 저어 잡념을 털어냈다.

“알 게 뭐야. 지나간 일 따위. 지금이 중요하지.”

지연이 씩씩하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에 담아 설거지한 지연이 애써 다른 걸 생각했다.

동생이 없는 휴식이었다.

당분간은 백수처럼 TV나 볼까, 아니면 그림을 그리러 갈까.

역시 백수처럼 늘어져 있는 것 보다 산 좋고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가서 애들이랑 맛있는 거 먹고 한가롭게 그림 그리는 게 좋겠지?

“이번에는 어디 가서 그려볼까. 바다는 사람이 많을 거 같으니까 산으로 갈까? 아니지. 프라이빗 비치라면 바다도 괜찮을지도? 좋은 별장이 있으려나?”

해외여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돈은 죽을 때까지 펑펑 쓸 정도로 많이 벌었으니까.

내가 그리는 그림은 대부분 풍경화.

가끔 지한이나 주변 인물이 등장하는 인물화도 그리긴 하지만 주로 그리는 건 풍경화였다.

재충전도 할 겸 지연이 머릿속으로 어딜 가면 좋을지 후보지를 선정했다.

“해외도 좋겠다. 애들이랑 같이 모래사장에서 모래찜질도 하고, 수영도 하는 거야. 낚시도 해 볼까? 바다가 엄청 맑으면 좋겠다.”

하나씩 머릿속으로 여행지를 스케치해가며 지연이 조금 전의 꿀꿀한 기분을 털어냈다.

설거지를 다 끝낸 지연이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아이들을 불렀다.

“모짜야. 우리 산책 가 볼까? 인절미도 갈 거지?”

애옹

왕!

산책이라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 아이들이 폴짝폴짝 뛰었다.

인절미는 어느새 리드줄을 가지고 와서 입에 물고 있었다.

그래. 날도 맑은데 밖에 나가자.

* * *

오랜만에 공원에 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옷차림이 가벼워진 사람들이 뜨거운 햇살을 가리며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 등산복 차림을 하고 느릿하게 걷는 노인, 꺄르르 웃으며 뛰는 아이들.

평일 공원에서 볼 수 있는 일상에 지연이 흐뭇한 얼굴로 사람들을 보았다.

헥헥헥헥

애옭

“아이고. 더웠어? 잠깐 쉬자, 얘들아.”

한참 돌아다니던 아이들이 뜨거운 햇살에 지쳤는지 혀를 내밀고 축 늘어져서 그늘로 피했다.

어이구. 미안해. 조금 더 일찍 나올 걸 그랬어.

가장 뜨거울 시간이 아니라고 해도 아이들에게는 충분히 더웠을 거다.

지연이 그늘진 벤치에 앉으며 아이들 앞에 시원한 얼음물을 그릇에 따라주었다.

지친 아이들이 시원한 물을 마시며 목을 축이고 모짜는 얼린 물병을 품에 안고 누웠다.

“시원해?”

지연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은 모짜와 인절미가 그늘에 늘어졌다.

아이들이 저렇게 늘어지는 것 보니까 올해도 무척 더울 예정인가 보다.

물병을 더 얼려야겠네.

집은 몰라도 산책 나올 때는 어쩔 수 없으니까 얼음물로 달래야지.

일단 오늘은 조금 쉬게 한 다음에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아. 맞다. 그림.”

설거지하면서 스케치할 장소를 찾기 위해 지연이 오랜 조언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교수님! 잘 지내셨죠?”

은퇴를 앞뒀음에도 여전히 정정한 목소리에 지연이 환한 얼굴로 헨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오랜만이구나. 지연이 너는 잘 지내고 있어?

“그럼요. 아. 생각해 보니 지금 거기는 늦은 밤이겠네요. 죄송해요.”

-아니다. 아직 안 자고 있었어.

헨리 교수의 다정한 말에 지연이 배시시 웃었다.

함께한 세월이 벌써 20년이 다 되어갔다.

그 세월만큼 자연스러워진 ‘지연’이란 발음이 참 마음에 들었다.

“다행이에요. 교수님께 조언을 받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드렸어요.”

-조언이라니. 지연이 네게 조언이 필요한 일이라니 조금 긴장되는데?

“교수님이 긴장하실 일도 있어요?”

-물론이지. 엠마가 화났을 때라든지 지연이 네가 거액의 후원금을 내놓는 일이라든지 너희들이 말도 없이 찾아와 학교가 마비된 일 같은 건 언제나 내게 긴장을 준단다.

“그건 서프라이즈였다구요. 엠마와 학장님의 허락도 받았어요.”

관계자의 허락을 받은 서프라이즈였다고 말하는 지연의 주장을 들은 헨리가 낮게 웃었다.

헨리 교수님의 생일 서프라이즈를 할 수 있었던 건 헨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동의 덕이었다.

그땐 몰랐지.

헨리네 학교 사람들이 우릴 그렇게 좋아할 줄.

지한이랑 내가 아직 어렸고, 데뷔한 지 얼마 안 돼서 모를 줄 알았단 말이야.

어쨌든 유명인이 찾아왔다며 즐거워하는 학생들과 손주를 보는 것처럼 인자하게 지켜보는 교직원들 덕에 그해 헨리의 생일 파티는 성공이었다.

즐거운 추억을 떠올린 두 사람이 웃음을 터트릴 때 헨리가 다시 본론으로 돌렸다.

-그래서 내가 뭘 도와주면 될까?

“아! 저 이번에 바다를 그리고 싶은데 좋은 곳 추천해 줄 수 있을까요? 맑고 투명하고 크리스탈이 반짝거리는 것 같은 바다가 보고 싶어요. 프라이빗한 곳이면 더 좋을 거 같아요.”

-흐음. 아는 지인의 별장이 있는 곳이 네가 말한 곳과 비슷한 거 같긴 하구나. 이번에 촬영이 끝났다더니 쉴 장소를 찾는 거니?

“겸사겸사예요. 마음 편히 쉬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요.”

-촬영 끝나자마자 작업이라니. 쉴 땐 쉬어야지.

“저한테는 그림 그리는 게 쉬는 거예요.”

지연의 대꾸에 헨리가 웃음을 삼켰다.

쉬기 위해서 그린 그림을 가지기 위해서 줄 선 사람들이 아쉬워할 소리였다.

하지만 지연이 편안한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기에 저들이 소장하고 싶어하는지도 몰랐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차오르고 따뜻해지는 그림이니까.

-알았다. 내가 좋은 곳 찾아보마.

“고마워요, 헨리. 지한이 촬영도 끝나면 같이 놀러 갈게요.”

-언제든지 환영이다. 오기 전에 엠마한테만 말해주렴.

아이들이 온다면 신이 나서 이것저것 잔뜩 준비할 부인을 떠올린 헨리가 지연에게 부탁했다.

“당연히 엠마한테 연락하고 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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