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렇지?
지연아. 너 상 받았을 때 우리 소고기로 회식했잖아.
“앞으로 마지막 촬영 날까지 점심이랑 간식은 내가 책임질게. 아. 예정대로 안 될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촬영하는 주 저녁에는 회식할 수 있게 식당 수배해 줘.”
“잠, 잠시만. 지연아.”
“비용은 전부 내가 댈 게.”
“아니, 잠깐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럼 언니. 나는 오늘 일찍 들어가서 내일 촬영 준비해야겠어.”
“너 평소에도 일찍 들어가서 준비하잖아! 지연아!”
뒤에서 은주가 뭐라고 하고 있어도 지연의 걸음은 당당했다.
지금부터 마지막 촬영까지 이 한 몸 불태워서 연기하겠어.
지연이 은혜를 수십 배로 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 * *
지연의 폭주가 있은 날로부터 3주 뒤.
오늘은 드디어 거.사의 마지막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지연은 난생처음 입어보는 갈색 미결수 옷을 입고 분장실 의자에 앉아 대본을 읽고 있었다.
그런 지연의 옆에서 분장하는 것을 보는 은주와 장훈이 탐탁지 않은 듯 불편한 소리를 냈다.
“흐으음.”
“으음.”
결국 두 사람의 소리에 지연이 보고 있던 대본을 덮었다.
“은주 언니랑 장훈 오빠. 도대체 왜 그래? 나 이상해?”
“아니, 네가 죄수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까 기분이 묘해서.”
“나도. 어쩐지 내 양심이 콕콕 찔리네.”
영화의 흐름상 최종 국면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가 바뀌기는 하지만 마지막에 가까워지기 전까지 피해자였던 지연이 죄수복을 입고 있는 것이 영 찝찝했다.
괜히 억울하고 미안하고 죄책감이 든달까?
이래서 국민청원을 하는 건가?
그걸 의도해서 지연이에게 이 옷을 입힌 거라면 감독의 의도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마음에 안 드는 듯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주 언니와 장훈 오빠를 보고 지연이 웃었다.
“배우 하다 보면 이런 옷도 입어보는 거지.”
나는 그래도 맡은 역이 다양해서 입는 옷도 다양한 편이었다.
악역 전문 배우들은 상처 분장은 예사고 거의 매 작품 시커먼 옷이나 푸른 죄수복을 유니폼처럼 입고 나온다.
전문직만 맡는 배우들은 다른 작품에서도 매번 비슷한 옷을 입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그나마 맡은 배역에 제한이 없어서 이것저것 다 입어볼 수 있는데 좋은 거 아닌가?
아무튼 한두 번 입는 것 정도로 저런 표정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연아 너 분장 다시 해야겠다.”
“음. 역시 이 실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네요.”
지연의 얼굴에 붓칠하던 분장실 팀장이 은주의 말에 손을 멈췄다.
두 사람이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더니 뭔가 거슬린다는 얼굴로 팔짱을 꼈다.
“두 사람 다 왜 그래요? 지금 나 딱 맞지 않아요?”
“음…. 아니야. 삶을 포기한 것치고는 얼굴이 너무 빛나.”
“아! 뭔가 했더니 이제 알겠네요. 이 실장님 말대로 지연이 얼굴이 너무 눈에 띄어요.”
“여기서 유령처럼 보여야 하는데 조금 부족하네요.”
“연기하면 괜찮지 않을까? 지금은 평소처럼 언니랑 오빠랑 대화하고 있으니까 그런 거고. 연기 들어가면 유령 같은 분위기가 날 거야.”
“아니죠. 이대로 카메라 앞에 세우는 건 내 경력이 울 일이에요.”
아니 겨우 이런 걸로 경력이 울어요?
지연이 팀장의 말에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일 때, 분장실 안에서 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다들 은주 언니랑 팀장님 말에 동의하는 거야?
“죄송한데 지연이 얼굴 더 초췌하게 할 수 있어요?”
“으음. 이것도 최선을 다한 건데. 상처를 달 순 없잖아요.”
“그것도 그런데. 흐으음. 조금 더 심적으로 지치고, 넋이 나간 것같이. 그런 거 있잖아요. 다 포기한 것 같은 사람!”
“나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야.”
“뭐 어때. 여기 ‘생기 없는 얼굴로’라고 지문에 나와 있잖아.”
아니 그러니까 그건 연기 들어가면 할 수 있다니까.
분장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지연이 벌써 의기투합하여 어디에 뭘 바를지 결정하는 두 사람을 보고 죽은 생선 눈을 했다.
내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겠군.
지연이 알아서 하라는 듯이 몸에서 힘을 빼고 거울을 봤다.
똑똑
“지연 씨. 분장 다 끝났나요?”
“아! 감독님. 네. 끝났어요.”
“아니아니아니. 잠시만요. 지금 팀장님이랑 의견을 나누는 중이에요.”
“네?”
지연은 해성과 기율 부자에게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제작에 들어갈 때 촬영 일정이나 세세한 상황은 조연출 대신 그가 직접 알리러 왔다.
촬영 준비가 거의 다 끝나가서 분장이 다 됐는지 체크하러 왔는데 아직 다 안 끝났나?
해성이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분장실 팀장과 은주가 상황을 설명했다.
두 사람의 말을 들은 강 감독이 지연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말이 맞네요. 얼굴을 조금 더 죽여도 되겠어요.”
“그렇죠?”
“그럼 수정하겠습니다!”
“아니. 얼굴을 왜 죽여요.”
“이렇게 분장했는데도 지연 씨 얼굴이 빛이 나서 그래요.”
연기 들어가면 조금 다를 거라니까?
이 사람들이 도대체 내 얼굴을 어떻게 만들려고 이러는 거야.
나는 호러는 딱 질색이야.
지연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무서운 거 딱 질색이야. 언니 알지?”
“그럼. 지연아 나 못 믿어?”
다른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조금 못 믿을 것 같아.
지연의 불신 어린 눈빛에도 은주는 어느새 대화에 합류한 강해성 감독과 함께 수정 방향을 얘기하고 있었다.
‘어휴. 그래. 내 얼굴 마음대로 하세요.’
다 포기한 지연이 대본을 펼쳤다.
* * *
드디어 마지막 촬영이었다.
첫 촬영보다 조금 포동포동해진 제작진들이 분주하게 최종 점검을 하고 있었다.
바뀐 것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시작했었는데 어느새 밖에는 뜨거운 여름 햇살이 가득했다.
배우들이 자기 자리에서 대기하자 해성이 신호를 보냈다.
“씬 넘버 119, 테이크 원!”
슬레이트가 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사인과 함께 카메라가 돌아갔다.
법정처럼 꾸며놓은 세트장에서 우연희가 된 지연은 지문에 적힌 대로 생기 없는 얼굴로 멍하니 법정에서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아니, 귀로는 저들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저들의 말은 연희의 뇌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피고인.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우연희… 입니다.”
“피고인에게는 진술 거부권이 있습니다. 이 법정에서 진술한 것은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네….”
판사는 영혼이 나간 것처럼 어딘가 텅 빈 것 같은 연희의 상태를 유심히 지켜보면서 그녀에게 말을 했고, 연희는 묻는 말에 조용히 대답했다.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상태가 지금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잠시 변호사가 판사와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컷! 좋아요. 오늘 마지막이라 그런가? 다들 장난 아닌데요?”
“마지막까지 열심히 해야죠.”
“오늘이 마지막인 거 잊고 있었는데 감독님이 이렇게 알려주시네요.”
“후아. 저는 아직 대사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떨리죠?”
“원래 죄를 짓든 안 짓든 법정이라는 곳이 사람 살 떨리게 하는 곳이야.”
“어라? 선배님은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내가 드라마, 영화 찍으면서 서 본 법정만 수십 번이야.”
판사 역을 맡은 배우의 말에 촬영장에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빵 터트렸다.
검사 역을 맡은 배우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 저런 너스레를 부린 거겠지.
어찌 됐든 연륜 있는 배우 덕에 상대방의 긴장이 풀린 것 같아서 지연이도 작게 미소를 지었다.
제일 경력이 오래된 배우가 저렇게 후배를 챙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건 아마 주연이라도 쉽게 할 수 없는 거겠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거니까.
“이렇게 마지막 날에도 화기애애하니 좋네요. 그럼 다음 컷도 갈까요? 준비되셨습니까?”
“네!”
“넵!”
“저도 준비됐습니다.”
배우들이 조금 전과 같은 자세로 신호를 기다렸다.
해성이 눈빛을 보내고, 두 번째 슬레이트가 쳐졌다.
딱!
슬레이트 소리와 함께 세트장은 또다시 법정이 되었다.
마지막이지만 처음처럼.
달리기의 종점에 도착하는 것처럼.
배우들은 온 힘을 다해 연기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쌓이고.
길어진 해가 저물어 갈 때.
짝짝짝짝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드디어 영화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 촬영이 끝이 났다.
266. 회식
오늘 하루 열정적으로 촬영했던 거.사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한우 집으로 향했다.
마지막 촬영까지 무사히 마친 사람들이 후련함이 섞인 얼굴로 자리에 앉아 A++한우를 먹으며 잔을 부딪쳤다.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대박을 위하여!”
“위하여!!!”
찰랑-!
쨍, 째쟁, 쨍!
편안한 작업 환경과, 말썽 피우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현장.
축복받은 환경에서 제작비 걱정 없이 촬영하고 무사히 끝났으니 사람들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 중심에는 역시 지연이 있기 때문이겠지.
모두의 중심에 있는 지연에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오지한 연기를 지연 씨가 가르쳤다고 하더니. 아니 이렇게 잘하는데 왜 가수로 먼저 데뷔한 거야?”
“저도 궁금해요. 지연 씨. 왜 연기는 스무 살부터 한 거예요?”
“아. 그게 제가 주목받는 걸 좋아해서요. 무대 위에 올라가면 그때만큼은 사람들이 저한테 집중하잖아요? 그래서 가수로 먼저 데뷔한 것 같아요.”
사람들의 질문에도 지연이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반년 동안 함께하면서 친해진 스태프와 배우들이 지연의 말에 호들갑을 떨며 반응했다.
“지연 씨 관종이구나!”
“관종이라니. 그런 단어도 아세요?”
“날 뭐라고 보는 거야.”
“음. 맞는 것 같아요. 관종. 그런데 연예인이라면 다 그런 거 아닌가요? 아이돌이나 배우가 되려는 이유는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서잖아요.”
“현답이네. 크. 역시 우리 지연 씨. 수능에서 만점 받은 사람답다니까!”
술이 들어간 사람들은 지연의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테이블을 돌던 사람들은 지연의 테이블만 오면 떠날 줄 몰랐다.
그러다 보니 지연이 있는 테이블에는 잔을 들고 지연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로 넘쳐 났다.
누군가가 멀리서 이 광경을 본다면 영화의 중심이 누구인지 여실히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두! 지연 씨가 배우였으면 더 빨리 대박이 났을 거라구요!”
“세연 씨. 그건 아니다.”
“맞아. 우리 지연 씨는 처음부터 이미 대박이었어.”
“명곡 ‘POLARIS’를 모른단 말인가!”
“맞아맞아. 나 대학생 때 진짜 ‘POLARIS’ 안 듣는 사람이 없었다!”
“그거 때문에 전국에 MP3 사 달라는 학생들로 부모님들이 골치를 썩였었지.”
“내 동생도 시험 잘 볼 테니까 그거 사 달라고 어머니한테 조르더라.”
흐음. 그때 불법다운로드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있군.
사장님이 나서서 앨범 구매 시 정식으로 MP3 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는 쿠폰 번호를 제공했었지.
스트리밍 사이트도 정식으로 인수해서 음질과 이용권을 개선하고, MP3를 구매하면 이용할 수 있는 무료 스트리밍 쿠폰 등을 무더기로 풀어서 불법다운로드 시장이 커지는 걸 막았었다.
물론 약간의 인맥과 재력을 이용해서 불법다운로더들을 선처 없이 처벌했던 것도 한몫했지.
지연이 추억을 회상하고 있을 때, 지연의 테이블로 거.사의 선장인 해성이 기율과 함께 도착했다.
“이거 다들 여기 있었습니까? 다른 테이블이 텅 비었더라니.”
“어이쿠. 감독님 어서 오세요.”
“여기 앉으세요, 감독님.”
“아닙니다. 저는 빈자리에 앉으면 되는걸요.”
자리를 비켜주려는 어린 스태프의 친절을 부드럽게 거절한 해성이 자리에 앉자 그 옆에 기율이 나란히 앉았다.
해성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고참 스태프가 두 사람의 잔을 채웠다.
“감독님이 오셨으니까 우리 짠! 할까요?”
“자. 자. 감독님이 선창하시죠.”
“하하. 제가 뭐라고. 지연 씨가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도 감독님께서 선창하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지연이까지 양보하자 해성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잔을 들었다.
“거.사 500만을 위하여!”
“에이. 500만이라니. 우리 지연 씨도 있는데 너무 약한 것 같습니다.”
“맞아요, 감독님!”
“우리도 있으니까 800만까지 가야 하지 않을까요?”
“선배님? 우리 다 합쳐도 300만은 못 올릴 거 같은데요.”
“괜찮아. 우리에겐 지연 씨가 있잖아. 지연 씨가 800만 몫은 해 주실 거야.”
“어? 그러면 더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가?”
이미 뇌가 알코올에 절었는지 얼굴이 불콰해진 채, 의식의 흐름대로 대화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어느새 지연에게 몰렸다.
강 감독님이 선창하는 걸로 됐는데 갑자기 왜 나한테 화살이 돌아온 거야.
갑자기 자신에게 돌아온 화살에 지연이 속으로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잔을 들고 말했다.
“네! 제가 800만 채울게요. 그러니까 우리 영화 1,000만 갑시다!”
“우오오오오!!”
“1,000만! 1,000만!!”
술과 불위기에 취한 사람들이 야만족이라도 된 것처럼 ‘1,000만’을 외치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기묘한 광기에 지연이 어서 건배를 외치라는 듯이 해성을 바라봤다.
다행히 지연의 신호를 알아차린 해성이 잔을 들어 올리며 선창했다.
“거.사 1,000만을 위하여!”
“위하여!!”
“1,000만을 위하여!!”
“우아아아아!!”
광기에 휩싸인 사람들이 잔을 부딪치곤 통째로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그렇게 술자리는 점점 더 고조되었다.
* * *
술이 약한 사람, 다음 날 스케줄이 있는 사람 등이 먼저 자리를 떴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건지, 아니면 술에 먹히는 건지 모를 상태로 하하호호 웃으며 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이렇게 근심이 덜 드는 크랭크업 현장이 어디 있을까?
해성이 그늘 한 점 안 보이는 스태프와 배우들의 얼굴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좋으세요?”
아버지의 옆에서 물컵에 물을 가득 따라준 기율이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아들의 물음에 해성이 흐뭇한 얼굴로 대답했다.
“좋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좋은 환경에서 좋은 작품을 만들어서 좋아.”
“아직 다 끝난 건 아닙니다.”
“그래. 후반 작업이 남았지. 그래도 기율아. 모두의 얼굴을 봐. 저 사람들도 알고 있는 거야. 우리 촬영이 성공적이라는 걸.”
“잘 만들어도 흥행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굴곡진 시절을 보내서 그럴까.
만약에, 만약에, 만약을 가정하는 아들을 보고 해성이 물었다.
아버지의 질문에 기율이 말문이 막힌 얼굴을 하더니 피식 웃었다.
“안 될 수가 없겠네요.”
촬영하는 동안에도 얼마나 영화 제목이 기사에 오르내렸는지.
다른 촬영 현장에서도 이렇게 기자가 자주 찾아오는 법이 없었는데
거.사 촬영에서는 기사가 안 온 날이 드물었다.
촬영 초기에는 지연이라는 이름 때문에.
다음에는 오지한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후에는 남매의 촬영장 조공 때문에.
그 밖에도 조금 수그러들 만하면 터지는 화제 때문에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은 촬영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대중들에게 각인이 되었다.
“기율아. 촬영은 어땠니?”
“…좋았습니다. 솔직히 이런 환경이라면 10년도 더 찍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하하핫. 그렇지? 그래서 고맙구나.”
“뭐가요?”
“네 덕에 이런 환경에서 작업해 보지 않았니.”
아들이 지원해 보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아들이 먼저 자신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아들이 시나리오를 계약하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게 어디 저 때문인가요. 아버지가 열심히 시나리오를 쓴 덕분인걸요.”
“그 시나리오도 빛을 못 볼 뻔하지 않았니.”
“운 좋게 지연 씨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