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나 이제 뭐 준비하지? 뭐 하면 될까? 살 빼? 피부과 가서 관리 좀 받을까? 아니면 연기 수업?”
“일단 진정해. 우선 계약부터 하는 게 먼저야.”
“맞다. 계약이 먼저지. 형! 계약 언제 한대?”
“몰라. 이번 달 안으로 연락을 주기로 했잖아.”
“아. 빨리 전화 왔으면 좋겠다.”
선호가 설렘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두 손을 꼭 모으고 행복한 상상에 잠긴 선호를 보고 매니저가 선호의 두 손을 낚아챘다.
“그 전에 피부과부터 가자.”
손 물어뜯을 때 잽싸게 말렸는데 엄지손톱이 울퉁불퉁했다.
주위도 울긋불긋한 게 더 늦게 말렸다면 피가 났을지도 모른다.
병원이랑 네일 숍에 가서 애 손부터 봐야지.
그다음은 바로 연기 특훈이다.
머릿속으로 선호의 일정을 정리한 매니저가 방에서 외투를 챙겨 나왔다.
263. 아내인가, 조감독인가
선호에게 오디션 합격 문자가 가기 며칠 전.
오늘도 <장난(The Game)>의 배역을 뽑기 위해서 지한은 범수와 승욱과 같이 오디션장에 있었다.
“후우.”
“두 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아! 아닙니다. 이건 전적으로 저희가 해야 할 일인데요, 뭘. 오히려 도와주러 오디션장에 와 주신 오지한 배우님께 감사해야죠.”
승욱은 이쪽이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오지한 배우였으니 와 줬지 다른 배우였다면 감독님의 제안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거다.
다른 배우들의 잠재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상대역을 맡아주고 그러면서도 캐스팅에 대해서는 일절 말할 수 없다니.
자존심이 강한 주연 배우들이 쉽게 승낙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오지한 배우는 무려 전 세계에서 주목하는 월드 스타.
할리우드에서 오지한 배우의 몸값을 생각한다면 이런 자리에 부를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짧은 기간이었지만 박범수 감독과 류승욱 조감독은 알 수 있었다.
‘이 배우는 좋은 작품, 좋은 연기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할 거야.’
‘좋은 작품은 감독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법이지.’
좋은 대본, 좋은 감독, 좋은 스태프, 좋은 제작사, 좋은 투자자, 그리고 좋은 배우.
모두가 힘을 합쳐야 나올 수 있는 게 바로 좋은 영화였다.
괜히 영화를 종합예술작품이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오지한 배우는 그 누구보다도 연기에 진지하게 임하는 좋은 배우였다.
어줍잖은 인기에 헛바람만 잔뜩 들어간 다른 배우와는 결이 달랐다.
저 외모에, 저 실력에, 저 인성이라니.
신이 7일 밤낮을 공들여 빚은 것 같은 존재에 범수와 승욱은 은연중에 오지한 배우를 인정했다.
승욱이 다시 한번 지한이를 속으로 인정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거 역시 ‘김진선’ 역에는 황선호 배우가 제일 잘 어울리네요. 감독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크흠. 오늘 온 쭉정이들 보다는 낫더구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칭찬에 인색한 범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옆을 힐끔 보는 게 지한을 의식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 박 감독의 행동을 보고 승욱이 속으로 웃었다.
‘캐스팅에 관여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오지한 배우가 찾은 배우를 결정하려니 마음에 걸리시나 봐.’
자기가 한 말이 있으니 더 그럴 것이다.
엄연히 따지면 투자자 진영이라고 할 수 있는 오지한 배우가 발굴한 사람을 뽑자니 죽어도 그들의 결정은 듣지 않겠다는 자존심이 걸리고,
그렇다고 오지한 배우가 찾은 배우를 뽑지 않자니,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오지한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의 뒤에 있는 자들이 마음에 걸려 갈등하고 있는 범수를 보고 승욱이 그의 갈등을 풀어주기 위해서 나섰다.
“그런데 오지한 배우님은 어떻게 황선호 배우에게 김진선 역을 시켜볼 생각을 다 하셨어요?”
승욱의 질문에 범수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래. 나는 보고도 오 배우가 말할 때까지 황 배우가 김진선 역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못 했는데, 어떻게 오 배우는 한 번에 알아봤지?
관심이 없는 척했지만 귀는 솔직하게 기울이고 있는 박 감독이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지한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 그거 말이죠? 제가 감독님께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대기실에서 지켜봤거든요.”
지한의 대답에 범수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힘겹게 말렸다.
역시 이 녀석은 진짜 배우야.
씰룩이는 범수의 입매를 본 승욱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어제도 그러셨군요. 오늘 왔을 때, 스태프들 사이에 있다고 하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런 의도였군요.”
“네. 아무튼 다시 황선호 배우에 대해 얘기하자면 다른 배우랑 달라서 눈에 띄었어요. 어제 다른 배우들은 옆을 힐끔거리면서 견제하거나 오디션 대본에 집중하거나 그랬거든요?”
“아하. 그래서요?”
지한의 말이 이어질수록 흥미가 도는지 승욱이 다음 이야기를 보채는 듯한 시선으로 지한을 바라봤다.
긴 시간 오디션으로 피곤할 법도 한데 어디서 활기가 샘솟았는지 승욱은 아예 몸을 돌리고 지한의 입을 주시했다.
“그런데 황선호 배우는 뭔가 달랐어요. 뭐랄까. 뭔가 붕 떠 있는 느낌? 이곳에 있는데 이곳에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지한의 말에 범수가 드디어 깨달았다는 듯 미간의 주름을 펴고 눈을 크게 떴다.
그거야 말로 김진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분위기가 아닌가.
왜 다른 배우들 사이에서 지한이 선호를 주목했는지에 대해 알게 된 범수가 더 말해보라는 듯한 눈빛으로 지한을 바라봤다.
“그게 작중에 등장하는 김진선을 볼 때 딱 떠오르는 느낌이더라구요. 그래서 근처에 어슬렁거리면서 매니저와 하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런데 황선호 배우는 사실 그때 이미 오디션을 포기하고 있더라구요.”
“그런데도 오디션을 보러 들어왔단 말이지?”
“여기서 도망치는 것도 안 좋지 않겠습니까.”
승욱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디션을 보러 왔다가 들어오지도 않았다는 말이 퍼지는 순간 업계에서 황선호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이고, 많은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다.
남들은 오디션 기회조차 받지 못하는데 요즘 좀 떴다고 거만해졌다느니, 버릇이 없다느니 등등.
포기했으면서도 오디션장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선호의 심정을 이해한 범수와 승욱이 선호의 결정을 이해했다.
“그래도 포기라니.”
“성진 역을 시켜도 제대로 못 했을 수도 있겠네요.”
선호의 결정을 이해했지만 쉽게 올 수 없는 자리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포기하려고 했다는 얘기에 살짝 실망했다.
지한이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반전을 터트렸다.
“다 포기한 것 같아서 저도 처음엔 생각이 없었는데 매니저가 잠시 한눈을 팔았을 때 황선호 배우가 보인 반응이 흥미로웠어요.”
“반응?”
“어떤 반응이요?”
“다른 배우가 성진을 준비하고 있을 때, 황선호 배우가 상대역을 연기하더라구요. 그것도 여러 배우의 상대역을 동시에요. 대사를 할 때마다 다르게 연기하는데 그게 너무 신기했어요.”
이때까지 그렇게 순식간에 상대에 맞춰 연기하는 사람은 누나 외에는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세상은 넓고 연기자도 많으니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눈앞에서 그런 사람을 직접 목격한 건 꽤 흥미가 도는 일이었다.
지한의 말에 두 사람 입에서 감탄이 튀어나왔다.
“물론 박성진에 대해서 비슷한 해석을 가져온 배우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황선호 배우가 연기했던 상대 역도 몇 가지 안 됐죠. 그래도 상대방이 연기하는 인물에 맞춰 본인의 연기를 바꾸다니 대단하잖아요? 게다가 성진 역보다 다른 역할을 더 잘했어요.”
“확실히 대단하네요.”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지?”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하려던 다른 배우와 달리 지한이 기회를 줄 때까지 얌전히 있던 선호를 떠올린 범수가 턱을 쓸었다.
하긴. 그때까지는 오디션을 포기하고 있었으니 의욕이 없던 건 당연한 건가?
“그리고 박진성 역에 내정된 김진석 배우가 연기할 때 대사 하는 걸 봤거든요? 김진석 배우가 할 때 황선호 배우 연기가 가장 잘 살았어요. 그건 상대방의 역량에 따라서 황선호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연기가 달라진다는 말이죠. 아마 황선호 배우는 알려진 것보다 더 연기를 잘할 거예요.”
그것까지 확인했단 말인가?
오늘 오디션을 진행한 배역은 총 3개. 참가자는 무려 115명이나 됐다.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것에 바꿔 순식간에 연기를 맞춘 황선호도 놀라웠지만 두 사람은 오디션을 보러 온 많은 사람 중에서 황선호를 발견하고 주목한 오지한도 놀라웠다.
‘분명히 다른 스태프들처럼 돌아다니거나 보조했다고 했는데 그 틈에 그걸 전부 다 파악했다고?’
‘오디션 채점표에 기록한 것도 꽤 날카로웠고, 참가자들에게 조언한 것도 대단하던데. 괜히 오지한이라고 하는 게 아니었군.’
두 사람은 이제 지한을 인정하는 걸 넘어서 괴물처럼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신을 보는 시선이 바뀐 걸 안 지한이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 아닙니다. 그냥 오지한 배우가 왜 황선호 배우에게 김진선 역을 제안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크흠. 그럼 김진선 역은 황선호 배우로 하는 데 다들 이견이 없는 거지?”
“저도 좋습니다.”
“오지한 배우는?”
“저요?”
자신에게 의견을 물을 줄 몰랐던 지한이 반문했다.
“그럼 여기서 오지한이라는 이름을 쓰는 배우가 자네 말고 또 있는가?”
“아… 저도 좋습니다.”
잠재력 측정기가 아니라 같이 의견을 나누는 동료로 인정받은 지한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한의 환한 미소를 본 범수와 승욱이 잠시 숨도 못 쉬고 지한의 얼굴을 구경했다.
‘캐스팅… 대박이다.’
‘크흑! 얼굴도 잘난 놈이 웃기까지 해!’
두 사람이 속으로 어떤 감상을 늘어놓았는지 모르는 지한이 의욕이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내일도 힘내겠습니다!”
“얼굴은 그만 힘내도, 아. 아닙니다.”
“커흐흠!”
* * *
추운 겨울이 가고 지연이 세트장에서 촬영을 이어가고 있을 때쯤 지한의 촬영 준비도 끝나갔다.
꽤 만족스러운 오디션을 본 박 감독은 오디션 일정이 끝나자마자 호텔에 자체 통조림행을 택하여 각색에 몰두했다.
위잉. 위잉-
범수가 있는 방안에는 프린터기가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종이를 뱉어내고 있었다.
조금 전 각색을 마친 범수가 한 장씩 쌓이는 대본을 보면서 진한 믹스커피를 마셨다.
호로록
“크허.”
커피를 마시면서 술을 마신 것 같은 탄성을 낸 범수가 눈두덩이를 주물렀다.
지난 일주일 동안 잠을 몇 시간 잤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옆에서 누군가가 입에 먹을 걸 밀어 넣어주긴 한 거 같은데 그게 아니었으면 각색이 끝날 때까지 버티지 못했을 거다.
‘아마 먹을 걸 넣어준 사람은 승욱이 녀석이겠지.’
다시 영화를 만들겠다고, 각색이 끝날 때까지 호텔에 들어가겠다고 한 날 아내는 짐을 싸서 자신에게 던졌다.
거기에 필요한 거 다 있으니 밥 잘 챙겨 먹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범수는 호텔로 들어왔다.
영화를 촬영할 때마다 연락이 두절되는 남편이니 아내가 곱게 보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갔다.
“흐하암. 씻고 한숨 자 볼까.”
배가 고팠지만 우선 눕고 싶었다.
범수가 대충 풀어놓은 짐을 찾으러 갔을 때 가지런히 정리된 짐이 보였다.
자신이 벗어 놓은 옷가지들이 세탁이 된 채 곱게 개어져 있는 걸 보면 승욱이 녀석이 왔다 간 게 분명했다.
마누라보다 더 살뜰히 챙기는 녀석.
누가 내 마누란지.
범수가 매장에서 파는 것처럼 잘 개어진 옷을 보고 낮게 웃었다.
“우리 마누라보다 승욱이가 더 살림을 잘하긴 해.”
그러니 영화계를 떠났을 때 식당을 차리지 않았겠는가.
우리 마누라 김치보다 승욱이 김치가 더 맛있긴 하지.
띵-동-
아내와 승욱이의 살림 레벨을 비교하던 범수를 꾸짖기라도 하듯 호텔방 벨이 울렸다.
괜히 뜨끔한 범수가 서둘러 다 식지 않은 커피를 원샷하고 문으로 향했다.
밖을 보니 승욱이 와 있었다.
잠시 가슴을 쓸어내린 범수가 문을 열었다.
“들어와라.”
“오늘은 제정신이시네요.”
“뭐?”
“하하. 농담입니다. 식사 안 하셨죠?”
승욱의 말에 범수가 방을 돌아봤다.
테이블에는 먹을 만한 게 없었다.
다 먹고 남은 초콜릿 봉지라든가 겹겹이 쌓인 종이컵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범수의 시선을 따라간 승욱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범수를 타박했다.
“감독님 또 커피만 드셨죠?”
“커흠. 그, 각색하다 보면 집중해야 해서.”
“사모님께 나중에 다 이를 거예요.”
“끄응.”
안 그래도 조금 전 찔릴 생각을 했던 범수는 승욱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제대로 씻지도 않고 먹지도 않은 범수의 몰골에 승욱이 일단 범수를 샤워실로 밀어 넣었다.
“일단 씻고 나오세요.”
“어어. 밀지 마.”
“어서요.”
“알았다.”
범수를 밀어 넣은 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들리자 승욱이 가져온 짐을 한쪽에 놓아두고 테이블을 정리했다.
범수가 통조림 되어 있는 사이 계속했던 일이라 방 안은 금방 깨끗해졌다.
-위이이잉.
쓰레기를 담은 봉지를 묶고 내려놓은 사이 프린터기가 인쇄를 끝냈다.
승욱이 손을 닦고 프린터기로 다가갔다.
페이지 번호가 적힌 종이를 순서대로 확인한 승욱이 옆에 있던 더블클립으로 종이를 집었다.
탁-
“방까지 치운 거야?”
대충 씻고 나온 범수가 그사이 깨끗해진 방을 보고 한마디 했다.
물기를 다 닦지도 않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범수를 본 승욱이 방 안의 온도를 높이며 말했다.
“밥은 깨끗하게 드셔야죠.”
“조금 더럽다고 안 죽는데 뭘.”
“제 영화 스크린에 걸리는 거 보시려면 건강하셔야죠.”
승욱의 ‘다음’을 기약하는 말에 범수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다시 아무렇지 않게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말했다.
“그때까지 뭐 얼마나 남았다고. 멀쩡한 사람 곧 죽을 사람처럼 대하지 마라.”
그의 ‘다음’이 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범수를 보고 승욱이 흐뭇하게 웃었다.
“자! 오늘은 감독님이 좋아하시는 콩나물 해장국이에요. 식혜도 챙겨왔어요.”
“내가 그거 땡겼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제가 감독님 조감독이잖아요.”
아마 마누라보다 이 녀석이랑 더 오래 살을 부대끼고 살았을 거다.
이러니 마누라도 승욱이를 비상연락망에 저장해놨겠지.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머리에서 물기를 대충 털어낸 범수가 자리에 앉았다.
“감독님. 여기 숟가락이요.”
“고맙다.”
“김치는 다 드셨어요?”
“….”
대답 없이 급하게 한 숟갈 뜨는 범수를 보고 승욱이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밥 잘 안 드시니까 일부러 작은 통에 담았는데 내용물이 거의 그대로였다.
반찬통을 통째로 들고 온 승욱이 조용히 테이블 중앙에 반찬통을 내려놨다.
“그, 나 김치 잘 안 먹어.”
“거짓말하지 마세요.”
“….”
편식하는 자식을 꾸짖는 듯이 단호하게 말하는 승욱을 보고 범수가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내가 감독인데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지 않아?
괜히 범수가 승욱의 말투를 꼬집으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제가 밥 잘 챙겨 드시는지 지켜볼 겁니다. 이건 사모님 부탁이기도 해요.”
“알았어.”
“일단 밥부터 드시죠.”
일단이라니.
다 먹으면 또 혼낼 거니?
시원한 해장국인데 체할 것 같은 기분에 범수가 소심하게 국을 뜨자 승욱이 한마디 했다.
“안 혼냅니다.”
“…그래.”
“맛있게 드세요. 감독님이 좋아하는 집에 가서 포장해 온 거예요.”
“어쩐지 익숙한 맛이다 싶었어.”
범수의 수저질이 기운을 얻었다.
배가 고팠는지 우걱우걱 퍼먹는 범수를 보고 승욱이 시골 할머니처럼 웃었다.
264. 제 동생 잘 부탁드립니다!
봄을 알리는 벚꽃이 다 떨어지고 사람들이 반팔을 꺼내입기 시작했다.
가족과 함께하는 달이자 생기가 넘쳐나는 5월.
드디어 영화 <장난(The Game)>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전 스태프와 연기자가 모두 모여 천지신명께 간절히 비나이다. 훌륭한 작품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저희 영화 <장난>의 크랭크인을 기념하여 고운 술과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였사오니 부디 흠향하시고, 진실한 노력의 대가가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보살펴주시기를 기원하나이다. 이 영화의 배우와 스태프들 모두 촬영이 끝날 때까지 사건 사고 없이 무탈하게 해 주시고, 힘든 일이 있더라도 서로 격려하고 북돋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하게 해 주소서.”
대표로 축문을 읽은 범수가 불을 붙여 종이를 태웠다.
화르르 타오르는 종이를 보면서 한자리에 모인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박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