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현의 말에 심사위원이 저마다 반응했다.
나쁘지 않은 심사위원들의 말에 종현이 범수와 지한의 반응을 살폈다.
‘감독님은 들어왔을 때부터 인상을 찌푸리고 계셨고, 오지한 배우는, 계속 저 표정이라 알 수가 없군.’
다른 사람이라면 반응을 살피며 오디션 결과에 대해 예측할 수 있었겠지만 연기의 신이라고 불리는 오지한 배우라 그런지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박 감독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바로 호통이라도 쳤을 스타일이라고 들었는데.
호통이 없는 걸 보면 내 연기가 마음에 든 건가?
종현이 예측할 수 없는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대답을 듣고 작은 목소리로 의견을 나눈 심사위원이 다음 참가자를 호명했다.
“다음은 최강일 배우.”
“저도 바로 연기 가능합니다.”
“최강일 배우는 2번 대본 부탁드립니다.”
“네.”
강일이 눈을 감고 감정을 잡자 승욱이 지문을 읽었다.
“조명이 켜지고 카메라에 녹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불이 켜진다. 화려한 무대가 보이고 사회자가 참가자들을 소개한다.”
“‘지상최대의머니쇼’에 초대받으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여러분들은 선택받은 분들입니다. 자, 그럼 참가자들을 소개하겠습니다. 1번 참가자 먼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안녕하십니까! 마산에서 온 박! 성! 진! 이라고 합니다!”
“박성진 참가자 안녕하십니까? 하하. 박력이 대단하시네요. 몸도 좋으시고요. 직업이 어떻게 되십니까?”
“헬스 트레이너입니다. 몸 쓰는 것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어쩐지 그래서 몸이 이렇게 좋으셨군요. 언제부터 운동하신 거예요?”
“제가 운동부 출신이라서 어릴 때부터 유도를 배웠습니다.”
강일이 자신만만한 태도로 팔뚝을 과시하며 말했다.
성진의 역할을 맡으려면 아직 몸을 조금 더 키워야 하지만 잘생긴 마스크와 몸짱으로 유명한 최강일이었기에 헬스 트레이너라는 직업이 어색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범수의 말이 끝나고 지한과 범수가 서류에 무언가를 작성했다.
뭔가 긍정적인 반응인 것 같아서 강일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종현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드리웠다.
상반된 두 배우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 사람이 작게 속삭이며 의견을 나눴다.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인 세 사람을 대표해서 승욱이 말했다.
“두 분 오디션 잘 봤습니다.”
결과가 나온 듯한 승욱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디션 한 번 보지 못하고 끝나는 것 같은 분위기자 선호가 ‘그럼 그렇지’ 하며 포기하고 있을 때, 지한의 시선이 선호에게 향했다.
“황선호 배우님. 정말 죄송하지만.”
그래도 날 배려해서 연기라도 봐 주겠다는 걸까?
선호가 반갑지 않은 배려를 예상하며 거절하려고 할 때 지한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다른 대본으로 연기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예?”
지한의 말에 두 배우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홱 돌아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오디션장의 분위기가 조금 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262. 당신을 캐스팅하겠습니다.
조금 전.
이종현과 최강일 배우의 연기를 본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눴다.
“더 볼 것도 없군. 성진 역에 지망한 사람은 황선호 배우까지지?”
“네. 감독님은 아까 보셨던 김진석 배우가 마음에 드신 거죠?”
“역시 조감독이야. 내 마음을 잘 아는군.”
“저도 김진석 배우가 제일 성진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힘을 과시하면서 상황을 통제하려는 성진을 잘 이해하고 연기한 사람은 김진석 배우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몸도 오늘 본 배우들 중에서 제일 좋았구요.”
“오 배우 말이 맞아. 아니 캐릭터와 오디션 대본까지 봤으면서 다들 어떻게 그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들만 지원했는지.”
박 감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기가 잘 연기할 수 있고, 잘 맞는 배역이 아닌 뭐라도 하나 건져보려고 온 배우들이 많았다.
특히 어중간하게 이름 있는 것들은 더욱 그랬다.
물론 일부러 성진의 오디션을 보는 배우들의 대본은 전형적인 힘으로 뭐든 다 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만 넣었다.
하지만 시나리오와 초반만 공개된 전체 대본을 본다면 성진이 그런 단순무식한 캐릭터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오디션 공고를 너무 급하게 넣었나?
준비성이 너무 부족했다.
특히 황선호 배우는 연기를 보지 않아도 이미 아웃이었다.
그렇게 비리비리한 몸으로 어딜 헬스 트레이너 역을 연기하려고.
배우의 몸을 만들 시간을 기다려 줄 만큼 시간이 넉넉하게 줄 수 없었다.
“그럼 황선호 배우님은 연기도 안 보고 보내실 겁니까?”
“더 볼 필요도 없어. 박성진 역에 어울리지 않아.”
범수가 선호의 연기를 보지도 않고 보내려고 할 때 지한이 박 감독을 말렸다.
“잠시만요, 감독님.”
“왜 그러나. 혹시 어쭙잖은 동정으로 연기라도 보자고 하려면 그만두게. 어쩔 땐 딱 잘라주는 게 배우에게 더 좋은 일일 수도 있어.”
준비해 온 걸 보여줘서 배우에게 후회가 남지 않게 해 줄 수도 있지만 그 연기 때문에 제작사나 감독에게 안 좋은 이미지를 남길 수도 있었다.
박 감독은 그럴 바에야 애초에 안 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범수의 얼굴은 본 지한은 그런 게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감독님. 황선호 배우에게 김진선 역을 연기시켜 보는 건 어떨까요?”
지한의 말에 범수의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확실히 헬스 트레이너인 박진성 역할 보다 괴롭힘당하던 피해자인 김진선 역할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등장하는 장면은 얼마 되지 않지만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되는 사건에 있는 김진선.
범수가 몇몇 배우를 캐스팅 목록에 올리긴 했어도 김진선 역할에 딱 맞는 배우를 찾질 못해 오디션 공고까지 내지 않았던가.
“승욱아. 김진선 오디션은 언제지?”
“잠시만요.”
승욱이 서류를 뒤져 스케줄표를 보더니 김진선 오디션 예정일을 확인했다.
“내일입니다, 감독님.”
“내일…. 내일이라고.”
“어차피 내일이라면 하루 일찍 한 명 추가해서 본다고 해도 큰 지장이 없을 것 같은데요. 황선호 배우에게 시켜보고 내일 적임자가 없으면 황 배우를 캐스팅하시는 건 어떨까요?”
지한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었다.
박 감독의 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까 대기실에서 봤던 모습과 그동안 황선호 배우가 했던 연기 등을 고려하니 이대로 황선호 배우를 그냥 보내기 아까웠다.
지한이 보기에 황선호 배우는 박성진 역보다 김진선 역할이 더 잘 어울렸다.
그래서 박범수 감독이 캐스팅에 개입하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흐음.”
고민하는 범수를 다른 두 사람이 차분히 기다리는 사이 박 감독이 결론을 내렸다.
“좋아. 황 배우에게 김진선 대본을 주자고. 단, 이건 어디까지나 보너스 찬스야. 지금 이 자리에서 대본을 보고 연기할 수 있게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많은 기회를 준 거야. 더 주면 공정하지 않을 테니까.”
범수의 말을 들은 지한이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여기 대본에 적힌 연기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준비할 시간을 드리겠지만 최대한 빨리 보고 싶네요.”
“예, 예?”
“이런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예? 아. 아닙니다.”
이미 성진 역은 정해진 것 같지만 내 연기를 보고 싶다는 게 어딘가.
애초에 마음을 비우고 있었는데 나에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게 영광이었다.
‘내 연기를 보고 싶다는 건 나한테 뭔가 관심이 있다는 거겠지? 이거면 매니저 형도 뭐라고 안 하겠다.’
쟁쟁한 배우들의 향연에 억지로 희망을 가지고 있던 자신의 매니저.
매니저뿐만 아니라 선호 역시 거의 버렸던 희망을 다시 붙잡았다.
자신이라고 왜 연기 욕심이 없겠는가.
워낙 쟁쟁한 사람들이 많이 와서 기가 죽었지만 자기도 배우였다.
더 좋은 배역을, 더 좋은 사람들과, 더 좋은 영화를 찍고 싶다는 건 배우로서 당연히 가지는 욕망이었다.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를 다시 키우던 선호가 집중해서 대본을 보기 시작했다.
대본에 들어갈 것처럼 빠르게 대사를 살피던 선호는 이 대사가 누구의 대사인지도 금방 알아차렸다.
‘이건 김진선 역할인데.’
회사에서 가져온 오디션 대본 중에서 박성진 역할보다 등장 씬이 작아서 커트했던 역할이었다.
하지만 선호는 성진보다 진선의 역할에 더 흥미가 가서 남몰래 진선의 대사를 살펴보곤 했다.
선호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준비된 것 같군.”
선호가 대답하지 않고 지문을 기다렸다.
깊게 몰입한 선호를 보고 범수의 입이 가늘게 휘어졌다.
승욱에게 눈치를 주자 승욱이 지문을 읽었다.
“해인아.”
해인이라는 이름을 부른 선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사형수가 마지막 고해를 하는 것처럼 슬픔과 미련이 담긴 목소리로 선호가 지한을 보았다.
그 모습에 지한이 덩달아 연기를 시작했다.
다급한 얼굴로 지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비명처럼 들렸다.
그 소리에도 선호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하는 걸까.”
“김진선! 너 왜, 왜 그래.”
지한이 다가가려는 것처럼 한 걸음 움직이자 선호가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상체를 뺐다.
그 모습에 지한의 두 눈이 커지고 걸음을 멈췄다.
다가가지 못한 지한이 애타는 목소리로 선호를 붙잡았다.
“진선아. 그러지, 마. …제발.”
애원하는 목소리가 지켜보던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범수와 승욱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종현과 강일도 몸에 힘을 준 채로 두 사람이 연기를 감상했다.
“나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하나는 알 것 같아.”
“제발, 제발!!”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선호의 말에 참지 못한 지한이 뛰는 것처럼 선호에게 달려갔다.
선호가 몸을 뒤로 누우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 세상에는 악마가 존재한다는 걸.”
“김진선!!!”
선호가 없는 허공을 움켜쥔 지한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아래를 쳐다봤다.
“아… 아, 아아아아아악!!!!!!!!!!!!!”
허물어지듯 바닥에 주저앉은 지한이 바닥을 긁으며 오열했다.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안 봐도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그려지는 장면에 지한의 오열이 지옥에서 올라온 비명처럼 들렸다.
바닥에 후두둑 떨어지는 물방울과 바닥을 긁느라 하얗게 질린 손가락을 보면서 사람들이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지한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을 닦은 지한이 몸을 돌려 박 감독에게 물었다.
“감독님?”
“어? 어어. 잘 봤네.”
지한의 연기에 자신도 모르게 진지하게 보고 있던 범수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짝짝짝짝
승욱이 옆에서 박수를 쳤다.
“황선호 배우, 연기 잘하네요. 그렇죠?”
“크흠. 나도 잘 봤네, 황 배우.”
“저도 놀라서 조금 진지하게 연기했지 뭐예요. 황선호 배우님 괜찮으세요?”
“예? 아. 감사합니다!”
감독과 톱스타의 인정에 선호가 얼떨결한 얼굴에 환희가 가득 차더니 힘차게 대답했다.
자신은 방금 죽은 척하느라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아 잘 못 봤는데
귀로 듣는 것만으로도 오지한의 연기가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통과 절망에 가득 찬 목소리.
지옥에서 울부짖는 것 같은 목소리로 선호는 그가 왜 국가대표급 월드 스타라고 불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다들 오디션 본다고 수고 많았네. 결과는 며칠 안에 개인적으로 통보가 갈 걸세.”
“고생하셨습니다.”
“모두들 고생하셨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오디션을 본 배우들이 상반된 얼굴로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은 뭐 씹은 듯 구겨진 얼굴로, 한 사람은 로또라도 당첨된 얼굴이었다.
* * *
며칠 뒤.
최근 이사를 해서 깔끔한 오피스텔 안에는 선호와 그의 매니저가 거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흐음.”
“끄응.”
침음성을 내는 것도 모르고 거실을 돌아다니는 매니저는 1분에도 수십 번씩 스마트폰의 화면을 들여다보았고, 선호는 그런 매니저의 뒤를 쫓아다니며 화면을 힐끔거렸다.
“형. 오디션 다 끝났겠지?”
“응. 어제부로 다 끝났댔어.”
“혹시 다른 사람 중에 결과 나온 사람 있어?”
“어제 본 사람 중에는 이미 결과가 나왔다고 하더라.”
그럼 나는 왜 소식이 없지?
역시 진선 역으로 오디션을 안 봐서 그런 건가?
솔직히 다른 배역을 추천하고 반응도 좋았기에 희망을 가지긴 했었다.
“형. 보통 오디션 결과 언제 나와?”
“일주일 걸릴 때도 있어.”
“일주일?”
그때까지 이렇게 기다려야 하는 건가.
선호가 초조한 마음에 손을 물어뜯었다.
그걸 본 매니저가 순식간에 달려들어 선호의 손을 잡아챘다.
“야! 너 손!”
“아… 미안해, 형.”
불안하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뜯는 버릇이 있었다.
연예인이 되고 나서는 조심하자고 생각했고 옆에 있는 매니저 형이 제지해줘서 한동안 사라졌던 버릇이었는데.
‘황선호. 오디션장에서 생각했던 거 다 잊었어? 공수래공수거라고 했잖아.’
선호가 다시 번뇌를 지우기 위해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띠링!
“으아아악!!”
“아아아아악!”
번뇌를 일으키는 소리에 선호가 매니저와 함께 비명을 질렀다.
사라지던 번뇌가 다시 살아났다.
두 사람이 떨리는 심정으로 방금 도착한 따끈따끈한 문자를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블레스 스튜디오입니다.
‘황선호’ 배우님의 영화 <장난> 오디션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계약을 위해 3월 중으로 연락이 갈 예정
입니다. 함께 좋은 영화를 만들어 가길
바라며 다시 한번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선호와 매니저의 눈이 몇 줄 안 되는 문자를 계속해서 읽었다.
몇 번이고 읽어서 다 외울 지경이 되자 두 사람이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서로를 바라봤다.
“형…!”
“선호야…!”
서로의 이름을 부른 게 신호가 되기라도 한 듯, 두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부둥켜안았다.
“으아아아아아!!!”
“됐다아!!!!!!!!!”
대한민국 배우들이 바라마지 않던 오지한 주연의 영화!
떨어질 거라 생각했던 오디션에게 운 좋게 기회를 얻어서 결국 배역을 따냈다!
“됐다! 됐어!”
“형! 나 이제 된 거지!”
“그래! 앞으로 네 앞은 화사한 꽃이 만발한 꽃길일 거야!”
“으허허허헝!!”
오디션 때 있었던 일을 들은 회사에서도 심사위원이 직접 ‘김진선’ 역을 제안했으니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거라고 말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희망을 품고 오디션 문자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