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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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10년 동안 있을 걱정거리 및 놀림감을 예상한 지연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알았어. 조심할게.”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힘들면 바로 말하고. 너는 힘들어도 말을 안 하니까 걱정이야.

“이젠 안 그럴게.”

-믿는다.

믿는다는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정말 내가 다친 일로 많은 사람을 걱정하게 만들었구나.

어린애도 아니고 다 커서 이런 일을 만들었다는 게 한심했다.

“형이 뭐래?”

“앞으로 조심하래.”

“또 영훈 엄마 튀어나왔겠네.”

“그렇지 뭐.”

전화를 끊고 소파에 벌러덩 누운 누나를 보고 지한이 미소를 지었다.

* * *

“내려가 봐야 하나.”

전화를 끊은 영훈이 걱정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통화를 종료하자 옆에 있던 블레스 스튜디오 직원이 궁금해하는 얼굴로 물었다.

은주 실장이 옆에 있다는 걸 알지만 다쳤다는 말에 직접 가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무책임하게 내려갈 순 없었다.

이제 자신을 그럴 위치가 아니었으니까.

“그래. 전화만 하자.”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괜찮은지 안부전화 하는 정도라면 괜찮을 거다.

평소에 뭐든 혼자 척척 해내는 지연이고 어릴 때부터 어른스러운 면모가 있는 지연이지만 딱 하나 지연이에게 불안한 점이 있다면 자기 자신을 막 대하는 점이었다.

콘서트나 컴백을 준비할 때면 지연은 연습실에서 살았다.

밤늦게까지 연습하고 아침 일찍 나오는 생활.

그러면서 지한이 촬영이 있을 때면 그것까지 챙기려 들었다.

전담 매니저였던 자신도 곡소리가 나온 일정을 따라가고 챙기는 모습을 볼 때면 감탄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지난번에 이탈리아에 다녀온 이후 뭔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지만 오늘 있었던 일로 예전의 불안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 고 실장님. 혹시 무슨 일 있나요?”

“아니요. 그냥 어제 촬영장에서 작은 사고가 있었다고 해서요.”

“아. 저도 전해 들었습니다. 지연 씨가 넘어져서 찰과상을 얻었다고 했지요?”

“네. 다행히 약 바르면 될 정도라 피부과에 가서 흉터 치료는 안 해도 된다고 하지만 걱정이네요.”

영훈의 말에 블레스 스튜디오 직원이 식은땀을 흘렸다.

고 실장의 말이 현장 관리를 못한 자신들을 탓하는 것 같았다.

직원이 재빨리 영훈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미리 현장을 정리했어야 했는데.”

“날씨가 추워서 도로가 언 걸 어떻게 할 순 없죠. 현장에서 얼음까지 깨서 치웠다고 들었습니다. 그 정도면 할 일 다 하신 거예요.”

“그래도 면목이 없습니다.”

배우,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여배우였다.

그런 여배우가 현장에서 사고를 당했다.

아무리 블레스 스튜디오가 탑엔터의 자회사라고 하지만 간이 철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즉시 병원까지 데려가 의사에게 진료를 받게 했다.

다행히 금방 나을 정도여서 망정이지 흉이 졌으면 대한민국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뻔헀다.

‘탑엔터 공 사장이 지연, 지한 남매를 그렇게 감싸고 돈다는데 클레임 안 걸고 넘어가서 다행이야.’

빨리 조치하길 잘했다.

사고 소식을 들은 블레스 스튜디오 전 직원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공 사장은 적에게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남매의 부모에게 접근금지명령과 아동학대로 고소한 것도 그거지만 수작을 거는 사람들을 이 바닥에서 뜨게 만들어 버렸다지?’

과연 없는 소문이 난 게 아니었다.

직원이 공 사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우세요?”

“아닙니다.”

“그럼 가죠.”

“네.”

두 사람은 오늘도 박 감독이 출몰하는 공원에 나왔다.

“언제쯤 박 감독님이 우리랑 얘기해 줄까요?”

“글쎄요. 언제가 됐든 기다릴 뿐입니다.”

“정말이지 고 실장님은 대단하시네요.”

“배우가 이 시나리오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를 잘 살려줄 감독은 얼마 없죠. 저희는 그중에서도 박범수 감독님을 좋게 봤을 뿐입니다.”

실력이 있어도 인성이 안 되면 아웃이다.

탑엔터에서 사람을 고르는 기준은 까다로웠다.

연예계에서 성공하고 나서 바뀌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며 또 실력이 있어도 인성이 안 좋아서 소문이 도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던가.

그 어떤 경우여도 탑엔터에서 사람을 보는 1순위는 인성이었다.

‘인성이 안 되는 놈은 사고를 치기 마련이다.’

라는 게 탑엔터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그 사고란 대부분 중요한 시점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지론대로 탑엔터 소속 연예인들이 안 좋은 일로 사회, 연예면에 오른 일은 없었다.

“아. 저기 박 감독님이시네요.”

“가시죠.”

영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박 감독이 산책하고 나서 꼭 들러서 마신다는 단골집 식혜였다.

그 외에도 준비한 아이템이 여러 가지였지만 과연 박 감독이 이걸 쓰게 해 줄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부딪쳐 봐야지.’

영훈과 직원이 박 감독에게 다가가자 그가 ‘또 너희들이냐.’라는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아는 채도 하지 않고 지나가려는 그에게 영훈이 식혜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258. 이걸 들어주면 계약하지.

“난 식혜 안 좋아하네.”

역시나 단박에 거절당했다.

하지만 영훈은 꿈쩍도 하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정원식당 아주머니께서 섭섭하시겠네요. 오늘 제가 대신 감독님께 드릴 거라고 받아왔었는데.”

영훈의 말에 범수의 걸음이 주춤했다.

정원식당.

한때 그의 가족이나 다름없던 조감독의 아내가 하는 식당이었다.

입봉시켜 주려고 할 때마다 번번이 작품이 망하는 바람에 오갈 데가 없어진 비운의 조감독.

‘결국 전 여기까지였던 거예요.’

마지막 작품이 한 달도 안 돼서 간판을 내리자 입봉의 꿈을 놓지 못하던 조감독도 그 꿈을 꺾었다.

지금은 아내와 함께 동네에서 자그마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식당도 형편이 좋지 못해 범수가 자주 찾아가곤 했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짓인가?”

“저희는 그저 감독님과 대화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대화? 이런 게 대화라면 앞으로 자네들과 대화할 때마다 청심환을 먹어야겠어.”

“박 감독님이 그 정도로 담이 작은 분이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훈의 말에 박범수는 그가 자신에 대해서 어지간히도 조사를 많이 해 왔다 싶었다.

“좋아. 일단 얘기는 들어보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옆에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영훈과 범수,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직원이 활짝 핀 얼굴로 인사했다.

이튿날에 바로 함락이라니.

역시 매니저계의 전설, 고영훈 실장!

직원이 감탄하며 영훈의 뒤를 따라갔다.

세 사람은 공원 근처에 있는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흔해 빠진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구석에 몸을 비집고 앉은 세 사람은 조금 우스운 꼴이었지만 그들 사이를 맴도는 공기는 무거웠다.

“그래서 도대체 뭘 하자고 뒤로 물러난 뒷방 늙은이까지 찾아왔나.”

“빙 돌려서 말하면 안 좋아하실 테니 바로 본론으로 말하겠습니다. 저희는 감독님께서 이 시나리오를 제작해 주셨으면 해서 찾아왔습니다.”

영훈이 테이블 위로 <장난(The Game)>의 시나리오를 올렸다.

그걸 힐끔 본 박 감독은 팔짱도 풀지 않은 채로 말했다.

“내가 영화판을 떠난 건 잘 알고 있겠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왜 떠났는지도 잘 알고 있고?”

“네.”

영훈은 말없이 묵직한 대답만 간략하게 내놓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숨도 못 쉬고 차를 홀짝이는 직원은 눈동자만 바쁘게 굴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날 찾아왔다고? 내가 오지한을 캐스팅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 아닌가.”

박 감독의 말에 블레스 스튜디오 직원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의 얼굴에 ‘어떻게 알았지?’라는 말이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이 바닥을 떠나서 있었다고 하면서도 상황을 파악하는 눈은 예리했다.

실력은 좋았지만 운이 좋지 않았던 감독은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경계심이 잔뜩 높아졌다.

“박 감독님이 지한이를 캐스팅하지 않아도 이 영화는 제작될 겁니다.”

영훈이 당당하게 박 감독의 시선과 마주하며 말했다.

‘설사 오디션을 한다고 해도 우리 지한이가 떨어질 리가 없지.’

가까이에서 봐서 잘 알았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지한이를 뛰어넘는 연기력으로 따져도 몇 명으로 추려진다.

거기에 나이, 인지도, 흥행성 등등을 포함하면 지한이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설사 명품 배우라고 불려도, 연기판에서 수십 년 이상 구른 원로라고 하더라고 지한이가 밀릴 일은 없었다.

지한이에 대한 영훈의 믿음은 굳건했다.

“좋아. 그거 계약서에 명시해 줄 순 있겠지?”

영훈이 직원을 돌아봤다.

작품 계약과 관련된 건 블레스 스튜디오에서 할 일이었다.

영훈의 시선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직원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준비한 계약서를 꺼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넵! 물론입니다.”

시나리오 옆에 계약서가 나란히 놓였다.

계약서와 시나리오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어도 감독의 시선은 여전히 두 사람의 시선에 콕 박혀 있었다.

어차피 계약서는 변호사가 검토할 일이고 파악이 끝난 후에 봐도 늦지 않았다.

중요한 건 사람.

그간의 일을 겪으면서 느낀점은 사람을 잘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범수 감독이 입을 열었다.

“간섭하는 즉시 난 촬영을 멈추고 일 그만둘 걸세.”

“네. 그 조건도 추가 하겠습니다.”

“배우는 내가 직접 보고 정할 거야.”

“오디션도 나쁘진 않죠.”

묻는 말에 족족 대답하는 영훈을 보는 박 감독의 눈이 가늘어졌다.

“배짱 하나는 좋구만. 좋아. 그렇게 하지.”

“알겠습니다.”

됐다!

박 감독의 입에서 드디어 긍정적인 답이 나왔다.

솔직히 한 달은 쫓아 다녀야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긴장된 시간을 보낸 영훈과 직원이 그제야 몸에서 힘을 빼고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나도 귀가 없는 게 아닌지라 탑엔터랑 블레스가 이 바닥에서 잘나간다는 건 들었어. 제작환경도 좋고, 투자도 좋고, 간섭도 덜한다지?”

“좋게 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블레스는 아직 갈 길이 멀었죠.”

“탑엔터에 인수된 걸로 거긴 이미 큰 걸음 걸었어.”

박 감독의 냉정하지만 묵직한 팩트에 직원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평가가 안 좋은 것보다 좋은 게 좋은 거였다.

분위기가 풀려갈 무렵 박 감독이 갑작스레 소리를 냈다.

“아! 한 가지 더 요청할 게 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들어줬으면 좋겠네.”

“말씀하시죠.”

“이번 작품이 잘 되든 안 되든 내 조감독의 입봉. 시켜줄 수 있나?”

말을 마친 범수가 떨리는 손을 감추고 두 사람의 입을 주시했다.

아내와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조감독.

박 감독의 가슴에 박힌 못들 중 하나.

탑엔터와 블레스라면 그 못 하나를 뽑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전과 달리 이번에는 자신이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박 감독은 이 조건을 위해서라면 그쪽에서 낙하산을 하나 정돈 꽂아넣어도 참아줄 아량이 있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넣을 수 있습니다. 류승욱 감독님 말이죠?”

“승욱이를 알고 있나?”

“박 감독님의 팀원이었는데 모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류 감독님이 맡았던 작품도 전부 알고 있습니다. 대학교에서 출품했던 작품까지 전부요. 확실히 <감자>였죠?”

승욱이 식당에서 식혜를 사 올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나.

내 팀원들은 물론 그들의 작품까지 전부 다 알고 있을 줄이야.

이쪽은 저쪽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았는데 저쪽은 이쪽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거 오늘 안 만났으면 얼마나 날 괴롭혔을지 모르겠군.’

어떤 사정이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다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처음부터 진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설득하려고 공원에서 기다렸던 두 사람에 박 감독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작품 한번 만들어 보겠군.’

박 감독이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하네.”

영훈이 손을 마주 잡았다.

“아직 사인 안 하셨습니다만?”

“철저하군.”

“이 바닥이 사인할 때까지 안심할 수 없잖습니까.”

재계약이든 이적이든 도장을 찍을 때까지 안심할 수 없는 게 이 바닥이었다.

영훈의 말에 박 감독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그들을 쳐다봤다.

“맞는 말이야. 그럼 나도 부지런히 움직여야겠구먼. 변호사도 만나고 시나리오도 살펴야 하니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독님!”

* * *

영훈이 성공적으로 박범수 감독을 설득했을 때, 남매는 오붓하게 숙소에 콕 박혀 있었다.

사진 한 번 찍겠다고 잠복한 기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역시 호캉스가 최고지.

뭐 하러 밖에 나가, 추운데.

지연이 따뜻한 방안에서 핫초코를 마시며 대본을 넘겼다.

형광펜으로 칠해진 지연의 대사 옆에 작은 글씨가 이것저것 달려 있었다.

“내일 촬영할 씬은 그거?”

“응. 촬영 전에 한 번 더 보려고.”

“누나는 여전하네.”

이미 다 외워서 더 이상 볼 필요도 없으면서 내일 있을 촬영을 위해서 마음을 다시 잡는다.

읽으면서 캐릭터가 어떤 감정으로 이 대사를 뱉으면 좋을지 생각한다.

무수히 많은 선택지 중에서 누나는 최선의 답을 선택하곤 했다.

나도 하는 방법이었다.

당연하지.

내가 알고 있는 건 전부 누나한테 배운 거니까.

“촬영도 미뤄줬는데 내일 가서 더 좋은 연기로 보답해야 하지 않겠어? 열심히 해야지.”

“그러다가 또 다치지 말고.”

“내일은 다치는 거 없어. 진짜야.”

내일은 뛰고 부딪치고 쫓기고 그런 게 일절 없는 씬이라구.

그냥 평범하게 걷는 장면이 다였다.

지연이 결백하다는 듯이 두 손을 들자 지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봐줬다.

동생의 용서에 지연이 안도할 때 시선 끝에 얇은 책이 보였다.

“그건 지한이 네 거?”

“응. 나도 마음에 들어서 계속 보려고 가져왔어.”

지한이가 가져온 시나리오는 나도 잘 아는 시나리오였다.

그럴 수밖에.

창고 털이 한 시나리오 중 하나였으니 내가 먼저 봤던 거다.

휴가 나왔을 때 추천했던 시나리오 중에서도 하나였고.

시나리오의 제목은 <장난(The Game)>

인터넷에 유명한 뉴튜버가 있었다.

호감을 주는 외모에 유려한 말, 게임도 잘하는 그는 연예인 못지않은 유명 인사였다.

어느 날 그에게 초대장이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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