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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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시민들을 조용히 시키느라 연출팀이 지문이 다 닳았을걸?

“지연아. 방금 실장님이랑 얘기하고 왔는데 다행히 시에서 며칠 더 말미를 줬대. 그쪽에서도 이 동네가 영화촬영지로 홍보가 되니까 좋아하는 모양이야. 다만 민원이 들어오니까 되도록 출퇴근 시간은 피해서 촬영 부탁한대.”

“진짜 다행이다.”

“나도.”

남매가 똑같은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시에서도 관광지로 홍보할 수 있으니까 윈-윈인 셈이지만 이걸로 촬영장에서 얼굴은 들고 다닐 수 있게 됐다.

“안 되겠다. 영훈 형한테 전화해야겠어.”

“오빠는 왜? 요새 바쁜 거 같던데.”

“여기 뷔페 좀 보내 달라고 하게. 나 때문에 고생했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영훈 오빠한테 전화하는 것보다 아영 이모한테 하는 건 어때? 전역하고 나서 아직 전화 못 드렸지?”

“아. 맞다.”

나오자마자 지인들에게 연락하긴 했는데 일 때문에 바쁜 사람은 전화를 못 했었다.

오늘은 시간이 되시려나?

“이모한테는 최대한 빨리 전화해야 하는 거 알지? 겸사겸사 이모한테 전화해.”

“잠깐. 얘들아. 혹시 그 이모가 우리 사장님 누나이자 호영호텔 주인이신 공아영 사장님 맞니?”

“엄연히 따지면 아영 이모 건 아닌데.”

“스탑. 맞단 거지?”

얘들이 뷔페 부른다면서 갑자기 왜 호텔 사장님한테 연락하는 거야.

남매가 HJ그룹 사람들이랑 격 없이 지내는 건 알았지만 은주는 아직도 가끔씩 아이들이 재벌과 친하게 지내는 걸 보면 심장이 뛴다.

이 바닥에 있는 이상 연예인과 재벌들이 얽혀서 좋은 일보다 안 좋은 일을 더 많이 듣기 때문일 거다.

자동 반사처럼 빠르게 뛰는 심장을 다독여 진정시킨 은주가 스마트폰을 쥔 아이들의 손에서 폰을 뺏으며 말했다.

“언니가 알아서 할게. 걱정하지 마.”

“그치만 이 일은 내가.”

“그럼 고 실장님한테 연락할게. 고 실장님도 호영호텔 사장님 알지?”

“알아. 같이 밥 먹은 적도 있어. 그때 이모가 호텔 촬영 허가 내주면서 한 번 밥 같이 먹었거든.”

그 얘기를 들은 은주가 직감했다.

고 실장님 분명 체했을 거야.

어쩐지 고 실장님이 예전보다 강심장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 노력한 게 아니라 이런 일로 단련된 거였어.

다음에 만나면 고 실장님한테 소화제 하나 사 드려야지.

“아무튼 언니만 믿고 너흰 얌전히 촬영장에 있어. 장훈아. 애들 옆에 꼭 붙어 있어라.”

“알겠습니다.”

“오늘 되도록 지연이 촬영이 끝나면 바로 돌아갈 수 있게 감독님께 말해 볼 테니까 촬영 끝나면 바로 옷 갈아입고.”

“그냥 인터뷰 한 번 해 주면 될 텐데.”

“영화 홍보에 도움이 되면 모를까 지한이 전역이랑 차기작 때문에 관심이 분산될 거야. 차라리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게 더 나아.”

은주의 대답에 지연이 수긍했다.

확실히. 저 기자들이 저러는 것도 지한이의 차기작 떡밥이 아무것도 안 풀려서 저러는 거였다.

그런 상황에서 내 촬영장에 왔으니 혹시 전역 후 복귀작이 내 영화 출연인지 설레발치고 있을 테고.

뭔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기자들과의 만남은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럼 나 고 실장님이랑 전화하고 올게.”

“응. 다녀와.”

은주가 서둘러 영훈에게 전화하러 떠났다.

* * *

촬영장에 오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기 전에 단숨에 찍어야겠다.

오늘 이 골목에서 찍을 장면은 집에서 누군가의 침입 흔적을 본 연희가 두려움에 떨며 집 밖으로 뛰어나가 친구 집으로 가려던 장면이었다.

“지연 씨. 계단 내려올 때 조심해요. 건물 옆에 있는 관이 터졌는지 바닥이 미끄러워요.”

“아니에요. 잠시만요! 여기 얼음 좀 깨주세요!”

혹시라도 있을 일을 대비해서 잠시 대기시킨 뒤 바닥의 얼음을 깨기 시작했다.

망치와 정을 이용하니 얼음이 시원하게 깨졌다.

“여기 좀 쓸어주세요!”

“네!”

일사불란하게 현장이 치워지고 지연이 자리에 섰다.

많은 짐도 없이 지갑과 폰 옷이 든 숄더백 하나만 든 지연이 마킹 된 곳에 대기했다.

“레디!”

해성이 손을 들어 올리고 모두가 준비 태세를 갖췄다.

“액션!”

감독의 신호와 함께 연희가 된 지연이 불안과 초조함이 가득한 얼굴로 빌라 문을 열고 나왔다.

‘너 위험한 거 아니야? 안 되겠다. 우리 집이 더 보안이 좋으니까 당분간 와서 살아.’

‘어떻게 그래.’

‘그럼 부모님이 계신 창원으로 내려가기라도 할 거야?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짐 챙겨서 나와.’

이 장면 전에 있을 씬을 생각하며 지연이 빠른 걸음으로 어둠이 깔리는 골목길로 걸어 나왔다.

지연이 골목을 하나 꺾었을 무렵 빼곡히 주차된 차들 사이로 온몸을 무장한 한 남성이 그림자처럼 조용히 나왔다.

저벅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연희의 귀에는 들렸기에 지연이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 작은 행동에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도망치려는 자와 쫓아가는 자가 눈치싸움을 벌였다.

쫓아오는 자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애써 평소처럼 걸음을 옮기는 연희와 그런 연희를 막다른 곳으로 몰아세우는 스토커의 날 선 신경전.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숨소리도 제대로 못 내며 열연을 펼치는 배우들을 주목했다.

겁먹은 걸 티 내려 하지 않을수록 뒤에 있는 스토커가 더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차태석 배우? 생각보다 더 잘하네. 역시 누나 덕인가?’

지한의 눈이 날카롭게 현장을 분석했다.

누나가 두려움을 감추려고 할수록 차태석 배우의 뒤틀린 감정이 더욱 선명해졌다.

차태석 배우가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거의 가리고 있었기에 누나의 표정만 더욱 두드러져 아슬아슬한 상황이 연출됐다.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은 위태로운 상황이 이어질 때 돌연 팽팽하게 당겨진 실이 끊어졌다.

주륵

“윽!”

얼음을 깨서 치웠어도 추운 날씨에 꽁꽁 언 도로를 어떻게 할 순 없었다.

위태로운 상황이었기에 지연이 넘어지자 다들 아까워하며 튀어 나가려고 했다.

지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정에 없던 상황이었기에 부상이 염려되어 살펴보러 가려 했지만 지연의 눈빛을 보고 몸에 제동을 걸었다.

“하악, 흡.”

아픈 것도 잊고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키는 연희를 연기하는 누나를 봤는데 자신이 달려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웅성거리던 스태프들도 계속해서 연기하는 지연을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넘어진 게 기폭제가 된 것처럼 지연이 서둘러 몸을 일으켜 골목을 뛰어갔다.

지연의 행동을 따라 차태석도 쫓아 달렸다.

다닥, 다다닥

타다다다닥

넘어진 지연이 쩔뚝이며 뛰고 태석은 그런 지연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쫓았다.

난데없는 추격전에 카메라가 빠르게 두 사람을 따라갔다.

기율이 들고 있던 카메라를 들고 따라 뛰었다.

달리기 선을 넘은 것처럼 표시된 곳을 넘자 모두의 달리기가 멈췄다.

이제 모두의 시선이 모니터를 보고 있는 감독에게로 향했다.

“컷!”

종료 신호에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지연아!”

“누나!”

대본에 없는 연기였다.

넘어지는 걸 본 사람들이 지연을 걱정하며 달려갔다.

두 손을 들어 괜찮다며 태석을 달래 주던 지연이 뛰어오는 사람들을 돌아봤다.

“나 괜찮아. 그보다 어땠어? 괜찮았어?”

다친 것보다 방금 장면이 어땠는지 물어보는 지연을 보고 다들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제일 몸값이 비싼 배우이면서도 부상을 아랑곳하지 않고 장면을 신경 쓰는 지연을 보고 모두 불이 붙었다.

대박의 조짐을 알리는 성화였다.

257. 내가 잘못했어.

“후우.”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온 지연이 상쾌한 듯 숨을 뱉었다.

오늘 촬영한 씬은 얼마 안 되지만 긴장감이 높은 씬이라 감정의 소모가 꽤 됐었다.

‘그래도 나 오늘 꽤 잘했을지도?’

모처럼 만족스럽게 찍은 것 같았다.

동생이 온 날 내 생에 최고의 장면을 찍은 거 같다니 이게 바로 누나의 힘?

지연이 드물게 풀린 얼굴로 머리를 털며 욕실을 나섰다.

“나왔어?”

“지한이? 벌써 다 씻었어?”

“누나가 오늘 오래 걸린 거야. 그보다 머리 말려줄게.”

“뭐? 안 그래도 돼.”

“내가 하고 싶어. 오늘 누나 손 다쳤잖아.”

윽.

치사하게 아까 넘어진 일을 걸고 나오다니.

내리깐 시선이며 꾹 다문 입술을 보아하니 이대로 거절했다가는 실망할 게 분명했다.

생에 최고의 장면을 찍었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다.

촬영장에서 작지만 사고가 일어난 걸 직접 봤을 동생의 마음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럼 부탁할게.”

당분간은 조용히 지한이 말 잘 들어야지.

가볍게 수건으로 물기를 턴 지한이가 드라이기를 꽂았다.

위이잉-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두피를 스쳤다.

따뜻한 물로 목욕까지 한 뒤에 선선한 바람으로 머리를 말리니 잠이 저절로 쏟아졌다.

그때 지한의 입에서 지연의 잠을 쫓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전화 왔어.”

“벌써!?”

“직접 내려오신다는 걸 내가 말렸어.”

미처 생각 못 했다.

작든 크든 촬영장에서 사고가 나면 위에 보고가 되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사고 난 사람이 나라면 사장님한테 다이렉트로 연락이 간다.

“미나 누나랑 영훈이 형한테서도 연락이 왔어. 서울로 올라오면 보재.”

“언니랑 오빠까지.”

“은주 누나는 혹시나 모를 기사 막으러 갔어. 괜한 기사 올랐다가 누나랑 영화에 악영향이 갈 수 있으니까.”

어쩐지 은주 언니가 병원에 장훈 오빠를 보낸다 싶었어.

다 이유가 있었구나.

인생 최고의 작품을 만든 대신 인생 최고의 고난도 같이 온 거 같은데.

생물학적 부모를 처리했던 일보다 더한 위기감이 들었다.

“오늘 누나가 촬영할 때 최선을 다했다는 것도 알아. 엄청 잘 찍힌 것도 알고. 하지만 그거 때문에 누나가 다친 건 마음에 안 들어.”

“…미안해.”

“오늘만 촬영하고 말 거야?”

“아니요.”

“그런데 왜 몸은 안 사려.”

“미안하다.”

“의사 선생님이 흉도 안 질 거라고 해서 다행이지. 누난 몸이 생명인 배우야.”

“응. 다음부턴 안 그럴게. 미안해.”

지연의 입에서 마르고 닳도록 사과의 말이 흘러나왔다.

욕실에서 씻고 나왔을 때는 기분 좋아 보였는데 지금은 축 처진 누나의 어깨를 보고 지한이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위이잉, 탁

“내가 지켜볼 거야.”

“알았어. 안 그럴게.”

“드래곤 엠페러 잘 찍었다고 안심할 게 아니었어. 내가 방심한 거지. 액션영화도 잘 촬영한 누나가 빙판길에서 넘어질 줄 누가 알았겠어.”

“다음부턴 아이젠이라도 신고 할게.”

끊임없이 쏟아지는 말에 화가 날 만도 했지만 오늘만큼은 모두에게 죄인인 지연이 고개를 푹 숙였다.

끄웅

왜옹

인절미와 모짜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조금 전 지연의 몸에서 나는 싫은 냄새에 주위를 빙빙 돌던 아이들이 씻고 나서도 가시지 않는 냄새에 잔뜩 곤두서 있었다.

거기다 지한이와 지연의 분위기가 안 좋아 보여서 전전긍긍하다가 겨우 울음소리를 내었다.

자기들 때문에 눈치 보게 만들었단 걸 안 남매가 미안해하며 둘을 끌어안았다.

“미안해.”

“우리 싸우는 거 아니야.”

쫑긋

두 사람의 말에 한 마리의 개와 한 마리의 고양이의 귀가 펄럭였다.

진짜 솔직한 귀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거야. 지한이는 속상해서 그런 거고. 화낸 건 아니야.”

지연의 설명에 인절미가 지한이의 얼굴을 핥았다.

이제 그만하고 화해하라는 신호였다.

그래. 우리가 누구 앞에서 싸우겠냐.

“앞으론 더 조심할게.”

“안 다치겠다는 소리는 안 하는구나.”

“솔직히 그건 무리잖아?”

앞으로 내가 어떤 장르를 찍을지도 모르고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그걸 찍을 거니까.

그건 너도 그렇잖아?

‘안 그래?’

‘그렇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누나한테 강하게 나가지 못하는 건 자신도 그 마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걸 찍을 거다.

그게 액션이든 로맨스든 스릴러든.

그러니 결국 해야 할 건 한 가지였다.

더 안전하게 찍는 것.

안전 장비를 확인하고 스태프들의 사인을 지키고 다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것.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고 조심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무튼 오늘은 푹 자. 모레까지 누나 촬영은 없어.”

“어? 나 내일 하나 있지 않나?”

“누나 부상 때문에 모레로 미뤘대. 기자 때문에 인터뷰 하나 해 주는 것도 있고.”

“결국 해주기로 했구나.”

“오늘 있었던 일이 안 새어나가게 하는 대신이지 뭐.”

지한의 말이 지연의 양심을 콕 찔렀다.

내가 진짜 다음부터는 화염 방사기로 도로를 싹 녹이고 찍는다.

* * *

-그러니까 누누이 조심하라고 했잖아. 아니 이 실장님은 도대체 뭘 하셨대. 거기 스태프들은 뭐 했고.

“다들 열심히 일했어. 찍기 전에 얼음도 깨서 다 치웠는걸. 그런데도 길 자체가 미끄러운 건 어쩔 수 없잖아.”

-지연이 너도 그래. 넘어졌으면 당장 상처를 확인했어야지 왜 연기를 계속 이어갔어.

“몰입하고 있었는데 어떡해. 그리고 조금 미끄러진 거 가지고 멈추면 필름 아깝잖아.”

-우리 회사 돈 많아. 제작비 부족하면 더 쓰면 되지 그게 아깝다고 연기를 계속해.

일어나는 시간에 귀신같이 전화를 건 영훈 때문에 이른 새벽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영훈의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영훈 엄마 여전하네.

그래. 당분간은 내가 죄인이다.

그래도 이제 곧 1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이만 끊으면 안 될까?

지연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영훈 오빠. 오늘은 안 바빠?”

-어. 많이 안 바빠. 조금만 바쁠 예정이야.

많이 바쁠 예정이군.

바쁜 와중에도 내 생각해서 전화해 준 마음은 고맙지만 이제 귀에서 피 날 거 같은데 일하러 가야하지 않을까?

오빠의 이른 퇴근을 위해서라도.

“얼른 일 끝내고 집에 일찍 들어가. 미나 언니가 걱정할라.”

-미나는 네가 더 걱정이래.

뭔가 고마우면서도 기분이 묘하군.

“안 그래도 오늘은 촬영 쉬기로 했어. 내일로 미뤘대.”

-그래? 하루라도 쉬면 다행이지.

“대신 인터뷰해야 하는데?”

-차라리 인터뷰가 낫지. 그건 안 넘어질 거 아니야.

이걸로 10년은 우려먹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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