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조기교육을 한 셈이죠.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이런저런 걸 가르쳐 주셨거든요.”
“아이고, 그랬구만 그랬어.”
“역시 조기교육을 잘했구만.”
“맨날 해 준 게 없다면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있더니 그게 다 빈말이었단 말이지?”
“그런 게 아니라,”
“아버지가 사기 때문에 충격이 크셔서 그렇게 생각하신 겁니다.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어머니랑 저랑 전부 다 알아요.”
기율의 말에 병실에 있는 사람들이 ‘어머’, ‘허허’ 하는 소리를 내며 감탄했다.
그리고 사기 때문에 위축됐을 해성을 생각했는지 짠한 얼굴로 해성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해성이 뭐라고 반박하려고 할 때, 기율이 TV를 보며 말했다.
“아무튼. 아들이 열심히 찍은 거니까 보고 평가 좀 해 주세요.”
“아! 그래. 우리 드라마 봐야지.”
“걱정 마. 강 씨. 내가 드라마 고수야. 지난번이랑 뭐가 달라졌는지 두 눈 부릅뜨고 볼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
“언니, 그래도 강 씨가 전문간데 우리보다 더 잘 알지 않겠수?”
“강 씨는 드라마 본 지 얼마 안 됐잖아. 우린 재방송까지 돌려봤고.”
“그렇지? 본 걸로 따지면 우리도 안 진다고.”
아줌마들이 호호호 웃으면서 드라마에 시선을 고정했다.
조금 전보다 더 불타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아버지도 보셔야죠. 보고 평가해 주세요.”
할리우드처럼 촬영감독과 오퍼레이터가 따로 있어 기율이 카메라를 잡지 않아도 그의 합류에 카메라 구도가 더 자연스러워진 건 사실이었다.
기율이 생각하는 아버지라면 그걸 알아볼 것이다.
드라마를 보던 해성은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몰입하면서도 어딘가 드는 기시감에 자꾸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거 뭔가,’
“익숙하죠?”
움찔!
기율의 말에 해성이 어깨를 떨었다.
아들의 말대로 뭔가 익숙했다.
긴장감을 강조하기 위해서 자신이 썼던 조명과 구도라든지 분위기를 환기시킬 때 쓰는 움직임이라든지가 익숙했다.
“아버지를 보고 배웠으니까요. 완전히 똑같진 않지만 제 실력의 바탕엔 아버지가 가르쳐 준 게 있어요.”
그래서였나.
어쩐지 익숙하다고 느낀 게.
“아버지.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니.”
“어릴 때 약속 지켜주세요.”
“약속?”
“같이 일해요. 제가 크면 같이 일하자고 하셨잖아요.”
기율의 말에 해성이 어느 옛날 아들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좋아! 그럼 우리 아들 나중에 크면 아빠랑 같이 일할래?’
‘응! 크면 아빠랑 같이 일할 거야!’
해맑게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걸던 어린 시절의 기율과 눈앞에서 깊은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는 아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약속, 안 잊으셨죠?”
기율의 말에 해성이 입을 열었다.
248. 약속하셨잖아요
“탑엔터에서 아버지의 시나리오를 제작하기 위해서 영화 인력을 모집하고 있어요.”
“…그러니?”
“아직 감독 자리가 비었을 거예요. 메가폰, 아버지가 잡아보는 건 어때요?”
“내가?”
기율의 제안에 해성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와서 자신이 무얼 할 수 있다고.
멍청하게 사기나 당해서 아내와 아들을 고생하게 만들어 놓고.
평생 뒷바라지하던 아내는 이제 자신 뒷수발까지 하느라 밤낮없이 일하고 있었다.
이런 자신이 무슨 염치가 있다고 다시 메가폰을 잡겠는가.
“됐어. 이제 와서 내가 무슨 염치가 있다고. 나는 이제 내 시나리오가 세상에 나오기만 하는 걸로 족해. 더는 너와 아내를 괴롭히는 일은 없을 거야.”
씁쓸하게 말하는 해성을 보고 기율이 드물게 소리를 높였다.
“저는, 아버지가 영화 만드는 거 싫지 않습니다.”
“기율아.”
“어릴 때 저와 약속하셨잖아요. 나중에 제가 크면 같이 일하겠다고.”
미안하다면서 고개를 숙이는 아버지가 싫었다.
제 욕심 때문에 모두를 고생시켰다면서 다시는 영화 쪽에 얼씬도 안 하겠다는 아버지가 싫었다.
“아버지는 제 생일 때, 기념일에 못 와줘서 미안하다고 하셨지만 괜찮아요. 물론 처음에는 서운했지만 우리 때문에 일하느라 늦게 온 거 다 알았어요. 어머니랑 저, 아버지 미워한 적 없어요. 아버지가 만든 작품이 영화관에 걸릴 때마다 친구들 데리고 가서 자랑했어요. 우리 아빠가 만든 작품이라고.”
“기율아.”
“영화, 그만두지 마세요. 아버지가 좋아하는 일이라면서요. 좋아하는 일 계속하세요. 그거 안 싫어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아들의 솔직한 마음에 해성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런 해성을 보고 있는 기율의 눈에서도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영화 같은 거 싫다고.”
“그건 아버지가 과로 때문에 죽을 거 같아서 그렇게 말한 거예요. 소담에서 돈도 제때 안 주고 부려 먹었잖아요. 소담이 싫어서 그런 거지 영화가 싫은 건 아니었어요. 그땐 제가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영화가 싫다고 말했지만 절대 그 뜻이 아니에요.”
기율이 랩을 하는 것처럼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때 그렇게 화를 냈었구나.
전부 나 때문에, 날 위해서.
“같이… 같이 만들어요. 그 시나리오 그러려고 만든 거잖아요.”
“그래. 그렇지. 우리 아들이랑 같이 만들려고 쓴 시나리오지.”
몇 년을 뜯어고치고 지우고 다시 쓰고를 반복한 소중한 시나리오였다.
아들이 저와 같이 영화길을 걸을 거란 걸 알고 나서는 한 시도 품에서 떨어트리지 않았던 소중한 시나리오였다.
그 시나리오를 만들 때도 아들의 말에 영감을 받아서 만든 거였다.
‘나중에 제가 만든 영화가 엄청 잘돼서 세상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었으면 좋겠어요.’
영화란 그런 것이지.
사람들을 웃게 만들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그게 바로 영화다.
“내가 정말 그 영화를 만들어도 괜찮겠니?”
“네. 저는 아버지가 영화 만들 때가 제일 좋아요.”
기율의 말에 해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기율이 어린아이처럼 해성의 품에 안겼다.
어린 날의 실수 이후 한 번도 안겨보지 못한 아버지의 품이었다.
이제는 자신이 꽤 자라 아버지의 품이 비좁아서 눈물이 흘렀다.
해성이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품에 안은 아들의 등을 떨리는 손으로 토닥였다.
* * *
“지연아! 빅뉴스!”
‘미스 뷰티’가 잘나가는 덕에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쁜 은주가 퀭한 얼굴로 두 눈을 빛내며 벤으로 들어왔다.
잠깐 전화 받으러 간다더니 도대체 무슨 전화를 받고 온 거지?
“무슨 일인데?”
지연의 물음에 은주가 씨익 웃었다.
언니. 지금 언니 몰골 생각 안 한 모양인데.
지금 혼자서 좀비 영화 찍고 있는 건 알고 있어?
제때 못 자서 허옇게 뜬 얼굴, 퀭한 눈가, 핏발이 선 눈동자.
거기에 조커처럼 입이 찢어져라 웃는 은주의 얼굴은 호러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나 다름없었다.
“강기율 씨. 합류하기로 했다.”
“어디에?”
“어디긴. 우리 영화지.”
우리 영화라면 <거부할 수 없는, 사랑>?
아니 그거 영화잖아?
“강기율 씨는 영화 안 한다면서.”
“내 말이! 그런데 이번 영화는 들어왔더라. 나도 깜짝 놀랐어. 더 놀라운 건 뭔지 알아?”
“여기서 더 놀랄 게 있어?”
이미 동그랗게 뜨고 놀람을 최대치로 표하고 있는 지연이지만 은주는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며 입을 열었다.
“강기율 씨, 아버지인 강해성 씨랑 같이 지원했어.”
“뭐?”
아니 사이 안 좋다며?
은주가 지연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의문을 바로 풀어주었다.
“부자 간의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야. 강기율 씨가 강해성 감독님을 설득해서 데려왔어. 꼭 같이하고 싶다고 말하더래. 회사에서는 강해성 씨가 직접 가져온 촬영 구상안이랑 콘티 보고 오케이 한 모양이고.”
“세상에.”
“너도 놀랐지? 지금 강기율 씨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너랑 똑같은 반응이야. 나는 아까 촬영감독님이 펄쩍 뛰는 것도 보고 왔어. 사람이 제자리에서 그렇게 높게 뛰는 건 처음 봤어. 강기율 씨랑 가까워 보이던 촬영감독도 그렇게 놀랐으니 나도 얼마나 놀랐던지.”
이래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 모양이구나.
단지 오해 때문에 서먹했던 걸 가지고 사이가 안 좋다고 소문이 쫙 퍼지다니.
연예계에는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 난다는 걸 꼭 명심해야겠어.
“아무튼 ‘미스 뷰티’ 끝나면 바로 촬영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아. 강해성 감독님이 예전에 같이 일했던 스태프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나 봐.”
“소담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
“응. 사장이 사기 치고 나서 이 바닥 뜬 사람도 있고 다른 데 간 사람도 있는데 강해성 감독이 부르니까 바로 온다나 봐. 강 감독님이 인망이 있는 거지. 아! 물론 오라는 곳이 우리 회사라서 그런 것도 있을 거야.”
우리 회사가 업계 넘버원이니까.
은주가 콧대를 높이며 말했다.
애사심이 넘치는 매니저라니.
역시 사장님이 복지랑 월급 팍팍 신경 쓴 보람이 있구나.
회장님 모토도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였는데.
오랜만에 회장님 생각난 김에 안부 전화 드려야겠다.
은퇴하고 나서도 정정하시다던데 얼마 전에 유럽 여행 간다고 들은 거 같은데 아직도 유럽이시려나?
* * *
2016년 하반기를 뜨겁게 달구었던 <미스 뷰티>도 서서히 끝이 다가왔다.
회장의 총애를 받으며 재벌 2세인 윤 이사의 눈 밖에 났던 신주안 본부장은 아름다운 미모에 올곧은 일개 광고회사 직원 여신해에게 빠졌다.
질투와 욕망이 가득한 주위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여신해는 꿋꿋이 버텨 냈고, 프로젝트를 무사히 끝냈다.
그 결과로 이번에도 회사 내에서 본부장인 자신의 위치도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
주변의 시선에 움츠리긴 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회사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은 신해를 보면서 주안은 또 한 번 그녀에게 반했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신해는 내 신부야.”
“그래서. 신해 씨를 데리고 가겠다는 겁니까? 가족도, 친구도 없는 그곳으로?”
신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주안이 날카롭게 물었다.
“신부를 데려가려는 목적. 따로 있는 거죠?”
“네가 알 거 없어.”
“그건 안 되겠는데?”
“네가 상관할 게 아니야. 이건 나와 내 신부 사이의 일이다.”
“아니. 나도 상관있어. 내가 여신해 씨를 좋아하거든.”
주안의 반박에 한도가 사나운 이를 드러냈다.
신부를 데려가려는 자와 그걸 막아서는 자.
무시무시한 괴물과 그녀를 지키려는 인간.
한도가 노랗게 변한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우리 사이를 방해하지 마, 인간.”
“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괴물 주제에.”
“하! 네가 뭘 알아.”
“그래. 몰라. 하지만 그건 알지. 여신해 씨가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 이제야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당당해진 사람이야. 네가 여신해 씨를 끌고 가게 둘 수 없어.”
“그건 네가 정할 문제가 아니지. 애초에 신해에게 넌 그저 거래처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한도의 공격적인 언사에 주안이 눈을 날카롭게 떴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두 남자가 첨예하게 대립할수록 <미스 뷰티>의 시청률도 하늘을 찔렀다.
이날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1분은 이 장면에서 탄생했다.
“아까 본부장님이랑 무슨 일 있었어?”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신해가 뾰로통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는 한도의 얼굴을 붙잡았다.
부드러운 손바닥에 볼이 붙잡혀 붕어 입을 하고 신해를 보게 된 한도가 애써 눈동자를 피했다.
“구한도.”
“…왜.”
“다른 사람이랑도 사이좋게 지내.”
“싫어.”
신해의 말에 한도가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붕어 입에 잔뜩 찡그린 얼굴을 보고 신해가 웃었다.
“나는 네가 다른 사람이랑도 잘 지냈으면 좋겠어.”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 잘 지내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그야. 넌 앞으로도 계속 나랑 같이 살 거잖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신해를 보고 이번에는 한도가 멍한 얼굴을 했다.
“나랑… 같이 살아 줄 거야?”
“내가 네 신부라며. 그리고 내가 싫다고 해도 계속 날 지켜줄 거잖아. 안 그래?”
이때까지 자기가 위험할 때마다 나타나 구해줬던 한도였다.
부엌에서 칼을 만질 때도 위험하다면서 안절부절하고 무거운 걸 들 때에도 다친다며 대신 들고갔던 사람.
이렇게 쥐면 터질까 불면 날아갈까 걱정하던 사람이 그동안 잘도 숨어서 지켜봤다 싶었다.
그 행동의 바탕에 자신을 향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어서 신해는 그의 수발을 얌전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이러다가 두 발로 걷지도 못할 거 같다고 했던 말에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어.’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땐 당황스러우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향한 믿음과 옅은 애정을 드러낸 신해를 보던 한도의 머릿속에 불쑥 주안의 말이 떠올랐다.
‘과연 여신해 씨가 널 따라가려고 할까?’
짜증나는 남자의 말에 한도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 변화를 포착한 신해가 의아한 듯 물었다.
“구한도? 갑자기 왜 그래?”
“그….”
“그?”
“…아니야.”
“뭐야. 왜 말을 하다가 말어.”
“빨리 들어가자고. 날아서 갈래?”
한도의 품에 안겨 공중산책을 했던 날 이후로 신해를 종종 한도에게 야경 보고싶다고 둘러 말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한도는 신해를 소중하게 안아 들고 밤산책을 즐겼다.
“그건 좋지만. 오늘은 괜찮아.”
“다른 사람들 시선 때문이라면 조용한 데 가서 몰래 날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어쩐지 네가 피곤해 보여서.”
알아차렸구나.
이게 다 신주안 때문이다.
재수없는 인간.
그 녀석 때문에 신해를 걱정하게 해버렸다.
“나는 괜찮아. 대신 손 잡고 가자.”
“응.”
신해가 손을 내밀었다.
한도가 신해의 손을 잡으려고 할 때였다.
후웅
“어?”
“!”
한도의 손이 반투명해지더니 신해의 손을 통과했다.
그 모습을 본 신해가 놀란 소리를 내자 한도가 재빨리 손을 꾹 쥐었다.
그러자 손이 다시 불투명해졌다.
“그거 뭐야? 왜 그래? 얼굴이 안 좋다 싶더니 어디 아픈 거야?”
신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들켜선 안 돼.
한도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픈 게 아니라 다른 생각 하느라 잠시 힘이 풀려서 그래.”
“정말이야? 아픈 거면 병원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인간들이 다니는 병원에 어떻게 가.”
“그럼 네가 아는 병원이나 의사 보러 가.”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자, 가자.”
한도가 신해의 손을 꼭 잡고 앞장섰다.
아직은 아니다.
조금 더.
신해가 지금 이 생활을 즐길 수 있길.
한도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최종화까지 앞으로 2화
시청률이 20%를 돌파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