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의 말에 기율의 눈동자가 지연에게로 향했다.
무감정한 그의 눈을 보고 지연이 입을 떼려고 할 때 누군가가 기율의 이름을 불렀다.
“기율아! 짐은 여기 두면 돼!”
“네!”
대답한 기율이 다시 짐을 들었다.
“그럼 일 때문에 바빠서. 이만.”
“아. 제가 괜히 바쁜 사람을 붙잡았네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짐을 들고 움직이는 기율의 등을 보며 지연이 아쉬운 말투로 말했다.
“왜 영화는 안 찍는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지연아! 왜 여기 있어. 메이크업 받으러 가야지.”
“장훈 오빠. 미안.”
“괜찮아. 자, 가자.”
말없이 움직인 덕에 찾아다녔는지 자신을 보고 안도한 얼굴을 한 장훈을 보고 가슴이 뜨끔했다.
지연이 분장실로 향했다.
246. 강기율 (2)
“촬영하겠습니다!”
지연이 카메라 앞에 섰다.
PD의 신호에 맞춰 촬영이 시작되었다.
첫 광고가 나갈 때까지 긴장했던 신해가 피곤한 기색으로 침대 위에 누웠다.
“해냈다.”
신해가 지친 얼굴로 뿌듯하게 웃었다.
진짜 잘 됐어!
커뮤니티랑 기사 몇 개만 확인했지만 광고 반응도 좋았고.
이게 매출로 연결될지는 신성카드에서 연락이 오는 걸 확인해야 하지만,
“잘될 거 같아.”
신해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가물가물하는 눈이 금방이라도 닫힐 것 같았지만 기쁨과 감동 때문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게 느껴졌다.
“내일… 출근하면….”
신해의 목소리가 늘어졌다.
흥분에 억지로 눈 떠 있던 것도 잠시, 졸음을 이기지 못한 신해가 결국 잠을 이기지 못하고 고른 숨을 내뱉었다.
그런 신해의 곁에 한도가 또 나타났다.
“고생했어.”
한도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신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는 자연스러운 접촉.
“네 앞을 막는 건 전부 내가 치워줄게. 그러니까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한도의 대사에 카메라 밖에 있던 기율이 반응했다.
‘…혹시 남으면 그걸로 네가 하고 싶은 일 해.’
아버지가 남긴 말이 잔상처럼 기율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의 눈동자가 여러 감정으로 어두워졌다.
기율의 감정이 어떠하든 촬영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번에 광고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고생했던 걸 전부 지켜본 한도가 신해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신해의 입술에서 멈춰 있었다.
한도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흐헤.”
파드득!
신해가 잠결에 뱉은 소리에 한도가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나 깜짝 놀랐는지 그의 몸이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움직였다.
입을 막은 한도가 당황한 눈으로 신해를 쳐다보더니 귀가 빨개져서 신해의 방 문고리를 잡았다.
“아. 이게 아니지.”
한동안 신해랑 같이 다니느라 인간의 삶에 익숙해 자신도 모르게 문을 열고 나갈 뻔했다.
방금 자신이 하려던 행동을 돌아본 한도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곤 사라졌다.
“컷! 아 좋네. 한 방에 롱테이크를 성공하다니 천시후 씨도 이제 대세 반열에 들었다고 레벨업한 건가?”
“정말요? 감사합니다.”
“잘하는데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게 다 선배님이 잘 이끌어 주신 덕이에요.”
시후가 순수한 얼굴로 웃었다.
방송에 나오는 신비한 청년은 어디 가고 칭찬에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순수 청년이 나타났다.
“자 그럼 클로즈 찍고 다음 씬으로 넘어가자고.”
“네!”
“준비하겠습니다!”
정 PD의 말에 스태프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이미 촬영감독을 도와 카메라 조정이 끝난 기율의 시선이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있는 지연에게로 향했다.
“역시 기율이랑 같이하면 일이 쉽게 끝나서 좋다니까. 나랑 같이 일할 생각은 없어?”
“…생각해 볼게요.”
“어?”
그동안 그렇게 끈질기게 제안했었는데도 돈이 급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던 기율이었다.
그런 기율이 생각해 보겠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자 촬영감독이 로또에 당첨된 거처럼 환희에 가득 찬 얼굴로 되물었다.
“진짜?! 너 방금 생각해 본다고 했다!”
“카메라 준비 다 됐어?”
“여긴 끝났습니다.”
“어어. 다 했어, 정 PD. 아니, 그 전에 기율아 너 방금 생각해 본다고 한 거야.”
“카메라 잡으시죠.”
“응. 잡았어. 그런데 기율아.”
“스탠바이!”
“찍습니다. 앞을 보세요.”
정 PD의 말과 기율의 보챔에 촬영감독은 듣고 싶은 말을 듣지 못한 채 촬영에 집중했다.
그 후로도 촬영은 순조로워서 예정된 촬영 시간보다 일찍 끝날 수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니 드라마가 이렇게 잘나가는데 이렇게 일찍 끝나도 되는 거야?”
“뭐 어때 좋은 거지.”
오늘 마지막 촬영이 끝나자 스태프들이 지친 얼굴로 인사를 나눴다.
시청률도 잘 나오겠다, 보너스에 포상 휴가도 확정됐겠다.
드라마 연장 때문에 쉴 틈 없이 바쁘긴 했지만 자신들이 만든 작품이 잘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모두의 얼굴은 밝았다.
팡!
“요오. 기율이 오늘 고생했어.”
“방금은 조금 아팠습니다.”
“아. 미안하다.”
그가 나쁜 마음은 없다는 걸 알고 있어도 아픈 건 아픈 거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한 기율이 묵묵히 장비를 챙겼다.
“당분간 잘 부탁한다고!”
“저야 돈만 제때 주시면 상관없습니다.”
“걱정 마라. 내가 괜히 널 불렀겠냐. 여기 광고, PPL, 투자 전부 빵빵해. 무려 그 ‘지연’이 있잖냐. 제작비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감독의 말에 기율의 시선이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는 지연에게로 향했다.
연예계에서 드물게 이미지와 인성이 일치하는 배우.
탑엔터 공 사장이 끼고돈다는 남매 중 누나.
어릴 때부터 동생과 이 바닥에 들어와 전설을 써 간 연예인 중의 연예인.
온갖 수식어가 붙은 지연과 촬영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기율은 오늘 촬영만으로도 지연의 실력을 알아볼 수 있었다.
기율은 집으로 가는 길에 지연에 대해 검색해 보기로 했다.
* * *
“오늘도 왔네.”
“응? 누구 보는 거야?”
“저기 강기율 씨.”
오늘은 막다른 곳에 몰린 윤 이사가 신 본부장을 협박하기 위해 신해를 납치하는 장면을 찍는 날이었다.
그걸 신 본부장보다 한발 먼저 나타난 한도가 구해주는 것까지 촬영하느라 인원, 특수효과, 와이어까지 대동하는 대규모 씬을 찍을 예정이었다.
촬영팀으로 왔으면서 와이어 장비팀을 도와주는 기율을 보고 지연이 신기한 듯이 보았다.
“기율 씨가 못하는 게 없다고 하더라고. 어제는 조명 팀 일도 도와주던데?”
“에엑? 진짜 만능이네요. 강기율 씨.”
의자에 앉아 있는 지연의 옆에서 머리와 의상을 점검하던 코디가 장훈의 말에 감탄사를 뱉었다.
“그치? 못하는 게 없는 사람을 여기서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다니까.”
“아. 그러네요. 못하는 게 없는 사람을 항상 옆에서 봐 놓고도 놀라다니. 아직 수련이 부족한가 봐요.”
“응? 그게 누군데?”
지연의 물음에 돌돌이를 들고 있던 코디와 미니 선풍기를 쥐고 있던 장훈이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지연을 돌아봤다.
그들의 노골적인 시선을 지연이 모를 리 없었다.
“나?”
“그래. 너 아니면 누구겠어.”
“연기면 연기, 노래면 노래, 요리면 요리, 그림이면 그림. 네가 못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
“나 저런 건 못하는데.”
“배우면 금방 잘할 거잖아.”
“그건 모르는 거지.”
“아니야. 넌 잘할 거야. 내 촉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귀신 같은 사람들.
배울 기회가 있다면 금방 숙달되긴 하겠지만 내가 굳이 저걸 배울 필요를 못 느꼈달까?
안 배운 건 못 하는 게 맞잖아?
지연이 속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촬영기법이나 용어는 오다가다 들어서 익숙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기를 직접 다루는 건 못한단 말이지.”
“그건 또 언제 오다가다 들었니.”
“지연이 너 혼자 다니지 말랬지.”
“아니, 다 같이 있을 때 들었잖아.”
지연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모처럼 지연을 놀릴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코디와 장훈이 음흉한 속내를 숨기며 몰아세우려고 할 때, 낌새를 알아차린 지연이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촬영 팀은 아직도 복귀를 못 했나 보네. 벌써 꽤 지나지 않았어?”
“아, 그거? 말도 마. 다음 날부터 후유증이 나타나서 다들 목 잡고 드러누웠어. 뭐. 의사 말로는 과로랑 피로도 조금 있다고 해서 조금 더 입원하기로 한 모양이야.”
“이쪽 업계가 과로가 심하긴 하지. 그래도 우린 근로시간 준수해서 찍는 거 아니야?”
지연과 지한의 억지 아닌 억지에 둘이 들어가는 촬영 현장에는 근로시간을 준수해서 찍는 걸 조건으로 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방송 시간에 맞추지 못할 거란 제작사와 방송사의 주장이 있었으나 사장님은 과감한 투자로 그런 두 곳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실제로 늘어난 제작비로 인한 충분한 인력, 적정 근로시간을 지킨 덕에 일어난 작업 효율 상승으로 인해서 오히려 방송 시간을 여유롭게 맞출 수 있었지.
최근에 우리 다른 제작 환경도 우리랑 비슷한 환경으로 바뀌고 있다던데 이게 다 사장님 덕인 거 같아서 지연은 뿌듯했다.
“우리야 열심히 지키고 있지. 그런데 우리 드라마 찍기 전에 다른 현장에 있다가 들어오셨잖아. 어쩔 수 없지.”
“이번 기회에 잘 쉬고 오셨으면 좋겠다.”
“아무튼 그래서 저 강기율이란 사람이 계속 온다는 거죠? 우리 지연이 못지않게 만능 인력! 최근 회사에서 유능한 인재를 찾고 있다던데 저런 사람이 들어오면 좋겠네요.”
“확실히 제작부에 기율 씨 같은 사람이 들어오면 우리도 안심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일단 현장이 안정적으로 굴러가겠죠?”
장훈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주 언니가 말하던데 기율 씨는 영화 현장에 안 온대.”
“에엑?? 아니 저런 제작계의 보물 같은 인재가 왜?”
“몰라.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야.”
“아쉽네.”
“아깝다. 지연이 네가 영화 들어갈 때 기율 씨 같은 사람이 있으면 좋을 거 같았는데.”
“그러니까 만능+만능은 무적이잖아요.”
“언니 그런 공식은 어디서 가져온 거야?”
“내가 직접 지었어. 꽤 그럴싸하지 않아?”
“좋은데요? 만능이 무려 둘이나 있는 거잖아요.”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을 본 지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5분 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멀리서 조연출의 외침이 들렸다.
* * *
“가, 가!!”
“구한도!!”
“가라고 했잖아!!”
신해를 구하려다 위기에 빠진 한도가 처절하게 외쳤다.
그 잘난 힘도 쓸 수 없었다.
애초에 신해에게 들킨 순간 자신은 신해와 함께 할 수 없었다.
그걸 무시하고 버틴 대가가 이것이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힘을 쓸 수 없다니.
멀리서 눈물투성이인 신해가 보였다.
“구한도오. 구한도.”
윤 이사 때문에 본인 몸도 상처투성이면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신해가 보였다.
“가!”
“어흐윽. 안 돼. 저기요! 누구 없어요! 흐억. 여기, 사람이. 흐어엉. 제발.”
울음과 애원이 섞여 서글픈 장면을 만들었다.
한도가 다 포기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자유롭게 살아. 넌 이제 내 신부가 아니니까 남자친구도 사귈 수 있을 거야.”
“어어엉! 지금 그 말을 왜 하는데! 하지 마! 구한도 하지 말라고!”
두 사람의 처절한 연기에 촬영하고 있던 스태프들도 숨죽였다.
꾸욱
기율의 옷에 주름이 잡혔다.
카메라 옆에 서서 두 사람, 정확하게는 지연의 연기를 보는 기율의 눈에 묘한 빛이 스쳤다.
“미안해.”
‘미안하다.’
기율이 눈을 질끈 감았다.
계약을 끝나고 돌아가던 날 아버지가 남긴 말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건 그런 말이 아니었는데.
“싫어! 미안하다고 하지 마!”
지연의 대사에 기율이 눈을 떴다.
“미안하다고 하지 마. 가라고 하지 마! 왜, 왜! 같이 가 주지 않는 거야.”
움찔
지연의 대사를 들은 기율의 눈에 파문이 일어났다.
그녀의 입을 빌어 나온 신해의 대사가 꽁꽁 싸맸던 기율의 마음에 닿았다.
“구한도오. 같이, 같이 가. 흐윽. 같이.”
신해가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하고 한도의 팔을 잡아끌었다.
무너진 잔해에 하반신이 깔린 자신을 겨우 신해의 힘으로 끌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가. 또 무너질지도 몰라. 가! 제발.”
“싫어. 안 가. 가라고 하지 말랬잖아. 히끅.”
신해가 울다가 딸꾹질까지 하며 한도의 팔을 꽉 잡았다.
딸꾹질에 탈진까지 오려는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신해의 얼굴을 본 한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러다가 신해도 여기서 쓰러질지도 몰랐다.
젠장. 움직여.
움직이라고 내 몸!
한도가 이를 악물고 몸에 힘을 줬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금기를 어긴 자신의 힘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잔해가 또 한 번 무너지려는지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구궁!
신해와 한도의 시선이 무너진 잔해로 향했다.
두 사람의 얼굴에 다급함이 서렸다.
“너만이라도 가! 어서!”
“싫어!”
신해가 한도의 몸통을 깍지를 껴안았다.
점점 더 흔들리는 잔해에 신해가 죽을힘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