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도에 대해 생각하느라 어느새 집 앞까지 온 신해가 자신이 내놓은 결론에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에이. 설마. 날 24시간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내가 위험할 때 딱 맞춰서 올 수 있어.]
그런데 진짜 그게 맞는다면?
신해가 계단을 내려다봤다.
망설이던 신해가 눈을 꼭 감고 계단으로 몸을 기울였다.
덥석
[뭐 하는 거야.]
한도가 놀란 숨소리가 들렸다.
신해가 눈을 떴다.
[맞았네.]
[뭐가 맞다는 거야. 방금 다칠 뻔했어. 알아?]
[알아요.]
[뭐?]
[이래야 올 거잖아.]
신해의 말에 한도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지금 일부러 그랬다는 거야?]
[구한도 씨. 방금 내가 위험하니까 나타난 거죠.]
[….]
[조금 전까지 아무도 없었어요. 센서등도 꺼져있었고, 발소리도 없었고, 문 여는 소리도 없었어.]
신해의 추궁에 한도가 눈을 피했다.
신해를 바로 세운 한도가 몸을 돌려 피하려고 할 때 신해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당신, 누구예요?]
[….]
[사람 맞아요?]
신해의 말에 한도가 몸을 움찔했다.
그가 눈을 크게 뜨고 신해를 돌아봤다.
244. 찾았어
<미스 뷰티>가 10화도 안 돼서 시청률 16%를 넘겼다.
배우들은 이렇게 빨리 목표를 달성할 줄 몰라서 얼떨떨한 한편, 기쁜 마음으로 시청률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서 모였다.
스태프들 역시 희희낙락한 얼굴로 SNS 라이브를 준비했다.
“우리 보너스 나왔대.”
“포상휴가로 세부 보내준다던데?”
“보너스 아니었어?”
“난 세부 들었는데.”
“둘 다야. 싸우지 말고 저기 가서 이거 세팅 좀 해. 이번에 들어온 PPL이야.”
각자가 들은 소문의 진위여부를 깔끔하게 정리해 준 고참이 들고 있던 카페 음료를 넘겼다.
드림기획 회의실로 꾸민 세트장에서 라이브 방송을 준비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PPL을 쓰는구나.
오늘의 주인공들이 모여 있는 곳에 카페 음료를 들고 가자 주역들이 반가운 얼굴로 받아들었다.
“우와. 이거 내가 좋아하는 건데.”
“뭐지? 제가 이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여러분들 음료 취향은 팬들이 다 알고 있더라구요. 각자 이름이 적힌 거 들고 가시면 돼요. 컵홀더에 이름 있어요.”
지연은 딸기가 듬뿍 올라간 음료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보고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PPL담당자가 각자 취향에 맞는 음료를 찾아볼 정도로 세심한 사람인가?
“자. 그럼 곧 라이브 시작할 거예요. 다들 질문지 받아보셨죠?”
“네.”
“읽었는데 제가 잘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서준 씨는 아이돌이잖아요. 팬들이랑 대화 엄청 잘 할 거 같은데요?”
“지연 선배님도 가수 출신이신데요.”
서준의 말에 배우들의 시선이 지연에게 쏠렸다.
그 시선에 지연이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지연 선배님은 뭐든 다 잘하실 거 같아.”
“지연 씨. 못하는 게 있긴 한가요?”
“저도 못하는 게 있죠.”
지연이 웃으며 말하자 다른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지연을 쳐다봤다.
못하는 게 있다고?
지연이 못하는 게 있다는 게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선배님이 못하는 게 뭘까?’
‘그냥 하신 말이겠지?’
‘노래도 잘하고 연기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고 액션도 잘하던데. 공부도 수능 만점 받았다고 했었지?’
다들 골똘히 생각하는 사이 SNS 라이브를 시작할 시간이 다가왔다.
오늘 라이브의 사회는 아이돌그룹 프로그램의 MC들이 해 주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반갑습니다. ‘미스 뷰티’ 시청률 공약 라이브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짝짝짝짝짝
과연 아이돌 프로그램 MC들답게 텐션이 높은 형순이와 대장이를 보니 배우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걸렸다.
“아니 우리가 살다 보니까 아이돌 소개 말고 드라마 배우 소개를 하게 될 줄을 몰랐습니다.”
“심지어 여기 나온 분 중 한 분은 우리가 그렇게 모시고 싶어 했는데도 답이 없던 분이에요!”
형순이와 대장이가 지연을 보며 말하자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지연에게 꽂혔다.
“지연 씨. 그렇게 애타게 불렀는데 한 번을 안 나와 주시고, 그런데 이런 자리에 우리를 부르고.”
“너무하네요. 이거 안 되겠어.”
형순이 팔짱을 끼고 배우들을 돌아봤다.
아이돌들의 군기를 잡을 때 나오는 포즈에 지연과 서준이 긴장했다.
└이건 지연이가 잘못했다.
└ㅋㅋㅋㅋㅋㅋㅋ보여줘!
└서준아!!!!!!!사랑해!!!!!!!
└우리 서준이 웃는 거 봐 너무 귀여워.
└지연아 오늘 내 생일이야. 생일축하한다고 해 줘.
└와 여기 배우들 무슨 일이야. 너무 눈부셔서 아무 것도 안 보여
└춤 춰줘 지연아!
└와 시후 얼굴에서 빛이 나.
└형순아 우리 근하 오빠한테도 말 좀 걸어줘! 우리 오빠 예능 처음이야ㅠㅠ
└어디서도 보기 힘든 조합이다. 얘들아 살앙해♥♥♥♥
채팅이 올라오는 속도가 빛의 속도 같았다.
채팅창을 읽기 힘들 정도였지만 형순은 다행히 모니터링하고 있던 스태프의 도움으로 몇 개의 댓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연 씨. 여기서 보여주시죠.”
“제가 뭘 보여드리면 될까요?”
“오올~ 자신감.”
“선배님…!”
“지연 씨가 못하는 거 빼곤 다 잘한대요.”
“맞아요. 선배님이 아까 그러셨습니다.”
기회를 잡은 배우들이 지연을 훌륭하게 팔았다.
다들 첫 순서가 자기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어차피 다 한 번씩 하게 될 텐데.’
잠시 저렇게 안도하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야 나중에 자기 차례가 됐을 때 더 절망할 테니까.
자기를 판 배우들의 미래를 상상한 지연이 생긋 웃는 얼굴로 미션을 기다렸다.
“이거 알아요? 샤샤샤!”
“아! 저 그거 아는데.”
“투폴드의 신곡이죠?!”
“역시 서준 씨는 본업이 아이돌이라 그런지 잘 아시네요.”
서준이 MC의 칭찬에 활짝 웃었다.
완벽하고 능력 좋고 카리스마 넘치는 신 본부장은 어디 가고 아이돌그룹 메인 댄서 한서준이 나타났다.
귀여운 막내의 행동에 배우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 그럼 아이돌계의 대선배인 지연 씨의 샤샤샤 다들 봅시다!”
모두가 두근두근하는 심정으로 지연을 쳐다봤다.
지연의 애교를 볼 수 있단 소식에 채팅이 올라오는 소리가 빛보다 빨랐다.
지연이 가수의 자아를 깨웠다.
“친구를 만나느라 샤샤샤!”
“우오오오오오오오!”
“하느님 세상에. 감사합니다.”
“아하하하하핫!”
“와아아악!”
주먹을 볼 옆에 두고 도리도리하는 지연의 모습에 모두가 폭발했다.
올해로 벌써 데뷔 13년차인 대선배의 애교였지만 선배, 후배, 스태프 모두 엄빠미소를 지었다.
흔들리지 않는 멘탈과 자세로 미션을 수행한 지연이 마무리로 윙크하자 현장과 채팅창은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우오오오오오오!!!!!!!!!!!!!!이걸 본 내가 승자!!!!!!!!!!
└아. 아아. 태어나길 잘했다.
└엄마아빠 감사해요. 아들 오늘 눈 정화했다!!!!!!!
└악아아아아악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지연아 사랑해!!!!!!!!!!!!!!!!!!!!!
└I love U♥♥♥♥♥
“이야. 지연 씨 잘하네. 아니 근데 왜 우리 프로그램은 안 나와 준 거야?”
“맞아맞아. 이건 지연 씨가 잘못했네. 빨리 우리 프로그램에 나와 준다고 각서 써.”
조금 전 흥분해서 방방 뛰던 건 어디 가고 다시 군기반장으로 돌아온 MC의 모습에 지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이거 너무 저만 하는 거 아닌가요? 여기 아이돌 메인 댄서인 서준 씨도 있는데.”
“그건 맞지. 하지만 윗물이 있어야 아랫물이 있는 법인데. 연차 순서대로 합시다.”
“그럼 이다음은 우리 윤 이사님이네요.”
“그렇게 되나? 윤 이사님 맞습니까?”
“아아. 연차로 따지면 그렇겠죠?”
“좋아요! 다음은 우리 윤 이사님 차례!”
지연이 훌륭하게 다음 바통을 윤 이사 역을 맡은 근하에게 넘겼다.
예능이 어색해 박수만 치고 있던 근하가 지연과 MC들의 지원으로 조명을 받게 됐다.
‘좋아. 모처럼 드라마 시청률을 걸고 라이브에 나왔으니까 모두가 공평하게 주목을 받아야지.’
배우들이 화제가 되면 될수록 ‘미스 뷰티’도 주목받는다.
큰 그림을 그린 지연이 남몰래 만족스럽게 웃었다.
* * *
시청률 공약 이행에 힘입어 <미스 뷰티>의 시청률도 고공행진을 했다.
늦은 시각 병실에 찾은 한 남성이 지친 몸을 이끌고 환자가 누워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버지 저 왔어요.”
아들의 소리에도 남자는 눈을 뜨지 않았다.
일이 잘 안 풀려도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하던 아버지.
드디어 기회가 왔다면서 아이처럼 웃던 아버지.
그런 기회를 사장이 투자금을 들고 나른 덕에 잃어버린 아버지.
알고 보니 그 기회라는 것도 사장이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한 말이라는 걸 나중에 들었다.
제작사가 망하면서 시나리오의 권리는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왔지만 정작 그걸 제작할 아버지는 충격으로 몸져누운 상태였다.
다시 예전처럼 영화를 제작할 기력은 없었다.
“아이구! 저 나쁜 놈!”
“한도가 아주 보물이구만.”
“저게 수호천산가 뭐시긴가라면서? 우리 딸이 그러더라고.”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고와서 천사가 내려온 거구만?”
“아니 그런데 왜 다들 신해를 못 괴롭혀서 안달이래?”
“쯧쯧쯧. 고추 달린 것들이 어린 여자한테 밀리니까 질투 나서 그런 거지. 에잉.”
아픈 환자들이 있는 병실에는 TV가 빨리 꺼진다.
하지만 <미스 뷰티>는 그런 환자들도 보게 만드는 마성의 드라마였다.
장기 입원 환자들이 있는 이 병실에 있는 환자들은 요즘 <미스 뷰티>를 보는 낙으로 살았다.
아들의 시선이 아줌마들이 보는 TV로 향했다.
TV 속에서 지연이 신주안 본부장과 함께 밥을 먹는 모습이 보였다.
제때 끼니를 챙기지 않아 미팅 도중에 꼬르륵 소리를 낸 주안을 신해가 챙겨서 밖으로 데리고 나온 참이었다.
[본부장님은 왜 그렇게 자신을 혹사시키는 거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뭔가 일만 하는 본부장님이 외로울 것 같아서요. 주위에 챙겨주는 사람도 없어 보이고. 아! 죄송해요. 이런 말 실례일 텐데.]
신해의 말에 주안이 숟가락을 내려놨다.
TV를 보던 아들도 무의식중에 몸을 떨고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아빠는 왜 맨날 일만 해?’
‘하하하. 아들 미안해. 아빠가 일만 하느라 아들이랑 못 놀아줘서.’
‘으으응. 난 괜찮아. 나는 아빠가 일하는 모습이 제일 좋아.’
‘정말?’
‘응! 일할 때 아빠는 엄청 즐거워 보이거든.’
그때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품에 꼭 안아주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자신이 하는 일을 이해받아서 그랬던 것 같다.
밤낮없이 일하고 수명을 깎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잠도 못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가족도 돌 볼 수 없는 일.
아버지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건 말이야.’
[그건 말이죠.]
‘아빠는 이 일을 엄청 좋아하기 때문이야.’
[제가 이 일을 좋아해서겠죠.]
기억 속 아버지의 말과 겹쳐 들리는 소리에 아들이 아버지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봤다.
‘그럼 나도 도와줄게!’
‘응? 뭘?’
‘나도 커서 아빠가 하는 일 도와줄 거야! 그러면 아빠가 맨날 판다가 안 돼도 되잖아!’
‘판다? 하하하하하. 다크서클 말하는 거야?’
‘응! 아빠 판다 같아. 맨날 눈 밑이 어두워.’
‘좋아! 그럼 우리 아들 나중에 크면 아빠랑 같이 일할래?’
‘응! 크면 아빠랑 같이 일할 거야!’
그래. 그때는 그랬었지.
크면 클수록 가족들을 뒤로한 채, 영화를 만드는 것에 몰두한 아버지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연극영화학과를 진학했다.
왜 그랬을까.
관성적으로 연극영화과를 나와서 카메라를 잡았다.
이 일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은 마치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처럼 이 바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럼 저라도 도와드려야겠네요. 신 본부장님이 덜 힘들게.]
움찔
아들의 시선이 다시 TV로 향했다.
신해가 순수한 얼굴로 본부장을 보며 싱긋 웃었다.
[신해 씨가 절 도울 필요는 없습니다. 애초에 다른 회사 사람이 아닙니까?]
[하지만 제 일에 최선을 다하면 본부장님한테도 도움이 되겠죠? 그리고 저도 제 일 좋아하거든요.]
신해의 말을 들은 아들이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 몇 번을 읽었는지 닳은 시나리오가 보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나리오를 보면서 눈물을 짓는 아버지이기에 아들은 병실에서 시나리오를 치워버렸었다.
하지만 치워버리고 나서 상태가 더 악화된 아버지 때문에 다시 시나리오를 제자리에 돌려놨다.
시나리오의 첫 장에 제목이 쓰여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사랑>
탁
아들이 서랍을 닫았다.
* * *
드라마도 중반을 넘어섰다.
다른 사람들의 질투와 오해를 받으면서도 자기 일을 해내고 좋아하는 신해를 보고 본부장은 점점 그녀에게 이끌리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런 그를 보고 한도는 신해에게 재롱을 부리듯이 능력을 선보였다.
모 애니에서 나온 것처럼 야경을 배경으로 공중 산책을 한 두 사람을 보고 시청자들은 한도와 주안 사이에서 갈등했다.
지연이 오늘도 신해랑 이어질 사람이 누군지 인터넷상에서 싸우는 팬들을 보고 웃음을 참고 있을 때 은주가 벤을 열고 들어왔다.
“지연아. 찾았어.”
“언니? 깜짝 놀랐네. 무슨 일이야?”
“찾았다고.”
다짜고짜 찾았다면서 소리치는 은주를 보고 지연이 폰을 껐다.
몸을 돌려 은주와 마주 본 지연이 은주를 진정시키며 물었다.
“일단 물부터 마시고.”
“고마워.”
“조금 진정해 봐.”
꿀꺽꿀꺽
더운 날씨에 이어진 야외촬영 때문에 모두가 녹초가 되어 있었다.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인 은주가 조금 진정된 거 같자 지연이 다시 물었다.
“뭘 찾았는데 그렇게 흥분했어?”
“시나리오 주인! 찾았어.”
“시나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