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사람이 아닌 클라이언트가 질문을 하는 것도 신기할 판에 신해가 의외로 막힘없이 대답도 잘하자 모든 직원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저기, 본부장님? 다음 발표해도 되겠습니까?]
[아.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계속하시죠.]
[네. 그럼 다음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기획 1팀의 장태수 팀장님이십니다.]
자기 차례가 끝나고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자 신해가 깊은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뒤에 남은 사람들은 전부 쟁쟁한 사람들이니까 자신은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신해의 예상과 달리 뒤에 이어진 발표는 줄줄이 실수가 터졌다.
당황했는지 발표하다가 말을 더듬는 건 예사였고, 갑자기 화면이 꺼지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준비한 게 아닌지 신 본부장의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내놓기도 했다.
점점 안 좋아지는 분위기에 임원들이 본부장의 얼굴을 힐끔힐끔 살피고 있을 때, 본부장이 입을 열었다.
[이걸 뭐라고 할까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속된 말로 첫 끗발이 개끗발이라고 해야 할지.]
[어흠. 흠.]
[신 본부장님을 보고 다들 긴장했나 봅니다.]
[글쎄요.]
변명 아닌 변명에 본부장의 입술이 뒤틀렸다.
[이거면 볼 것도 없군요. 처음 발표했던 분 이름이 여신해 씨였던가요?]
[네? 네. 기획 2팀 여신해입니다.]
[여신해 씨 기획안이 제일 좋군요. 저대로 준비해 주십시오. 나머진 볼 필요도 없습니다.]
[신 본부장님. 그렇지만 여신해 씨는 이제 막 입사한 신입인 데다가 아직 이 일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그런 분의 발표가 제일 좋았습니다. 그리고 광고는 여신해 씨 혼자 만드는 게 아니지 않나요? 혹시 제작까지 여신해 씨 혼자 해야 할 정도로 드림기획에 인력이 부족합니까?]
[그런 게 아니라.]
[그러면 뭐죠? 클라이언트가 선택한 기획을 왜 거부하는지 납득이 가게 설명해 보세요.]
칼날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본부장의 말에 회사 사람들이 진땀을 흘리며 허리를 숙였다.
회사의 상사들이 연신 허리를 굽히는 걸 본 직원들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주위를 살핀 본부장이 마지막 한마디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여신해 씨 기획안이 아니라면 생각 없습니다. 그럼 광고 촬영날이랑 홍보물이 나오면 그때 다시 뵙죠.]
폭풍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OST와 함께 다음 화 예고편이 올라오는 걸 본 사람들이 막힌 숨을 토해냈다.
“본부장님 너무 카리스마 있다. 서준 씨 노래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연기도 잘하는구나. 다시 봤어.”
“안 돼요! 남주는 천시후 씨라구요! 물론 서준 씨가 아이돌이면서 연기도 잘하는 게 대단하긴 하지만 어쨌든 안 돼요.”
“천시후 씨가 그 날개 달린 사람이죠? 마치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레이디를 지키는 흑기사 같달까. 제 취향입니다.”
“지금으로 봐서는 다들 본부장님만 찾을 거 같은데요? 지금 게시판 반응도 본부장님에 지분이 높습니다.”
두 작가와 미나의 다툼에 영훈이 팩트를 정리했다.
그 말을 혜미가 반박했다.
“하지만 요즘 대세는 잘 지켜주는 잘생기고 초능력을 가진 외계인 같은 남주잖아요. 순애보적이기도 하고. 신해만 본다구요.”
“군인 같은 남주가 아니라요?”
“뭐가 됐든 여주를 지켜준다는 게 중요해요!”
본인이 쓴 얘기라 앞으로 어찌 될지 알면서도 본인 픽을 들이밀며 말싸움하는 혜미와 그에 지지 않고 팩트로 맞서는 영훈, 본부장을 연기한 서준을 보고 흥미롭다고 말하는 민경, 옆에서 모두의 말에 맞장구쳐주며 기름을 붓고 있는 미나까지.
4D로 보는 드라마 게시판이나 다름없는 모습에 지연이 슬그머니 몸을 떨어트렸다.
싸움에는 강 건너 불구경이 최고지.
지연이 남아 있는 맥주를 홀짝였다.
243. <미스 뷰티> (4)
무더운 여름날.
폭염에 열대야가 지속되는 밤 사람들은 소금물에 절인 배추처럼 흐느적거리며 시원한 에어컨 공기를 쐴 수 있는 집으로 향했다.
그것은 불금이라고 불리는 금요일 저녁도 마찬가지였다.
“야. 너 어디가?”
“집에!”
“야아. 이제 시작인데.”
“미안! 드라마 봐야 해!”
“뭐어?”
약속이 있던 이들도,
“부장님 시간입니다.”
“어? 아아. 벌써 그 시간인가? 다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네! 들어가십시오.”
“좋은 주말 되세요.”
회식을 하던 이들도,
“엄마! 나 왔어!”
“학원은 어쩌고?”
“당분간 금요일만 좀 봐 줘!”
“뭐?”
공부를 하던 이들도
모두 금요일 밤만 되면 TV 앞으로 모여들었다.
전설이 된 피겨 선수의 경기 때처럼 이 시간만 되면 사람들의 외출이 뜸해지고 홈쇼핑 주문마저 줄어들었다.
모든 방송사가 꿈꾸는 마법의 시간이 한 드라마에 의해 펼쳐졌다.
“으아아. 지난주에 천시후 이름 들으려다가 끝났었지.”
“아니 감질맛나게 사고날 뻔한 신해를 구해준 장면에서 끝나면 어쩌냐고.”
“아. 그 사고. 뭔가 수상하지 않았어?”
“분명 본부장 반대파에서 보낸 사람이 본부장 방해하려고 낸 사고일 거야.”
“윤 이사?”
“와. 진짜. 하.”
“재벌 2세도 아닌데 실력으로 빨리 승진한 게 그렇게 부러울 일이야?”
“원래 회사에서 그렇게 파격적으로 승진하는 게 어렵잖아. 하물며 윤 이사는 낙하산인데 번번히 회장님한테 신 본부장이랑 비교당하니까 짜증났겠지.”
“아무리 그래도 자기 회사한테 손해를 끼칠 생각까지 하면서 방해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원래 남자의 질투가 더 무서운 법이야. 눈 돌아간 놈한테 그게 중요하겠어?”
초고속 승진과 회장님의 총애를 받는 이유를 끊임없이 증명해야하는 자리에 있는 신 본부장.
그런 신 본부장에게 어떻게 해서든 흠집을 내려고 하는 회장의 아들이자 악연인 윤 이사.
‘예쁜이’가 아닌 ‘여신해’로 인정받기 위해 일했을 뿐인데 엉겁결에 그들 사이에 끼게 된 광고회사 직원 여신해.
사건에 휘말린 신해를 도와주고 위협되는 이들을 처리하는 정체불명의 남자.
숨가쁘게 진행되는 사건에 시청자들은 한 화라도 놓칠 수 없었다.
“이번 주에 15% 넘기겠지?”
“세상에. 국장님 우리 방송국에서 15% 넘기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없어. 없으니까 지금 사장님도 난리지.”
오죽하면 국장이 몇 주째 조정실에 와서 시청률을 확인하겠는가?
개국 이래 최고의 시청률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을 보며 국장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시작합니다!”
“시청률은? 시청률은 어때?”
“15%입니다!”
미쳤다.
방송 시작부터 지난주보다 3%p나 오른 시청률로 시작했다.
이번 주 목표를 벌써 달성해버린 국장이 주먹을 꽉 쥐었다.
“정 PD에게 연락해. 시청률 공약 이행하게 시간 좀 내 보라고.”
“옙!”
제작발표회에서 시청률 16%를 넘기면 SNS로 라이브 방송을 하기로 한 걸 기억한 국장이 지시를 내리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미쳤구만.”
* * *
[당신 누구예요?]
[그냥, 지나가던 사람.]
[지나가던 사람 맞아요? 난 분명 횡단보도 반대편에 있었는데 눈 깜빡할 사이에 우리 집 앞에 와 있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신해의 말에 검은색 일색인 남성이 시선을 피했다.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묘하게 순수한 반응에 신해는 문뜩 이 사람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절 구해주신 것도 고마운데 밥 한 끼 살게요. 연락처 줄 수 있어요?]
[연락… 처?]
[전화번호 말이에요. 휴대폰 번호 뭐예요?]
남자가 그게 뭐냐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뭐지?
생긴 건 프랑스 생수만 마실 것처럼 귀티나게 생겼으면서 하는 행동은 전파도 안 통하는 산골에서 온 것처럼 보였다.
신해는 자꾸만 이 기묘한 사내에게 관심이 생기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어휴.]
신해의 한숨에 남자가 몸을 움찔했다.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남자를 보고 신해가 가방에서 포스트잇을 꺼내 전화번호를 적었다.
[제 전화번호예요. 꼭! 꼭! 연락하세요. 알았죠?]
[알았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안 물었네. 이름이 뭐예요? 저는 여신해예요.]
[구한도.]
[구한도 씨. 구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신해가 남자의 두 손에 포스트잇을 꼭 쥐여 주고 집으로 올라갔다.
건물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가는 중에도 신해는 뒤를 돌아보며 손으로 전화 받는 시늉을 해 보였다.
신해가 올라가는 동안 켜지는 센서 등을 지켜보면서 남자는 신해의 집에 불이 들어올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창문에 불이 켜지는 순간 남자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남자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신해는 신성카드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계속해서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뭐야. 꼭 연락하랬는데.]
고마운 것도 고마운 거지만 왠지 그 남자는 낯설지 않았다.
자꾸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것처럼 기묘한 기시감이 들었기에 신해도 모처럼 용기를 발휘해서 적극적으로 전화번호를 건넨 것이다.
[신해 씨. 10시부터 촬영이지?]
[네. 그래서 광고 콘티랑 스토리보드 들고 현장에 갈 생각이었어요.]
[아무리 책임자라고 하지만 신해 씨 혼자 보낼 수 없지. 우진 씨. 같이 가요.]
[알겠습니다.]
허리를 다친 팀장을 대신해서 팀을 이끌고 있던 과장의 말에 우진이 대답했다.
우진은 신해를 여자라고, 신입이라고 무시하지 않는 팀원 중 한 명이었다.
주임님이라면 괜찮을지도.
우진에게 현장에서 봐야 할 것들을 들으면서 신해가 기합을 다졌다.
그러나
신해와 우진이 현장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고가 일어났다.
[거기, 조심해!]
[피해요!]
[예?]
우진이 감독과 배우를 확인하는 사이 콘티를 들고 현장을 살피던 신해의 위로 무거운 조명기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자신에게 떨어지는 조명을 보며 신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쾅!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고에 놀란 사람들의 비명, 무언가 망가지는 소리, 어수선한 발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곧 다가올 신해가 아픔에 대비했지만 한참이 지나도 고통은 다가오지 않았다.
신해가 눈을 떴다.
[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 품, 이 옷, 이 구도.
며칠 전 횡단보도에서 사고가 날 뻔한 날과 똑같았다.
신해가 고개를 홱 들었다.
[괜찮아?]
무표정하던 남자의 얼굴에 당황과 걱정이 가득했다.
[구한도 씨?]
[다친 곳 없어?]
[구한도 씨가 여긴 어떻게.]
[거기 괜찮아요?!]
[세상에!]
[괘, 괜찮아요. 멀쩡해요.]
허겁지겁 달려온 사람들이 신해의 말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회사가 망할 뻔했다.
이 상황에서도 일감을 놓치지 않은 거에 안도해야 하는 사람들이 쓴물을 삼켰지만 사람이 무사해서 안도한 건 진심이었다.
[조명! 도대체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죄송합니다. 분명히 아까 단단히 고정했는데 지금 보니까 고정이 잘 안 돼 있었나 봅니다. 진짜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망가진 조명기구를 살피던 기사가 이럴 리가 없다면서 울상을 지었다.
저 기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조명기구가 헐거워진 이유가 따로 있단 말인데.
어쩐지 신성카드 광고와 관련된 사람들이 계속해서 사고에 휘말리는 거 같아서 신해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런데 저 분은 누구?]
[오늘 알바 오신 분인가?]
[죄송하지만 누구세요?]
[제, 제가 아는 분이에요! 그 광고촬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다고 해서. 죄송합니다!]
신해의 해명에 사람들이 한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어흠. 거 모델인가?]
[이 바닥에 있으면서 한 번도 못 본 얼굴이긴 하지만.]
[맞아요! 모델 지망생이에요!]
신해의 말에 한도가 그녀를 돌아봤다.
‘내가?’라고 묻는 것 같은 시선에 신해가 땀을 뻘뻘 흘렸다.
[아무튼 저 친구 덕에 사고를 막았구만.]
[고맙습니다.]
[혹시 에이전시가 없나요? 제가 아는 좋은 데가 있는데. 소개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아 좀 빠져. 뭘 그런 걸로 보답하려고 하냐? 커흠. 에이전시는 나도 아는 데가 있으니까.]
[선수치시깁니까?]
한도의 얼굴을 본 사람들이 고맙다면서 너나 할 것 없이 명함을 건넸다.
엉겁결에 명함을 받아 든 한도는 상황을 정리한다는 관계자들의 말에 신해에게 손목을 붙잡혀 밖으로 나왔다.
스튜디오 내부에서 나온 신해가 비상구로 향했다.
그때까지 한도는 말없이 신해의 뒤를 따랐다.
비상구 문이 닫히자 신해가 뒤를 홱 돌아봤다.
[뭐예요?]
[뭐가?]
[왜 전화 안 했어요?]
[전화는 어떻게 하는 거지?]
한도가 짙은 눈을 끔뻑였다.
소처럼 순진한 눈동자를 본 신해는 맥이 풀렸다.
며칠 동안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산 내가 바보 같아.
[일단 나랑 스마트폰부터 사러 가요.]
[그럴 필요는 없는데.]
[그 전에.]
[?]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
한도가 또 신해의 시선을 피했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신해의 시선에 한도가 난감해하고 있을 때쯤 다행히 촬영이 무사히 시작됐다.
[뭐? 실패했다고?]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야!?]
누군가가 부하에게 보고받고 있었다.
실패라는 말에 상대방이 화를 내며 책상 위에 있던 걸 집어던졌다.
[윽!]
날아오는 물건에 머리를 맞았음에도 부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상대방의 분노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망쳐. 신주안 그 녀석이 하는 건 뭐든 망치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나가봐.]
끝까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간 부하를 보고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남자가 거칠게 몰을 죄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했다.
[신주안.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다음에는 어림도 없어.]
남자가 주안을 떠올리는지 허공을 보며 사나운 눈빛을 쏘아 보냈다.
그의 책상에 ‘이사 윤 민 재’라는 명패가 놓여 있었다.
자신에게 위험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는 채, 신해는 촬영이 끝나니 순식간에 사라진 한도를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분명히 옷을 꼭 잡고 있었는데 언제 사라진 거지?
나타나는 것도 순식간이었는데 사라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점점 더 남자의 정체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 신해에게 우진이 인사했다.
[신해 씨. 오늘 수고했어요. 여기서 퇴근하고 내일 회사에서 봅시다.]
[네. 주임님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래요. 오늘 많이 놀랐을 텐데 집에 가서 쉬세요.]
[감사합니다.]
외근갔다가 바로 퇴근한 신해가 버스를 탔다.
집으로 가는 길에 신해는 한도를 부를 방법을 생각했다.
처음 한도가 나타난 건 횡단보도에서 사고가 날 뻔했을 때.
두 번째는 조명기구가 자신의 위로 넘어질 때였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전부 본인이 위험할 때라는 것이었다.
뚜벅뚜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