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으로서의 행동강령을 되새긴 혜미가 머리를 털고 있을 때 지연이 혜미가 가져온 치킨을 가지러 부엌으로 향했다.
* * *
깨끗하게 씻고 손님들 앞에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난 두 사람이 가져온 간식들을 세팅했다.
맥주 캔까지 내놓는 모습이 본격적이었다.
“작가님들 맥주 괜찮으세요?”
“저는 좋아요.”
“저도 좋습니다!”
술이 약한 민경이 두 손으로 맥주캔을 받아들었다.
혜미는 씩씩하게 과일맛이 나는 맥주캔을 골라 가져갔다.
어느새 드라마 전 방송이 끝나고 광고가 이어지고 있었다.
스타작가와 명품 PD의 조합.
거기에 지연이라는 화룡점정까지 얹은 드라마답게 다섯 손가락에 들어가는 대기업들의 광고가 줄줄이 이어졌다.
맥주 캔을 따고 인절미의 엉덩이를 밀어 지연의 옆에 앉은 영훈과 미나가 한 모금 홀짝 마시고 말했다.
“지한이가 휴가 나와서 같이 보면 좋을 텐데.”
“휴가 안 쓰고 모아서 말년에 나올 거라잖니.”
“맞아, 본인이 하겠다고 결정한 거잖아. 지연아. 너도 응원해 줘. 안 갈 거라고 용쓰는 애들이 많은데 제 발로 가서 의무를 다하고 오겠다잖아. 우린 그냥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면 되는 거야.”
“언니, 오빠. 사실대로 말해. 지한이한테서 전화 받았지.”
시선을 피하는 두 사람을 보고 지연이 확신했다.
나한테는 전화 안 하더니!
심통난 지연이 전화가 오면 단단히 화를 낼 거라며 다짐했다.
옆에서 대화를 듣던 혜미가 안고 있던 쿠션을 터트릴 듯이 움켜쥐었다.
저런 대화를 나눌 만큼 매니저랑 코디랑 친한 사이라니.
‘지연 씨랑 지한 씨는 스탭들도 착하구나.’
전설의 매니저님은 다정한 스타일이었다.
옆에 있는 코디님한테 자연스럽게 오징어를 물려 주는 지연을 보고 혜미가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연예인이 보이는 이미지와 실제 성격이 다르다는 건 이 업계에서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연은 예외인 것 같았다.
‘과연 지연이는 여신님이야.’
메리골드 프로젝트 이후 팬들 사이에서 불리는 별명으로 지연을 부른 혜미가 뿌듯한 얼굴로 지연을 엿봤다.
“아. 이제 시작한다.”
“광고 엄청 길었죠?”
“지연아. 이번 작품도 잘될 건가 봐.”
“이미 광고 완판이래요. 오 작가님도 처음부터 완판은 힘드셨는데!”
“우리 지연이가 좀 대단하긴 하죠.”
혜미의 말에 미나가 대신 으쓱였다.
<미스 뷰티> 1화가 시작됐다.
* * *
신해 역할을 한 지연의 나레이션이 흘러나왔다.
[나는 예쁘다.]
[얼마나 예뻤냐고 하면 날 보겠다고 학교 안에 사람이 가득 찰 정도로 예뻤다.]
강의가 끝난 신해가 창밖을 바라보자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바글바글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신해가 한숨을 쉬었는데 그 모습마저 예뻐서 기절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속출했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예뻐서 어딜 가나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신해의 어린 시절이 나왔다.
어린 아기임에도 눈코입이 오뚝한 신해를 둘러싼 어른들이 한소리씩 했다.
[어휴. 이뻐라. 누구 집 아기길래 이렇게 예뻐?]
[너 미스코리아 하면 되겠다.]
[모델 해도 되겠어.]
[탈란트는 어때?]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나이임에도 어른들은 신해를 두고 아이의 미래를 점쳤다.
어린 신해가 가방을 메고 초등학교에 갈 때도,
자라서 교복을 입을 때도,
수능 때문에 수험서를 달달 외울 때도,
[초등학생일 때 별명은 ‘몇 반 예쁜이’]
[중학생 때 별명은 ‘해성중 얼짱’
[고등학생 때 별명은 ‘신계동 여신’]
[그리고 지금은,]
[모두가 날 그냥 여신이라고 부른다.]
직장인이 된 신해가 출근하는 모습을 배경으로 OST가 흘러나왔다.
242. <미스 뷰티> (3)
“크흡.”
“지연 씨. 진짜 예쁘네요.”
“지연아. 이 역할은 너한테 딱이다.”
“우리 지연이가 학교 갔으면 진작에 저런 소리 들었을 텐데.”
미나가 아련하게 말한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부끄러워서 지연이 모짜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잠시 모짜가 바둥거렸지만 곧 힘을 푼 지연의 손에 다시 얌전히 안겼다.
화면 속에서 신해가 회사에 출근해서 동료들이랑 인사하는 장면이 나왔다.
일부러 꾸미지 않았음에도 신해는 회사에서 독보적인 외모를 자랑했다.
[신해 씨. 안녕!]
[신해 씨 왔어요?]
[어서 와요.]
신해의 등장만으로 회사 분위기가 밝아졌다.
정중하게 인사를 한 신해가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오늘 있을 회의를 위해서 작성한 기획안이다.
똑똑
[신해 씨. 뭐 해? 회의하러 가야지.]
[아. 벌써. 네. 갈게요.]
정신없이 열중하던 신해가 자료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심히 자료를 준비했지만 신해는 거기서 한 마디도 말할 수 없었다.
신입이라서 그런 걸까?
그런 것치곤 같이 입사한 남자 동기는 팀장의 지목을 받아서 자신이 준비한 아이디어를 발표하기도 했다.
기각되긴 했어도 신해는 남자 동기처럼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싶었다.
[그럼 이대로 진행하기로 하자고.]
안 되는데.
과연 지난번과 똑같은 식으로 광고를 진행한다고 해서 클라이언트가 좋아할까?
신상품이 지난번 상품과 다르고 혜택 범위도 조금 더 젊은 층을 향해있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고객층으로 2030을 노린 것 같은데 이대로 가다가는 원하는 광고효과를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말해야 할까?
신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팀장이 신해를 불렀다.
[신해 씨. 오늘 클라이언트 미팅하러 갈 때 신해 씨도 같이 갈 테니 준비하고 있어.]
[네? 넵!]
클라이언트를 만나러 가는 중요한 자리에 신해를 데려간다는 팀장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미묘해졌다.
동기들은 놀라움과 질투 반.
선임들은 미묘한 시선으로 오늘 신해의 차림을 살폈다.
그 기묘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채, 신해는 클라이언트와 대면했다.
그리고,
[이야. 이거 드림기획에도 이렇게 예쁜 분이 계셨는 줄 몰랐네요.]
[하하하하하. 이번에 뽑은 신입입니다. 예쁘고 성실해서 데려왔지요.]
[그래요?]
불편했다.
자신이 예상했던 자리는 이런 자리가 아니었는데.
광고 기획을 소개하고, 어떻게 제작될지, 예상되는 효과는 얼마일지 프리젠테이션 하는 자리일 줄 알았는데.
신해가 고개를 숙이고 소맷자락만 쥐었다.
그날 신해는 입 한 번 떼지 못하고 관람 당하고 왔다.
[푸우.]
불편했던 자리가 끝나자마자 신해가 도망치듯이 집으로 들어와 침대에 뛰어들었다.
달라붙었던 시선
뒤틀린 입꼬리
구경거리처럼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앉아 있던 자신
신해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빨리 불쾌했던 기억을 지워내고 싶었다.
쏴아아
신해가 떠난 자리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이 신해가 있던 자리를 비췄다.
펄럭
달빛이 들어온 자리에 검은 그림자가 날개처럼 내려앉았다.
“오오. 멋져요. 제 머릿속에 있던 거랑 완전 똑같아요.”
“나 방금까지 조금 짜증나다가 그림자 보고 설레기 시작했어.”
미나와 혜미가 서로 손을 꽉 움켜쥐고 화면에 들어갈 것처럼 집중했다.
신비로운 존재의 암시 덕에 몰입한 두 사람을 보고 지연이 맥주를 홀짝였다.
욕실에서 씻고 나온 신해가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누웠다.
힘들었던 만큼 쉬고 싶은 하루였다.
신해가 커튼을 치고 불을 끄고 누웠다.
어둠 속에서 또다시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깊이 잠이 든 신해가 있는 침대 머리맡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꺄아아아악!”
“나왔다!!”
혜미와 미나의 호들갑에 옆에 앉아 있던 민경과 영훈이 귀를 막았다.
소리 없이 등장한 존재의 얼굴이 드러났을 때 두 사람이 재빨리 혜미와 미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고생했어.]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낮고 거친 목소리였지만 목소리에는 다정함이 가득 담겼다.
무표정하고 어두운 얼굴의 남성이 짙은 눈으로 신해를 내려다봤다.
남자가 머뭇거리며 신해의 머리에 손을 얹으려고 할 때 신해가 잠투정을 했다.
[으음.]
남자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멈춰 있던 손은 신해가 다시 고른 숨을 내쉬자 다시 조금씩 신해의 머리로 다가갔다.
남자가 아기를 쓰다듬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로 신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해의 얼굴이 편해지는 걸 본 남자가 으르렁거리는듯한 소리를 내며 말했다.
[널 괴롭힌 놈들은 내가 없애줄게. 그러니 좋은 꿈 꿔.]
몇 번 더 신해의 머리를 쓰다듬은 남자가 아쉬운 듯이 손을 뗐다.
그리고 등을 돌려 신해의 방에서 사라진 남자는 오늘 신해와 미팅이 있었던 클라이언트가 잘 보이는 빌딩 위에 올라가 있었다.
얼큰하게 취해서 귀가 중인 클라이언트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이 서늘했다.
“끄흡.”
“천시후 배우가 젊은 남배우 중에 잘 나간다고 하더니 과연 잘하네요.”
“에이스 엔터에 유망주가 있다더니. 천시후 배우도 괜찮은데?”
“괜찮은 정도가 아니야. 우리 지한에 비할 건 안 되지만 비율이 괜찮아. 저 정도라면 어떤 옷을 입혀도 태가 날 거야. 얼굴도 우리 지한이보단 못하지만 괜찮고. 지연이랑 같이 나왔는데도 오징어가 안 된 게 그 증거야.”
연기를 잘하는 젊은 배우는 드물다.
그중 탑이라고 할 수 있는 지한이가 군대에 가고 다른 배우들 역시 군대에 갔거나 막 전역한 참이었다.
배우 천시후는 그 틈을 타 혜성처럼 등장한 젊고 연기력이 탄탄한 남자 배우였다.
누가 업계 사람들 아니랄까 봐 민경과 영훈, 미나가 배우를 품평했다.
‘저 정도면 직업병이야.’
지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미스 뷰티>는 1화부터 전개가 고속도로를 깐 것처럼 시원하게 진행됐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신입이 미팅 장소에 따라갔다는 이유만으로 회사에 신해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돌았다.
얼굴 때문에 뽑혔다는 둥, 미팅 자리에 데리고 나간 것도 접대 때문일 거라는 둥, 회사 높으신 분의 애인이라는 둥.
신해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이 맴돌았다.
그런 회사 사람들에 대한 신해의 반응은 무(無)대응이었다.
[이런 일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고.]
예쁘다는 이유로 자신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오간 게 하루이틀 일이던가.
어릴 땐 내 장래에 대해서 미스코리아냐, 탤런트냐 다투던 사람들이었다.
그게 싫어 공부를 열심히 했더니 이번에는 아나운서냐 선생님이냐로 다투었다.
조금 더 크니 ‘사’ 자 직업에 시집을 보내야 한다느니 재벌가로 보내야 한다느니 싸우더니,
전부 다 때려치우고 취직하니 더 늦기 전에 결혼해야 한다면서 선자리가 줄을 지었다.
뭘 해도 결국 날 고가의 상품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질린 신해는 주변 사람들의 악의에 반응할 힘조차 잃었다.
[결국 이번에도 날 사람으로 봐주는 사람은 없는 건가.]
회사 내에 도는 악의적인 소문에 혼자 밥을 먹은 신해가 회사로 들어가자 그녀를 발견한 같은 팀 직원이 신해에게 손짓했다.
[신해 씨! 빨리 와. 큰일났어!]
[네?]
[우리 팀한테 들어왔던 신성카드 있잖아. 거기 담당자가 글쎄 어제 사고가 나서 큰일이 났다지 뭐야?]
[그 사람이요?]
어제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아무 일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이 사고가 나다니.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그 사람을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이 일을 맡기로 했는데 세상에. 우리 기획안이 마음에 안 든다고 다시 해 오라고 했던 거야!]
[네에!?]
[그동안 신성카드는 우리가 맡았었는데 새로 온 담당자는 그동안 성적이 안 좋다면서 이번에도 별로면 다른 회사랑 경쟁 피티할지도 모른대. 그래서 회사가 지금 난리야! 이 와중에 우리 팀장님은 허리를 삐끗하셔서 입원하시다니.]
동료의 말은 들은 신해는 그제야 왜 회사가 이렇게 어수선한지 알아차렸다.
솔직히 그녀도 이전 제작 방향이 마음에 든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회사의 큰 고객을 놓치는 것이었다.
신성카드는 회사의 매출을 담당하는 큰 기둥 중 하나였다.
그게 빠진다면 회사가 휘청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이름값을 보고 왔던 다른 고객들도 빠질 위험이 있었다.
드림기획은 난리가 났고, 모든 부서가 매달려서 신성카드 광고 기획안을 준비했다.
회사의 사활이 걸려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에게 동등한 기회가 오갔다.
그리고 최종 기획안을 결정하는 날.
마지막 5인 안에 신해가 들어갔다.
[후우. 잘하자. 이번이 기회야.]
사람들에게 ‘아 거기 예쁜 애?’로 기억되지 않고 ‘여신해’로 기억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동안 받았던 오해를 모두 털어버릴 수 있는 기회.
신해가 심호흡을 하며 나란히 앉아 발표할 사람들을 쳐다봤다.
각 부서에서 쟁쟁하다고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제비뽑기로 제일 먼저 뽑혀서 다행이다.
저런 사람들 뒤에 한다면 사람들은 제 기획에 관심도 주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후우]
신해가 심호흡하며 순서를 기다렸다.
[그럼 ‘신성카드’ 광고기획 프리젠테이션을 시작,]
벌컥
사회자가 말을 마치려고 할 때 프리젠테이션룸 문이 벌컥 열렸다.
사장과 이사, 임원들이 눈살을 찌푸릴 때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들을 본 그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신 본부장님이 여긴 어떻게.]
[우리 회사의 일이니 저도 들을 자격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드림기획의 실력도 확인하고 싶어서요.]
신성카드의 본부장?
저렇게 젊은 사람이?
드림기획 직원들이 눈을 휘동그레 뜨며 문을 열고 들어온 본부장을 보았다.
본부장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어려 보였다.
혹시 신성그룹 회장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 아닐까?
모두의 머릿속에 신성그룹 일가의 가계도가 그려지고 있을 때, 본부장이라고 불린 사람이 비어있는 자리를 살피고 앉았다.
[그래서 안 하실 겁니까? 프리젠테이션.]
[아. 예. 그럼 기획 2팀의 여신해입니다. 프리젠테이션 시작하겠습니다.]
조금 전 첫 순서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왜 하필 첫 순서일까라는 생각을 한 신해가 사회자의 말에 자리로 나왔다.
솔직히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은 안 났다.
그저 연습했던 대로, 몸이 기억하는 대로 맡기고 나니 어느새 발표는 끝나고 자신은 박수를 받고 있었다.
[괜찮군요. 과연 첫 발표자부터 이런 실력이라니 드림기획이라고 할 만합니다.]
[하하하. 그렇죠? 여 사원이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실력도.]
[실력 얘기하는데 얼굴은 왜 말씀하십니까.]
[아. 어흠. 그만큼 실력이 좋다는 말이었습니다.]
본부장의 말에 사장이 헛기침하며 말을 수습했다.
그 모습을 본 신해의 안에서 본부장에 대한 평가가 순식간에 올라갔다.
[궁금한 점이 있는데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