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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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두면 여행이라도 가려고요?”

“그냥 좀 쉬면서 생각해 볼게요.”

대책도 없다는 말에 최 팀장이 혜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견적 내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그런 식으로 쳐다보다니.

그동안 참았던 것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마지막날에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던 혜미가 꾹 눌러 참았다.

“혜미 씨. 이건 내가 사회에 먼저 나온 선배로서 말을 하는 건데. 어디 갈지 정해놓지도 않고 그냥 일이 힘들어서, 상사한테 꾸지람 들어서 그만두는 건 결국 본인 손해야. 어린애도 아니고 혜미 씨도 나이가 있는데 이런 데서 그만둘 거야? 밖으로 나가면 경력도 안 돼. 다른 데 가면 혜미 씨보다 나이도 어린 사람들이 더 높은 곳에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혜미 씨 나이에 일할 수 있는 것도 복이야.”

이건 아니지.

혜미 씨라고 존칭하는 것 같지만 결국 하는 말은 비아냥이다.

무슨 오해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본인 실적도 생각 안 하고 충고랍시고 자신의 결정을 깎아내리는 최 팀장을 보고 혜미가 결국 참는 걸 그만뒀다.

“최 팀장님. 저 그만둔다고요.”

“혜미 씨. 내 말 들었어요? 그러니까 그만두더라도 그렇게 앞뒤 없이,”

“아니 그만둔다는데 왜 그렇게 조언이랍시고 하시는 거예요? 왜 그만두려는지 정말 몰라요? 당신 때문이잖아요, 당신.”

당최 자신의 결정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 최 팀장에게 혜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혜미의 눈빛이 사나웠다.

“이때까지 당신 사람들이 그만둔다고 할 때 왜 그만둔지 몰랐죠? 그거 전부 당신 때문이라고.”

“무슨! 혜미 씨. 나 혜미 씨 친구 아니에요. 말 조심해서 해 주세요.”

“아아. 존댓말 듣고 싶으시면 해 드릴게요. 이 일이 힘든 거 압니다. 그건 버틸 수 있어요. 그런데 사람이 힘든 건 못 참아요. 당신이 우릴 힘들게 한다고요.”

혜미의 말에 팀장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콜센터 특성상 귀하디귀한 점심시간이었지만 다들 밥 먹는 것도 뒤로한 채 혜미와 팀장의 대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일하는 동안 사무실에서 전화하지 마세요. 여기가 당신 집 안방입니까? 고객이든 직원이든 존중해서 말하세요. 고객 무시하지 마시구요. 전화 건 사람들이 팀장님한테 무시당할 이유 없어요.”

“내가 언제,”

“예전에 브랜드에서 A/S 운영할 때 일해 봤다고 되게 유세 떠는데 거기서도 근무 분위기 망쳐서 따돌림 아닌 따돌림당했다면서요. 그거 엎고 회사 그만둔 거 다 알아요. 그러니까 그거 가지고 잘난 척하지 말라고요.”

고상한 척한다고 모를 줄 알았어?

이 바닥이 얼마나 좁은데.

그렇게 자랑하는 회사를 왜 그만뒀는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거라면 진짜 멍청한 사람이었다.

“너! 그만둔다고 있는 사실 없는 사실 막말하는 거 같은데! 내가 이 바닥만 몇십 년 있었어. 두고 봐.”

“몇십 년 동안 고작 하청 회사 관리직이라니 진~짜 잘 나셨네요.”

“너!”

최 팀장이 손바닥을 들었다.

그래. 그렇게 고상한 척하더니 너도 찔리면 손이 먼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구나.

깔끔하게 관리한 손톱이 보였다.

저거 맞으면 엄청 아프겠지?

혜미는 맞기 전에 먼저 손을 움직였다.

최 팀장의 연약한 손목을 혜미가 잡았다.

“뭣, 이거 놔! 신고할 거야!”

“콜센터? 일? 힘들 수 있어. 그런데 그거 안 힘든 줄 알고 여기 온 건 줄 알아? 그만두는 애들이 다 너 때문인 줄 몰라? 모르는 척하지 마. 그 애들도 다 당신 때문에 그만둔 거야.”

“놔! 놓으라고!”

“잘 들어. 다시는 다른 사람 무시하지 마. 우리가 네 부하직원이긴 하지만 노예는 아니잖아. 신고할 거면 신고해. 나도 당신이 그동안 한 거 전부 다 이를 테니까.”

혜미의 말에 말문이 막힌 최 팀장이 도움을 구하는 것처럼 주위를 돌아봤다.

하지만 자신을 싸늘하게 쳐다보는 다른 직원들을 보곤 안색이 흐려졌다.

늘 스스로 적을 만들던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오늘까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시간이 없어서 밥은 편의점으로 때워야겠네요. 팀장님 것도 사다 드려요?”

“난, 됐어요.”

“네. 그럼 마무리 잘하고 갈 테니 퇴사 처리 잘해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연락하는 거 팀장님도 싫으실 거 같으니까요.”

최 팀장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훗날 친했던 동료에게 듣기론 개선장군처럼 당당한 걸음이었다고 한다.

* * *

“그렇게 전 퇴사할 때 공공의 적을 무찌르고 나왔죠. 저 그만두고 그 사람도 얼마 안 가서 그만뒀다고 하더라고요. 며칠 동안 눈치 보면서 조용하더니 다른 곳에 합격하자마자 퇴사했다고 하더라고요. 최 팀장 사라지고 나니까 다들 살맛 난대요.”

“….”

“…와.”

“…진짜.”

아니, 퇴사할 때 상사를 날려버리고 나왔어?!

하늘고래랑 잘 안 됐으면 어쩌려고 저렇게 지르고 나왔지?

최 팀장이라는 사람이 꼰대에 또라이 같긴 한데 이혜미 작가가 팀장을 물리쳐 영웅이 된 게 더 놀라웠다.

“혜미 씨. 용케 참았네요.”

“헤헤. 그렇죠? 사실 성질 좀 더 죽이려고 했었는데 마지막까지 제 결정에 왈가왈부하는 걸 듣고 그만 급발진해버렸지 뭐예요. 유종의 미를 장식하고 싶었는데 이놈의 성질 때문에.”

대사를 쓰면서도 ‘더!’를 외치며 일부러 자극적이고 더 강하게 쓰는 작가들이 많았지만 이혜미 작가가 말해준 걸 들으면 그런 것들이 다 약하게 느껴진다.

오희은 작가님 밑에 있을 땐 얌전하고 싹싹한 막내였다고 들었는데 사회가 혜미를 이렇게 물들여 버린 걸까?

선후를 알 수 없는 일에 썰을 들은 보조작가들이 혜미에게 말했다.

“혜미 작가님은 아침 드라마를 쓰셔도 잘하셨을 거 같아요.”

“에이. 제 취향은 로맨스에요. 아침 드라마는 뭐랄까 너무 식상하잖아요. 뻔하고.”

“아침드라마가요? 네가 사실 내 이복동생? 당신이 내 엄마? 내가 알고 보니 재벌집 후계자? 내 남편이 바람? 이런 게 마구 나오는 게요?”

“네. 다 뻔하잖아요. 1화만 보면 대충 관계도가 다 나와서 재미없던 걸요? 실제로 직장 내에서 네 다리 걸치다가 머리채 잡고 싸운 거 본 적도 있고.”

온갖 마라맛 설정과 상황들이 소용돌이치는 아침 드라마가 식상하다니.

그런데 그걸 직접 봤다니 뻔하다고 하는 게 이해가 되기도 한데.

아니, 그런데 이혜미 작가는 도대체 어떤 수라장을 거쳐 온 거지?

민경과 보조작가들이 혜미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 * *

<난 여신이다>는 초호화 제작진, 초호화 캐스팅으로 주목받았다.

대본 수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제목이 <미스 뷰티>으로 수정되었다.

“우와. 이게 촬영장이구나.”

“어이쿠. 우리 이 작가님 오셨어요?”

“넵! 저 첫 촬영을 꼭 보고 싶었거든요. 혹시 고사는 안 하나요?”

“요즘은 그런 거 잘 안 하지.”

“오 작가님은 그런 거 꼭 해야 탈 안 나고 잘된다고 하셨는데.”

촬영장을 둘러보는 혜미 작가는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들뜬 기색이었다.

다들 그런 이 작가를 보면서 흐뭇한 얼굴로 제 할 일 하고 있었다.

오희은 작가님이라면 고사를 신경 쓰실 법도 하지.

배우 의자에 앉아 있던 지연이 이 작가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오늘 첫 촬영이라고 오신 거예요?”

“네! 저 너무 떨려요. 그런데 고사 안 해도 괜찮을까요? 물론 최 작가님도 안 하셨다고 듣긴 했지만 그래도 첫 작품인데. 아! 최 작가님은 고사 대신 지연 씨랑 첫방을 같이 봤다고 하셨는데.”

“맞아요. 최 작가님도 첫 작품이라서 많이 불안해하셨거든요. 유 PD님도 그랬죠. 그래서 다 같이 보자고 했어요.”

“저어. 그럼. 혹시. 그. 아, 아니에요.”

지연이 눈앞에서 우물쭈물거리는 혜미를 보고 눈치챘다.

고사를 언급하면서 내 눈치를 살피는 거 보면 뻔하지.

포기하고 있던 작가로서의 첫발을 내딛는 건데 고사에 의존해서라도 잘하고 싶은 마음이 이해가 갔다.

“그럼 이 작가님도 첫 방송 같이 보실래요?”

“네? 정말 그래도 돼요?”

혜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옆에서 그걸 지켜 본 민경이 감동받은 얼굴로 지연을 쳐다봤다.

혜미 씨가 걱정하니까 같이 봐 준다고 한 거겠지?

지연 씨는 여전히 착하다니까.

“네. 그런데 가족이랑 같이 안 봐도 되겠어요?”

“괜찮아요. 어머니랑 아버지는 다 지방에 계신걸요. 첫방송 시청률이 중요한 거 알아요.”

“최 작가님도 같이 보실래요?”

“좋죠. 지연 씨랑 같이 첫방을 보다니. 이번 작품도 잘 될 거 같네요.”

“이번에도 야식은 제가 책임질게요.”

“아, 아니에요. 제가 사 갈게요. 혹시 좋아하는 치킨 브랜드 있으신가요?”

“저는 뭐든 좋아요. 후라이드 반 양념 반?”

“네! 제가 사 갈게요.”

지연의 집에 간다니.

가서 내 작품의 첫 방송을 같이 보다니!

‘엄마 나 성덕됐어.’

일 때려치길 잘했다.

241. <미스 뷰티> (2)

시간이 흘러 흘러 드디어 <미스 뷰티>의 첫 방송이 있는 날.

지연의 집에는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들로 북적였다.

“늦은 밤, 실례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저녁이죠. 어서 와요.”

“지연 씨. 실례할게요.”

“최 작가님은 오랜만이죠?”

“그렇네요.”

집으로 초대하는 건데 너무 드라마만 보고 끝내는 건 좀 그래서 늦은 저녁을 함께하자고 불렀다.

빈손으로 와도 된다고 했는데 벌써 양손에 익숙한 치킨 브랜드 봉지를 들고 있는 혜미를 보고 지연이 고맙다며 받았다.

“정 PD님은 오늘 조정실에서 시청률 확인하신다고 안 오신다면서요?”

“예. 시청률 실시간으로 확인하셔야 마음이 편하시대요.”

“나중에 코톡으로 실시간으로 시청률 알려주시기로 했어요.”

두 작가들의 말에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 PD님처럼 첫 방송을 다 같이 보는 PD님이 계신가 하면 정 PD님처럼 시청률을 조정실에서 직접 보는 PD님도 계신 거겠지.

세 사람이 함께 저녁을 먹었다.

손님이 온다고 신경 좀 써 봤는데 볼이 미어터져라 먹는 혜미 작가를 보니 모처럼 솜씨를 발휘한 보람이 있었다.

배가 빵빵해져서야 자신의 추태를 알아차린 혜미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거실에 나란히 앉아서 시원한 청포도 에이드를 마시고 있는 뒤였다.

“헛. 지연 씨. 말로만 들었는데 진짜 요리 잘하시네요. 아. 에이드도 맛있어요.”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이네요.”

“최 작가님이 알려줬어요. 지연 씨는 연기도 잘하는데 마음씨도 곱다고. 요리도 잘해서 그때 먹었던 음식이 아직도 꿈에, 읍!”

“혜미 씨도 참. 그거까지 말할 필요는 없어요.”

혜미가 말하는 동안 귀가 뻘겋게 달아오르던 민경은 꿈 얘기가 나오자마자 혜미의 입을 막았다.

이미 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 이상은 안 돼요, 혜미 작가님!

얼마 안 되는 기간이었던 거 같은데 벌써 사이가 좋은 두 작가를 본 지연이 에이드를 한 모금 마시며 웃었다.

“민경 작가님이 다른 사람들이랑 이렇게 빨리 친해진 적이 없는데. 혜미 작가님이 마음에 드셨나봐요.”

“헤헤헤. 정말요? 최 작가님 저 마음에 드세요?”

“이 작가님이 워낙 친화력이 좋으셔서요.”

혜미가 민경에게 머리를 들이대며 대답을 보챘다.

민경이 진정하라며 혜미의 얼굴 앞에 손바닥을 펼쳤다.

흠. 혜미 작가님이 꼭 개 같으시구나.

왕?

“인절미 너 말한 거 아니야.”

감이 좋은 인절미가 지연을 쳐다보자 지연이 다시 누우라며 인절미의 머리부터 몸통까지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본 모짜가 질투하며 인절미를 쓰다듬는 지연의 손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헤헤. 뭔가 이 분위기 좋네요. 오 작가님 밑에 있을 때는 첫 방송 날이 살얼음판이었거든요.”

“아무래도 첫 방송 시청률이 중요하니까요. 작가로서 긴장되는 날이긴 하죠.”

“맞아요. 사실 저도 어제까지는 엄청 떨렸는데 최 작가님이랑 지연 씨랑 같이 있으니까 뭔가 안심되고 잘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동안 최 작가님한테 지연 씨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어서 그런가 봐요.”

“최 작가님이 뭐라고 하셨는데요?”

“지연 씨는 지상에 내려온 천, 읍!”

“그냥 방송가에 도는 지연 씨에 대한 소문 같은 거요. 행운의 여신 같은 걸 말해줬어요.”

그게 아닌 거 같은데.

당황하며 열심히 눈빛으로 피력하는 최 작가님을 위해서 모르는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이 작가님이 숨넘어갈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럼 오늘은 우리 시청자가 된 것처럼 즐겨봐요. 뭔가 여자들만 있어서 파자마 파티하는 기분이기도 하네요. 친구들이랑 드라마 같이 보는 기분?”

“파, 파자마 파티요?”

“친구라니. 제가 감히 지연 씨랑.”

지연의 말에 혜미가 얼굴을 붉히며 화들짝 놀랐고, 민경이 폐를 끼칠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냥 분위기 좀 풀어보려고 한 말인데 저렇게까지 놀랄 일이야?

친구라는 게 싫은 거야 아님 파자마 파티가 싫은 거야?

감히 그럴 수 없다며 펄쩍 뛰는 두 사람의 반응에 지연이 조금 기가 죽었다.

그런 지연의 생각을 모르는 채 두 사람은 거칠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진정하기에 바빴다.

‘진정해. 이혜미. 지연 씨는 그냥 해 본 말이야. 괜히 날뛰지 말라고. 날뛰면 지연 씨가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치, 친구라니. 굳이 따지자면 나는 언닌데. 어머.’

‘늦은 시간에 여자 둘이 집에 간다고 하니까 걱정하신 거겠지? 착각하지 말자. 지연 씨는 그냥 걱정해서 한 말이야. 그런데 언젠가는 지연 씨랑 파자마 파티해 보고 싶다.’

쿵쾅쿵쾅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두 사람과 그런 두 사람의 사정을 모른 채 모짜의 앞발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지연 때문에 거실에 기묘한 정적이 내려앉았을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띵동-

“누구지?”

“누구 오기로 한 사람이 또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요. 연락한 사람은 없는데. 제가 나가볼게요.”

지연이 의아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경호원 아저씨들이 메시지를 줬을 텐데 따로 연락 온 건 없었다.

그건 미리 등록된 사람이란 뜻이었다.

누구지?

“어?”

인터폰을 확인하니 영훈 오빠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뒤에는 미나 언니까지?

두 사람이 웬일이지?

문을 열어준 지연이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자 손으로 부채질하며 흐느적거리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아이고 더워라. 오늘따라 왜 이렇게 찜통이래니.”

“지연아. 죽겠다. 물 좀 줘.”

더위에 늘어진 풀처럼 녹초가 된 두 사람이 좀비처럼 걸어들어왔다.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는 둘째치고 이대로 두다가는 죽을 거 같아 보이는 두 사람에 지연이 시원한 물을 가져다 건넸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벌컥벌컥 물을 마신 두 사람이 ‘캬아!’ 하는 탄성을 뱉었다.

“흐아. 살 것 같아.”

“고마워, 지연아.”

“아니야. 그런데 무슨 일 있어?”

빈 잔을 건네받은 지연이 땀을 닦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야 오늘은 네 작품 첫 방송 하는 날이잖아.”

“우리가 같이 봐주러 왔단 말씀! 어때? 지연아. 고맙지? 감동이지?”

같이 보려고 영화관까지 들러 버터구이 오징어랑 팝콘을 사 왔다고 자랑하는 두 사람을 지연이 조용히 응시했다.

과하게 호들갑 떠는 것 같은 두 사람을 본 지연이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작품이 들어갈 때마다 같이 첫 방송을 확인하는 것이 동생과 내 일과였다.

아마 지한이가 없으니까 나 혼자서 볼 거란 생각에 바쁘고 더운 날에도 날 찾아와 준 것 같았다.

아니면 지한이한테 따로 연락받았든가.

‘지금 다른 배우도 영화 들어가서 바쁘다고 했으면서.’

지한이가 빠지고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작품에 들어간 소속 배우들 덕에 영훈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건 회사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코디 팀의 수장인 미나 역시 한창 바쁠 시기.

그런 시기에 시간을 내서 와 줬다는 생각에 지연의 코끝이 찡해졌다.

“안에 선객이 있는데 괜찮겠어?”

“선객?! 누구?”

“누구야? 어떤 놈이야?”

지연의 말에 ‘어떤 놈’이냐면서 영훈과 미나가 눈을 번뜩였다.

왜 놈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

지연이 코뿔소처럼 뛰어가려는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미스 뷰티’ 작가님들이야. 놈 아니야.”

“어흠. 작가님들 와 계셨어?”

“아하핳. 그랬어?”

미나가 머쓱해하며 혹시 안에서 듣진 않았는지 눈을 데굴데굴 굴릴 때 영훈이 옆에서 미나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두 사람을 데리고 모두가 모여있는 거실로 향하자 지연이 오지 않아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 있던 두 작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최 작가님. 오랜만이네요. 미리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고 실장님도 오랜만에 뵈어요.”

안면이 있던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고 옆에서 혜미가 책에서 튀어나온 위인을 보는 것처럼 영훈을 쳐다봤다.

‘우와. 고영훈이다. 어릴 때부터 지연이랑 지한이를 봐 줬다던 전설의 매니저!’

맡는 배우가 들어가는 작품마다 대박을 터트려서 신의 손이라고 불리는 그 매니저를 눈앞에서 영접한 혜미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영훈을 바라봤다.

민경과 인사를 나눈 영훈이 혜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이혜미 작가님이죠? 듣기로는 글솜씨가 장난 아니라고 하던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예엡-!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오히려 이쪽이야말로 신의 손에게 잘 보여야 했다.

귀청이 터트려 버릴 것처럼 인사한 혜미를 보고 영훈이 눈을 깜빡이더니 웃음을 터트리고 대답했다.

“하하. 네.”

“두 사람 바로 앉아도 되겠어? 땀 식으면 감기 걸릴라. 샤워라도 하고 와. 옷은 손님방에 있을 거야.”

“지연아. 나 냄새 많이 나?”

“장미나. 손님들 앞에서 땀 냄새 풍기지 말고 얼른 와.”

영훈이 미나의 목덜미를 잡고 손님방으로 향했다.

결혼하고 집을 구해 나갔다지만 스케줄 때문에 우리 집에서 잘 경우도 있으니까 미나와 영훈의 옷은 손님방에 그대로 있었다.

씻으러 간 두 사람을 혜미가 잠시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손님방. 나도 언젠간! 헙. 아니야. 정신 차려. 너는 사생팬이 아니라고. 이 정도만 해도 성덕이란 걸 잊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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