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하늘고래 JC 밑으로 들어간 거 아니야? 왜 저렇게 저자세래?”
“저쪽에서는 계속 증명해야 하거든. 솔직히 JC에서 문화산업 잡아먹겠다고 인수한 건데 초반에 좀 죽 썼어. 그게 하늘고래 탓은 아니고, 이번에 감방 가신 어느 분 때문에 드라마, 예능 다 성적이 안 좋았거든. 그런데 하필 딱 그 시기에 JC에서 힘 빡 주고 거창하게 투자한 때라서 하늘고래에서 실적 내기에 급급하단 얘길 들었어.”
“아.”
원래대로라면 게이트가 터지는 건 2년 정도 뒤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최팔녀가 지한이를 건드리는 바람에 내가 그 일을 앞당겼고, 그게 이렇게 돌아오게 된 거란 말이었다.
나 때문에 피해를 본 곳이 있구나.
메리골드만 신경 쓰지 말고 이쪽도 신경 쓸 걸 그랬어.
이따가 돌아가면 사장님한테 한번 말해 봐야겠다.
드르륵
“실례합니다. 늦었죠.”
“아니에요. 저희가 일찍 온 건데요. 편하게 앉으세요.”
“그래도 저희가 먼저 왔어야 했는데 첫 미팅부터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늘고래 측에서 나온 사람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별로 늦지도 않았고 오히려 약속 시간에 맞춰 온 것이었다.
우리가 별나서 약속 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 와서 잡담하며 기다린 걸 가지고 저렇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아. 이거 계속 실례만 하네요. 저는 하늘고래 김영민 실장입니다. 옆은 드라마 <난 여신이다>를 촬영하실 정현호 PD님. 그 옆은 이번에 지연 씨가 고른 대본의 주인인 이혜미 작가님이십니다.”
“안녕하십니까. MBS 있을 때 지연 씨와 작품 같이 하고 싶었는데 거길 나오니 그런 기회가 생겼네요.”
“안녕하세요, 정현호 PD님. 정 PD님이랑 같이 찍다니 제가 다 영광이에요.”
한때 드라마 강국이라고 불리던 MBS의 명품 감독이었다.
그쪽이 파업이다 뭐다 하면서 난리가 났을 때 한 목소리 보탰고, 그 이후에 MBS를 떠나 하늘고래의 품에 안긴 사람이었다.
출연했던 작품 중에서도 대박이라고 불리는 작품이 수두룩한 상황.
작가가 신인이다 보니 PD는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긴 모양이었다.
“이혜미 작가님이라고 하셨죠? 처음 뵙겠습니다. 지연입니다.”
“흐읏. 반갑습니다. 이혜미라고 합니다. 제 부족한 작품에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혜미가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고개도 어찌나 푹 숙이던지 자칫하다가는 상에 이마를 박을 뻔했다.
기합이 넘치시는 분이구나.
“하하하. 우리 이 작가님이 지연 씨 덕분에 다시 작가의 길을 걷게 돼서 엄청 기쁜 모양입니다.”
“제 덕에요?”
“네. 사실 우리 이 작가님이 한동안 이 바닥을 떠나 있었거든요.”
아. 그랬었지.
어쩐지 아무리 신인이라도 연달아 3번의 히트작을 만든 PD를 붙여준다 싶더라니.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은주 언니가 미리 조사해 온 자료에서는 멜로 드라마의 대모 오희은 작가님 밑에서 막내 생활을 했다고 들었었는데 다시 돌아온 걸 보면 역시 글 쓰는 게 천직인 모양이었다.
“이 작가님의 예전 글 봤어요. 솔직히 처음에는 ‘난 여신이다.’랑 너무 전개가 달라서 깜짝 놀랐어요.”
“그걸 봤어요? 으아아 어떡해.”
혜미가 자신의 부끄러운 흑역사를 들켰다는 생각에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꽤 유쾌하신 분 같네.
“초반에는 오희은 작가님처럼 멜로 전개를 따라가는가 싶더니 작가 그만두기 전에 공모전에 낸 작품들을 보니 완전 변했더라구요. 그런데 그게 더 이 작가님한테 맞는 옷 같았어요. 멜로보다는 로맨스 코미디를 판타지와 결부해서 잘 쓰시더라구요.”
“아아. 그게 제가 예전에 인소랑 팬픽 좀 끄적였거든요. 그런데 작가가 되려면 그런 글을 쓰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공부도 좀 하고, 드라마 대본을 닳도록 읽기도 하고 오희은 선생님한테 매달려서 가르침도 받고 했는데 지연 씨 말대로 내 옷이 아니었는지 잘 못 썼어요.”
“어쩐지. 이 작가님이 잘 쓰는 건 이쪽인 거 같아요. 로코에 판타지 한 스푼.”
“로코에 판타지 한 스푼이라니. 너무 좋네요. 이거 제가 나중에 써도 될까요?”
누가 작가 아니랄까 봐.
들고 있던 다이어리를 꺼내며 지연의 말을 받아적으려고 하는 이 작가를 보고 지연이 즐거운 얼굴을 했다.
분위기가 풀어지자 하늘고래에서 나온 담당자가 운을 뗐다.
“지연 씨 덕에 캐스팅이 순조롭습니다. 벌써 하겠다고 답을 보낸 배우들이 반 이상이고요. 또 투자도 순조롭게 들어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드라마를 찍은 게 3, 4년 전인데 여전히 인기가 많아요.”
“절 좋아해 주는 팬들과 고생하는 소속사 언니오빠들 덕분이죠.”
“지연 씨는 정말 겸손하네요. 저희 측에서도 지연 씨가 저흴 선택해 줘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지연 씨가 원하는 조항을 계약서에 삽입하려고 합니다.”
“대본 수정 같은 거 말이죠?”
은주가 지연을 대신해서 대답했다.
그 말에 혜미가 움찔하며 눈치를 살폈다.
“맞습니다. 공모전에서 쓴 대본이니 수정할 필요가 있죠. 게다가 우리 작가님이 떠나계시는 동안 실력이 일취월장하셔서 수정하면 더 좋은 대본이 될 거 같습니다.”
하늘고래 실장의 말에 혜미가 뜨악한 얼굴을 했다.
나 콜센터 직원이었는데?
폐관수련 하고 온 것도 아닌데 일취월장할 게 어디 있어.
식은땀이 뻘뻘 흐를 것 같은 혜미가 뭐라 하려고 했으나 정현호 PD의 끼어들기에 실패하고 말았다.
“지연 씨. 내 연출작들 알죠? 믿고 맡겨 주시죠.”
“알죠. 그래서 작가님은 어떠세요?”
“네? 저요?”
“네. 대본 수정 괜찮으세요?”
“저는 넵! 잘 쓸 수 있어요. 아니, 잘 쓰겠습니다!”
상사의 명령을 받은 군인처럼 기합이 들어가 대답하는 혜미를 보고 사람들의 시선이 혜미에게로 향했다.
짧은 시간에 지연이와 시선을 교환한 은주가 입을 열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이 작가님은 다른 일을 하다가 오셨다고 했죠? 일단 오희은 작가님 밑에서 배우셨다고 하니까 작가님의 실력은 걱정 안 해요. 다만 요즘 트렌드에 맞게 글빨을 살리시는 건 조금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해요.”
은주의 말에 하늘고래 실장과 정 PD가 잠자코 들었다.
혜미가 은주의 말에 집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아는 작가님이 있어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공동집필 어떠세요?”
“공동집필이요?”
은주가 조심스럽게 혜미의 눈치를 살폈다.
자존심이 강한 드라마 작가의 성향상, 자신의 작품을 다른 작가와 함께 집필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혜미 작가는 막내 작가로 일한 경력밖에 없었고, 이번에 제작하기로 한 작품도 공모전 당첨작이 아니다.
우연히 지연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작가.
하늘고래 측에서도 숙련된 PD를 붙여주려고 하는 건 다 그 이유 때문이었다.
하물며 <난 여신이다>는 여러 가지 수정을 거쳐야 하는 작품.
작품의 완성도와 안정성을 위해서라도 공동집필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과연 이 작가가 저 제안을 받아들일까? 공동집필이라면 투자자들이 더 좋아할지도 모르는데. 이왕이면 받았으면 좋겠군. 우리로서도 리스크가 줄어들 수 있으니.’
‘공동집필도 나쁘지 않지. 솔직히 이 작가가 쪽대본을 할지 안 할지 걱정도 됐었고, 수정 후 더 나은 작품이 나올지 확신도 없었으니 공동집필로 가는 쪽이 현장에서는 더 좋지.’
‘자기 자식과도 같은 작품인데 다른 사람이 같이 만들어 나간다고 하는 걸 좋아할까? 그래도 작가님을 위해서라도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는데.’
‘이게 안 되면 플랜B로 간다.’
저마다의 생각을 한 채, 모두 혜미의 입만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의 입술이 얇은 호선을 그렸다.
“공동집필이라니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하하하. 우리 이 작가님은 공동집필도 괜찮으신 모양입니다.”
“확실히 드라마를 제작해 본 작가님이 집필을 도와주시면 수정도 빨리 끝나겠군요.”
“제 제안이 불쾌할 수도 있었을 텐데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저희가 아는 작가님께 연락 후, 이 작가님께 연락드려도 될까요?”
“네! 아. 제가 아직 명함이 없어서 제 연락처는 이거에요.”
혜미가 다이어리를 찢어 연락처를 쓴 다음 은주에게 건넸다.
전화까지 걸어서 번호를 확인한 은주가 혜미의 번호를 저장했다.
“이거 너무 지연 씨를 힘들게 해서 미안하네요. 그런데 어떤 작가님이 우리 이 작가님과 공동집필을 하실 건가요?”
“최민경 작가님이요.”
“최민경 작가요?”
“유철왕 PD와 콤비인 그 최민경 작가 말입니까?”
“유경 콤비인 그 작가님이요? 이번에 ‘오리 날다’로 20% 넘긴 그 최민경 작가님 맞죠? 벌써 쓰리 홈런이라고 하던데!”
실장과 정현호 PD, 이혜미 작가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천재라고 불리며 암암리에 드라마계의 샛별, 3대 작가와 동등한 반열에 올라갈 거라는 최민경 작가가 공동집필에 함께 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세 사람이 눈을 왕방울만 하게 떴다.
‘우리 최 작가님 완전 스타 다 됐네.’
첫 방송 하던 날 내 덕이라면서 울던 사람이 어느새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어엿한 작가가 되었다는 소식에 지연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주변의 평가가 올라가고 작품이 끝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는 시점에도 자신의 요청 하나에 흔쾌히 오케이를 외친 민경을 떠올린 지연이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작가님 맞아요. ‘내 호위무사는 여대생’에서 함께 한 인연 덕에 이번에 도와주시기로 했어요.”
“세상에. KBC에서 최민경 작가를 놔주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용을 쓰고 있다고 들었는데.”
“최 작가가 유 PD 외에는 손발을 맞추지 않는다는 말이 있던데 이걸 지연 씨가 해내네요.”
실장과 PD가 특급 만남을 주선한 지연을 희귀생물을 보는 듯이 쳐다봤다.
음? 뭘 그렇게 보시나.
원래 이 바닥이 인맥이 반, 인기가 반 아닙니까.
“그래서 이 작가님은 어떠세요? 최 작가님 괜찮으세요?”
“물론이죠!!!!!!!!”
혜미가 눈앞에 찾아온 황금 동아줄을 꼭 붙잡았다.
역시 지연이는 최고야!
감사합니다. 내 여신님.
지연을 보는 혜미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 * *
미팅이 있고 제작사나 방송사나 탑엔터나 전부 분주하던 때.
지연은 거실에서 민경과 통화를 나누고 있었다.
-재밌었어요. 조금 손 볼 게 없진 않지만 클리셰를 활용하는 것도 좋고 거기에 변주를 하는 것도 소질 있어요. 왜 이때까지 이런 작가를 몰라봤을까요?
“시대를 잘 못 탔던 거죠. 이혜미 작가님이 글을 쓸 땐 멜로가 대세였으니까요.”
-아무튼 잘될 거 같아요. 이 작가님이 너무 ‘YES’만 외쳐서 조금 부담스러울 때가 있긴 하지만 가르쳐 주는 건 잘 배워서 바로 반영하더라구요. 덕분에 저도 즐거워요.
“즐겁다니 다행이에요. 제 부탁을 들어주시느라 무리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거든요.”
-이런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줘요. 지연 씨가 주는 연락이라면 언제든 기다리고 있을 게요.
몇 년이 지났는데도 한결같이 내게 감사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민경을 보면서 지연이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어쩜 이렇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변함이 없는지 몰라.
좋은 사람은 여전히 좋은 사람들이고.
선의를 품은 자들은 다른 사람을 돕는데 주저함이 없다.
‘돌아오길 잘했다.’
요즘 들어서 계속 드는 생각에 지연이 안부 인사를 끝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이번 드라마가 끝나면 지한이랑 같이 지인들 좀 만나고 다닐까?
일은 다 던져 버리고 말이야.
먀옹
“응? 모짜도 같이 갈래?”
웨옹
컹
“어이쿠. 인절미도 왔어? 그래. 너도 지한이 형아 많이 보고 싶지?”
끄웅
지한이라는 말에 인절미가 귀를 늘어트렸다.
녀석. 지난번 휴가 때 지한이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더니 지금도 많이 그리운가 보네.
그래도 요새는 군대에서 자주 통화를 해 줘서 인절미가 나름 잘 버티고 있었다.
“너도 나도 이렇게 외로움을 타서 어떡할래?”
몰랐는데. 나 외로움 많이 타더라.
지한이가 혼자 촬영하러 가거나 미국에 가 있어도 괜찮았는데 군대라는 격리된 곳에 들어가 원할 때 만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왔다.
일하고 왔을 때 열렬히 반겨주는 모짜와 인절미가 없었다면 혼자 이불 뒤집어쓰고 눈물을 훔쳤을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혼자 방에 틀어박혀 며칠은 안 나와도 괜찮았는데. 지한이 이 녀석 날 길들여 놓고 갔어.”
어린왕자에 나오는 사막여우가 된 것처럼 지연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됐다.
어차피 나중에 동생이 결혼하면 혼자가 될 테니 미리 예행연습 한다고 생각하지 뭐.
“모짜야! 언니 대본연습 할 건데 도와줄래?”
앩
지연의 말에 모짜가 귀를 눕히더니 슬그머니 도망쳤다.
연기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도망치는 모짜가 얄미웠다.
왕!
“인절미 네가 해 준다고? 좋아. 어이구. 기특한 것.”
헥헥헥헥
지연이 인절미를 마구 쓰다듬자 인절미가 간지러운 듯 혀를 내밀고 이리저리 뒹굴었다.
한바탕 쓰다듬고 쓰다듬받던 둘이 자리에서 비실비실 일어나 마주앉았다.
거실에는 대본을 읽는 지연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에 호응하듯이 대사가 끝나면 작게 짖는 인절미의 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열심히 연습하는 두 사람 사이로 도망갔던 모짜가 슬그머니 다가와 양반다리를 한 지연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한동안 지연이와 인절미의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240. <미스 뷰티> (1)
여리고 순한 민경의 성격을 따라가듯이 민경의 보조작가들은 전부 순한 양들이었다.
그런 양 떼들 사이에 한 마리의 늑대가 합류했다.
그것도 양의 탈을 쓰고 자신이 양이라고 생각하는 늑대.
이제는 스타작가 반열에 올라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받는 민경은 자신의 작업실에 온 혜미를 보았다.
“작가님 여기서 신해가 속으로 참을 인을 3번 다 셌잖아요. 그럼 이제 한 번 터트리는 게 어떨까요?”
“으음. 저기 신해는 주변의 시선과 편견에 억눌려 소심한 성격이지만 자신이 고집하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고 마는 캐릭터라고 하지 않았나요? 참고 있던 걸 터트렸다고 한 번도 누군가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던 신해를 어떻게 터트릴 건가요?”
“음. 뭐가 좋을까요? 사실 제가 들었던 것 중에는 상사를 따로 불러서 비상구에서 멱살을 잡았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혜미의 말에 양들이 몸을 들썩였다.
두 사람이 공동집필을 하면서 느낀 바로는 의외로 민경과 혜미가 호흡이 잘 맞는다는 사실이었다.
괜히 멜로계의 대모 밑에서 배운 게 아니라는 듯이 혜미는 작가로 성공할 무언가가 있었다.
다만 가끔씩 이렇게 예상치 못한 말이나 전개를 생각할 때가 있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민경의 작업실에 함께 있는 작가들은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옹기종기 모인 보조작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속삭였다.
‘잡았어?’
‘상사 멱살을?’
‘사회는 무서운 곳이구나.’
최 작가는 철왕과 콤비로 소문이 날 만큼 다른 PD와 호흡을 맞춰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며 작품을 만들었고, 작품이 성공할수록 촬영장에 적극적인 배우들이 모였으면 모였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멱살잡이나 폭언, 막장 썰을 혜미의 입에서 들을 때마다 작가들은 사회의 냉혹함에 오들오들 떨었다.
“으음. 하지만 그 사람은 신해가 아니잖아요? 신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가 중요해요. 신해도 부처가 아니니 화가 나겠죠. 그럼 신해는 어떻게 화를 낼까요?”
민경이 차분하게 혜미에게 상황을 주입시켰다.
신해라면 어떻게 했을까.
머릿속에서 설정해 놓은 캐릭터가 어떻게 행동했을지를 생각해 보라며 민경이 혜미의 상상을 자극했다.
“신해라면 그렇겠네요. 조곤조곤하게 말로 사람을 패겠어요. 팩트로 조진다고 할까? 그렇게 화를 낼 거 같아요.”
“저도 그게 신해한테 더 잘 어울릴 거 같아요.”
스타 작가의 칭찬을 들은 혜미가 배시시 웃었다.
공동집필을 시작하고 나서 민경은 이렇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혜미를 훌륭하게 조련했다.
혜미가 작가를 그만두었던 동안 떨어진 기술이나 감을 되찾아 주면서 그녀가 이렇게 급발진할 때 제동을 걸어주었다.
“그래도 혜미 씨도 잘 하고 있어요. 대본을 수정할 때마다 캐릭터들의 대사가 점점 살아나는 거 같아요.”
“콜센터에 있으면서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거든요. 그래서 뭔가 대사도 더 잘 떠오르는 거 같아요.”
“확실히 많은 사람을 만난 게 혜미 씨한테 도움이 된 거 같아요. 캐릭터도 더 생동감 넘치는 거 같고. 이 작품 끝나면 사람들이 전부 이 작가님보고 숨겨진 보석이라고 할 거 같은데요?”
막내작가로 있던 때에 비해서 조금 더 대사가 맛깔나게 수정된 것을 보고 민경이 칭찬했다.
아무리 조사를 하고,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아무리 인터뷰를 많이 해도 역시 본인이 경험한 것이 제일 실감 나는 법이었다.
“헤헤. 그럼 더 실감 나는 장면을 위해서 현장에서 스태프끼리 싸움이 나는 건,”
“그건 상황을 보고 하죠.”
“스태프끼리의 싸움이 조금 별로면 교통사고는 어떨까요?”
왠지 폭력적이고 유혈이 난무하는 혜미의 상상에 뭉쳐 있던 양 떼들이 또다시 몸을 파르르 떨었다.
“혜미 씨. 혹시 전 직장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네? 없진 않았는데 왜 물어보세요?”
“아니요. 왠지 캐릭터들이 생동감이 넘치긴 하는데 다들 화가 많은 거 같아서요.”
민경이 캐릭터를 언급하며 돌려 말했다.
신해의 직장 생활에 저런 폭력적이고 과격한 일들을 계속 상상하는 걸 보니 직장 생활에서 맺힌 게 많아 보였다.
대본에는 작가의 성향이 은연중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민경이 애 둘러 물어보자 혜미가 아련한 얼굴로 허공을 보며 말했다.
“사실 전 직장에서 일이 좀 있었어요.”
“일이요?”
“그건 제가 하늘고래에 연락을 받은 날이었죠.”
“?”
뭔가가 있어 보이는 혜미의 말에 얘기가 삼천포로 빠졌다는 생각도 잠시,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멱살을 잡은 건지 궁금해졌다.
양 떼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 온기를 나누고 있을 때, 혜미가 이어서 말했다.
“그 연락을 받고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팀장한테 갔어요. 일을 그만둔다고요.”
* * *
콜센터 특성상 그만두는 직원은 많았다.
그래서 당일에 그만둔다고 말을 해도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
어차피 인수인계할 것도 없었고, 혜미는 오랫동안 품에 안고 다니던 사직서를 당당하게 들고 최 팀장에게로 향했다.
“팀장님. 저 오늘까지만 할게요.”
“뭐? 아니 혜미 씨 그렇게 무책임하게 말할 거예요? 설마 조금 전에 내가 말한 거 때문에 그래요? 겨우 조언 좀 했다고 그렇게 막 나가면 어쩌자는 거예요? 혹시 다른 데 취직이라도 됐어요?”
“그건 아니구요. 그냥 그만둘게요.”
다른 곳에 합격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상사에게 지적 좀 받았다고 삐져서 그만둔다고 말하다니.
최 팀장은 혜미의 행동을 아직 어린 사람의 치기 어린 행동이라고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