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런?”
“여기서 끊으시면?”
“아니 루카스 감독이 또 여기서!”
여기저기서 아니시에이팅이 터졌다.
1편에서도 결정적인 곳에서 끝을 내는 바람에 팬들을 원성을 한 몸에 받았던 루카스 감독.
이번 편에서는 곱게 가나 싶었더니 쿠키영상도 절묘한 곳에서 잘라 버렸다.
아니 좀 다 보여주면 어디가 덧나!?
“루카스 감독 뚝배기 깨러 간다.”
“같이 가실 분 모집합니다.”
“2번이요.”
“3번 합류합니다.”
조금 전까지 눈물 콧물을 빼던 사람들이 의지를 불태우며 나왔다.
어딘가의 전투원숭이처럼 전투력이 몇 배로 상승한 채로 밖으로 나오는 관객들을 보고 다음 타임 관객들이 의아해하며 그들을 바라봤다.
“뭐야. 무슨 일이야.”
“다들 얼굴을 보면 운 거 같긴 한데 왜 저렇게 화가 나 있지?”
“아니 호쾌한 액션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며.”
“뭐야. 또 뭔일 생김?”
빛나와 친구들은 화장실 가는 것도 잊고 다시 매표소로 향했다.
이렇게 중요한 떡밥을 두고 그냥 갈 수 없었다.
금색 눈은 에반인 거 같고, 신전은 또 왜 폐허가 된 거야?
심장의 행방을 찾고 싶은 건 뭐고.
“심장이라니. 얘들아 너흰 봤어?”
“아니.”
“못 봄.”
“심장이라면 누구 심장이야? 아이린?”
“우느라 못 봤어. 젠장. 이건 한 번 더 봐야 함.”
“인정.”
“ㅇㅈ.”
“밥은 나중에 먹자.”
“이렇게 찝찝한 상태로는 못 먹지.”
쿠키영상이 남긴 심장 떡밥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밥이 넘어갈 거 같지 않았다.
그렇게 빛나와 친구들은 매표소로 향했고, 저녁까지 매진인 덕분에 찝찝한 상태로 다음 날을 기약했다.
그날 먹은 저녁은 체했다.
* * *
개봉에 맞춰 정신없이 홍보 일정을 소화하고 오니 어느새 개봉 3주차였다.
국내외 할 것 없이 일정을 소화하고 겨우 한숨 돌린 남매가 품에 털뭉치들을 안았다.
부들부들한 감촉에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뭐지.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진 느낌인데.”
“누나도?”
1, 2주 차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지 우리가 갈 때마다 환호해주던 팬들이 3주 차 되니까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더라.
그거 보고 1회차 관람인 사람과 n회차 관람인 사람이 확실하게 구분됐었지.
조금 귀여웠다.
코톡!
코톡!
“누가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는 거야.”
열렬하게 인절미를 쓰다듬고 있던 지한이가 메시지를 확인했다.
뭔가를 확인한 지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아아. 루카스 감독님.”
“감독님? 왜?”
“누나도 단톡방 봐.”
우리 때문에 코톡을 깔고 단톡방까지 참여한 루카스 감독의 성의를 생각해서 지연이 자신의 폰을 꺼내들었다.
지한이 말대로 단톡방에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스케줄 때문에 무음으로 해 놨더니 이렇게 쌓인 줄도 몰랐네.
지연이 톡방을 들어갔다.
[감독님. 근데 진짜 이제 아이린 못 봐요? 정말로?]
[제 지인들이 다 이거 맞냐고 아이린 살려내라고 난리에요.]
[저도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그걸로 끝입니까? 저는 아이린과 함께 한국에서 예능까지 찍고 왔다고 더 괴롭힘 당하고 있습니다.]
[로건, 당신이 말입니까?]
[(가소롭다는 이모티콘)]
“로건이랑 다른 사람들도 꽤 친해졌나 봐.”
“로건은 큰 부상을 당했지만 3편에서 부활해 나랑 대적한다는 캐릭터니까.”
“정확히는 조종당하는 시체 역할이지만.”
“뭐가 됐든 3편에 출연하잖아?”
지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지연이 다시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무튼 감독님 진짜 아이린 출연 안 시켜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
[아쉽습니다.]
[그러면 지연 다른 작품에는 언제 들어갈 예정이야? 괜찮은 시나리오가 들어왔는데 시간이 된다면 한번 보겠어?]
[반칙! 지연은 나랑 먼저 같은 작품 하기로 했어!]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케이티. 제가 알기로 지연은 아직 차기작은 정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뭐야. 그걸 어떻게 알아?]
[수상하군.]
[지금 지연을 주목하고 있는 곳은 많으니까요. 제 에이전트가 말해줬습니다.]
왠지 메시지에서 로드리오의 식은땀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직 차기작 정한 건 없는데 어떻게 알았지?
로드리오가 있는 에이전시도 꽤 정보력이 좋은 모양이다.
[아무튼 연! 나 먼저야! 나랑 먼저 같이 작품하는 거야!]
[최근에 좋은 시나리오가 들어왔습니다. 괜찮다면 연락주십시오.]
[나도 좋은 시나리오가 있어. 그리고 다들, 말한 건 제가 먼저입니다.]
[하하하. 다들 진정해. 지연. 나는 이미 투자자까지 구했어. 혹시 원하는 스토리가 있나?]
[감독님?!]
[반칙입니다.]
[…메일로 시나리오를 보낼게. 확인해 줘.]
아웅다웅하는 드래곤 엠페러 식구들을 보고 지연이 조금 전 동생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누나가 보고 있는 대화를 확인한 지한이 짐짓 삐졌다는 듯이 입을 내밀며 말했다.
“다들 누나만 찾네.”
“무슨 소리야. 며칠 전에 너 곧 촬영하러 출국한다니까 공항까지 오겠다는 거 힘들게 말린 거 기억 안 나? 모두 오면 공항이 마비될 거라고 열심히 설득했었잖아.”
“아 맞다.”
지한이 무마할 때 자주 쓰는 눈웃음을 쳤다.
이 녀석아.
일부러 그렇게 웃어봤자 소용없어.
지연이 모짜의 앞발을 꾹꾹 만졌다.
“그래서 지한이 너 이제 곧 출국이지?”
“응. 드래곤 엠페러 멤버들 말고 크리스도 언제 오냐고 계속 물어봐.”
<바이러스> 촬영 이후 오랜만에 같이 촬영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어렸던 지한이가 이제 다 커서 크리스랑 같은 눈높이에서 촬영하다니.
이렇게 생각하니까 새삼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게 됐다.
우리 애 이렇게 쑥쑥 자랐구나.
회귀 전보다 무려 10cm나 더 컸다.
181에서 멈출 거라고 하던 동생의 키는 183에서 멈췄다.
그거 때문에 미나 언니가 기장 손본다고 고생 좀 했지.
“그런데 리벤져스2 한국에서도 촬영한다며? 이번에는 중간에 한국 한번 오겠네.”
“좋아. 좋은데 다들 한국에 가면 뭐 먹어야 하냐 어딜 가 봐야 하냐 뭘 사야 하냐며 물어봐.”
“어차피 돌아다니지도 못할 사람들이 설레발은. 음? 아직 합류 안 했는데 리벤져스 멤버들이랑 벌써 친해졌어?”
“크리스 덕이지.”
그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고 돌아다닌 거지.
드센 배우들 사이에서 고생할 동생을 상상한 지연이 괜히 듬직한 동생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 왜 그래?”
“아니야. 그래서 한국 촬영은 언제쯤이래?”
“3월 말쯤?”
“뭐야. 금방이네? 갔다가 거의 바로 돌아오는 거 아니야? 그냥 여기서 합류하는 건 어때?”
“지금도 일정 많이 봐준 거 알잖아.”
“그건 그렇지.”
그 마벨에서 이렇게 배우의 일정을 고려해주다니.
이것도 다 드래곤 엠페러의 성적이 좋으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에 개봉한 드래곤 엠페러2의 전 세계 반응도 좋다니?
그쪽 관계자가 헤벌죽한 얼굴로 돌아다닌다는 말을 애런한테서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짐 무겁게 많이 안 챙겨가도 되겠다. 한국 촬영하러 들어올 때 그때 많이 챙겨가.”
“응. 알았어. 크리스가 좋아하겠네.”
아. 그 양반.
집으로 초대할 때마다 먹을 걸 한 보따리로 싸줬던 게 떠올랐다.
안 그런 줄 알았는데 의외로 크리스가 먹을 걸 좋아하더라고.
유명해지고 나서 제일 좋았던 점이 맛있는 걸 계속 먹을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리벤져스에 나오는 근육질 모습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들었던 지연이기에 식탐이 강한 그가 이해되기도 했다.
올 때 맞춰서 미리 장 봐야겠네.
“크리스 오면 손님방 비워놔야겠네.”
“크리스가 괜찮다면. 여기도 호텔 못지 않게 보안이 좋으니까.”
정민혁 사건 이후로 우리집은 보안이 더 강화되었다.
근처에 빈집도 몇 채 산 걸로 알고 있다.
우리 때문에 이 동네 땅값도 많이 비싸졌는데도 덜컥 구입하는 사장님을 잠시 말리기도 했으나, 사장님 금고에 티도 안 나는 수준인데다가 나중에 소속 연예인에게 빌려줄 수도 있다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사장님 언제 그렇게 많이 버셨지?
뭐. 저번 일로 사장님 얼굴이 하얗게 질린 모습도 봤으니 순순히 받아들였다.
경비를 강화하는 게 우리한테 나쁜 것도 없으니까 안 받아들일 이유가 없지.
“누나는 뭐 할 거야?”
“나? 나야 뭐.”
다시 음반 작업 준비해야지.
기다리고 있는 팬들이 많으니까.
연기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팬들이 많이 늘었다.
팬카페에 가면 기존의 가수 활동을 좋아하던 팬들과 거의 동등할 정도로 유입된 팬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기존의 팬들이 조금 서운해하고 있었다.
“컴백 준비 하려고. 연기하면서 정말 많은 영감을 받았거든.”
“영감? 이번에는 누나가 직접 작곡해 보게?”
“나도 너랑 같이 매튜한테서 배웠으니까. 오랜만에 매튜의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작곡해 보려고. 재밌을 거 같아.”
지한이는 연기 때문에, 나는 음반 작업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매튜한테 함께 배웠었다.
이번에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머릿속에 있는 걸 전부 끄집어내서 작곡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몇 곡 넣을 거야?”
“글쎄? 미니로 들어갈 거 같은데.”
“미니면 4곡 정도?”
“아마도 그쯤.”
“빨리 듣고 싶다.”
“응. 너 모레 출국.”
누나의 말에 지한이 소파 위에서 녹아내렸다.
연기하는 건 즐겁다.
촬영하는 것도 재밌고.
다른 사람들이랑 온 힘을 다해 연기하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누나 노래도 듣고 싶었다.
옆에서 작곡하는 거 보고 싶은데.
그럼 나도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노래 완성하면 꼭 먼저 들려줘.”
아쉽지만 촬영을 미룰 수 없던 지한이 첫 순서로 노래를 듣게 해 달라는 것으로 타협했다.
짧은 시간에 수없이 고뇌한 동생을 안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일 먼저 너한테 들려줄게.”
“그럼 됐어. 아아. 출국하기 전까진 놀 거야.”
“안 돼. 출국 전까지 일해야 합니다.”
“…영훈이 형은 악마야.”
별 수 있나.
최팔녀 때문에 잠시 일을 미루고 왔는데도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줄은.
그 시국인데도 들어오는 일은 많았다.
어째서인지는 우리도 몰랐다.
“일어나. 밥 먹고 일찍 자자.”
“오늘은 배달 시키자.”
“나도 좋지.”
저녁은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다.
232. <메리골드> (1)
슥-스슥
오선지 위에 음표가 그려진다.
마치 정해진 길을 따라가듯이 지연의 손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음표를 그리는 지연의 얼굴 위에 아이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지연은 아이린이 되어 노래를 만들고 있었다.
이건 아이린이 동생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마지막 말.
홀로 무거운 짊을 짊어지게 만든 것에 대한 고해.
가족이자 스승으로서 혼자 남겨 두고 갈 이에게 전하는 유언.
슥-슥-
그리고
스윽-톡
응원과 감사.
아이린의 마음을 담아 지연이 손을 움직였다.
연필이 마지막 기호를 그렸다.
끝세로줄.
악곡의 끝을 알리는 기호였다.
“끝.”
뭔가에 홀린 것처럼 쉬지 않고 악보를 써 내려간 지연이 연필을 내려놓고 다시 한번 살폈다.
지연의 머릿속에서 멜로디가 재생됐다.
음. 생각한 대로 나온 거 같아.
이제 확인받을 일만 남았다.
만족한 얼굴로 악보를 내려놓은 지연이 기지개를 켰다.
“으그그그그극!”
계속 같은 자세로 있었더니 여기저기서 ‘두두둑-’ 하는 소리가 났다.
어후. 내가 좀 오랫동안 이러고 있었던 모양인데.
나가서 스트레칭 좀 해 줘야겠다.
그때 지연의 방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먀옹
“모짜 왔어?”
아이들을 배려해서 문턱도 없애고 잠금장치도 없앤 문 덕에 모짜가 문을 밀고 방으로 들어왔다.
사람처럼 문을 열고 들어온 모짜를 보고 지연이 몸을 낮춰 안아 들었다.
…애애옭
지연이 모짜를 안아 들자마자 모짜가 잔뜩 토라진 울음소리를 뱉었다.
기분 나쁜 티를 내는 모짜를 보고 지연이 양손으로 모짜를 들었다.
액체라고 불리는 고양이 아니랄까봐 지연이 잡은 부분 밑으로 몸이 추욱 늘어졌다.
“왜 그래. 우리 모짜 왜 이렇게 심통이 났어. 언니가 안 놀아줘서 그래?”
애애옹!
“미안미안. 언니가 너무 무심했지. 미안해. 언니가 놀아줄까?”
지연의 말에 모짜가 귀를 쫑긋 세웠다.
사실인지 아닌지 살피겠다는 듯이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이내 게슴츠레 지연을 바라보며 골골송을 불렀다.
“어이구. 이 녀석. 논다니까 기분이 좋아?”
개냥이라서 그런가.
주인을 패거나 물고 도망가는 냥아치와는 달랐다.
어휴. 도대체 누구 집 고양이길래 이렇게 예뻐.
다른 집사들과 마찬가지로 팔불출 같은 생각을 한 지연이 모짜를 안고 방을 나섰다.
탁
방 문이 조용히 닫혔다.
텅 빈 방.
조금 전까지 지연이 앉은 자리 근처로 악보들이 눈처럼 쌓여 있었다.
오선지 위에는 하나같이 음표들이 빼곡히 춤추고 있었다.
* * *
작업물을 가지고 회사에 들렀다.
어제 미리 연락해서 그런지 은주 언니가 자리에 있었다.
3실에서 담당하는 가수들이 하나둘 늘어남에 따라 얼굴 한 번 보기 힘들 정도로 바쁘던 사람인데 모처럼 시간을 내줬다.
부디 은주 언니의 소중한 시간을 소용없게 만들지 말아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