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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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의 이마에 얼음 결정이 내려앉았다.

[이겨내라.]

[…아이린!]

[이것 또한 시련이다.]

[왜, 왜에-!!]

에반의 동공이 세로로 길쭉하게 찢어졌다.

그의 손톱이 날카로워지고 이빨이 길쭉하게 솟았다.

용,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에반을 보며 아이린이 그의 머리 위에 차가운 장막을 씌워주었다.

[이것이 왕의 길이니까.]

누군가의 위에 서는 것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 어떤 생명체에도 치우치지 않고, 사사로운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

그것이 용이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

용제는 그런 용들의 정점에 선 존재.

혹시라도 그 덕목을 지키지 못하고 폭주한 존재를 막아 세우는 것 역시 용제의 역할이었다.

[너는 할 수 있단다, 에반.]

시련을 위해서 의식이 내면으로 들어간 에반을 아이린이 다정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그 모습을 리사가 말없이 지켜봤다.

또각또각

[내 동생을 잘 부탁한다.]

[가시는 겁니까?]

[내 할 일을 하러 가야지.]

[에반이 깨어나면 무척 슬퍼할 겁니다.]

리사가 흔들리는 눈으로 아이린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이린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그게 뜻하는 건 단 한 가지뿐이었다.

죽음.

아이린은 지금 제 발로 사지(死地)로 걸어가고 있었다.

[차라리 여기서 막으세요. 여기라면!]

용제가 되기 위한 자의 시련을 준비한 곳이었다.

안에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만큼 견고해서 바깥으로부터의 위협에서 안전한 공간이었다.

[에반이 마지막 시험에 들어간 이상 이 유적은 더 이상 침입자를 막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대로 가면 에반이!]

[울지도 모르지.]

다 알면서.

리사는 울지 않는 아이린을 대신해서 눈물을 터트렸다.

이대로 가 버리면 에반은 또 어떻게 하란 말인가.

자기 때문에 모든 가족이 목숨을 잃었다.

과연 에반이 그걸 좋아할까?

리사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북극의 빙벽처럼 단단하게 선 아이린의 등을 쳐다봤다.

[내 동생의 옆에 있어 주길 바란다.]

그 말을 남기고 아이린이 걸어갔다.

죽으러 가는 것임에도 리사는 말릴 수 없었다.

아이린은 지금 용제를 지키려는 게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가는 것이니까.

리사가 두 손을 꼭 쥐고 기도했다.

[‘제발. 제발 에반. 빨리 일어나.’]

그녀의 기도가 에반에게 닿길 바랐다.

* * *

유적 밖에서 아이린이 타락한 용과 용살자들의 발을 묶어두고 있을 때, 에반은 자신의 어둠을 마주하고 있었다.

[너 따윈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어.]

[시끄러워. 어둠 주제에.]

[하하! 차라리 나에게 맡겨라. 그렇다면 내가 부모의 원수를 죽이고 버러지 같은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거울을 맞이한 것처럼 똑같은 얼굴이었지만 에반이 맞이하고 있는 자는 광기에 가득 차 있었다.

[언제부터 네가 아이린의 말을 잘 들었나! 그녀는 결코 너에게 상냥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매일 훈련, 훈련, 훈련! 용으로서의 마음가짐이 무어냐! 신체를 단련하는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아이린은 결국 널 동생으로 생각하지 않았어!]

[닥쳐.]

[아이린은 널 용제에 올리고 모든 걸 다 제 손아귀에 쥐려는 속셈이다. 아직도 그녀를 믿는 건가!]

멍청한 에반.

어리석은 에반!

어둠이 웃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에반을 둘러쌌다.

광기에 물든 에반이 손을 들어 빠르게 내려찍었다.

어느새 그의 손이 용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닥치라고 했지.]

흠칫!

감정이라곤 파편도 보이지 않는 에반의 무감각한 금색 눈동자에 어둠이 몸을 떨었다.

순간 압도됐다.

그러나 곧 어둠이 광소를 터트리며 에반에게 달려들었다.

[이거야! 이래야 내 본체라고 할 수 있지! 너와 나. 여기서 살아남는 자가 용제가 된다!]

에반과 어둠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어둠과 금빛이 격돌했다.

서로가 똑같은 존재기에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공격이 오갔다.

어둠은 광기 어린 얼굴로 에반을 공격했고, 에반 역시 무정한 눈으로 어둠의 약점을 공격했다.

둘 다 목숨을 도외시하고 날카로운 손톱을 겨누고 있을 때 이변이 생겼다.

우뚝,

[아이린?]

에반이 몸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봤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이린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

무정하던 에반의 눈동자에 금이 갔다.

[하핫! 어딜 보는 거냐.]

빈틈을 보인 에반에게 어둠이 달려들었다.

푸욱-!

날카로운 손톱이 거죽을 꿰뚫었다.

[…어?]

[너랑 놀아줄 시간 없어.]

에반의 금빛 눈동자가 시리게 빛났다.

유적이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시련이 끝났다.

배신자들을 처단하고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이 땅에 용제가 강림했다.

[철수…!]

[어딜 가려고.]

어느새 눈앞에 에반이 금빛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그의 눈을 본 순간 타락한 용들과 용살자들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모든 생명체가 포식자 앞에 서면 느끼는 공통적인 감정.

공포.

그것은 같은 용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금빛 눈이 꼼짝도 못 하고 굳은 자들을 훑어보다가 한 곳에서 멈췄다.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아름다운 용.

온몸이 붉게 물들었어도 그녀의 고결한 순백은 가려지지 않았다.

저벅,

저벅,

저벅,

에반이 걸음을 옮겼다.

[아이린.]

대답이 없었다.

마지막까지 저들의 발을 묶기 위해서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생기가 사라진 아이린을 본 에반의 몸에서 파동이 터져나갔다.

단순한 힘의 파동.

그러나 그것은 강자이기에 유형화된 기세였다.

[죽어라.]

에반이 사라졌다.

[아악!]

[으악!!]

[끅]

용살자들의 단말마가 들렸다.

[젠장 쳐!]

용살자와 타락한 용들의 무리 대 에반.

누가 봐도 한쪽이 압도한 싸움이었지만 승기는 에반에게 있었다.

손과 쇠가 부딪쳤는데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린다.

용살자들이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데 에반의 손짓하나에 폭탄이 터진 것처럼 날아간다.

콰아아아아-!!

타락한 용의 숨결이 에반에게 쏟아졌다.

인공위성에서도 보일 만큼 거대한 화염 기둥.

전력을 쏟아낸 일격이었는데도 비늘을 곤두서게 만드는 위기감이 가시질 않는다.

[아이린을 태운 건 네 불꽃이었구나.]

[크, 흐아아악!!]

제 불길이 자신을 태웠다.

파괴의 정점인 레드 일족의 율리안이 비명을 질렀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율리안을 그대로 둔 채, 에반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에반의 모습이 잠깐 보일 때마다 누군가의 목숨이 사라졌다.

그리고 에반이 몸을 멈췄을 땐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있는 자는 없었다.

적을 전부 쓰러트렸다.

모든 생명체의 정점인 용제가 되었다.

그러나,

[으아아아아아아아-!!!!!!!!!]

에반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231. 쿠키 영상

스태프 롤이 올라오고 조명이 켜졌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훌쩍

여기저기서 아이린의 최후와 에반의 절규에 슬퍼하는 이들의 훌쩍임이 들려왔다.

“흐어어어엉.”

“아. 구빛나. 쪽팔려.”

“여기 휴지.”

“그만 울어라.”

“그치만 너희들도오옥!!”

부모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오열하는 빛나를 보고 친구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들의 눈가 역시 붉었다.

“자. 일어나자.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킁. 조금만 더.”

“하아.”

감수성이 풍부한 친구의 뒤치다꺼리는 힘들었다.

빛나를 핑계 삼아 자신들의 마음을 추스르던 친구들은 스태프롤이 다 끝나갈 때쯤이야 일어났다.

“킁.”

“화장실부터 가자.”

“팝콘 남았어.”

“나도 콜라 많이 못 마셨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영화 덕에 먹을 것에 집중할 틈이 없었다.

에반의 과거라니.

어쩐지 1편이 시작할 때 꼬꼬마 애기들이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 같았는데 그게 다 이유가 있었다.

이제야 풀린 1편의 떡밥을 보고, 또 남겨진 떡밥들을 생각하면서 빛나와 친구들이 자리를 뜨려고 했다.

우르릉-

“어?”

“음?”

“아직 안 끝났어?”

빛나와 마찬가지로 감정을 추스르느라 늦게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이 갑자기 들린 소리에 출구로 향하던 것을 멈추고 스크린을 올려다봤다.

출구 근처에 있던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고 백스텝을 밟았다.

스크린 속에서는 밝은 달이 떠올라 있었다.

그런데 달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은 하늘이었는데 방금 들린 소리는 천둥소리 같았다.

쿠구구궁-!

“어? 또?”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네.”

“저기.”

“신전이잖아?”

관객들의 말대로 스크린에는 아이린의 영역이던 용의 신전이 보였다.

그러나 신전은 사람들이 기억하던 모습과 달랐다.

하얗고 우아하던 신전은 어디 가고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흉물스러운 모습을 한 폐건물이 나타났다.

‘신전이 갑자기 왜 저 모습이 된 거지?’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타락한 용들이랑 용살자들이 저기 습격한 건가?’

사람들이 저마다 추리하며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때 서서히 고성을 가까이 담던 화면이 빠른 속도로 건물 내부를 비췄다.

파편과 먼지 때문에 엉망이 된 내부가 보였다.

그리고 운석이라도 맞은 것처럼 뻥 뚫린 천장이 나타났다.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모습이 슬프기 그지없었다.

뚜벅, 뚜벅

그곳에 누군가가 검은 워커를 신고 나타났다.

[여기에 있었군.]

검은 워커를 신은 이가 걸음을 멈췄다.

천장이 무너져 들어온 달빛이 검은 워커를 신은 이의 얼굴을 비췄다.

“어?”

“저 사람.”

“국장님?!”

마벨의 팬들이 워커를 신은 사내를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나타난 슈퍼히어로들의 국장에 사람들이 고개가 꺾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당신에게 알려줄 것이 있습니다.]

국장의 말에 달빛이 비추지 않는 어둠 속에서 한 쌍의 금색 눈동자가 떠졌다.

무정한 포식자의 눈이 자신을 향하자 국장이 자신도 모르게 물러나려는 걸음을 멈췄다.

주먹을 꼭 쥐어 물러나려는 몸을 멈춘 국장이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심장의 행방 찾고 싶지 않습니까?]

국장의 말에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금색 눈을 지닌 존재가 어둠 속에서 한 걸음 밖으로 나온 순간 쿠키영상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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