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주민의 귓가에 간절하게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다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어떡해요. 사장님 놀랐잖아요.”
“사장님 괜찮아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가 들린 후, 커튼을 가르고 아이들의 얼굴이 빼꼼 드러났다.
그러면서 좌우를 살피며 응급실 상황을 확인한 아이들이 주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리 괜찮아요.”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멀쩡한 아이들 얼굴을 본 주민의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깜짝 놀란 게 역력한 주민의 얼굴을 확인한 둘이 옆에 있던 경호원을 탓했다.
“아저씨들 말을 끝까지 전달해야죠.”
“맞아요. 그런 식으로 말하면 다쳤다고 오해하잖아요.”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저.”
“우릴 제대로 경호 못해서 죄송하다고 한 거죠?”
“우리가 놀랐을까 봐 응급실에 데려온 거면서. 정작 다친 건 아저씨들이 더 다쳤으면서.”
“…그랬어?”
“네. 아저씨들도 가스총 때문에 검사받으러 갔는데 전부 멀쩡하대요.”
“역시 우리 경호원 아저씨들이라니까. 안 다쳐서 다행이야.”
평소와 다름없는 아이들의 모습에 주민이 몸에 힘을 주고 일어나 아이들을 와락 안았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많이 놀랐어요? 남 비서님한테 못 들었어요?”
“남 비서가 너희들 응급실에 있다는 얘기만 하던데.”
살짝 원망이 섞인 주민의 시선이 옆에 서 있는 남 비서에게 향했다.
그 시선에 겨우 몸의 떨림이 멈춘 남 비서가 살짝 흠칫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응급실 얘기만 듣고 서두르는 바람에 실수했습니다.”
“어? 아저씨들이 전부 다 말하지 않았어요? 멀쩡한데 혹시 몰라서 병원 간다고 한 거 같은데.”
“저는 전부 보고했습니다.”
지연이 연락을 전한 경호원을 쳐다보자 그가 살짝 억울함이 담긴 목소리로 변명했다.
주민과 남매의 시선이 다시 주민에게 향했다.
“죄송합니다. 보고 내용을 빠뜨리다니 할 말이 없습니다.”
“…아니야. 자네도 많이 놀라서 그랬겠지. 애들이 안 다쳤으면 됐어.”
철두철미한 데다 일에 있어서는 완벽함 그 자체인 남 비서님이 이렇게 중요한 사항을 빠뜨리다니.
진짜 많이 놀라셨나 봐.
지연과 지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자세히 보니 사장님 못지않게 남 비서님의 행색도 많이 헝클어진 게 보였다.
‘남 비서님도 우리 많이 좋아하나 보다.’
‘그런가 봐. 저렇게 당황한 모습 처음 보는 거 같아.’
걱정시켜서 미안한 마음이 듦과 동시에
알 수 없는 기쁨이 가슴 한편에서 피어올랐다.
“히힛.”
“흐흫.”
아이들의 웃음에 모두의 시선이 둘에게 쏠렸다.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까 침전물처럼 가라앉아있던 불안이 전부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웃지 마. 이 녀석들아. 너희들 당분간은 외출 금지야.”
“맞습니다. 사장님,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는 안전한 곳에서 쉬게 하시죠.”
“좋은 생각이야, 남 비서. 당장 별장 관리인에게 연락해.”
“네.”
안 돼.
이러다 꼼짝없이 호화로운 감금 생활을 하게 생겼어!
비상등을 켠 것처럼 강렬하게 울리는 예감에 남매가 다급하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치만 집회 가고 싶어요.”
“우리도 대한민국 국민이라고요.”
“차라리 경호원 아저씨들을 더 붙여주세요.”
“맞아요.”
우리가 시작한 일이었다.
예전과 똑같이 흘러간다고 해도 우리 두 눈으로 이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안 돼. 정 가고 싶으면 집회 장소 근처 호텔을 빌려줄 테니까 호텔에서 봐.”
“사장님!”
“그치만.”
“그보다 너희를 위협한 그놈은 어디 갔어.”
단호한 얼굴을 한 주민이 화제를 전환했다.
옆에 있던 경호원은 자신들의 실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각을 세워 자세를 잡았다.
“아아. 그놈이요?”
“그놈이라면 경찰서에 갔어요.”
“경찰서?”
“경찰 아저씨한테 넘기긴 했는데 응급실 간다는 핑계로 우린 빠졌어요.”
“그런데 곧 경찰이 올 거 같은데 어떡하죠?”
아이들의 말을 들은 주민이 이마를 쳤고,
옆에 있던 경호원의 등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229. 악연의 끝
촛불 집회 때문에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 서 있는데 이 상황에서 유명 연예인이 습격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관할서에는 식겁하며 서둘러 응급실로 경찰관을 보냈다.
“실례합니다. 여기 오지연, 오지한 씨 어디 있습니까?”
“아. 그분들이라면 입원했습니다. 원무과에 가시겠어요?”
입원이라니.
신고 내용에 의하면 갑자기 괴한이 습격해서 몽둥이로 내려쳤다는데 얼마나 크게 다쳤는지 알 길이 없었다.
현장에 갔을 때는 이미 병원으로 향한 뒤였고, 남은 사람은 경호원과 범인뿐이었으니까.
“많이 다쳤을까요?”
“그러지 않길 빌어야지.”
두 경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원무과에 물어 피해자가 입원한 곳으로 향한 경찰은 병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을 보고 침을 삼켰다.
딱 봐도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진짜 크게 다친 건가?’
‘하필 이 시국에 오지한이랑 지연이 다치다니.’
비상이다.
불길함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밖으로 나왔다.
“누구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종로 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오지한 씨와 오지연 씨 안에 계십니까?”
“아. 경찰분들이시군요. 아이들은 모두 안에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두 사람의 정체를 안 남 비서가 피곤한 얼굴로 인사했다.
문을 열고 나온 남성은 지쳐 보였지만 얼굴에 초조함과 불안은 없었기에 경찰들은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다행히 많이 다친 건 아닌가 보군.’
‘휴우.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남 비서가 다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온 남 비서가 두 경찰을 데리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VIP실에는 원래라면 침대가 하나였지만 두 사람이 남매라는 사실 때문인지 2개의 침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두 경찰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오지한과 지연을 빠르게 살폈다.
소독약 냄새가 조금 나긴 하지만 두 사람이 깁스를 하거나 거즈를 붙인 곳은 없어 보였다.
천만다행이었다.
남 비서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들은 주민이 두 경찰을 보았다.
“종로서에서 나오셨다고요.”
“네. 강력팀 장형석입니다.”
“강력팀 한경준입니다.”
“저는 아이들 보호자이자 소속사 사장인 공주민이라고 합니다.”
세 사람이 명함을 교환했다.
간단한 자기 소개를 한 뒤, 형사들은 피해자 진술에 들어갔다.
지연이와 지한이는 주민이 부른 변호사와 함께 나란히 앉아 진술했다.
“그래서 촛불집회를 하고 나오던 길에 누군가가 뒤를 따라왔단 말이죠.”
“네. 경호원 아저씨들이랑 같이 있었는데 누가 따라오는 거 같다면서 차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가던 중이었어요.”
“그리고 차에 막 올라타려고 하는데 뒤에서 ‘죽어!’라는 소리와 함께 가스총이 발사됐어요.”
“피의자의 소지품에서 가스총이 발견되긴 했습니다. 현재 구매경로를 알아보는 중입니다.”
호신용이라도 가스총이나 전기충격기는 관할경찰서의 허가증이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 물건을 범죄에 사용했으니 구매경로를 찾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튼 가스총 때문에 잠시 소란이 생긴 틈에 그 사람이 뭔가 내리치려고 했어요. 눈이 매워서 잘 보진 못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망치더라구요.”
“그 망치도 현장에서 발견하여 현재 저희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지연이와 지한이의 말을 정리하며 두 사람이 사건 경위를 파악했다.
‘죽어’라는 발언.
‘가스총’과 ‘망치’라는 도구를 준비한 점.
가해자는 두 사람을 명백히 살해할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하나네요.”
“말씀하세요.”
“정민혁 씨와는 어떤 관계십니까.”
올 것이 왔다.
지연이와 지한이가 서로 시선을 교환할 때, 변호사가 대신 대답했다.
“정민혁 씨가 슈퍼노바이던 시절. 지연이와 오가면서 몇 번 스친 적은 있습니다. 그 뒤 정민혁 씨가 학폭 사건으로 그룹에서 탈퇴하고 연예계를 떠났는데 우연히 미국에서 열린 자선 파티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자선 파티요?”
“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정민혁 씨가 명함을 주며 지연이한테 연락을 하라고 하더군요. 당연히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연이와 지한이는 한국으로 귀국했죠.”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난동을 부린 겁니다.”
변호사의 말에 형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히 미국에서 다시 만난 지연을 보고 정민혁이 관심을 가졌던 것 같은데
그걸 지연이 거절하고 말없이 한국으로 떠나가 따라와 보복한 건가?
스토커와 사생팬과 비슷한 행태에 형사들은 일이 어떻게 흘러간 건지 대략 알겠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철저히 조사해서 가해자가 합당한 벌을 받을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추후 연락드리면 그때 경찰서에 출석 한번 해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다만 지연이와 지한이가 유명 연예인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비밀로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그럼 쾌유하시길 빕니다.”
“빨리 나으십시오.”
형사들이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두 사람의 걸음이 멀어지자 지연이와 지한이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으아.”
“하아.”
잘못한 것도 없는데 경찰이라고 긴장한 남매를 본 사람들이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
“경찰이니까요.”
“우리가 피해자긴 하지만 경찰은 좀 무섭잖아요. 어쩔 수 없어요.”
게다가 경찰은 좀.
회귀 전에도 경찰을 본 경험이 있었다.
오히려 자주 봤었지?
가정폭력 때문에 자주 신고했었거든.
그런데 그땐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술이 깰 때까지 근처 친척 집에 잠시 가 있으라고 하는 말이 다였다.
그래서 피해자의 입장인데도 경찰은 썩 내키지 않는 존재였다.
“아무튼 이제 더 이상 정민혁이랑 얽힐 일은 없겠죠?”
“네. 정민혁이 자신의 탈퇴와 계약해지는 지연의 탓이라고 말할 순 있지만 증거는 없을 겁니다. 표면적으로 정민혁은 학교폭력으로 인해 소속사와 계약 해지가 된 것이거든요. 그리고 이 시국에 최팔녀의 사주 때문에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말하긴 어려울 겁니다.”
“걔가 같이 죽자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말하면 어떡해요?”
“맞아요. 가스총이랑 망치까지 들고 온 걸 보면 이미 몰릴 대로 몰린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거잖아요.”
“그렇게 해도 우리가 피해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군요. 다만 연관검색어에 뜨는 위험이 있겠습니다.”
변호사의 말에 주민이 남 비서에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연관검색어에 뜨지 않도록 요청하란 거겠지.
사장님이 네이바랑 다움에 주식을 얼마나 가지고 있더라?
잘은 모르겠지만 대주주라고 불릴 만큼 가지고 있단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정민혁은 더 생각하지 말고 오늘은 이만 쉬렴.”
“내일 퇴원할 거예요.”
“안 돼. 지연이랑 지한이 너. 안 다쳤다고 하더니 다친 거 숨겼잖아.”
“우리 숨긴 적 없는데. 괜찮다고 했지 안 다쳤단 말은 안 했어요.”
“그게 그거지.”
“달라요, 사장님.”
“씁. 어쨌든 안 돼.”
“아니. 넘어질 때 조금 까진 것뿐인데.”
“다쳤잖아.”
“3cm도 안 될 거 같은데.”
“까진 건 까진 거야.”
지연이와 지한이가 협공했지만, 주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피가 조금이라도 났으니 다친 건 다친 거였다.
아이들의 부상에 대해서는 일말의 여지도 없는 주민은 단호한 얼굴로 당분간 병원에서 쉬라고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가져다준다나?
‘이게 뭐야. 결국 호화로운 감금이 되어버렸잖아.’
지연이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주민이 토라진 아이들을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런 일 겪은 사람들은 다들 긴장이 풀리면 아프기 시작하더라.”
“사장님 말씀이 맞아. 내일 되면 어디가 아플지 모르니 당분간 경과를 지켜보자는 거야.”
“저도 예전에 교통사고 당했는데 당한 날은 모르다가 다음 날부터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후유증이 꽤 무섭더군요.”
차례대로 주민, 남 비서, 변호사가 말했다.
그들의 말에 지연이와 지한이도 이유를 납득하고 더 이상 투정 부리지 않았다.
“푹 자. 더 이상 정민혁이라는 놈은 만나지 않을 거니까 안심하렴.”
남매가 누운 걸 확인한 세 사람이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아직 남은 일이 있었다.
둘만 남은 병실에서 지연이와 지한이가 약한 불빛에 의지하여 옆으로 누워 대화했다.
“누나. 아까도 날 먼저 보호했지.”
“나는 누나잖아.”
“나는 남자잖아.”
이제 다 커서 누나보다 훨씬 건장한 몸인데도 또 보호받았다.
지한이가 속상했는지 어릴 때처럼 입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다음엔 그러지 마.”
“다음에도 그럴 거야.”
“누나.”
“넌 내 하나뿐인 가족이잖아. 그리고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걸 어쩌라고.”
천연덕스러운 지연의 말에 지한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제는 자신이 누나를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또 지킴을 당해버렸다.
이래서는 누나를 지키겠다는 다짐을 지킬 수 없게 된다.
“두고 봐. 다음에는 꼭 내가 먼저 지킬 거야.”
곧은 시선을 보내며 다짐하는 동생을 보고 지연이 한발 물러났다.
“그래. 다음에는 네가 지켜 줘.”
먼저 지키는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저렇게 속상해하는 건지.
덩치만 컸지 애네 애야.
지연이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피곤할 텐데 자자.”
“그런데 이제 진짜 정민혁이랑 볼 일은 없는 거겠지?”
“자기도 생각이란 게 있으면 조용히 있겠지. 지금 그 여자랑 연관되어 있다고 밝히는 건 스스로 불구덩이에 들어가겠다는 거랑 다를 게 없잖아.”
괜히 입을 놀려서 형량을 더 높일 거라고 생각되진 않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궁지에 몰린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래도 사장님이랑 남 비서님, 변호사 아저씨가 있으니까 더 볼 일은 없겠지.
이때까지만 해도 정민혁을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 * *
“그래서. 날 부른 이유가 뭐예요?”
지연이 수갑을 차고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있는 정민혁을 보며 말했다.
널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여기서 또 보게 될 줄이야.
거뭇한 안색과 면도도 제대로 못 한 정민혁이 음울한 시선으로 지연을 쳐다봤다.
그래. 내가 지금 여기 있는 이유는 수사협조 때문이다.
며칠 전 우리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형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죄송하지만 정민혁 씨를 한번 만나주시겠습니까?
“제가요…?”
비밀리에 가서 진술까지 다 하고 왔는데 갑자기 내가 왜?
그 전에 피해자와 가해자를 만나게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