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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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새로 온 알바생들을 환영했다.

* * *

제주도에서 소동이 가라앉고 있을 때, 탑엔터 임원 회의실에서는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밖에서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비가 그들의 심란한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사장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위에서 특별히 지시가 내려온 사항입니다.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우린 예전부터 정부와 거리를 둬 왔습니다. 이번 정부라고 해서 우리가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 거리를 둔 것 때문에 우리가 손해를 입은 적도 있어요.”

“거리를 둬서 나쁠 건 없지요. 우린 탑엔터입니다. 그 어떤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거 없이도 우린 업계 1위예요.”

주민이 각자의 의견을 떠드는 임원들을 말없이 지켜봤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번 정부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것이 가득했다.

‘내년에 일어날 일을 막는 것도 정신없는데 그쪽에서 제안이라니. 이거 안 받아들이면 블랙리스트에 올린다고 난리 피우겠지. 하! 그깟 리스트 감히 우리 애들한테 가당키나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주민의 미간에 주름이 짙어졌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정부에서 들어온 일까지 생각할 여력은 없었다.

내년 상반기에 개봉할 지한이의 영화를 생각해서라도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했다.

대략 알아본 것만 해도 그 회사에 대한 비리가 엄청났으며 사장은 바지사장이 유력한 것으로 확인됐다.

평소라면 이딴 회사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 일을 막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그 회사를 인수해 정상화시키는 것이었다.

‘인수가 쉽지 않을 거 같아. 저쪽에서는 비자금 용도로 회사를 굴리고 있는 것 같으니 쉽게 내어줄 거 같지 않아. 게다가 정권과 연결고리도 있고.’

주민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그의 미간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사장님?”

“…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니 임원들이 전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런, 잠시 딴생각을 한 사이 내 의견을 구한 모양이군.

주민이 미안하다는 듯이 손짓하며 말했다.

“미안하군. 뭐라고 했지.”

“저희는 지연이와 지한이가 이 제안을 안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아아.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그깟 명예 한국 홍보대사로 임명해 준다고 영상 하나 헐값에 찍어 달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되지. 그거 임명 안 해 줘도 우리 애들은 이미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다고.”

주민의 말에 임원들의 얼굴에 자부심이 피어올랐다.

암. 맞는 말씀이지.

우리 애들은 누가 임명 안 해 줘도 이미 대한민국 홍보대사라고.

그깟 홍보대사 임명해 준다고 홍보 영상 찍게 해 준다는 게 말이야 방구야.

“그럼 이 제안은 거절하는 걸로 결정한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안건은 뭐지?”

“마벨 측에서 들어온 제안입니다. 그쪽에서는….”

속 빈 강정 같던 정부의 제안보다 훨씬 좋은 내용이었다.

그래. 지한이도 이제 합류할 때가 되긴 했지.

지연이와 지한이 앞으로 들어온 내용을 검토하고 앞으로 정부와 어떻게 거리를 둘 것인가 등에 대한 안건으로 회의가 진행됐다.

우웅

주민의 휴대폰이 조용히 울렸다.

회의를 진행하느라 주민은 휴대폰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폰에는 누군가로부터 온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수상한 늙은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십시오]

뒤늦게 회의를 끝내고 나온 주민이 메시지를 확인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도와달라고 할 줄 알고.”

이까짓 일은 재수 없는 천사덕후 늙은이가 없어도 해낼 수 있었다.

그쪽이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애들 일에 간섭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줄 알고.

‘그쪽이 역사와 전통이면 이쪽은 끈끈한 가족의 정으로 나오겠다 이거야.’

가족사에 외부인이 끼어들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메시지를 읽씹한 주민이 입꼬리를 비틀며 사장실로 향했다.

* * *

“거절이라고?”

“네. 그쪽에서는 일정상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전해 왔습니다.”

난을 닦던 이가 비서의 말에 손을 멈추었다.

“겨우 그런 일로 나랏일을 거절한다는 말인가. 일이 있어도 우리 일을 우선으로 처리해야 하는 것을.”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사내의 말에 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땐 대답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답이 없는 비서를 본 그가 난을 닦던 걸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래. 무슨 일정이 있길래 나랏일도 거부하는지 들어봐야겠어.”

“자세한 일정을 말해주지 않았지만 곧 둘 다 영화에 들어갈 예정인가 봅니다.”

“영화? 겨우 그거 때문에 거절했다고?”

불편한 심기를 반영한 목소리가 집무실에 퍼졌다.

비서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영화라고. 고작 영화 때문에 큰일을 거절했단 말이지.”

계속해서 거절한 이유를 되뇌는 사내의 목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살아있는 권력이자 가장 힘이 강한 시기에 들은 거절의 말에 사내의 심기가 비틀렸다.

“이 일을 VIP께서 얼마나 기대하고 계신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쪽에서 거절했다고 고스란히 안 된다는 말을 하러 와!”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비서를 윽박질렀다.

비서의 고개가 들릴 줄 몰랐다.

“어떻게 해서든 하게 만들어. 탑엔터를 압박하든 두 사람한테 들어오는 일을 끊든 하란 말이야!”

“그게, 쉽지 않습니다. 국내가 아니더라도 할리우드에서 부르는 배우기도 하고, 탑엔터의 공주민 사장은 HJ그룹의 삼남입니다.”

압박할 수당이 마땅찮다는 말이었다.

사내 역시 수를 쓰기 어려운 배경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얼굴 앞에서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알아 와.”

“…알겠습니다.”

더 이상 안 된다고 말하면 자기 머리로 재떨이가 날아올지도 모르는 일에 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방법을 찾아오란 말인가.

HJ그룹은 만만찮은 곳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전 정권에서도 벼르기만 하고 혼쭐을 못 냈겠는가.

언론을 장악한 전 정권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HJ그룹을 상대할 때면 다들 고민하는 문제였다.

권력은 끝이 있고, 돈은 영원하다는 말이 있으니까.

그래서 권력자들이 권력을 쥐면 이리저리 해 먹으려고 하는 게 아니겠는가.

“하아.”

그래도 자신은 해야 했다.

하지 않으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우니까.

‘그 아이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나부터 살아야지 어쩌겠어.’

집무실을 등지고 걸어가는 비서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222. 노리는 자들

“최근 아이들의 부모에게 접근하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스그, 극-!

서류에 사인하고 있던 주민은 남 비서의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에 들어간 힘 때문에 주민의 사인이 끝나는 곳이 조금 찢어졌다.

찢어진 종이만큼 불쾌해진 심경에 주민이 혀를 차고 고개를 들었다.

“누가.”

“아마도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 같습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엉덩이 무거운 공무원들이 발걸음을 옮겼다면 예사 이유가 아니겠지.

이럴 줄 알고 아이들의 부모에게 감시를 붙인 건 아니지만 상대가 이런 식으로 나왔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동에 심사가 비틀린 주민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우리가 거절하면 다른 애들을 알아보면 되는데 끈질기게 구는군. 한류스타라는 것들 쓰면 되지 꼭 우리 애들이어야 하는 이유가 뭐야.”

“사장님. 상대가 비교되지 않습니다만.”

고작 아시아에서 조금 이름을 알린 가수나 배우들과 할리우드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아 전 세계 팬들의 사랑을 받는 우리 애들이 같을 리가 없지 않냐며 남 비서가 시선을 보냈다.

남 비서의 말에 주민이 쉽게 수긍했다.

“하긴 한류스타와 우리 애들은 비교가 안 되긴 하지.”

“‘카페 옹달샘’ 출연 이후, 제주도 방문하는 관광객 통계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8월 한 달만 해도 관광객 수가 120만을 넘었습니다. 아이들이 찍은 예능이 방송한 9월 역시 관광객들이 줄지 않고 있는 추세구요. 하물며 중국이나 일본 같은 아시아 관광객들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아메리카에서 오는 관광객이 급증했습니다.”

고작 한국에서 10%를 넘기는 예능 방송 하나가 만들어낸 성과라고 치기에는 그 결과가 어마어마했다.

이러니 저쪽에서도 그렇게 애타게 우리 애들을 찾는 거겠지.

다시 봐도 말도 안 되는 조건만 아니었다면 조금은 고려해 봤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쪽은 안 돼. 이번 정부와는 어떤 식으로든 엮이는 건 피해야 해.”

“네. 하지만 내부 단속도 조금 신경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연이랑 지한이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와 가수들의 가족, 친척에게도 접근이 있는 게 확인됐습니다. 매니저들이 알려왔습니다.”

“이것들이 진짜.”

주민은 그제야 상대방에서 탑엔터를 흔들기 위해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무슨 양아치도 아니고.

원하는 걸 내놓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건가?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국민을 상대로 이런 치졸한 짓을 벌인다고?

“지연이가 말한 카드를 빨리 써야 할지도 모르겠군.”

미래에서 돌아왔다는 걸 밝힌 순간 지연이는 많은 것을 털어놓았다.

그동안 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들, 인상 깊었던 작품들, 연예계의 사건 사고,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재난에 대해서도.

작고 가녀린 몸에 얼마나 많은 걸 담아두고 있었던지.

혼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지연을 떠올린 주민의 얼굴에 잠시 안쓰러움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일단 매니저들에게 다시 한번 알리도록 하고, 몇몇은 내가 직접 연락하는 걸로 하지.”

“알겠습니다. 전달하겠습니다.”

“애들 촬영이 끝나면 바로 출국할 수 있게 준비해 놓고.”

“네.”

“모짜랑 인절미 수속도 준비해 놨겠지.”

“문제없이 끝내겠습니다.”

“저쪽에서 수를 쓸지도 모르니까 서두르고, 혹시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당분간 떨어져야 할지도 몰라.”

아이들이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 이렇게까지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저쪽의 반응이 심상찮았다.

이 정도로 거절 의사를 보였으면 웬만해선 물러갈 법한데 이상할 정도로 끈질겼다.

‘혹시 홍보영상은 핑계고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닐까.’

주민이 다른 걸 의심하고 있을 때 남 비서가 그를 불렀다.

“사장님?”

“아. 아니야.”

“애들 촬영은 어떻게 할까요?”

“앞으로 얼마나 남았다고 했지?”

“촬영은 여행 촬영이 남았습니다만.”

“여행이라.”

아직 좀 남았군.

그때까지 아무 일 없이 넘어가면 좋겠는데.

“촬영장에 특이사항은 없었지?”

“네. 없습니다. 아무래도 출연진들이 출연진이다 보니 방송국 측에서도 경호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혹시나 모르니 애들 촬영할 때는 더 신경 쓰도록 해.”

“알겠습니다.”

“이만 나가 봐.”

남 비서가 주민에게 인사를 하고 사장실을 나섰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주민은 한동안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저들이 이렇게 끈질기게 나오는 이유.

만약 홍보영상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면?

아이들을 끈질기게 찾는 이유가 다른 것 때문이라면?

주민은 제3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지나친 생각일 수 있지만 아이들에 관해서라면 만에 하나라는 것도 놓칠 수 없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제안을 넣은 관광공사 뒤에 다른 이가 있을 거다. 더 강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꼬리부터 더듬어 가면 머리까지 닿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전에.

아이들의 안전부터 확보해야 했다.

“쯧. 촬영이 빨리 끝나길 기다린 적은 처음인데.”

활동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들을 떠올린 주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잘나가는 예능을 그만 찍으라고 할 수도 없고.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을 만든 누군가 때문에 주민이 속으로 칼을 갈았다.

* * *

“그래서 아무것도 못 하고 왔단 말이지?”

“죄송합니다.”

“그딴 말 듣자고 내가 기다린 줄 알아!?”

허리를 숙인 비서의 모습에 사내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자리에 앉았다.

차단, 차단, 차단.

그가 가져온 소식은 전부 이러이러한 이유로 실패했다는 얘기뿐이었다.

생각보다 탑엔터의 방어는 견고했다.

‘이게 다 오지한과 오지연과 계약한 덕이란 말이지.’

원래부터 탑엔터는 재벌 3세인 공주민 덕에 자본의 부족함 없이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오지한과 오지연이란 걸출한 스타가 나오니 날개를 단 듯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다.

탑엔터뿐만 아니라 HJ그룹 역시 손대는 곳마다 성공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덕분에 이렇게 손 쓰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이번 일은 꼭 성공해야 해.”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많은 걸 희생했는데!

사장의 임기도 끝나고 이미 재임도 끝난 상황이었다.

원래라면 정권이 바뀌면서 사장 역시 다른 인물로 바뀌는 게 관례였지만 이번 관광공사 사장은 이례적으로 재임에 성공한데다 그 기간이 끝났음에도 업무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었다.

노조 역시 현 사장 체제를 반기는지 후임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누구 좋으라고! 빨리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나한테 기회가 돌아올 게 아닌가!’

고작 부사장 자리로 만족할 거였다면 긴 세월 여기서 아득바득 버티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더 놓은 곳으로 갈 거다.

그러기 위해서 저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거야!

내부 인사가 사장에 임명된 적은 거의 없었기에 저들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만 잘 진행해 주면 날 국회로 불러준다고 했어. 혼자 힘으로 해보려 했지만 시간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군.’

고민하던 사내는 눈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는 비서를 보고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됐어. 이만 나가 봐.”

“네. 죄송합니다.”

“알면 다른 수단을 찾아오던가.”

“….”

비서가 대답하지 못하고 나갔다.

쯧. 쓸모없기는.

마땅찮다는 듯이 비서가 나간 곳을 쳐다보던 사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신호음이 가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관광공사 임형기입니다.”

-아, 임 부사장! 오랜만이오.

“하하. 네. 잘 지내셨습니까?”

사내와 수화기 너머 상대와 안부 인사를 주고받았다.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사내가 본론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도움이 조금 필요할 것 같습니다.”

-도움? 설마 연예인 하나 섭외하지 못해서 내 도움이 필요하단 겁니까?

겨우 이딴 일도 처리 못 하냐는 듯한 뉘앙스에 사내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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