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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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만에 짧은 회화가 될 정도로 한국어를 배운 로건이 엄지를 척 들었다.

한창 몸값이 비쌀 때 한국의 예능에 출연한 배우 때문에 고생하는 그의 에이전트에 묵념.

그건 차치하고 짧은 시간에 이 정도 회화를 구사하다니 그의 노력에 감탄했다.

“그런데 어제 방송해서 손님 많이 올 줄 알고 마음 단단히 먹고 왔는데.”

“날씨가, 좀 그렇지?”

채연의 말에 다들 문밖을 쳐다봤다.

벌써 5번째 촬영 날.

이제는 친해진 옹달샘 직원들이 비가 쏟아지는 밖을 보며 말했다.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필 촬영하는 날 제주도 날씨가 좋지 않다니.

가뭄 때문에 힘든 제주도의 사정을 생각하면 좋아할 일이지만 카페 입장으로서는 좋지 않은 날이었다.

“이거 비가 꽤 굵은걸.”

“오늘은 안에 있어야겠다.”

“안? 밖은 안 하나?”

안이라는 말에 로건이 눈을 시무룩하게 물었다.

하긴 일할 때 마당 일을 담당하는 건 그의 몫이었으니까 자신의 일이 줄었다는 거에 시무룩할 법도 했다.

아니, 그 전에 당신 알바생이잖아.

일 없으면 좋아해야 하는 거 아냐?

로건의 행동에 사람들이 웃음을 참았다.

“오늘은 손님이 많이 없겠네.”

“비 오는 날에는 다들 나가기 싫으니까 이해해.”

이런 날은 손님이 많이 없다.

비 오는 날은 어쩔 수 없었다.

“로건이랑 지한이라면 비 오는 날도 로드워킹 할 거 같은데.”

“비 오는 날엔 나도 쉬어야지.”

“우리 애들은 안 쉬지만.”

“애들? 아아. 강아지 산책 말이구나.”

지한과 지연이 키우는 반려동물에 대해서도 아는 채연이 비 오는 날도 고생한다는 지한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반려멍님이 산책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지.

“나도 개나 고양이 키우고 싶다.”

“언니는….”

“누나는 좀….”

“채연, 노우.”

자기 몸 하나 잘 못 챙기는 채연이 누굴 키우겠다고.

오히려 개나 고양이가 채연을 키웠으면 키웠을 거다.

이제 모두 채연이 가사 능력이 빵점이란 걸 안다.

“나도 이제 계란프라이 할 줄 안단 말이야!”

“그동안 다리를 건넜던 프라이팬을 생각한다면 할 줄 알아야지.”

“채연, 나도 요리 잘함.”

그걸로 요리한다고 할 거면 자신도 요리 잘한다는 말이었다.

촌철살인을 날린 로건의 말에 채연이 심통 난 얼굴을 했다.

이렇게 잡담을 하는 데도 손님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

오픈한 지 꽤 됐는데도 안 오는 걸 보면 오늘 장사는 그른 모양이다.

이런 날도 있는 법이지.

오디오가 비면 곤란하니까 알바생들이랑 친목 좀 다녀볼까.

“채연 언니 진짜 삐지기 전에 다른 얘기 해 볼까?”

“어떤 거?”

지연의 말에 지한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때 조금 전까지 놀림을 당한 채연이 손을 들며 의견을 냈다.

“비 오는 날이면 그거지. 으흐흐흐흐.”

“뭔데?”

“무서어운 이야기!”

조금 전 놀린 걸 기억이라도 하듯이 채연이 직원들을 보며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무서운 이야기. ghost!”

“맞아요.”

“그럼 불 꺼?”

“로건 씨. 오늘 뭔가 말이 통하네요.”

채연과 로건이 짝짜꿍하며 카페 안을 돌아다녔다.

아니 친목을 다져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하필 무서운 이야기라니.

난 아직 동의한 적이 없는 얘기를 저들끼리 신나서 준비하는 채연과 로건을 보고 지연이 망연히 서 있었다.

오늘 장사를 공쳤다는 걸 알았는지 가게 안에서 지켜보던 스태프들도 재밌겠는지 초를 가져왔다.

“초네.”

“응.”

“불도 끄는구나.”

“그러게.”

갑분공포이야기로 상황이 진행되자 지연이 솜사탕 씻은 라쿤처럼 허망하게 말했다.

옆에서 지한이 그런 누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다들 모여.”

“롸저.”

“사장님도 와야지!”

“누나. 오라는데?”

“가자.”

지연이 사형장에 끌려가는 죄수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카페는 왜 이리 좁은지.

몇 발자국도 안 걸어서 초를 켠 테이블에 도착했다.

“제가 말을 꺼냈으니 제가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좋다.”

“….”

“시작해요, 누나.”

“이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채연이 으스스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말했다.

누가 배우 아니랄까 봐 감정 잡는 게 우사인볼트보다 빨랐다.

그래 봤자 아직은 하나도 안 무서웠다.

꽈악

“누나? 갑자기 팔은 왜 잡아?”

“손 시려서.”

말과 달리 지연의 손은 따뜻했다.

지한이 누나의 행동을 보고 피식 웃었다.

누나는 옛날부터 호러나 스릴러에 약하다니까.

“담요도 줄까?”

“됐어.”

“따뜻한 거 필요하면 말해.”

“응.”

지한이 누나의 상태를 모른 척 넘어가 주고 있을 때 채연의 이야기가 서서히 진행됐다.

* * *

“제가 ‘섬마을 처녀’ 촬영했던 건 아시죠?”

“아. 그.”

“뭔지 알아. 그거 봤어.”

스태프들이 하나둘씩 말을 보탰다.

채연의 출연작인 ‘섬마을 처녀’를 본 사람들인 것 같았다.

과연. 제목대로 섬에서 촬영한 그 드라마가 채연의 말에 신빙성을 더해줬다.

“그때 있었던 일이에요. 해무가 낀 날 섬사람들은 외지인인 우리에게 말했어요. ‘섬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어. 비가 오거나 해무가 짙을 땐 밖을 나가선 안 돼.’라고.”

채연이 물오른 연기력을 발휘하며 사람들을 으스스한 눈으로 둘러봤다.

손님이 없어서 카페 안에 함께 자리하고 있는 스태프들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왜 그런 말이 있나 싶어서 물어봤습니다. ‘왜 안 되는데요?’라고. 그랬더니 제게 이 경고를 해 준 섬사람이 말해 줬어요.”

꿀꺽

채연이 뜸을 들이자 사람들이 무서우면서도 궁금해하는 마음에 주먹을 꼭 쥐거나 옆 사람을 붙들며 기다렸다.

“‘바다에서 죽은 자들이 올라오기 때문이지.’”

“히익.”

“흡!”

호러 스릴러에 약한 몇몇 사람들이 팝핀을 추며 입을 틀어막았다.

지한의 손을 쥔 지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채연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처음에는 안 믿었어요. 죽은 사람이 바다에서 올라온다니.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죠.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말을 하는 채연이 그날의 일을 회상하는 듯이 몸을 떨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는 듯이 그녀의 시선에 불안이 담겼다.

채연의 행동에 그녀의 말을 듣던 사람들이 덩달아 몸을 움츠렸다.

모두가 그녀의 다음 말에 주목했다.

“에이 설마라고 생각하고 넘겼어요. 섬에 해무가 너무 짙게 껴서 어차피 촬영도 글렀겠다 모두 민박집에서 가볍게 한잔 마시면서 쉬자고 했죠. 마을 사람들이 해 준 경고도 잊고 다들 다음 촬영 힘내자고 하고 있을 때 누가 갑자기 말을 하는 거예요. ‘밖에서 무슨 소리 안 들려?’라고.”

“으아아아.”

“나 이런 거 약한데.”

“그 말을 듣고 다들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그랬더니 뭔가 젖은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철퍽, 철퍽, 철퍽. 처음에는 누가 바다에 들어갔다 나왔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자리에 없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민박집 주인인가 생각했는데 주인 할머니는 일찍 주무신다고 했거든요. 아무도 올 사람이 없는데 발소리가 들리니까 모두 조용히 했어요. 그때! 발소리가 점점 선명하게 들리는 거예요. 그리고 소리도 이상했어요. 발소리와 함께 뭔가 끄는 소리도 들리는 거예요.”

철…퍽! 드드드득

“그래요. 바로 저런 소리가…!”

!!!!!!!!!

모두가 섬뜩함을 느꼈다.

채연이 섬에서 들었다는 소리가 밖에서 들리고 있었다.

221. 마수

저런 소리라고?

무서운 얘기에 귀를 막은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을 보며 짓궂게 놀리던 사람들도

작게 들려온 소리에 하던 행동을 멈추고 몸을 움츠렸다.

모두가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며 옆에 있는 사람과 수신호를 보냈다.

‘이거 무슨 소리야?’

‘혹시 오늘 누구 오기로 했어?’

‘이 비바람 속에 누가 와요!’

‘저거 소리가 이상해요! 젖은 발소리랑 뭐 끄는 거 같은 소리라고요!’

‘뭘 끄는데!’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드드드득, 철퍽 드드드득, 퍽!

발걸음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모두가 두려움이 담긴 눈으로 문밖을 쳐다봤다.

비 때문에 어두운 밖에 길쭉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히아아아악!”

“밖에! 밖에 뭔가 있어요!”

“여기로 오고 있다고요!”

“문 막아! 막아야 해!”

방금까지 무서운 이야기를 듣던 스태프들이 하나같이 몸을 떨며 불붙은 강아지처럼 돌아다녔다.

이게 무슨 일이야!

비 오는 날 나온다는 귀신이 여기 갑자기 나타난 것도 아닐 테고!

밖에 있던 그림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인 줄 알았던 그림자가 가까이 오면서 더 늘어났다.

“히익! 와요! 온다구요!”

“저거 뭐야!”

“하나가 아니야!”

“귀신! 귀신이야!”

“PD님이 나가 봐요! 남자잖아요!”

“그게 뭐! 나도 무섭다고! 강 감독님! 감독님 귀신 잡는 해병대라면서요!”

“해병대라도 귀신은 못 잡아!”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왜 하필 분위기를 낸다며 불 끄고 초를 켰을까.

자신들의 움직임에 일렁이는 초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벽에 비친 그림자가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기겁한 제작진들이 서로 등 떠밀고 있을 때 문 앞에 다가온 그림자가 문을 열었다.

벌컥!

“으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아악!”

“엄마얏!!”

“으워어어!”

말이 되지 못한 비명들이 가득했다.

모두가 혼비백산해 구석으로 도망가고 있을 때 입구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촬영 안 해요?”

“촬영하는 거 맞죠?”

촬영?

예상치 못한 소리에 구석으로 피하던 사람들이 멈춰섰다.

“귀신이 촬영?”

“우리 게스트로 귀신 나와요?”

“무슨 소리야. 사람이잖아.”

“누가 불 좀 켜봐!”

사람이라는 말에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벽을 더듬거리던 스태프가 스위치를 켜자 그제야 카페 내부가 훤해졌다.

밝은 빛에 안심을 한 사람들의 시선이 그림자가 들어온 현관으로 향했다.

“여기 카페 옹달샘 맞나요?”

“한성이 형!”

“알바 모집한다고 해서 왔어요.”

“지수 누나까지.”

한성과 지수가 우비의 모자를 벗으며 들어왔다.

두 사람이 가져온 트렁크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뭐 끄는 소리는 두 사람이 가져온 트렁크 소리였구나.

안도한 지연이 자신도 모르게 멈췄던 숨을 내쉬는 사이 여기저기서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하아아아.”

“후우으.”

“흐아아.”

두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고 있었다.

안심하는 사람들을 둘러본 지연이 아차! 하며 카메라가 있는 쪽을 확인했다.

나 방금 좀 그랬던 거 같은데 혹시 다 찍혔나?

이따 나 PD님한테 보여달라고 부탁해야겠다.

‘쉽게 보여줄 거 같진 않지만.’

부디 최대한 멀쩡한 모습으로 나왔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연이 혼자 방송에 나올 자신의 모습을 걱정하는 사이, 스태프들은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을 지워내기라도 하는 듯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아니, 오늘 올 사람 없다며?”

“죄송합니다. 두 사람이 올 시간이 됐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하마터면 우리 애 졸업식 못 보고 이승 하직할 뻔했어.”

오늘만큼은 출연진 못지않은 활약을 보여준 스태프들이 서서히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시작했다.

게스트를 확인한 사람들이 카메라를 확인하고 마이크를 채우러 다가갔다.

우비를 벗은 두 사람이 빗물 때문에 현관에서 들어오지 못하고 서 있자 지연이 행주를 들고 다가갔다.

“우비는 여기 벗어두고 가. 걸어두면 마르겠지. 트렁크는 이걸로 한 번 닦고.”

“고마워요, 누나.”

“감사합니다.”

한성과 지수가 지연의 친절에 좋아하며 대답했다.

“그런데 두 사람 왜 우산 안 쓰고 우비 입고 왔어?”

“아. 바람 많이 불지도 모른다고 해서 우비 챙겨왔어요.”

“작가님이 마당에서 일할지도 모른다고 해서 우비 입었어요.”

이게 다 제작진의 노림수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비바람을 맞으면서 파라솔을 치우는 알바생!

물에 쫄딱 젖으며 고생하는 알바생!

그동안 못 보여줬던 고난, 역경, 수모!

오늘은 전국적으로 비가 많이 내린다고 했고, 강풍이 부는 곳도 있으니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우리 심장에 안 좋아서 문제지.’

그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 알았다면 제작진들도 다시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아까 메인 작가와 손잡고 비명 지르던 나 PD를 떠올린 지연이 시니컬한 미소를 지었다.

아까는 진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고.

지한이가 꽉 안 잡아줬으면 도망쳤을 거다.

“그럼 카페 옹달샘에 온 걸 환영해. 일단 유니폼부터 갈아입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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