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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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하는 지연의 말에 채연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밤에 단 거 먹으면 살쪄요.”

“8시 넘어서 밥 먹는 건 괜찮고요?”

“그건… 어쩔 수 없잖아요?”

채연이 눈치를 보면서도 꼭 먹고 싶다는 듯이 간절하게 바라봤다.

그래, 이건 야식이 아니다.

늦은 저녁일 뿐.

자신의 작업을 기다리느라 밥도 못 먹은 직원들을 보고 미안해진 지연이 통 크게 인심을 발휘했다.

“혹시 좋아하는 음식 있어요?”

지연의 말에 채연이 조심스러워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스요.”

“네?”

“오므라이스…먹고 싶어요.”

오므라이스 좋지.

밥은 안 해줘도 직접 해 먹으라고 냉장고에 재료를 넉넉히 넣어놨더랬다.

오므라이스 정도면 충분하지.

“좋아요. #로건은 뭐가 좋아요?#”

#지연이 해 주는 거라면 뭐든 다 좋아.#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한결같은 사람이네.

지연이 물감이 묻은 앞치마를 벗었다.

* * *

배부르게 저녁을 먹고 다 같이 1층을 청소한 뒤 올라오니 벌써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후딱 씻고 나온 지연이 화장품을 바르는 동안 채연이 옷가지를 들고 욕실로 향했다.

“그럼 씻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보고하듯이 말 안 하고 다녀오셔도 돼요.”

“아. 그렇죠? 하하하하. 내가 왜 말했지.”

왠지 모르게 지연에게 말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욕실로 들어가는 채연을 본 지연이 생각했다.

‘훈련의 성과가 있군.’

오늘 하루 작업지시를 내리고 먹을 걸로 길들였더니 자신도 모르게 날 따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래, ‘카페 옹달샘’이 끝날 때까지 이렇게 가자.

“아.”

크림을 바르던 지연이 무언가가 생각난 듯 욕실 문을 두드렸다.

-네?

“채연 씨. 오늘 고생했으니까 따뜻한 물에서 푹 지지다 나와요. 나오면서 물 받아 놨어요.”

-어쩐지 욕조에 물이 틀어져 있더라니. 고마워요!

고마울 것까지야.

아르바이트생이 건강해야 일을 시키기 편하지 않겠는가.

내일은 카페 홍보를 위해 돌아다녀야 하기도 했고, 음료 제조랑 서빙을 가르쳐야 했다.

지난번 사전미팅 때 만난 이후로 레시피를 공유해 주기도 했는데 과연 잘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해봐야지.

화장품도 바르고 머리도 말리고 동생도 보고 오니 채연이 욕실에서 나왔다.

푹 지지고 나왔는지 피부가 복숭아 빛이 돌았다.

복숭아 인간이 되어 돌아온 채연이 침대에 흐물흐물 늘어졌다.

“흐아아아.”

“머리 안 말려요?”

“조금만 이대로 있을게요.”

정말 고됐나 보다.

오늘 하루 종일 땡볕에서 잡초 뽑고 잔디 심느라 고생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딱 봐도 채연의 몸은 운동과 멀어 보였기에 저렇게 피곤해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머리 말려 줄 테니까 조금만 일어나 봐요.”

“네에에.”

대답은 했지만 피곤한지 채연은 일어나지 못하고 꼼지락거렸다.

어이구. 아무리 피곤해도 머리는 말려야지.

당신 여배우잖아.

방에도 관찰 카메라가 있다고.

카메라도 생각 못 할 정도로 뻗은 채연을 보고 지연이 드라이기를 들었다.

“이대로 말려 줄 테니까 그냥 편하게 누워 있어요.”

“헤헤. 고마워요.”

위이이이잉

따뜻한 바람이 채연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머리 깊숙이 손가락을 넣어 살살살 털며 따뜻한 바람에 머리카락을 말리는 지연의 손길에 채연이 눈을 감을 채로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지연 씨는, 꼭, 엄마 같네요.”

“예?”

거참. 이제 22살인 사람한테 뭐라는 거야.

내가 영혼은 늙었어도 겉은 어린데.

“제 상상 속, 엄마 같아요. 다정하고, 맛있는 거 해 주고, 챙겨주고….”

엄마면 엄마지 웬 상상 속 엄마?

지연이 채연의 말에 의문이 들었다.

“지연 씨, 같은, 엄마 있으면, 좋겠…다.”

송채연은 엄마가 없나?

잠결에 이어지는 말에 지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머리만 말렸다.

어느 정도 머리가 마른 것 같자 지연이 채연을 불렀다.

“채연 씨. 머리 다 발렸어요. 똑바로 누워서 자요.”

“….”

지연이 조심스럽게 어깨를 흔들어 보았지만 채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단했던 노동을 마치고 뜨끈한 물에 씻기까지 하니 쏟아지는 잠을 막을 수 없었나 보다.

고른 숨을 내쉬는 채연을 본 지연이 채연을 움직여 똑바로 눕혔다.

가벼운 여름 이불까지 꼼꼼히 덮어준 지연이 불을 껐다.

잠들기 전 지연이 동생과 코톡으로 대화했다.

남자 방이 따로 떨어져 있으니 별수 있나.

[뭐 해?]

[씻고 나왔어.]

[늦었네.]

[로건이 누나에 대해 궁금한 게 많더라고. 얘기하다가 늦었어.]

궁금한 것도 많네.

나한테 고마워한다더니 궁금한 것도 많은 모양이다.

별거 아닌 거 가지고 날 얼마나 과하게 생각하는 거야.

누가 보면 진짜 날 좋아하는 줄 알겠네.

[더 늦기 전에 자.]

[안 그래도 누웠어. 누나도 일찍 자. 오늘 힘들었잖아.]

[그래. 나도 누웠어. 채연 씨는 이미 뻗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잘 자.]

[누나도 잘 자.]

노동의 후폭풍이 무서우니 일찍 누워야 했다.

동생과 코톡을 끝낸 지연이 폰을 내려놓으려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언니. 송채연 씨 가족관계가 어떻게 돼?]

메시지를 보낸 지연이 폰을 충전기에 꽂고 누웠다.

217. 세상에 나쁜 애는 없다 (3)

끄으으으

침대에서 괴성이 들렸다.

여기저기 뻐근한 몸에 채연이 눈도 뜨지 못하고 침대에서 꼼지락거렸다.

“지금 몇 시이…헙? 끄악!”

시간을 확인하러 폰이 있는 곳을 더듬던 채연이 평소에 만지던 것과 다른 느낌의 협탁을 만지고 벌떡 일어났다.

맞아. 나 지금 제주도였지.

나 언제 잠든 거야?

자기 전에 지연 씨한테 뭐라고 한 거 같은데.

정신을 차린 채연이 고개를 홱홱 돌렸다.

맞은편 침대의 주인은 이미 일어났는지 잘 정돈된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지각이다!”

어떡해. 늦잠 잤나 봐.

채연이 후다닥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양치하고, 세수하고, 화장품을 바른 채연이 머리를 질끈 묶고 1층으로 내려갔다.

다다다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에 지연이 고개를 돌렸다.

조리대에서 밥을 만들고 있던 지연이 채연을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일찍 일어났네요. 좋은 아침이에요, 채연 씨.”

“네? 일찍? 어어. 좋은 아침이에요.”

“아직 아침 준비 다 안 됐는데 벌써 내려오셨네요.”

채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계를 보았다.

지연의 말대로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여름이라 해가 일찍 떠 착각했던 모양이다.

너무 푹 잔 것 같은 느낌도 거기에 한몫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계단 앞에 서 있는 채연을 보고 지연이 손짓했다.

“이렇게 된 거 아침 준비하는 거 도와줄래요?”

“네. 좋아요.”

지연의 다정한 요청에 채연이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스레인지가 있는 곳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맛있겠다.”

“제주 흑돼지로 만든 김치찌개에요. 맛 좀 볼래요?”

“그래도 돼요?”

지연이 국물을 떠 후후 불었다.

적당히 식힌 국자를 채연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호로록

“! 맛있다.”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에요.”

“지연 씨는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연기도 잘하면서 다른 것도 너무 잘하는 거 아니에요?”

“다 배운 거죠. 채연 씨도 배우면 할 수 있어요.”

지연의 말에 채연이 울상을 지었다.

나는 안 되던데.

처참한 자신의 첫 요리를 떠올린 채연이 고개를 저어 허튼 생각을 털어냈다.

그러는 동안 지연은 깨끗한 볼에 달걀을 풀고 썰어놨던 야채를 집어넣고 있었다.

“달걀은 왜 푸는 거예요?”

“김치찌개에는 계란말이니까 계란말이를 만들어야죠.”

그런 건가?

집에서 김치찌개 먹을 때 어땠더라?

채연이 곰곰이 기억을 떠올렸다.

김치찌개를 집에서 마지막으로 먹은 적이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지연이 생각에 잠긴 채연을 보더니 말을 걸었다.

“요리 잘해요?”

“아니요오.”

채연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그럼 밥은 어떻게 해 먹어요?”

“배달 음식이죠. 어릴 때부터 자주 시켜 먹었어요.”

“어릴 때부터요?”

“부모님이 바쁘셔서 혼자 밥 먹어야 했거든요.”

채연의 말에 지연이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어린아이가 부모 없이 혼자 밥을 먹었다고 말하는데도 채연의 얼굴에는 그림자 하나 없었다.

아마 그녀에게 그런 사실은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이 겪은 일이었기 때문일 거다.

“그럼 좋아하는 음식 말해봐요. 여기 있는 동안은 알바생 입맛에 맞춰서 밥해줄게요.”

“그래도 돼요? 저는 그냥 아무거나 주셔도 돼요.”

“괜찮아요. 얼른 좋아하는 거 말해봐요. 오므라이스 말고 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으음.”

채연이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돈까스요.”

“경양식? 일본식?”

“경약식이요. 넓게 펴서 소스 부은 게 좋아요.”

주문을 접수한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에 돈까스 먹을까.

냉장고에 돼지고기는 많던데.

제주도라 그런지 제작진이 흑돼지를 꽉꽉 채워 넣었더란다.

나 PD가 그럴 리가 없는 사람이라 냉장고 내용물이 꽤 인상에 남았다.

“그런데. 저 여기서 뭐 해요?”

“테이블에 수저 좀 놔 줄래요?”

“넵.”

셰프의 지시를 받은 보조가 잽싸게 움직였다.

“그거 다 하면 냉장고에서 반찬 꺼내서 덜어 주세요.”

“넵!”

그 정도는 잘하겠지?

지연이 채연에게 상차림을 맡기고 프라이팬에 계란물을 풀었다.

바닥이 익고 막 계란을 말려던 찰나 지연의 귓가에 둔탁한 소리가 꽂혔다.

쿵, 덜그럭!

지연이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봤다.

손이 미끄러졌는지 반찬통이 테이블 위에 옆으로 서 있었다.

“….”

“…죄송합니다.”

그녀에게 일을 시켜도 되는 걸까.

지연이 걱정과 불안이 가득한 얼굴로 채연을 쳐다봤다.

채연의 시선이 갈 곳 잃고 허공을 떠다녔다.

* * *

가볍게 감귤밭 주위를 뛰고 온 지한과 로건이 2층에서 샤워하고 내려왔다.

보글보글 소리를 내는 찌개와 냉장고에 있던 반찬, 그리고 계란말이까지.

훌륭한 아침 상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자 모게섬미다.”

지연과 지한의 인사에 채연과 로건이 덩달아 인사했다.

달리고 온 지한이 국자를 들어 김치찌개를 덜었다.

지한을 시작으로 다들 제 몫을 덜어 김치찌개를 한 숟갈 떠먹었다.

“맛있다!”

#읍! 맵습니다.#

#먹으면 적응될걸요? 이게 ‘김치찌개’예요.#

#크흡. 맵지만 맛있습니다. 크으.#

로건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김치 안 먹어 본 사람들은 매울 수 있지.

그래도 할라피뇨보단 나은 게 아닌가?

로건이 ‘크으!’ 하면서 김치찌개를 계속 떠먹었다.

계속 먹는 걸 보니 맛은 마음에 든 모양이다.

#계란말이도 먹어요. 모양 예쁘죠?#

#네. 지연이 만든 겁니까?#

#그럼요. 밥은 내 담당이잖아요.#

그 말에 로건이 포크를 찍어 계란말이를 입으로 가져갔다.

부드러운 식감 뒤에 이어지는 계란말이 김치찌개로 자극받은 혓바닥을 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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