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지연 씨. 화구 왔습니다!”
나 PD가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금방 구해왔다 싶어서 시계를 보니 벌써 꽤 시간이 흘러 있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지?
#그럼 로건. 힘내요. 이따 저녁에 맛있는 걸 준비할게요.#
#지연이 주는 거라면 뭐든 다 좋아.#
어느새 두 사람은 편하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다만 로건의 얼굴이 뜨거운 햇살 때문인지 평소보다 조금 붉었다.
“어때요? 이거 맞나요? 평소에 사용하시던 걸 불러주셔서 있는 건 다 사 왔습니다만.”
“맞는 거 같아요.”
지연이 상자 안에 들어있는 붓을 집어 들었다.
붓을 오랜만에 잡는 거 같다.
스케치노트는 항상 들고 다녔는데 붓의 감촉이 어색하게 느껴지다니.
이거 헨리 교수님 볼 면목이 없는걸.
붓을 잡고 나자 두근거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럼 저 안에 들어가서 작업할게요.”
“어? 어어. 지연 씨 저희가 들어드릴게요.”
“괜찮아요. 이 정도쯤이야. 어?”
“작업할 거지? 들어줄게.”
어느새 다가온 지한이 지연의 손에서 상자를 뺏어갔다.
무거운 화구들이 가득한 상자가 가뿐히 들렸다.
나도 힘으론 밀리지 않는데.
“채연 씨는 어쩌고 혼자 왔어.”
“지친 거 같아서 그늘에서 잠시 쉬라고 했어.”
“아. 이런 노동은 처음이시지?”
원래 청소라는 게 예삿일이 아니긴 하지.
하물며 한 번도 손에 모종삽 한 번 안 들어봤을 거 같은 채연이었다.
근육통 올지도 모르니 뜨끈한 물로 목욕시키고 파스 붙여줘야겠네.
“그래서. 로건이랑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했어?”
“봤어?”
“봤지.”
지한의 말에 지연이 로건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요약해서 말했다.
“우리가 오해했던 거 같아.”
“사정은 알겠어. …누나에 대한 건 오해가 아닌 거 같지만.”
“응? 뭐라고 했어?”
“아니야. 이거 여기 두면 될까?”
“거기 두면 내가 알아서 꺼내 쓸게.”
지한이 테이블 위에 상자를 내려놨다.
지연이 앞치마와 토시를 꺼내 입으며 동생의 얼굴을 살폈다.
로건 얘기할 때 표정이 묘하더니 괜찮은가?
그와 제일 많이 부딪친 건 지한이니까 오해라고 해서 바로 감정이 사라지진 않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에겐 시간이 필요하겠네.’
그렇게 생각하면서 지연은 빠르게 장비를 착용했다.
“머리 다시 묶어야겠다.”
“아. 그러네.”
“하던 거 하고 있어. 머리는 내가 묶어 줄게.”
지한이 비닐을 뜯고 화구들을 정리하던 지연에게 말했다.
“그래. 어디 한번 예쁘게 묶어 봐.”
“알았어.”
동생이 낮게 웃었다.
지한이 지연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었다.
머리를 한데 묶은 다음, 손가락으로 볼륨을 살려 준 뒤 묶인 머리카락을 빙빙 돌려 감았다.
그걸 끈으로 능숙하게 묶자 어느새 훌륭한 로우번이 완성되었다.
“고마워.”
“이 정도로 뭘.”
지한이 잔머리를 몇 가닥 빼 주며 스타일을 정리했다.
어떨 때 보면 미용실 원장님 같다니까.
손재주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지한이가 나보다 더 좋은 것 같았다.
‘내가 동생을 잘 키웠어.’
지연이 배가 부른 것 같은 얼굴로 흐뭇하게 웃었다.
“더운데 밖에서 일하는 거 힘들지?”
“그래도 금방 끝날 거 같아. 애초에 마당이 그렇게 넓지 않아서 다행이야.”
“감귤밭 사이에 있는 곳이잖아. 마당이 넓을 수 없지.”
“그러게. 덕분에 일찍 끝나겠는걸.”
“그래도 날이 더우니까 조심해. 일하는 틈틈이 물 자주 마시고, 중간에 그늘에서 쉬고. 선크림 또 바를래?”
“내가 알아서 할게. 누나도 첫날부터 너무 무리하지 마.”
남매가 서로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서로 누가 더 챙기나 내기하는 것 같던 둘은 지금 촬영 중이라는 걸 떠올리고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까지 걱정만 할 거야.”
“이러다가 끝이 안 나겠네.”
“나는 나가서 잔디 모종 마저 심고 올게.”
“그래.”
손을 흔들어 동생을 배웅했다.
이제 동생도 없으니 내가 일할 차례군.
지연이 등을 돌려 새하얀 벽을 마주했다.
216. 세상에 나쁜 애는 없다 (2)
새하얀 벽 앞에서 지연이 붓을 움직이며 노래를 흥얼흥얼 불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카메라로 모습을 담던 제작진들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잊어버렸던 동심이 다시 떠오를 만큼 발랄한 동요를 부르는 지연의 얼굴엔 생기가 가득했다.
카메라 감독이 벽 앞에서 붓을 움직이는 지연의 뒷모습을 가득 담았다.
제작진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지연은 흥겹게 그림을 그렸다.
‘옹달샘 하면 나무지!’
깊은 산 속에 있는 옹달샘이니까 커다란 나무를 그려야겠다.
맑은 옹달샘 물을 마셨으니 얼마나 튼튼하게 자랐을까.
옹달샘 옆에는 그 산에서 제일 오래된 나무가 있을지도 몰랐다.
‘크고 오래된 옹달샘의 지붕이 되어 주는 거야.’
옹달샘의 지붕이 되어 줄 나무를 상상한 지연이 붓을 움직였다.
스케치 하나 없는 새하얀 벽에 붓이 닿았다.
깨끗하게 먼지를 닦은 벽에 암갈색 선이 그어졌다.
스윽, 슥, 스슥, 스윽
지연의 손이 거침없이 선을 그었다.
옹달샘의 지붕이 되어줄 나무가 거침없이 가지를 뻗었다.
‘더, 더!’
하늘을 가릴 만큼 커다랗게!
나뭇가지가 시원하게 뻗을수록 지연의 기분 역시 상쾌해졌다.
그때 나무가 가지를 뻗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나타났다.
“안 닿아….”
부들부들
붓을 쥔 지연의 손이 더 이상 뻗지 못했다.
이미 최대한으로 뻗은 손이 허공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감히 내 나무가 가지를 뻗는 걸 방해하다니.
더 안 크고 뭐했어, 내 몸!
지연이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가지가 뻗지 못한 위쪽 벽을 올려다봤다.
“사다리 가져와야겠다.”
청소하는데 사다리가 필요하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지연에게 중요한 건 나무의 가지를 뻗게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했다.
‘나무의 성장을 방해하는 자는 가만히 두지 않겠다. 그게 설사 내 키라고 해도.’
지연이 적장의 목을 따 올 것처럼 무서운 기세로 밖으로 향했다.
잔디를 심고 물을 뿌려주던 지한과 채연이 지연을 발견했다.
“누나?”
“로건 어딨어?”
“그 사람이라면 건물 테라스 쪽에서 물청소 중인데.”
“고마워.”
용건만 마치고 테라스로 향하는 지연을 보고 지한과 채연이 멍하니 서 있었다.
“방금 뭐였죠?”
“누나가 로건을 찾았어요.”
“혹시 결투라도 신청하러 가는 걸까요?”
누구 하나 가만 안 둘 것 같은 눈빛이었는데.
채연이 주눅 든 얼굴로 지연이 향한 곳을 힐끔거렸다.
지한이 채연의 말에 묘한 얼굴을 했다.
“그림 그리다가 갑자기 결투요?”
벽에 전쟁 장면이라도 그리는 건가?
카페랑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지한의 반응을 살핀 채연이 곧바로 말을 철회했다.
“그런, 좀 그렇죠?”
채연이 머쓱한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그녀의 말도 이해가 갔다.
그만큼 지연의 기세는 남달랐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지연의 손이 닿지 않아 그림을 못 그렸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지한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누나가 향한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악!
“아.”
“아.”
테라스 쪽에서 굵직한 비명이 들려왔다.
로건의 목이 따였나 보다.
두 사람이 그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 * *
로건에게서 사다리를 뺏어온 지연이 순조롭게 작업을 이어갔다.
어느새 지연의 머릿속에는 눈앞의 그림을 완성하는 것 말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무뿌리 쪽에는 이끼도 그리자. 가지 사이에는 새도 앉아 있고, 틈새로 햇살도 들어오는 거야.’
붓을 놀리는 지연의 얼굴에는 활기가 넘쳤다.
나뭇가지가 뻗어갈수록 지연의 상상도 뻗어나갔다.
왜 붓을 놓고 있었던 걸까.
이렇게 후련한데.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여 있던 스트레스가 한 방에 터지는 것 같았다.
스윽, 슥
커다란 나무를 그렸다.
오랜 세월 동안 우뚝 서 있는 나무를
곧은 기둥을 그리고 넓게 뻗은 가지를 그렸다.
붓칠이 한 번씩 더해질 때마다 나무에 세월이 묻어나왔고
더운 땡볕 아래 시원한 그늘을 주는 나뭇가지가 풍성해졌다.
“와아아….”
“이건 정말이지.”
“대단하다고 듣긴 했지만”
주변에서 뭐라고 말하든 지연의 집중을 깨트릴 순 없었다.
지연은 시간도 잊고 촬영 중이라는 사실도 잊었다.
모든 걸 잊은 지연이 마지막으로 붓을 찍었다.
“후우.”
지연이 깊은숨을 토해내며 붓을 내려놓았다.
온통 하얀색이던 카페 안에는 어느새 그늘을 만들어주는 커다란 나무가 자리하고 있었다.
들어오는 입구에서 보면 바로 볼 수 있는 벽에 그려진 커다란 나무는 보는 이들의 넋을 빼놓았다.
압도적이면서도 포근한 느낌이었다.
옹달샘의 지붕이 완성되었다.
“다했다.”
작업을 끝낸 지연의 기지개를 켰다.
그 모습에 지연의 작업을 지켜보던 이들도 참고 있던 숨을 뱉었다.
지연의 곁으로 지한이 다가왔다.
“고생했어. 누나.”
“고마워.”
나도 얼마 만에 이렇게 후련하게 그림을 그렸는지 모르겠다.
그림을 그릴 때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느꼈다.
지연이 상쾌한 기분으로 동생을 돌아봤다.
짝! 짝! 짝! 짝!
“멋져요! 대단해요! 최고예요!”
#그림을 보고 눈물이 날 뻔한 건 처음이야.#
카페 옹달샘의 직원들이 지연에게 몰려들어 저마다 받은 감동을 뱉었다.
“어떻게 이걸 순식간에 뚝딱 완성했어요?”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어. 갑자기 사다리를 뺏어갈 땐 무슨 일인가 했는데 저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면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이 계속 나무에 향하는지 채연과 로건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저 감탄만 나왔다.
병원을 연상시키던 하얀 벽은 어디 가고 숲속에 들어온 것처럼 웅장한 나무가 서 있었다.
‘설마 제작진이 아무것도 없이 벽을 하얗게 해 놓은 건 누나의 그림 때문이었나?’
왠지 직접 벽화를 그리는 게 아니었어도 누나한테 그림을 부탁했을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아무런 소품 없이 벽만 하얗게 해 놓을 리가 없었다.
‘하여튼 방송국 놈들.’
지한이 벽 하나를 가득 채운 나무를 보면서 감탄하는 제작진을 흘겨봤다.
왜 사장님이 방송국 사람들을 믿지 말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속이 아주 시커먼 놈들이었다.
꼬르르르
“아.”
채연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
빨개진 채연의 얼굴을 확인한 지연이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8시네. 다들 밥 안 먹었지?”
“누나 그림 보느라 감탄한다고 못 먹었지.”
“미안. 디저트 준비도 못 했네.”
“그건 내일 해. 그림 그리느라 피곤했잖아.”
“그래도. 만들어주기로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