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많은 장소 중에 외곽에 있는 오리 불고기 집이라니.
엎드려 모셔야 할 톱스타의 말인데 무시할 수도 없고.
지연과 지한의 말에 나 PD가 젓가락을 들었다.
“음?!”
그리고 신세계를 보았다.
과연 아는 사람만 아는 맛집이라더니 오리 불고기가 극락의 맛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못 먹은 음식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넓고 자신이 모르는 음식도 많았다.
감동한 것 같은 나 PD의 얼굴에 남매가 웃으며 말했다.
“맛있죠?”
“네. 그렇네요.”
“쌈에 올려서 고기랑 이거, 이거, 이거까지 넣어서 드셔보세요.”
“이거랑 이거요?”
“네.”
나 PD는 남매가 추천하는 대로 얌전히 따라 먹었다.
정신없이 오리 불고기를 빠진 나 PD가 정신을 차린 건 남은 양념에 비빈 볶음밥을 전부 다 해치운 뒤였다.
“헙. 내가 언제 이렇게 많이 먹었지.”
후식으로 나온 오미자차를 홀짝거리던 나 PD가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했다.
미팅하러 와서 밥만 실컷 먹었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어쩌다 보니 오리 불고기 코스를 끝낼 때까지 일 얘기를 하나도 못 했다.
“오미자차도 맛있죠?”
“주인아주머니 고향에서 보내준 거래요.”
“아. 그렇군요. 갈 때 사 가고 싶을 정돕니다.”
…가 아니지!
이러다가 또 일 얘기도 못 꺼내고 오미자차만 마실 뻔했잖아?
손에 들고 있던 차를 힘겹게 떼어 낸 나 PD가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장소 섭외가 끝났습니다.”
“벌써요?”
“어디에요?”
“제주돕니다.”
“제주도 좋죠. 금방 구하셨네요?”
“하하하. 미리 봐 둔 곳이어서 손쉽게 구했죠. 두 분 덕에 제작비도 빵빵해서 구하는 데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오.”
“고생하셨네요.”
나 PD의 말에 아이들이 작게 박수 쳤다.
박수를 받은 나 PD가 턱을 들고 말했다.
“두 분이 무슨 아르바이트를 할지도 이미 정했습니다.”
“뭔가요?”
“아르바이트해 본 적 없는데 살짝 긴장된다.”
“괜찮아. 익숙해지면 금방 잘할 거야.”
아르바이트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지한이 설렘 반 긴장 반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슈퍼스타의 아르바이트라니.
벌써부터 흥미진진한 장면이 많이 나올 거 같았다.
나 PD가 두 사람의 당황하는 모습을 담을 생각에 싱글벙글한 얼굴로 프로그램을 설명했다.
“아르바이트 하면 역시 편의점이지만 두 분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촬영장이 마비되겠죠. 그래서 카페로 잡았습니다.”
“아아. 그렇겠죠?”
“예전에 ‘친구 이상, 연인 미만’ 찍을 때 편의점에서 잠깐 촬영했었는데도 사람 엄청 몰려서 촬영하기 힘들었어요. 나 PD님 말대로 편의점보다 카페가 좋은 것 같아요.”
“네. 그렇지만 평범한 알바가 아닙니다. 카페를 운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방금 아르바이트라면서요.
사장님 우리 아르바이트 시킨다면서 갑자기 왜 카페를 운영하라고 하는 거죠?
처음과 말이 달라진 나 PD에게 남매의 시선이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개인 카페를 생각 중입니다. 카페 주인이 직접 커피를 뽑고 디저트를 준비하는 것이 아르바이트가 하는 일이랑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게 뭐.
주인이랑 아르바이트생이랑 같냐.
두 사람의 시선이 더욱 가늘어졌다.
“너무 안 좋게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하는 일은 아르바이트생이랑 다르지 않아요!”
거짓말.
“장점도 있습니다. 메뉴 구성을 전부 여러분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요!”
쫑긋
나 PD의 말에 솔깃했는지 남매의 진득한 시선이 사라졌다.
두 사람의 흥미를 돋우는 데 성공했다는 걸 깨달은 나 PD가 재빨리 카페를 직접 운영하면 좋은 점을 늘어놓았다.
“프렌차이즈가 아니라서 두 사람이 원하는 카페를 직접 꾸밀 수 있습니다! 원하는 카페를 직접 만들고 싶지 않으신가요?”
쫑긋!
먹혔다!
2번 연속 유효타를 먹인 나 PD가 신이 나서 말했다.
“게다가 여러분의 일꾼이 되어 줄 아르바이트생도 섭외했습니다. 매 화 게스트들이 와서 여러분들을 도와줄 겁니다.”
일꾼이 온다면 고생 많이 안 할 거 같은데.
손이 많으면 준비하는 것도 금방 끝날 거고.
아르바이트가 처음인 지한이도 한결 편하게 할 수 있을 거야.
두 사람의 얼굴에 수긍하는 빛이 떠오르자 나 PD가 자신만만하게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아르바이트생으로 두 분도 편하실 분들을 섭외했습니다. 이분들이 자발적으로 와 주신다고 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우리도 편할 사람이라.
그래, 역시 일할 땐 손발이 맞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랑 같이하는 게 최고지.
“누구예요?”
“저희가 편할 사람들이면 역시 친한 사람들이겠죠?”
“맞습니다.”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한성이나 지수인가 봐.
아니면 의외로 승우 아저씨려나?
근데 그 아저씨는 나 PD랑 나중에 다른 예능 찍는데.
우리 때문에 바뀐 건가?
지연이 머릿속으로 예상 출연자들을 추리고 있을 때 나 PD가 힌트를 던져 주었다.
“요즘 두 분과 가장 많이 언급되는 분들을 모셨습니다.”
“?”
“?”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우리랑 같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람들이라고?
요즘 우리랑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람이 누구지?
누가 뭐라고 해도 ‘벤데타’랑 ‘드래곤 엠페러2’에 나오는 사람들이었다.
“하하하. SNS에도 많이 언급되는 분들이더군요.”
SNS라니.
더욱 불길함을 느낀 지연이 동생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누나, 설마.’
‘에이. 아니겠지. 작품 찍느라 바쁘다며?’
‘그렇겠지? 걔도 지금쯤이면 미국 돌아갔겠지?’
애써 다른 이유를 생각하며 두 사람의 결격사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 PD의 입에서 설마설마하던 인물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송채연 씨와 로건 와일로 씨가 흔쾌히 승낙할 줄은 몰랐지 뭡니까.”
“….”
“….”
한동안 안 보인다 싶었더니.
이러려고 안 보였던 거였나.
스토커가 촬영장까지 따라올 모양이다.
* * *
인연이라는 건 돌고 돌아 만나게 된다고 하던가.
피하려고 했었는데 대놓고 만나버렸다.
“지금이라도 못한다고 할까.”
“이미 출연한다는 기사가 쫙 퍼졌는걸. 봐 봐. 팬들이 다 빨리 보고 싶대.”
“그럼 그 두 사람을 바꿔 달라고 하는 건.”
“그러다가 기자들이 이상한 기사라도 쓰면 어쩌려고. 벤데타 때문에 달살커플 팬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유 없이 바꿔 달라고 하면 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 거야.”
“로건, 그 사람만이라도 바꿔 달라고 하자.”
“아. 기사 났다.”
고민하는 사이 두 사람의 출연 확정 기사가 나 버렸다.
“….”
“….”
이렇게 되기 전에 움직이려고 했는데.
화제성에 목맨 방송국 놈들이 한발 빨리 움직였다.
“영훈 오빠도 이 기사 확인했겠지?”
“사장님한테 혼나겠다.”
나 PD로부터 아르바이트생의 정체를 들은 직후 탑엔터에는 때 이른 겨울이 찾아왔다.
어떻게 해서든 연관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이렇게 엮이다니.
공 사장은 당장 회의를 소집했고, 영훈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갔다.
아이들의 좁은 친구 관계를 생각하며 방송국 놈들에게 안일하게 게스트 섭외 권한을 맡긴 영훈이 후회하고 탑엔터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지만
대책을 마련할 새도 없이 손 놓고 당했다.
“누나. 이렇게 된 거 우리 악덕사장이 되자.”
“그래. 아주 모오옷된 사장이 돼서 마구마구 굴려주겠어.”
두 사람이 손을 맞잡았다.
끄우웅
므와옹
그 광경을 보면서 모짜와 인절미는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212. 옹달샘 카페에 어서 오세요 (1)
프로그램명이 정해졌다.
<카페 옹달샘>
제주도의 자연과 어우러진 이름이라나?
프로그램 이름이 어떻게 정해지든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형, 살아있어?”
“죽었다….”
촬영 날짜와 프로그램명, 출연진 등을 알려주러 온 영훈 오빠는 시체 같은 몰골로 소파에 앉지도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사장님한테 많이 시달리긴 시달렸나 봐.
며칠 새 사람이 완전 반쪽이 됐네.
직접 알려주러 온 것도 도망쳐 온 걸지도 모른다.
“오빠. 회사에 말해 놓을 테니까 오늘 자고 가.”
“우리가 말하면 사장님도 이해하실 거야.”
“고맙다.”
진짜 고마웠는지 영훈의 눈가에 이슬이 살짝 맺혔다.
안쓰러운 영훈의 몰골에 남매는 저절로 동정심이 들었다.
지연이 방에서 이불을 꺼내오는 동안 지한이 영훈의 옷을 갈아입혔다.
이럴 땐 어린애보다 손이 많이 가는 오빠라니까.
소파에 누운 영훈의 위로 이불을 덮어주자 금세 곯아떨어졌다.
“많이 고생했나 봐.”
“나 PD님 때문이지 뭐. 프로그램 이름이 옹달샘이라고 했나?”
“이름은 귀엽네.”
“왠지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일 거 같다.”
옹달샘이라는 이름이 주는 이미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영훈이 살짝 뒤척였다.
지연과 지한은 하던 말도 멈추고 영훈이 깰까 숨죽였다.
다행히 영훈은 더 이상 뒤척이지 않고 고른 숨소리를 뱉었다.
“후우.”
“하아.”
혹시나 영훈이 깰까 봐 조용히 있던 남매가 작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영훈 오빠 자는 거 보니까 나도 잠 오는 거 같아.”
“잠깐 낮잠 자는 거라면 괜찮을지도.”
“베개 가져올게.”
지연과 지한이 방에서 각자의 베개를 가져 나왔다.
거실 테이블을 치우고 이불을 깔자 모짜와 인절미가 기웃거리며 이불 위로 올라왔다.
“쉿. 너희도 낮잠 자자.”
“얼른 옆구리에 들어와.”
지연의 말에 아이들이 잽싸게 남매의 옆구리에 붙었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뒤척이던 녀석들이 편한 자세를 찾았는지 움직임이 줄어들었다.
지한과 지연이 그 모습을 보고 소리 죽여 웃었다.
“우리도 이제 자자.”
“누나 잘 자. 인절미도 잘 자고 모짜도 잘 자.”
아이들이 귀를 쫑긋하는 걸로 대신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지연과 지한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거실에는 고른 숨소리가 늘어났다.
* * *
“끄응.”
영훈의 무의식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의식이 부상했다.
그러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소리가 서서히 뇌에 입력되기 시작했다.
“영훈 오빠 일어날 거 같은데.”
“안 일어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수저 하나 더 놓으면 되겠지?”
“응. 어차피 밥 먹이고 보내려고 했어.”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밥을 먹이고 보내려고 했다니.
아이들 덕에 어릴 때 할머니와 함께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저 말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자주 하던 말이었는데.
‘누가 보면 내가 앤 줄 알겠네.’
영훈이 속으로 웃으며 눈을 떴다.
왕!
인기척을 제일 먼저 느낀 인절미가 영훈이 잠에서 깬 걸 알고 다가왔다.
인절미가 일어나라는 듯이 영훈의 얼굴을 핥았다.
헥, 헥, 헥, 헥
“아이고 이 녀석아. 침 냄새 난다.”
“형, 일어났어?”
“그래. 일어나자마자 침 공격을 받았지만.”
영훈이 달려드는 인절미의 얼굴을 잡고 떨어트렸다.
“형 며칠 동안 잠을 얼마나 못 잔 거야.”
“으음. 3일 통틀어서 5시간 잤나?”
“그러나 수명 줄겠다.”
“어쩌겠어. 내가 한 일이 있는데. 그거 수습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안 그러면 사장님이 나 뼈째 발라 드실걸?”
“우리 사장님이? 에이. 그 전에 봐주셨을 거야.”
글쎄다.
사장님이 너희 앞에서만 유해지셔서 그렇지 원래 얼마나 무자비하신데.
문제 일으킨 사람은 칼같이 끊어내는 게 우리 사장님이다.
검사나 경찰 됐으면 죄지은 놈들은 네 발로 엎드리고 다녀야 했을걸?
영훈이 아직도 사장님의 무서운 면을 모르는 지한의 말에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공 사장에 대한 불만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형, 밥 먹기 전에 화장실에 가서 세수하고 와야겠다. 침 냄새나.”
“그 정도야? 내 이 인절미 녀석을 그냥! 이리 와! 내가 아주 진짜 인절미로 만들어주마!”
달려드는 영훈을 보고 인절미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피흉
“웃어?!”
“자자. 애꿎은 인절미 괴롭히지 말고 얼른 씻고 와. 미나 누나도 오늘은 우리 집으로 퇴근한대.”
“미나도? 아이고 알았다. 내가 알아서 갈게. 밀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