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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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로건이 못하는 거겠지?”

스태프들이 수군거리는 게 귀에 들렸다.

오랜 시간 단련된 몸은 그의 자부심이자 자랑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부정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힘으로 밀린다고? 내가?’

그의 동공이 갈 곳 잃고 헤매었다.

으득

그가 이를 악물었다.

“로건. 조금 쉬었다 할까요?”

“아닙니다. …바로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눈이 살벌하게 불타올랐다.

‘몇 번 더 하면 울겠는데?’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으나 떨리는 동공은 숨길 수 없었다.

저런 사람들은 자신의 힘이나 권위가 무너지면 금방 주저앉더라.

조금 더 하면 진짜 울 것 같아서 지연은 이번까지만 하고 그만두기로 했다.

“레디. 액션!”

루카스 감독의 신호에 촬영이 다시 시작되었다.

챙, 스윽, 스각-!

첫 합이 잘 들어맞았다.

첫 번째 고비를 넘긴 로건의 얼굴에 불안이 조금 가셨다.

휘익, 스윽, 챙!

그다음 고비 역시 무사히 잘 넘겼다.

그래! 이대로만 가면!

로건의 얼굴에 자신감이 다시 떠올랐다.

자신에게 내리꽂히는 대검을 흘리면서 거리를 벌린 아이린이 창을 다시 쥐었다.

그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낀 율리안이 코를 찡긋하며 물었다.

“뭐 하자는 거냐.”

“네 말대로 나는 네 상대가 되진 못한다.”

“이제라도 알았다니 다행이군. 그렇다면,”

“그렇지만!”

아이린의 외침에 율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한순간 그녀의 기세가 율리안을 압도했다.

그녀의 외침에 좁아들려는 어깨를 겨우 편 로건이 다음 대사를 기다렸다.

율리안이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살폈다.

“내가 여기서 널 죽이진 못해도 발목은 묶을 수 있을 거다.”

아이린의 얼굴 위로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샛별 같은 두 눈을 본 율리안의 등줄기 위로 불길함이 내려앉았다.

‘뭐지? 뭘 하려는 거냐, 아이린!’

뭐가 뭔진 모르지만 자신의 감각이 경고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눈앞의 존재를 해치워야 한다고.

그것은 대본이 아닌 율리안을 연기한 로건의 본능이기도 했다.

이게 마지막이야.

이것만 하면!

타닥! 후우우웅-!

그 본능에 따르듯이 로건이 커다란 덩치와 안 어울리게 잽싸게 움직이며 지연에게 검을 휘둘렀다.

미리 짠 것보다 훨씬 빠른 타이밍이었다.

아직 아이린은 준비 자세였는데 율리안의 검이 벌써 그녀의 몸에 닿을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루카스 감독과 촬영 감독, 다른 스태프들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어?”

“어어!”

“위험한 거 아니야?”

촬영할 때 다른 이들은 조용히 해야 함에도 그것을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루카스 감독이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촬영을 중지하려고 할 때.

아이린의 머리카락이 허공에 나풀거렸다.

‘어?’

로건이 한순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환하게 열린 자신의 가슴 앞에 와 있는 창끝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당황하든 말든 지연은 다음 대사를 읊었다.

“얼어라.”

보호구를 입은 가슴 위로 서늘한 충격이 내리꽂혔다.

차가운 아이린의 눈동자를 마주한 로건의 눈앞에 얼음꽃이 피어오르는 환상이 보였다.

들어 올린 팔을 내릴 생각도 하지 못한 율리안이 충격에 입을 벌린 채로 굳어버렸다.

“컷! 지연! 로건! 두 사람 다 괜찮습니까?!”

루카스 감독이 컷을 외치자마자 뛰어왔다.

방금은 그가 보기로도 크게 다칠 뻔한 일이었다.

촬영 중 배우가 부상을 당한다면 그것은 오롯이 현장을 감독하는 자신의 책임이었다.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왔을 때 지연이 빙그레 웃으며 두 손을 들었다.

“괜찮아요. 저 멀쩡합니다.”

“후우. 다행입니다. 로건, 당신도 괜찮습니까?”

“저…도 멀쩡합니다.”

“지연이 꽤 강하게 봉을 찌른 것 같았는데 괜찮다고요? 정말입니까?”

“보호대가 있어서요. 그리고.”

지연이 손끝에서 힘을 뺀 덕에 크게 다치지 않았다.

그녀가 봐주지 않았다면 다치는 건 자신이 됐을 거다.

로건이 침을 꼴깍 삼켰다.

지연이 그를 돌아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으세요?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연기를 이어가시다니 대단하네요.”

그녀의 두 눈동자 안에 자신의 얼굴이 잡혔다.

두근

로건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207. 이건 막아야 해!

드래곤 엠페러 촬영도 끝났겠다.

나는 요즘 한국에서 방영중인 벤데타를 보고 있었다.

“목하 화이팅! 나쁜 놈들을 전부 감옥에 보내주라고!”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이 두 사람까지 우리 집에서 같이 보고 있는 걸까.

“한국어로 하는 건데 두 사람 다 알아들어?”

“다는 못 알아듣지만 지한의 연기를 보면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아볼 수 있어.”

“저는 이제 리스닝은 문제없습니다.”

언제 이렇게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대.

지연이 신기한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누나가 TV에 집중하지 못하고 두 사람을 힐끔거리자 지한이 의문을 풀어주었다.

“저번에 누나 생일 준비하면서 연락 자주 했다고 했잖아. 그때 이미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대.”

“그때부터?”

“그 전부터. 우리랑 촬영하고 나서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하더라. 로드리오는 꽤 진지하게 선생님까지 쓰면서 배웠다고 했어.”

“로드리오라면 왠지 그럴 거 같아. 그럼 케이티는?”

“케이티는 우리가 나온 드라마 보고 배웠대.”

아. 드라마 보면서 배운 거구나.

그래도 뭔가 신기하네.

우리 때문에 저 두 사람이 한국어를 배웠다는 게.

신기해하는 지연을 보고 간식을 가지러 갔던 영훈이 돌아와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냐. 너희들 때문에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그 당사자들을 보니까 신기해.”

“새삼스럽게.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벤데타나 봐.”

“응.”

영훈의 말에 지연이 시선을 다시 돌렸다.

어느새 벤데타는 중반부에 접어들었다.

초반에 한국에 들어온 마피아 차기 보스 후보 루치아노와 그에게서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 형사 서목하가 서로 부딪치며 티격태격하는 것이 지나고.

서목하가 쫓던 사건의 범인이 한국에서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대기업의 직계라는 사실이 막 드러난 참이었다.

[대한민국 형사들은 다 이렇게 무모한가?]

[무모하더라도 해야지. 그게 내 일인데.]

서목하의 말을 들은 루치아노의 얼굴에 표정이 지워졌다.

[네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알아줄 거 같아? 그래, 수고했다. 이럴 거 같냐고.]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해.]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조금 전과 똑같은 말에 루치아노의 얼굴에 짜증이 떠올랐다.

날 이렇게까지 화나게 만든 건 로메오 이후로 처음인데.

루치아노가 화를 참는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마음을 가라앉힌 로드리오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서목하에게 말했다.

[그럼 그만둬, 경찰.]

[싫어.]

[그만두라고 했어.]

[싫다고 했어. 네가 뭔데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해.]

목하의 말에 루치아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화사하게 만개한 꽃처럼 웃은 루치아노가 목하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순식간에 눈앞에 미남 배우 뺨치는 얼굴이 들이닥치자 목하는 당황해 피하지도 못했다.

갈 곳을 잃고 흔들리는 눈동자를 확인한 루치아노가 유혹하듯이 그윽한 눈으로 웃자 목하의 얼굴이 빨개졌다.

[뭐, 뭐 하는 거야?]

[네가 그만둘 때까지 이렇게 하고 있을 거야.]

루치아노의 말에 목하가 파드득 몸을 떨며 뒤로 떨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루치아노는 그녀가 자신에게서 떨어지는 걸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덥썩

한쪽 손은 목하의 팔을 잡고 다른 손은 목하의 허리를 감싸 안은 루치아노가 잘생긴 얼굴로 목하를 보며 웃었다.

자신을 넋 놓고 있는 목하를 보면서 루치아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다음도 계속할까?]

[뭘 계속해!]

깜짝 놀란 목하가 온 힘을 다해 루치아노를 밀었다.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는 그 힘에 떠밀린 루치아노가 소파로 넘어졌다.

[난 간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난 계속 수사할 거야!]

목하가 후다닥 달려 나가 루치아노의 집에서 사라졌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릴 들은 루치아노는 떠밀린 자세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에는 언제 웃었냐는 듯이 차갑고 서늘한 마피아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여기서 물러났으면 좋았을 텐데. 서 이사에게 연락해야겠네.]

조금 전 목하가 범인이라고 지목했던 재벌 3세, 서 이사를 언급하면서 루치아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나는 지한이 목하 편인 줄 알았는데!”

“…나쁜 놈들과 한 편인 줄 몰랐습니다.”

케이티와 로드리오가 배신당했다는 표정으로 지한을 돌아봤다.

두 사람의 시선에 지한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저건 드라마라 그런 거야. 루치아노는 마피아잖아.”

“그래도 너무해.”

“히어로가 빌런이 됐어.”

“케이티. 그거랑 이거는 다른 작품이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로드리오도 빌런으로 나오는데.”

“로드리오!”

“아닙니다!”

지한의 물귀신처럼 로드리오를 끌어들였다.

고개를 홱 돌려 로드리오를 바라보는 케이티의 얼굴에 배신감이 가득 떠올랐다.

그 옛날 로마의 황제가 자신을 배신한 친우에게 했던 것처럼 케이티의 시선은 ‘로드리오 너마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 다 진정해.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야.”

“누나 말이 맞아. 현실에서 마피아랑 형사가 저런 사이일 리가 없잖아.”

“맞습니다. 케이티. 진정하시죠. 저건 드라마일 뿐입니다.”

“으음. 하지만 한국 속담에는 ‘드라마보다 현실이 더하다’란 말이 있었어.”

케이티 많이 배웠구나.

드라마를 많이 봐서 그런가?

저런 말도 다 아네.

“아무튼 진정해. 루치아노는 결국 서목하랑 이어지게 될 거야.”

“그렇겠지? 그런데 진짜 드라마니까 가능한 일이긴 하네. 마피아랑 형사가 이어지는 것도. 저렇게 뒤통수친 상대랑 사랑에 빠지는 것도 전부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야.”

케이티가 화면에 뜬 루치아노와 현실의 지한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원래 드라마가 다 그렇지.

옆에서 강냉이를 주워 먹고 있던 영훈이 실실 웃었다.

“저렇게 해도 이어진다는 게 진짜 대단하다. 만약 현실에서 내 일을 방해하고 나쁜 짓을 한 상대가 나한테 고백하면 어떨까?”

“절대 안 받아줘야지! 감옥에 보내버려!”

“그걸 받아주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누가 그걸 받아주겠습니까?”

아직 과몰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케이티와 로드리오가 파삭 썩은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 영훈이 하하하 웃었다.

“그렇겠죠? 하긴 머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 누가 저런 상대를 받아줍니까?”

“왜? 지한이 정도면 받아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잘생겼지, 능력 좋지, 내 여자한테 잘해줄 것 같지.”

지연의 말에 네 사람이 죽은 생선 같은 눈으로 말했다.

“지연, 세상에는 얼굴이 다가 아니야.”

“맞습니다. 지연은 연애할 때 조심해야겠군요.”

“누나. 혹시 누가 누나한테 고백하면 꼭 말해줘.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해볼게.”

“지연아 연애 상대는 잘 보고 골라야지. 함부로 고르면 사장님이 가만히 계시겠니?”

이 사람들이 날 뭘로 보고.

누굴 얼빠로 보는 거야.

“날 바보로 보는 거야? 나도 보는 눈이 있어. 내 말은 현실에 있는 지한이 정도라면 사람들이 다 반할 거란 얘기였다고.”

“아아. 그런 거야?”

“지한 정도라면 확실히.”

“진짜지? 누나, 혹시 나쁜 남자가 취향인 건 아니지?”

“아니라니까. 누난 다정한 사람이 좋아. 그리고 나쁜 남자는 내 스타일이 아니야. 나쁜 남자도 순화했다. 나쁜 놈이라고 불러야지. 거짓말하고 숨기고 이용하는 사람은 최악이야.”

“…혹시라도 그런 놈이 다가오면 바로 말해주렴.”

“알았어. 아무튼 절대! 절대로! 그런 사람은 내 취향 아니야. 알았지?”

진짜 싫다는 것처럼 인상을 쓰고 진저리를 치는 지연을 보고 네 사람이 안심했다.

그런데 지연이 저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건 처음인데.

과거에 그런 사람이랑 만난 적이 있었나?

지연은 아직 누구랑 사귄 적이 없다고 한 것 같은데 묘하게 구체적이군.

이상한 사람이랑 만났다면 바로 사장실 소환 각이다.

“….”

옆통수에 꽂히는 동생의 시선이 따갑다.

동생아, 왜 그렇게 보니.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누난 절대 그런 사람이랑 만난 적이 없단다.

결백해.

다른 사람들도 있는 자리에서 회귀 전에 있었던 일을 언급할 수 없었기에 지연은 조용히 TV만 보았다.

오렌지 주스가 체할 거 같아.

드라마를 보면서 마셨던 음료수가 역류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지연이 불편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다른 곳에서도 그녀의 이상형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요즘 촬영장에서 잠잠하단 소리를 들었습니다. 드디어 로건 당신도 촬영에 협조적으로 나오는군요. 저쪽에 퀸즈 사람이 있어서 많이 걱정했었는데 마찰이 없었던 것 같아 다행입니다.”

“…어?”

“? 로건 제 말 듣고 있었습니까?”

“어어. 어. 뭐라고 했지?”

딱 봐도 자기 말을 흘려들은 것 같은 로건을 보고 그의 에이전트인 윌이 한숨을 쉬었다.

촬영장에서 더 이상 오지한에게 시비를 걸지 않는 것 같더니 아예 정신을 놓고 있었던 거였나.

그 퀸즈에서 애지중지 대한다는 오지한에게 시비를 걸고, 그의 누나인 지연에게 혼쭐이 난 이후 로건이 한동안 잠잠해서 안심하고 있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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