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에 들어가는 상대에 대한 조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상세했지만, 지연은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강한 백인 남성?
지연이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요청하는 것처럼 애런을 올려다보자 그가 부연 설명을 했다.
“지연이 알기 쉽게 말하자면 가부장적인 데다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보면 되겠네요. 아! 지한의 얼굴도 문제이겠군요. 잘생긴 남자를 보면 그렇게 시비 걸고 다닌답니다. 아마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는 게 아닐까요?”
최악이다.
지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지연의 머릿속에 로건에 대한 인상이 최악으로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 * *
오늘도 길어진 촬영을 끝내고 지한과 지연이 집으로 돌아왔다.
말도 안 되는 신경전을 받아준 지한이 먼저 씻는다며 욕실로 향하고 지연은 반가운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말도 마! 안 그래도 그 사람이랑 같이 촬영할 때 얼마나 힘들었다고!
폰 너머로 케이티의 하소연이 들려왔다.
얼마 전까지 우리는 케이티와 같이 촬영했었다.
제작사에서도 1편에서 함께 합을 맞췄던 우리를 배려하여 케이티와 같이 촬영하는 일정을 앞에 배치해 주었기 때문에 즐겁고 편안했다.
2편에서 새로 등장한 적대 진영의 용과 같이 얼마 전부터 촬영하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그때부터 순조롭던 촬영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는 거다.
“로드리오는 그나마 괜찮았다고 하던데.”
-로드리오도 말도 안 되게 힘들었을걸? 정말이지 로드리오도 우리랑 같이 힘들게 훈련받고 스턴트도 위험하지 않은 수준에서 직접 소화하는 편인데 그쪽에서 계속 도발했다지 뭐야! 이거 하나 제대로 못 하냐고!
지연의 얼굴이 얼음이 낀 것처럼 차갑게 얼었다.
자기가 뭐라고 로드리오를 보고 뭐라 해!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우리가 제일 잘 알았다.
1편에서도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결코 훈련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드래곤 엠페러 후속편을 위해서 액션 스쿨에 가서 훈련받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한 운동을 직접 배우기도 했다.
“로드리오는 왜 그걸 말하지 않았을까.”
-지연이랑 지한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 그랬을 거야.
“케이티는 괜찮았어?”
-어쩌겠어. 돈을 받은 이상 맡은 역을 해야 하는걸. 난 훈련소에 전부 다 모였을 때는 처음 본 사이라 말도 잘 안 했단 말이야. 그런데 이런 놈일 줄 누가 알았겠어!
내성적이고 낯가리는 케이티가 저렇게 화를 내며 말할 정도면 얼마나 최악이겠는가.
나와 지한이가 있는 진영과 저쪽 진영은 전투 스타일이 달랐다.
그래서 훈련받을 때도 따로 나눠서 받았다.
-후우. 그래도 짜증 나는 놈이지만 연기는 그래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녹색 괴인을 연상시키는 크고 단단한 몸을 가진 로건은 이미지와 다르게 섬세한 연기를 펼치는 배우였다.
그 덕에 오디션에서도 꽤 높은 점수를 받아 율리안 레드 역을 맡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압도적인 파괴의 화신인 레드 드래곤을 맡은 만큼 한 덩치 하는 로건은 그동안 다른 장면에서는 말썽 없이 촬영을 잘 끝냈다고 들었다.
“애런이 그러는데 잘생긴 남자를 싫어한대.”
-…왜?
“나도 몰라. 옛날에 좋아한 사람한테 못생겼다고 차이기라도 했나?”
-퀸즈 에이전시 사람은 다른 말 더 없어?
“가부장적이고 인종차별주의잔 데다가 잘생긴 사람만 보면 시비를 걸고 다닌대.”
-최악이다.
케이티와 지연의 생각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가부장적인 건 뭐야?
“쉽게 말하자면 무뚝뚝하고 가정적이지 못하고 남성우월주의자란 말이야.”
-뭐야, 그거. 최악이야!
최악이 한 번 더 쌓였다.
지연의 케이티의 절규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루카스 감독이라면 좋은 사람을 뽑을 줄 알았는데 실력 외에 다른 건 보지 않으셨나 보다.
‘아. 그래서 나도 뽑은 거겠구나.’
할리우드에서는 무명인 데다가 아시아계 배우.
루카스 감독은 이곳에서 무엇 하나 증명된 것이 없는 신인인데도 아이린 화이트라는 주요 배역에 날 캐스팅했다.
그런 감독님이니까 로건도 뽑았겠지.
-아무튼 지연! 내일이 ‘그’ 장면이지? 보란 듯이 해치워 버렷!
“저기, 케이티. ‘그’ 장면에서 해치워지는 쪽은 난데….
-아니야! 넌 해낼 수 있어!
스피커 너머로 ‘아자아자’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또 언제 배웠어.
케이티의 응원을 들으니 진짜 해치워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 이왕 죽을 거 혼쭐을 내주고 죽어야겠다.
206. 촬영장의 문제아 (2)
오늘은 드디어 내가 해치워지는 그날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퇴장씬? 죽음씬?
아무튼 오늘부로 아이린 화이트는 ‘드래곤 엠페러’에서 하차한다!
그래서인지 아침부터 영훈 오빠가 초조한 얼굴로 옆에서 서성였다.
“지연아. 물 마실래?”
“아니. 괜찮아.”
“보호구는 다 착용한 거지?”
“응. 이미 몇 번이나 확인했어.”
“몸은 어때? 좀 풀린 거 같아? 어디 결리는 덴 없고?”
“…오빠. 진짜 준비 다 됐어. 이제 곧 촬영인데 진정하는 게 어때?”
“형. 누나가 어디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조금 진정해.”
“죽으러 가는 거 맞잖니!”
걱정이 극에 달했는지 영훈이 버럭 외쳤다.
내가 죽는 씬이어서 그런지 잔뜩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아, 오빠. 제발 여기서 울지 마. 내가 진짜 죽는 것도 아니잖아.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창피하게.
제발 진정해.
지연이 촉촉한 영훈의 눈동자를 보며 간절하게 텔레파시를 보냈으나 영훈에게 닿지 않았다.
“진짜는 아니잖아, 형.”
“그래도!”
실장 달고 조금 진중해진 것 같더니 내가 죽는 걸 촬영한다고 하니 옛날처럼 다시 호들갑을 떠네.
오랜만에 봤는데도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래, 이게 영훈 오빠지.
그래도 그만해 줬으면 좋겠어.
은주 언니, 언제 와.
한국에 잠시 들어갔다가 온다며.
빨리 와서 영훈 오빠 좀 말려줘.
그러나 지연의 바람과는 달리, 은주 실장이 왔어도 영훈과 함께 걱정하면 했지 절대 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옆에서 영훈이 호들갑을 떨고 있을 때 루카스 감독이 디렉팅을 하러 다가왔다.
“지연. 아이린의 마지막. 잘할 수 있겠어요? 비장하면서 아름답고 숭고해야 합니다.”
“믿어주세요. 감독님.”
지연의 말에 루카스 감독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자신만만한 얼굴을 보니 내가 괜한 말을 한 것 같군.
내가 말하지 않아도 지연이라면 알아서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을 텐데.
“지연은 항상 멋진 연기를 보여줬죠. 이번에도 멋진 연기를 보여줄 거라고 믿어요.”
감독의 말에 지연도 마주 웃었다.
고작 한 편을 같이 한 사이지만 둘 사이에는 그것을 뛰어넘을만한 유대가 쌓여 있었다.
그래. 이제는 눈빛만으로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가 됐지!
“거참. 하기 힘들면 스턴트한테 맡기고 빠질 것이지. 무슨 준비가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하여튼 이래서 얼굴만 보고 배역을 뽑으면 안 된다니까.”
대놓고 들으란 듯이 말한 로건의 목소리에 지연과 루카스의 얼굴에 금이 갔다.
지연을 빙 둘러싸고 걱정하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도 뾰족해졌다.
저 터진 만두 같은 게 뭐래.
다음부터는 루카스 감독님이라도 꼭 한마디 해야지.
캐스팅할 때, 배우의 됨됨이도 꼭 살피라고.
영훈이 마지막으로 지연의 보호구를 점검하며 험악한 얼굴로 말했다.
“지연아. 발라버려. 알았지?”
“오빠. 나만 믿어.”
“누나. 믿는다.”
“그래. 날 믿어라.”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이 갚은 게 아니라 깊은 원한을 얻은 율리안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얄미운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섰다.
근육 돼지. 넌 그냥 오늘 죽었다.
지연이 오늘 몇 번의 NG까지 낼 수 있는지 계산하며 카메라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지연의 뒤로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때만큼은 레드 드래곤이 못지않은 뜨거운 기세였다.
* * *
초록색 크로마키 벽이 세워진 곳 앞에서 율리안과 아이린이 마주 보고 섰다.
차가운 얼음 같은 얼굴을 한 아이린이 손에 든 창을 앞으로 겨누었다.
“이 뒤는 한 발자국도 못 간다.”
“그깟 풋내기 헤츨링을 위해 죽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화이트.”
“유치하게 색깔로 날 부를 건가. 내겐 아이린이란 이름이 있다.”
“굳이 그 이름으로 널 불러줄 이유를 못 찾겠군. 비켜라.”
“날 치우고 싶으면 힘으로 해 보시지.”
아이린의 말에 율리안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신전 밖으로 제 발로 나온 이상 넌 더 이상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지.”
터지기 직전 화산 같은 율리안의 말에도 아이린은 차가운 빙벽처럼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대답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무심한 아이린의 시선이 폐부를 찌를 것처럼 율리안에게 향했다.
아이린의 시선을 받은 율리안이 코를 찡긋했다.
‘저 눈!’
뭐든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저 눈이 거슬렸다.
신전 밖을 벗어나면 제대로 힘도 쓸 수 없는 나약한 일족 주제에!
용신의 은혜 없이는 용 취급도 받지 못했을 반푼이가 감히 자신의 앞을 막아서다니.
사나운 그의 심정을 드러내듯이 그의 어금니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컷! 액션 들어가기 전에 바스트 찍겠습니다.”
“후우우.”
“네, 감독님.”
짧지만 서로 날카롭게 신경전을 벌였기에 율리안이 길게 숨을 뱉어 감정을 정리했다.
그에 반해 지연은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가뿐한 얼굴로 감독의 말에 대답했다.
로건이 바스트를 찍기 위해서 조금 전과 같은 자세로 준비하는 지연을 힐끔 쳐다봤다.
‘…내가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밀릴 뻔했어.’
율리안이 이를 드러냈음에도 끝까지 지켜보던 그 눈이 떠오르자 로건이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그 오지한을 상대할 때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 내가 턱 끝에 겨우 닿을까 말까 한 어린 여자애를 상대로 밀린다고?
절대 그럴 수 없어!
나는 무수한 고비를 넘고 이 자리에 섰단 말이다.
얼굴 하나 가지고 운 좋게 이 바닥에 일찍 들어온 것들이랑 비교도 안 될 만큼 노력했는데.
어째서 저 두 사람은 이렇게 쉽게 여기에 있는 거지?
‘지연, 그리고 오지한…!’
로건의 두 눈이 화염이 깃든 것처럼 붉게 타올랐다.
꽈아악
그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찌 됐든 오늘 이 자리에서 아이린은 죽는다.
모두에게 선명하게 날 각인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어디 죽을 때도 그 표정을 할지 두고 보자고.’
로건의 시선이 지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 *
바스트를 찍은 뒤, 로건과 지연은 다음 장면을 준비했다.
다음 씬은 드디어 두 사람이 직접 대치하는 장면.
이 장면을 위해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액션!”
감독의 신호와 함께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아이린이 주로 쓰는 무기는 얼음 창, 율리안이 쓰는 무기는 거대한 대검이었다.
소품으로 만들어 실제 날이 세워져 있진 않았지만 그 외형만으로도 위협을 주기 충분했다.
두 사람은 사전에 짜인 대로 무기를 휘둘렀다.
챙, 스윽, 스각-!
율리안의 파괴력이 높은 무기를 피하고 흘리며 아이린이 창을 찔렀다.
“이까짓 공격으로 날 막겠다고?!”
“무식한 녀석.”
그의 힘에 공격을 흘린 아이린이 저릿한 손아귀에서 힘을 풀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힘으로는 저 녀석을 상대할 수 없어.
계속해서 공격을 흘리면서 빈틈을 노려야 했다.
저 녀석이 노리는 건 결국 에반이니까.
‘에반이 선택의 성소에 들어갈 때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어. 내가 시간을 벌어줘야 해.’
아이린의 얼굴에 굳은 각오가 서렸다.
그 얼굴을 본 율리안의 눈썹이 하늘로 솟았다.
“애초에 너희들의 생각은 잘못됐다! 어째서 우리가 지켜보기만 해야 하나! 우린 군림하는 존재다! 어리석은 존재들 위에 우리가 서야 한단 말이다!”
“그런 생각 자체가 문제라는 걸 왜 모르나. 우리는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지켜보는 자다.”
“우린 위대한 존재다. 신께서 우리를 모든 생명체의 정점으로 만든 이유를 모른단 말인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모든 것을 돌보고 보듬기 위해 태어난 이유다.”
대검과 창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창이 점점 대검에게 밀렸다.
빈틈을 노리는 찌르기와 빠른 베기가 있었지만 묵직한 공격 한 방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역시 레드 일족이야. 파괴력 하나는 좋군.’
이대로 가다가는 율리안이 자신을 쓰러트리고 에반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아이린이 창을 크게 휘둘렀다.
스가가각-!
후웅!
창에 담긴 힘에 율리안이 대검을 놓쳤다.
“컷! NG!”
자신보다 얼굴 하나는 작은 여배우의 힘에 밀려 검을 놓친 로건이 당황한 얼굴로 제 손과 지연을 쳐다봤다.
‘이게 무슨? 방금 힘이?’
그가 땅에 떨어진 검을 허망하게 보았다.
“악력이 약하신가 보네요. 다음에는 조금 더 살살 날리겠습니다.”
“!!!!!!!!!!!”
로건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그 얼굴을 본 지연이 입을 가렸다.
아이고 고소해라.
그녀의 눈이 여우처럼 둥글게 휘어졌다.
그 뒤로도 율리안의 NG 퍼레이드가 계속됐다.
채앵-!
“NG!”
이번에는 첫 합부터 검을 날려 먹었다.
일부러 검을 놓치지 않으려고 꽉 쥐었는데!
챙, 스그극.
후웅-!
한 번 부딪친 뒤 아이린이 창으로 검을 흘리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에서도 창이 흘리는 힘을 이기지 못해서 검을 쥔 손이 허공에 붕 떠버렸다.
다행히 검은 놓치지 않았다.
“NG!”
당연히 NG였다.
로건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와. 로건 팔뚝이 내 허리만 해서 힘 좋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레슬링 그만둔 것도 벌써 몇 년이냐. 저 근육도 이제 물살이 된 거겠지.”
“그렇겠지? 아이린이 저렇게 가녀린데 설마 저 힘에 밀리려고.”
“생각해 봐라. 저 하얀 팔뚝으로 나무 기둥만 한 팔뚝을 이길 수 있을 거 같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