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이 말해서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에도 철왕은 둘에게 꼭 이르라며 신신당부했다.
그 말에 담긴 철왕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지한과 지연이 간질간질한 것을 참는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PD님.”
두 사람이 통화가 끝난 거 보고 영훈이 다가왔다.
“유 PD님 어때?”
“다시 자신감 좀 찾은 거 같아.”
“그래. 다행이네.”
지한의 말에 영훈이 안도한 얼굴을 했다.
KBC와 사이는 다른 방송국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스타 PD와는 잘 지내면 좋으니까.
뭐, 사적으로 지내기에도 좋은 사람이기도 했고.
“그나저나 오늘도 조금 시간이 걸릴 거 같은데. 너흰 괜찮아? 안 피곤해? 모니터링한다고 일찍 일어났잖아.”
“괜찮아. 우리 원래 일찍 일어나잖아.”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났으면서.”
“오빠도 우리랑 같이 일어났잖아. 오빤 괜찮아?”
“너희도 내 나이 되어봐라. 늙으면 잠이 없어져.”
거짓말.
우리 때문에 일부러 일찍 일어났으면서 저렇게 말하기는.
가뜩이나 매니저는 일이 많아서 잠도 잘 못 자는 거 아는데.
남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영훈을 올려다봤다.
그 시선을 느낀 영훈이 고개를 홱 돌렸다.
애들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져서 이런저런 말도 다 하게 된단 말이지.
영훈이 화제를 돌렸다.
“사람들 반응은 어때?”
“지금 기사 몇 개 들어가서 보는데 다들 울고 있어.”
“카페도. 지한이랑 내 카페, 연합카페 등등 다 가 봤는데 울어.”
“좋아. 그럼 잘된 거네.”
팬들이 울었다면 일단 그건 좋은 거다.
그 사람들은 망해도 울고 대박이면 더 우는 사람들이니까.
“미국에서도 모니터링할 수 있지만 이왕이면 한국에서 하고 싶었는데.”
연예면을 가득 채운 기사를 보고 지연이 아쉬운 듯이 말했다.
악당을 악당이 해치운다는 몇 년 후에 유행할 요소가 들어가 있는 드라마였다.
시청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지 않을 리 없었다.
아직 한국에서 악을 악으로 응징하는 서사는 대중적이지 않으니까.
방송국이나 팬들을 만나면서 그 생생한 반응을 확인했어야 했는데.
그런 지연의 걱정을 알고 있다는 듯이 영훈이 지연의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아. 우리 애들이 열심히 모니터링해 주고 있으니까. 커뮤랑 각종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 기사까지 전부 다 확인 중이야. 지금까지는 다들 너무 좋대.”
“그렇다면 다행이고. 끝까지 잘 갔으면 좋겠다.”
“지연이 너 평소답지 않네. 예전에는 이거, 저거, 요고 딱 집어서 해야 한다고 했잖아. 잘 될 거라면서.”
그건 내가 알고 있는 드라마였으니까 그렇지.
옆에서 동생이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지연이 왜 그 작품을 선택했는지 이제는 알고 있으니 나오는 반응이었다.
“아무튼 지금 너희들한테 중요한 건 ‘드래곤 엠페러’ 촬영이라는 거 알지?”
“알아. 형.”
“알고 있어. 지금은 ‘드래곤 엔페러’에 집중해야 한다는 거.”
“그래. 그거면 됐어.”
어제까지만 해도 루치아노와 재벌녀 역할로 화면에 나왔던 두 사람이지만 지금은 그 모습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배역을 맡더라도 순식간에 몰입하고 연기할 수 있는 남매를 본 영훈이 배가 부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오늘도 힘내자고.”
“네!”
“응.”
* * *
남매들이 머나먼 땅에서 영화 촬영을 하고 있을 무렵.
한국에 있는 탑엔터는 전쟁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네. 죄송하지만 지금 인터뷰를 하기 힘듭니다.”
“오지한 배우 스케줄이 꽉 차 있어서 현재로서는 힘듭니다.”
“벌써 다른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어서요.”
통화를 받을 수 있는 인력은 전부 수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분명 회사가 크고 소속된 배우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홍보실 인원도 늘렸을 텐데 지금 인력으로는 밀려 들어오는 문의를 전부 감당하기 힘들어 보였다.
“…저러다 한 팀장이 한 번 터지겠군.”
“전화선 뽑으라고 할까요?”
“전화선 뽑으라고 해. 어차피 중요한 제의는 메일이랑 담당자에게 연락이 가게 되어있어.”
“알겠습니다.”
드라마가 끝난 직후부터 다음 날인 오늘까지 여전히 쉴 새 없이 전화가 들어오고 있었다.
다행히 무례한 질문이나 압박은 들어오지 않아 응대가 한결 편해 보였으나 어마어마한 양의 통화가 들어오다 보니 직원들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예전에 한 번 뭣 같은 말로 직원들의 혈압을 오르게 했던 기자들과 언론사를 족쳐놓길 잘했다.
‘역시 본보기로 삼길 잘했군.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으려나. 남 비서에게 보고받을 때가 된 거 같기도 하고.’
워낙 악질들이라 이것저것 걸리는 게 많아 전부 엮어서 보내버렸다.
탑엔터 공 사장에게 찍힌 게 아니라 HJ그룹 삼남에게 찍혔다는 소문이 돈 기자를 받아줄 곳은 없었다.
주민은 그 이후로 손을 쓰지 않았으나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반년에 한 번씩 보고받고 있었다.
적지 않은 수고가 들어가는 일이었지만 내 새끼에게 막말을 한 기자들에게 품은 주민의 원한은 깊었다.
‘10년 정도 지켜봤으니까 앞으로 10년 더 지켜볼까? 딱 2022년까지만 감시하자.’
그 정도면 우리 애한테 한 말을 갚기 적당한 기간일지도?
아무튼 중요한 건 그 머저리들이 아니었다.
우리 애가 나온 드라마가 잘 나가고 있다는 거니까.
‘벤데타’는 이제 시작했을 뿐이다.
* * *
“연락이 안 됩니다.”
“전화기 선 뽑은 거 같은데요?”
“어떻게 할까요?”
신입기자들이 울상을 하고 한 곳을 쳐다봤다.
그곳에서 막내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던 여기자가 팔짱을 풀며 말했다.
“그래서? 전화 안 받으며 기사 못 써?”
“아닙니다!”
“그렇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추측성 보도?”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한 명이 답을 내놓았다.
그 말을 들은 여기자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걸친 채 손을 움직였다.
딱!
“악!”
“이게 어디서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은 기사를 쓰려고. 벌써부터 아-주 못된 것만 배웠다? 너 누가 그렇게 가르쳤어?”
조금 전의 미소가 거짓이라는 듯이 막내의 이마에 딱밤을 때린 여기자가 살벌하게 몰아세웠다.
그 모습을 본 다른 막내들이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너 또 애들 잡냐?”
“선배님!”
편집국장을 편하게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여기자를 본 막내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국장님한테 선배님이라고 편하게 불러도 되나?
딱!
“악! 아파요. 선배님.”
“회사에서는 국장님이라고 불러라.”
“예전에는 안 그러더니 나이 들더니 권력에 맛 들었어.”
“씁. 그게 아니라 애들이 놀라잖아.”
국장이 막내들을 향해 눈짓했다.
그걸 본 여기자가 얄궂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차피 내 밑에서 일할 건데 내 스타일에 적응하는 게 좋을걸요?”
“어휴.”
국장이 이마를 짚었다.
얘랑 더 말해서 뭐해.
내 머리만 아프지.
“그래서 무슨 말 하고 있었는데.”
“오지한이랑 지연 취재요.”
여기자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저 두 사람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여기자와 편집국장에게는 더욱 특별한 이름이었다.
“애들 취재시키려고?”
“네.”
“지금 그 두 사람 한국에 없을 텐데.”
“알아요.”
국장의 말에 여기자가 따박따박 대답했다.
막내들이 말없이 눈알만 굴렸다.
국장의 얼굴이 점점 부드럽게 풀렸다.
“좋아. 취재해.”
“옙! 다녀오겠습니다.”
“애들 너무 굴리지 말고.”
“뭐. 보고요. 너희들 뭐 해. 얼른 짐 챙기지 않고.”
여기자의 말에 막내들이 허둥지둥 일어나 짐을 챙겼다.
“그런데 선배님. 아까 국장님이 두 사람은 한국에 없을 거라고….”
“맞아. 그래서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갈 거야.”
그게 어딘데요? 우리 지금 어디로 취재하러 가요?
막내들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다들 여권은 있지? 걱정 마. 내가 해 봐서 아는데 미국 땅에서 두 사람 찾는 거 일도 아니야.”
여기자, 아니.
편집국장이 된 구성민과 함께 과거 다짜고짜 미국 땅을 밟아 인터뷰를 따 온 매일일보의 전설, 한슬기가 경악하는 막내들을 돌아보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204. 착각이야
슈우우우웅
비행기가 뜨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소리에 매일일보 신입 기자들이 허탈한 얼굴로 공항을 쳐다봤다.
“이게 지금 꿈은 아니겠지?”
“…어흑!”
“엄마.”
장장 10시간이 넘는 비행을 하고 낯선 땅에 내동댕이쳐진 기자들이 길잃은 아이처럼 공항 한복판에 서 있었다.
“너희들 뭐 해?”
“선배님. 저희가 정말 여기서 오지한과 지연의 인터뷰를 딸 수 있을까요?”
“걱정 마. 내가 해 봐서 아는데 그렇게 어려운 거 아니야.”
어려운 게 아니기는.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라면 대한민국 언론사들은 왜 전부 두 사람 인터뷰를 못 따고 있는 건데.
갑자기 끌려와 낯선 환경에 놓인 신입 기자들의 눈이 뾰족해졌다.
라떼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 눈을 본 슬기가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눈빛을 쏘아 보냈다.
‘하여간 요즘 것들은 끈기가 없어요, 끈기가.’
직접 취재하는 것도 배워야 하는데 회사에서는 맨날 우라까이 하라고 하니까 애들이 뭘 알겠나.
이러니 제대로 취재하지도 않고 뇌내망상으로 글 쓰는 소설가들이 늘지.
우리가 기레기라고 욕먹어도 할 말이 없어.
쯧쯧쯧.
슬기의 눈이 점점 더 가늘어졌다.
조금 전 낯선 환경에 정신이 나가서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던 신입들이 전부 눈을 아래로 깔았다.
“내가 아무렴 그냥 왔겠냐.”
“선배님?”
“그럼, 혹시?”
“두 사람이 어딨는지 아세요?!”
막내들이 기대가 담긴 초롱초롱한 눈으로 슬기를 쳐다봤다.
대학 졸업만 했지 아직 뽀송뽀송한 애기들인 신입들을 본 슬기가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폰을 들어 보였다.
“고영훈 매니저랑 미리 연락했다.”
“오오오오오오오!!!”
“우오어어어어어!”
“썬배니이이임!!!”
선.배.님!
선.배.님!
선.배.님!
고영훈 매니저가 어릴 때부터 오지한과 함께했던 매니저라는 사실을 모르는 연예부 기자들은 없었다.
그런 고영훈의 번호를 가지고 있다니.
심지어 오기 전에 미리 통화를 했다니!
선배에 대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날 따라오도록, 제군.”
“““옛썰!!!!!!!”””
슬기의 뒤를 따라 세 사람이 보무도 당당하게 공항에서 벗어났다.
* * *
영훈이 기자들을 데려오자 분장을 마친 지연과 지한이 네 사람을 환영했다.
“오랜만입니다, 오지한 씨. 지연 씨.”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한 기자님.”
우와아아아.
진짜 오지한이랑 지연이다.
선배의 뒤를 따라와 처음 할리우드 촬영장에 입성한 신입들이 남매의 실물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인터뷰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에요. 제작사에서도 안에서 인터뷰해도 된다고 허락했고, 저희도 영화 촬영 때문에 한국에 돌아가기 힘들었거든요.”
“마침 기자님이 직접 와 주신다고 해서 저희도 잘됐다고 생각하던 참이에요. 그런데 정말 저도 인터뷰하는 거 맞나요? 지한이만 하는 게 아니라요?”
“네. 지금 두 분 다 화제니까요.”
이제 더 나오지 않을 캐릭터를 가지고 인터뷰할 게 있을까?
아! 한국은 지금 고작 1, 2화 나왔었지.
댓글에서도 나 더 나와달라고 팬들이 울었고.
예고 영상에서도 나와 같이 촬영한 씬을 편집한 영상을 내보내기도 했으니 나도 같이 껴서 인터뷰하는 거구나.
머릿속에서 상황을 다 정리한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애런과 대화를 하고 온 영훈이 모두에게 말했다.
“말씀드린 대로 1시간 정도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허락된 선에서 촬영 현장을 찍으실 수 있다고 하네요.”
“네. 알겠습니다. 얘들아, 들었지? 얼른 준비해.”
“예, 옙!”
“알겠습니다!”
“넵!”
영훈의 말을 들은 슬기가 막내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얼른 키워서 부려 먹어야지.
* * *
인터뷰 준비는 순식간에 끝났다.
아이린과 에반 분장을 한 두 사람이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녹음기를 켜고 시작을 알린 슬기가 두 사람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매일일보 한슬기입니다.”
“배우 오지한입니다.”
“가수 겸 배우 지연입니다.”
가볍게 인사로 서문을 연 슬기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다.
“벤데타의 인기가 예사롭지 않은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실감이 잘 안 나요. 기사나 카페를 보면 난리가 난 거 같은데 저는 지금 미국에 있으니까요. 그래서 잘 와닿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럴 수 있겠네요. 실감이 나지 않으신다니 아쉽네요. 얼른 촬영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그 반응을 직접 확인하시면 좋겠습니다. 다음으로는 배역에 관한 질문입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마피아 보스로 나왔죠. 주인공이 나쁜 놈인데 어떠셨어요?”
“사실 제가 악역이 처음이 아니어서 그렇게 낯설진 않았어요.”
“기억납니다. 바이러스에서 이미 백신 역을 맡으셨죠. 죽음의 천사라는 이명을 얻었는데 이번에는 어떤 별명을 얻을 것 같나요?”
“음. 글쎄요? 팬들께서 불러주신다면 뭐든 다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한 지한이 상큼하게 웃어 보였다.
벤데타에서 나왔을 땐 그렇게 카리스마 넘치고 우아한 도살자 같았는데 이렇게 보니 순둥이가 따로 없었다.
이게 바로 갭모에란 것일까?
카메라를 잡고 있던 신입이 지한의 미소를 보고 반사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찰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