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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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시작하는 7월.

<벤데타> 첫 방송 날짜가 확정됐다.

* * *

“내가 진짜 이날만 기다렸다.”

드디어 이날이 왔다.

미술 입시 준비생이었던 예지(플래닛, 지한사랑)가 번뜩이는 눈으로 화면을 쳐다봤다.

그 옛날 미술 입시 준비생이었던 예지는 디자인과에 입학하여 훌륭한 개인 쇼핑몰 창업자가 되었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남성 의류 전문 쇼핑몰을 창업했는데 그녀의 뮤즈가 누구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한 사실이었다.

“지한이 슈트 핏 너무 좋던데. 하지만 개인 온라인 쇼핑몰에서 슈트를 내긴 힘들어. 하지만 언젠가는.”

내 옷을 지한이한테도 입히고 말겠어.

예지가 무슨 상상을 하는지 위험한 얼굴로 흐흐 웃었다.

내일은 공장에 가 봐야 해서 일찍 일어나야 했지만 이건 놓칠 수 없었다.

그까짓 잠. 죽어서 자면 돼지.

지한이의 속눈썹 한 톨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TV도 큰 사이즈로 바꿨다.

적금을 깨야 했지만 아깝지 않았다.

“여전히 광고가 많구나.”

종편이 등장한 이후, 공중파의 위세가 예전만 못했다.

그런데 지한이가 나온다는 것 하나만으로 첫 화부터 무수히 많은 광고가 붙었다.

하지만 이 기다림 끝에 지한이를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아쉽지 않았다.

잠시 후,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 로고가 올라왔다.

[벤데타]

[–1화-]

로고가 사라지고 멋진 풍경이 펼쳐졌다.

이국적인 풍경과 맑은 하늘, 푸르른 바닷가, 길게 뻗은 도로.

부우우우웅!

푸른 나무와 파아란 바다가 보이는 곳을 고급 외제 차가 질주했다.

오픈카 덕에 운전하고 있는 이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벨 것 같은 날카로운 턱선

꽃잎이 물든 것 같은 입술

오뚝한 콧날

백설 공주처럼 투명한 피부

목에 튀어나온 아담스 애플 덕에 그 존재가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런데도 미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사람이었다.

그가 차를 몰고 도착한 곳은 거대한 부지가 있는 대저택이었다.

저택 입구에 도착한 미남자가 차에서 내리자 검은 양복을 입은 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루치아노#]

미남자가 검은 양복의 덩치들의 인사를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선글라스를 벗어 옆에 있는 이에게 내밀었다.

“꺄아아아아악!!!”

지한의 얼굴이 화면 가득 잡혔다.

예지가 참지 못하고 베개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화면 속에서 다른 사내에게 선글라스를 건네준 미남자가 긴 복도를 거닐었다.

어느새 그의 옆에는 지적이고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가 서 있었다.

[#보스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습니다.#]

이지적인 외모의 사내의 말에 미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승계작업을 서둘러야겠군.#]

[#이미 준비 중이지만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로메오 녀석이 귀찮게 하기 전에 일을 다 끝내야 하는데 그쪽은 어때?#]

[#다른 조직의 사람과 비밀리에 만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조직을 끌어들이겠다? 그 녀석의 뇌는 치즈 덩어리기라도 한 건지.#]

미남자가 시니컬하게 구멍이 숭숭 뚫린 치즈와 로메오란 사내의 뇌를 비교했다.

능력도 없는 주제에 욕심은 많아서.

“크흐흐흐그그. 지한이 너무 멋있어. 잘생겼어. 최고야.”

예지가 핥기라도 할 것처럼 화면 너머에 있는 지한을 집요하게 바라봤다.

쭉쭉 뻗은 팔다리와 옷 위로 살짝 드러나는 잔근육을 보고 있으니 어느새 지한이가 다른 이들과 함께 기다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미남자와 연령대가 다양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보스의 전언을 들었다.

보스가 선언했다.

‘아시아 마약 시장을 장악해라.’

보스의 후계라는 정통성을 얻을 조건이었다.

[#보스께서 아직도 아시아 시장 진출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셨군#]

갈색 머리칼의 중년 남성이 말했다.

[#당연히 진출해야지! 그쪽 시장이 요즘 얼마나 돈이 되는지 모르나? 그래서 네가 안 된다는 거야. 겁쟁이 알론소#]

[#그 입 닥쳐, 로메오.#]

중년 남성이 자신을 보고 비아냥거린 젊은 남성에게 외쳤다.

로메오라 불린 남성이 알론소의 사나운 말에도 지지 않고 시선을 쏘아 보냈다.

그 모습을 보던 잘생긴 미남자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로메오가 놓치지 않고 미남자에게 시비를 걸었다.

[#뭐가 웃기지?#]

로메오의 말에 미남자가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여기저기 이를 드러내지 마, 로메오. 겁먹은 강아지가 짖는 것 같잖아.#]

[#말 다 했어!?#]

미남자의 말에 로메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메오가 미남자의 멱살을 잡을 것처럼 거센 기세로 다가갔다.

[#다들 그만하시죠!#]

보스의 말을 전하러 온 이가 세 사람을 말렸다.

그의 말에 로메오가 욕을 하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미남자가 변함없는 자세로 지켜봤다.

미남자가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메신저를 돌아봤다.

[#계속하세요.#]

[#네. 그럼 이어서 말하겠습니다. ‘내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가지고 오는 이에게 내 자리를 물려주겠다.’ 이상입니다.#]

[#알겠습니다.#]

보스의 말을 들은 알론소와 로메오가 자리에 앉아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미남자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기가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보고 로메오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가는 걸 보니 고향으로 가고 싶었나 보지? 그래. 어서 네 나라로 꺼져버려.#]

[#로메오!#]

도를 넘은 로메오의 말에 알론소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쳤다.

미남자가 등을 돌린 채 우뚝 서 있었다.

미남자의 우뚝 선 다리에서 화면이 서서히 올라갔다.

마침내 화면에 그의 등이 잡혔을 때, 예지는 숨도 쉬지 못하고 그의 기세에 압도된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꿀꺽

예지가 힘겹게 침을 삼켰을 때 미남자의 상체가 서서히 돌아갔다.

천천히 드러난 그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그 얼굴에 로메오가 잠시 기가 죽어 주춤하는 것이 보였다.

[#내 나라는 이탈리아고, 내 이름은 루치아노야. 아무리 멍청하다고 하지만 설마 내 이름도 외우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그래. 그 치즈 덩어리같이 구멍투성이인 뇌에 똑똑히 박아두도록 해.#]

화면에 미남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됐다.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루피노 패밀리의 루치아노야.#]

루치아노의 두 눈이 차갑게 타올랐다.

203. <벤데타> (3)

화려한 붉은 드레스에 보석이 알알이 박힌 액세서리를 한 여성이 루치아노와 한 화면에 잡혔다.

눈이 멀 것 같은 미모의 여성을 보면서도 루치아노는 미동 하나 없었다.

그때 루치아노의 가면을 쓴 듯한 얼굴에 금이 갔다.

[그런데 그쪽 한국어 잘하네요? 생긴 것도 동양인에 더 가까운 거 같고, 혼혈인가? 아님 입양?]

“끄으으윽.”

보고 있던 예지가 참지 못하고 신음성을 냈다.

어떻게. 방금 지한이가 찌푸린 얼굴 너무 좋아.

개섹시해…!

입을 틀어막은 그녀의 시선은 화면에 나온 지한과 지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루치아노의 품에서 총이 나왔다.

[그, 그 총은 뭐야? 장난이지?]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여?]

루치아노의 사나운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철없이 입을 함부로 놀리던 재벌 3세의 동공이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떨렸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나와 거래를 하던 상대의 딸.]

[그걸 알면서 그래?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거래도 끝이야.]

[아아. 그 거래.]

철컥

안정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보고 있던 예지는 자신에게 총구가 겨누어 진 것처럼 침을 꼴깍 삼켰다.

피부에 와닿는 위험에 여인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녀를 루치아노가 막다른 곳으로 사냥감을 모는 포식자처럼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쫓았다.

[네가 조금 더 생각이 있었으면 감히 내 앞에서 동양인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지 않았을 거야. 나는 그 말을 하는 자를 살려둔 적이 없거든.]

[모, 몰랐어. 미안!]

뒤로 물러나던 여인이 테라스의 끝에 닿았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했잖아!]

더는 물러날 곳이 없음을 안 여인이 발악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마치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와 주길 희망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루치아노의 불쾌한 음성에 그만 둬야했다.

[시끄러워.]

[끕.]

자신을 구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절망

눈앞에 존재에 대한 공포

조금 전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

그 모든 것을 처음 겪는 여인이 가녀린 목소리를 내었다.

[아, 아빠.]

[여기 네 아빠는 없어. 널 구해줄 사람도 없지.]

[여기 사람들이 많잖아! 날 죽이면 너도,]

[너 하나 죽인다고 해서 이 나라에서 나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총구가 심장 위에 닿았다.

[여긴 이탈리아야. 멍청한 여자.]

탕-!

흩날리는 꽃잎처럼 붉은 무언가가 허공에 뿌려졌다.

여인의 몸이 천천히 뒤로 넘어가 테라스 밖으로 떨어졌다.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붉은 드레스를 휘감은 여인이 아래로 사라졌다.

아름답게 스러지는 붉은 꽃이 멈추더니 OST가 흘러나왔다.

어느새 1화가 끝나고 다음 화 예고가 나오자 예지가 정신을 차렸다.

“와아아아악!!!!!!!!!!!!”

팡-! 파앙-!

예지가 쿠션을 내리쳤다.

조금 전 루치아노를 연기한 지한의 눈빛에 압도되어 숨도 못 쉬던 것도 잊은 그녀는 멋진 장면을 보고 울부짖었다.

먼지가 풀썩풀썩 날렸지만 이따위 걸로 내 감동을 멈출 수 없어!

“켈록!”

먼지는 그녀의 감동을 멈출 순 없었지만 대신 비명을 멈추었다.

기침을 하면서도 예지는 다음화 예고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너무 멋있잖아! 젠장 너무 좋아! 두 사람 와꾸 합 미쳤어! 더 해 줘! 지연이는 왜 벤데타에 더 출연을 안 한 거야!’

둘이 정식으로 한 작품에 출연한 건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이 다였다.

그 이후로는 포상 휴가나 까메오나 그런 자잘한 만남밖에 없었다.

너무해!

같이 작품 더 해 줘!

많이많이 해 달란 말이야!

한 프레임 안에 같이 잡혀 줘!

그 바람은 예지뿐만 아니라 ‘벤데타’를 본 모든 시청자가 갖는 생각이었다.

* * *

[수목드라마 대전 ‘벤데타’, ‘너마들’, ‘퀸의 교실’까지 당신의 선택은?]

[新수목 전쟁, 후발주자인 ‘벤데타’ 첫방 시청률 18.1% 1위…‘너마들’ 16.5%]

[오지한·송채연 ‘벤데타’, 18.1% 수목극 맞대결 완승]

침체에 빠져 있던 KBC수목드라마가 화려하게 부활했다.

부활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벤데타’는 예사롭지 않았다.

└어흑 우래기들 잘했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지한이 얼굴이 잘생겨서 잠시 멈칫했다가 연기를 더 잘해서 입 벌리고 봄. 눈빛 봤냐? 시선만으로 심장 멎게 하는 클라쓰

└오빠. 오빠한테서 벽 느껴져요. 완.벽.

└└이분 드립치는 거 보니까 오빠가 아니라 동생이라고 해야 할 거 같은데.

└└└^^

└└└└죄송합니다!!!!!!!!!!!!!!!!!

└연회 씬에서 지연이가 하고 나온 팔찌 어디 거예요?

└└프랑수와 인피니티 러브체인 로즈골드 브레이슬릿 (링크)

└└└ㄱㅅㄱㅅ

└우리 지한이 친이연미에서 상탈하고 나왔을 때도 장난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마피아라니.

└감사합니다. 아아. 감사합니다. 오늘부터 방송국 쪽으로 절하겠습니다.

└근데 우리 지연이 이대로 끝이에요? 진짜로? 총 맞고 다이?

└안 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지연이 살려내 이 방송국 놈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우리가 이렇게 말해도 소용없음. 이거 100% 사전제작임

└└젠장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고작 1화가 방영되었을 뿐인데 벌써 수목드라마 시청률이 압도적이었다.

사전제작이라는 것 때문에 방송국도 첫 화 반응을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작하자마자 10%를 넘는 시청률로 시작한 것 때문에 KBC 조정실에서는 결승골을 넣은 것처럼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장난 아니야!! 고마워! 어흑. 최고 시청률 나왔을 때가 언젠지 알아?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철왕의 들뜬 목소리에 지연과 지한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후반 작업을 서두르느라 시체 꼴이었다던데 목소리를 들어보니 괜찮으신가 보다.

기뻐하는 철왕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 지연이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언제였는데요?”

-지연 씨랑 지한 씨랑 둘이 동시에 화면에 잡혔을 때야!

호오?

모처럼 내가 힘들게 땜빵했는데 시청률이 잘 나오지 않으면 조금 억울할 뻔했다.

잘 나왔다니 다행이네.

데보라도 좋아하고 있을까?

이탈리아에서도 한국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나?

지연이 통화가 끝나고 데보라에게 메시지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철왕이 높은 데시벨로 말했다.

-역시 두 사람이 나오면 시청자들도 좋아한다니까!

“그러게요. 좋아해 주시다니 다행이네요.”

“PD님 아무튼 시청률 대박 축하드립니다.”

-하하하. 이게 어디 나 때문인가. 열심히 해 준 우리 배우님들 덕분이지.

“에이 PD님 없이 어떻게 벤데타가 이렇게 잘 나왔겠어요.”

“맞아요. 역시 유 PD님. 여전히 실력 좋으세요.”

-흐. 후흣. 그래?

쑥쓰러워하면서 기뻐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걸로 또 한동안 버틸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을 충전시켜줬다.

유 PD님은 이렇게 주기적으로 자신감을 충전시켜드려야겠어.

“그럼 PD님 저희 곧 촬영해야 해서 오늘은 이만 끊을게요.”

-어? 어어. 그래. 두 사람 다 촬영 잘하고 와! 혹시 거기서 누가 괴롭히면 바로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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