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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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설정상 해외 촬영을 못 따라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국내 촬영에서 오지한과 접점이 생긴 것으로 만족해야지.

듣자 하니 오지한과 같이 촬영했던 여배우와 썸타거나 그런 관계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아마 나이 차이가 꽤 있었거나 로맨틱한 관계가 드물었기 때문에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

극 중에서 오지한과 연인 관계까지 간 데다가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난다.

오지한의 이상형을 모르기에 촬영할 때 일부러 담백한 척 굴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덕분에 ‘그’ 오지한과 편하게 잡담을 할 수 있는 관계까지 왔다.

‘조금만 더 하면 돼.’

잘하면 오지한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재벌 3세인 탑엔터 사장이 오지한을 그렇게 끼고 사는 데다가 무려 할리우드 스타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1위.

할리우드에서 주목받는 배우 1위.

사귀고 싶은 연예인 1위의 절대매력의 소유자!

촬영하면서 보니 몸도 S급이었다.

내가 오지한을 정복한 첫 여자가 되는 거야.

그리고 오지한이랑 열애설이 나면 내 급도 덩달아 오를 거다.

채연은 혼자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을 하며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지한을 보았다.

그런 채연의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채…. 송채연!”

“…네??”

정신을 차리니 눈앞에 이번에 새로 붙은 실장님이 서 있었다.

그가 살짝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사람이 불러도 대답이 없어?”

“뒤풀이 갈 생각에 그만.”

“어서 가서 옷 갈아입자. 다른 사람들도 다들 현장 정리하고 바로 갈 거래.”

“알았어요.”

자신을 따라온 실장을 보고 채연이 입을 삐죽였다.

그 모습을 본 실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게 또 헛바람 든 것 같은데.’

회사에서도 채연은 인지도에 비해 관리 등급이 꽤 높았다.

이번에 오지한과 같이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그녀에 대한 관리가 더욱 집중됐지만, 채연은 그 전부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점 때문에 회사에서 특별 관리 대상 취급받았다.

20대 여배우 중에서 눈에 띌 만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작품 보는 눈은 없어 번번이 다른 배우들에게 밀리곤 했었다.

게다가 얼마나 사랑에 잘 빠지던지 작품에 들어가기만 하면 상대 배우에게 푹 빠지는 건 소속사 사람들이라면 전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실장은 오지한과 출연할 때 절대 이상한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채연의 눈을 보고 자신이 말했던 걸 전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아. 채연아. 공 사장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니까.’

건드려선 안 되는 핵폭탄인지 모르고 당장 보석에 눈이 멀어 다가가려는 모습이 어리석었다.

실장이 또다시 한숨을 흘리며 채연의 뒤를 따라갔다.

사고 안 치게 감시 잘해야지.

그래야 채연이도 살고 내 직장도 사는 길 아니겠는가.

월급쟁이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 * *

알코올이란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사람의 이성을 한 순간에 휘발시키는 것인가.

“마시자!”

“우헤헤헤헤!! 우리 진짜 잘될 것 같아요!!”

“흐엉. 내가 잘될 거라고 했잖아.”

“이주빈 보고 있나?! 내가 너보다 잘될 거라고 했지?! 하하하하.”

“이주빈이 누구야?”

“이 PD 동생이래요.”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간 제작진들이 미쳐 날뛰었다.

촬영이 끝났다는 사실도 있지만 촬영을 하면서 이 작품이 성공할 거란 강한 믿음을 얻게 된 탓오 있을 거다.

그러니 저렇게 안심하고 술을 마신 거겠지.

뛰어난 라인업, 넉넉한 투자와 여유로웠던 촬영 일정까지.

‘벤데타’가 성공하면 드라마 제작환경이 바뀔 거라고 짐작하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사전제작이 좋긴 했지. 그래도 저건 좀 과한데. 촬영기간 동안 의도치 않게 금주를 하기라도 한 건가’

고삐가 풀린 것처럼 노는 사람들을 보고 지한이 고개를 저었다.

술을 못 마셔서 죽은 귀신이 붙은 것 같았다.

공기 중에서 진한 알코올 향이 나는 것 같아서 지한이 코를 찡긋하며 영훈에게 물었다.

“형. 원래 뒤풀이라는 게 이래?”

“아아. 너는 그동안 미성년자라 이런 자리 안 와 봤지? 원래 촬영하는 사람들이 이래. 이 일이 스트레스가 많은 일이잖냐.”

지한의 말에 영훈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난 술이 싫어. 술 마시는 사람이 이해가 잘 안 가.”

“그래그래. 그렇지만 너도 어쩔 수 없이 술자리에 가야 하는 일이 생길 거야.”

“거기서 술 안 마셔도 돼?”

“사람에 따라 다르지. 안 마셔도 괜찮다는 사람이 있을 거고, 안 마신다고 꼽 주는 사람이 있을 거고. 흔히 말해 꼰대 같은 사람들?”

“그렇구나. 술버릇이 안 좋은 사람은 싫은데.”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다 조사해 놨으니까 혹시나 술자리 갈 일이 있으면 누구랑 만나는지 말해줘.”

“그렇게 할게.”

영훈의 말을 들은 지한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이들을 대신해서 뒤풀이 자리에 자주 간 그가 새삼 지한이 성인이라는 사실에 흐뭇해하며 쳐다봤다.

‘이제는 내가 대신 자리를 안 지키고 있어도 되겠네.’

언제 이렇게 컸지.

몇 달 전 공 사장과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영훈이 감회에 젖은 눈으로 지한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술자리에 미성년자인 지한을 두고 망나니 같은 모습을 보여줄 사람은 없었기에 지한이가 뒤풀이 자리에서 빠져도 다들 그러려니 했었는데 이제는 이런 자리에 빠지려면 그것 말고 다른 구실을 찾아야 했다.

저렇게 싫어하니 한동안은 이런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영훈이 머릿속으로 메모를 하고 있을 때 술에 취한 사람이 지한이에게 다가왔다.

“흐어엉. 지한 씨. 정말 고마워요. 지한 씨가 없었으며언.”

유 PD였다.

술도 몇 잔 안 한 것 같은데 어느새 취해서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왠지 데자뷔 같은 모습에 지한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철왕의 몸을 추슬렀다.

“PD님 괜찮아요? 내일부터 편집한다고 바쁠 거라면서요.”

“편지입. 편집하러 가야 하는데.”

“아. 안 되겠다. 형. 도와줘.”

“그래.”

“유 PD님 취하신 거야?”

“원래 술이 좀 약하시잖아요. 오늘 촬영이 끝나서 긴장도 좀 풀렸는지 더 일찍 가셨어요.”

“어이쿠. 그럼 내가 데려갈게. 지한 씨는 더 놀아.”

“아니에요. 저도 가려고 했어요.”

“뭐? 더 있다가 가지.”

“아직 술자리가 익숙하지 않아서요. 최 감독님은 더 있다 가세요.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형. 반대쪽 부축해줘.”

“알았어.”

지한의 말에 편집하러 갈 거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철왕을 보고 지한이 지원군을 불렀다.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간다고 인사를 한 지한이 배웅받으며 나왔다.

그가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아는 스태프들이 반쯤 취한 얼굴로 손을 들어 지한을 배웅했다.

영훈과 지한이 철왕을 부축해서 밖으로 데려나갔다.

호와 코디들이 따라 나와 먼저 차로 향했다.

“형. 유 PD님 집 알아?”

“알지. 저번에 내가 데려다 드렸는걸.”

“아, 맞다.”

예전에 ‘내호생’ 첫 방송을 같이 본다며 집에 왔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방송을 보면서 마신 맥주에 취해서 자고 간 다음 날, 영훈이 형이 데려다줬었지?

“그럼 유 PD님 집에 들렀다가 가자. 너무 늦게 들어가면 누나가 걱정할 거야.”

“그래. 지연이도 말로는 잘 놀다 오라고 했지만 술자리라서 걱정하는 거 같더라.”

누나가 자신을 걱정했다는 말에 지한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누나는 날 아직도 어린 앤 줄 안다니까.”

“내 눈에는 너희 둘 다 아직 어린 애다만?”

“형. 그건 아니다. 이렇게 큰 어린애 봤어?”

“그거 모르냐? 원래 부모 눈에는 자식들이 늙어도 애로 보이는 거야.”

“알았어, 영훈 엄마.”

“이 녀석이 형한테?”

지한이 놀리듯이 말하자 영훈이 눈을 흘겼다.

철왕을 양옆으로 부축하고 차에 태운 순간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지한이 뒤를 돌아보았다.

“지한 씨!”

“채연 씨?”

202. <벤데타> (2)

채연이 술 때문에 살짝 붉어진 얼굴로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벌써 가시게요?”

“아, 네. 술자리는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유 PD님이 많이 취해서 데려다줄 겸 들어가려구요.”

“다들 지한 씨 없으면 아쉬워할 텐데….”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럴 정신이 없을 텐데.

그리고 인사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부 인사하고 나왔다.

아쉬워하긴 했지만 다들 오늘 고생했다며 흔쾌히 보내줬다.

KBC 드라마 국장은 본부장님이 잘 상대해 주고 계셨고, 다른 제작진들은 촬영하는 틈틈이 같이 대화도 하고 밥도 먹었으니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제 촬영이 끝났으니 지한 씨랑 더 못 보겠네요.”

“다른 작품에서 또 볼 수도 있죠. 그때까지 우리 모두 열심히 연기한다면요.”

“하지만 오지한 씨랑 같이 촬영하는 게 더 좋았어요. 또 그때가 언제 올지도 모르고….”

채연이 눈을 아래로 깔며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

채연의 말에 지한의 미소가 어색해졌다.

그녀의 말에 담긴 의도가 뭔지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옆에서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있는 영훈 형을 보니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았다.

‘연애? 돈? 명성?’

영훈의 생각이 지한의 눈에 바로 보였다.

그동안 촬영하면서도 만난 여배우들은 대부분 날 돌봐야 하는 대상이나 선망의 대상으로 보았는데.

이런 타입은 새롭네.

촬영할 때는 공사 구분하는 것 같더니 오늘을 위해서 참은 거였나?

예전에 누나가 이거랑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했는데 자신이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몰랐다.

이따 집에 가면 누나한테 말해줘야지.

“저기…혹시 괜찮다면 다음에 같이 밥이라도 먹을래요? 왠지 지한 씨랑 연기에 대해 얘기하는 건 편하더라구요. 밥은 제가 쏠게요. 제가 파스타를 잘하는 곳을 알아요.”

“연기는 정해진 게 없어요. 각자에게 맞는 스타일이 다 다르듯이. 연기하다가 막히는 게 있으면 벤데타 단톡방에 올려줘요. 모두가 확인하고 채연 씨를 도와줄 거예요. 그리고 식사 약속은 어려울 것 같네요.”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는 건 조금 부끄러워서…. 식사가 부담스러우시면 갠톡은 어떠세요?”

그 말을 하면서 채연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눈은 지한을 힐끔거리는 게 단둘이 있고 싶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와. 진짜 간도 크네.

감히 매니저가 보는 앞에서 저런 개수작을 부린단 말이야?

영훈이 이제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자는 심정으로 팔짱을 끼고 채연을 쳐다봤다.

하지만 지한은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저도 도와드리고 싶은데 바로 영화 촬영이 있어서요. 시차도 있어서 답장도 어렵고 저보다는 한국에 있는 다른 배우들이 더 도움이 될 거 같아요. 그럼 오늘은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잘 놀고 들어가세요.”

“저기, 잠시!”

드르륵, 탁!

지한이 차에 올라타자 영훈이 잽싸게 문을 닫았다.

그가 호에게 신호를 보내자 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패달을 밟았다.

부웅

순식간에 떠나가는 밴을 보고 채연이 허망하게 눈을 깜빡였다.

“뭐야, 나 까인 거야?”

주차장에 홀로 남은 채연이 한동안 계속 멍하게 서 있었다.

* * *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학!!”

지연이 배를 잡고 뒹굴었다.

소파 위에 쓰러져 눈물까지 찔끔 흘릴 정도로 웃는 누나를 보고 지한은 괜히 말했나란 생각이 들었다.

“아하학, 큽, 흐흐흐. 흐으으.”

눈물까지 흘리며 웃던 지연은 이제 우는 것 같았다.

“흐으. 내 배. 흐흐흑. 배 아파.”

“배가 아픈 게 싫으면 적당히 웃지 그랬어.”

“하으, 흐, 그치만, 너무, 후흐흐. 웃긴걸.”

내가 그 사람을 차고 온 게 그렇게 웃긴 일일까.

지한의 표정을 본 지연이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누나를 보고 지한이 작게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켜줬다.

지연이 숨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네가 웃긴 게 아니라. 후우. 하. 그 여자가 널 어떻게 해 보려고 생각했던 게 웃겼어.”

“그건 나도 좀 웃기네. 이제 우리한테 그런 수작 거는 사람은 없을 줄 알았는데.”

“회사에서 네가 들어가는 작품에 캐스팅된 사람의 조사를 허술하게 했을 리도 없는데. 촬영 때는 얌전했지?”

“응.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어. 사실 형도 그 여자가 금사빠란 건 알고 있었대. 다른 사람이 우리한테 다른 마음을 품고 접근하는 건 막을 수 있지만 혼자 사랑에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

“아. 그건 그렇지.”

진짜 순수하게 좋아하는 거라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런 가벼운 사랑을 하는 사람한테 내 동생을 주고 싶지 않은데.

“근데 지한이 네가 보기엔 어때? 정말 널 좋아하는 거 같았어?”

“아니. 그냥. 날 엄청 비싼 명품백 보듯이 보는 것 같았어.”

“아하. 뭔지 알 것 같아. 그거.”

결국 남자친구를 자신을 돋보이게 해 주는 장신구쯤으로 취급하는 타입처럼 보였다는 거네.

그런 사람이랑은 작품 외에 엮이지 않는 게 좋았다.

이왕이면 작품도 같이 안 엮였으면 좋았을 텐데 캐스팅에 대해서 우리가 뭐라 할 건 아니라고 생각해 관여하지 않았더니 이런 일이 생겨버렸네.

다음번에는 상대역 캐스팅에 간섭 좀 해야겠는걸.

이번 일이 있으니까 영훈 오빠랑 사장님이 다음번부터 캐스팅에 손쓰겠지.

“어쨌든 촬영이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야.”

“끝나자마자 금방 새 작품에 들어가지만 어쨌든 끝난 건 끝난 거지.”

“원래 한 작품 하면서 다른 작품 준비하는 경우도 많대. 두 작품 동시에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던걸?”

“우린 이때까지 그렇게 한 적이 없었잖아.”

“당연하지. 워라밸은 중요한 거니까.”

지연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아무리 인기가 많아져도 가장 중요한 건 지한이였다.

지한이가 행복하지 않고 건강하지 않다면 무리하게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가끔 욕심 때문에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싶어 했지만 그런 경우에는 들어가는 작품이나 스케줄을 조정했었다.

“나도 알아. 그래서 휴식기도 적절히 가지고 있잖아.”

“드래곤 엠페러 찍으면 제대로 쉴 거야.”

“누나도 쉴 거지?”

“나도 쉬어야지.”

드라마에 앨범에 까메오에 너무 바빴으니까.

지연의 말에 지한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휴가 때 뭐 할 거야?”

“그림 그려볼까 해.”

“그림? 오랜만이네.”

“응. 제대로 못 그린 지 너무 오래됐어.”

“유 관장님이 좋아하시겠네.”

주민의 큰형수이자, HJ미술관의 관장을 맡은 진희는 지연의 오랜 팬이었다.

작품 공개와 판매도 그녀가 대신해 주고 있었다.

“이번에는 뭘 그리고 싶은데?”

“뭐든.”

“아직 정해놓은 건 없구나.”

“지금은 그냥 막연하게 생각 중이야.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누나의 말에 지한이 동의했다.

지금도 해야 할 일을 앞두고 있었다.

“드래곤 엠페러부터 끝내자.”

할리우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방송국에서 얼마나 쪼였는지 <벤데타>의 후반 작업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진행됐다.

KBC에서도 화제를 이어가고 싶었는지 편집기사를 몇 명이나 더 붙여 줬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렇게 오히려 촬영이 끝나고 더 바쁜 시간을 보냈던 철왕이 시체 같은 몰골로 내부 시사회가 끝난 뒤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짝짝짝짝

“유 PD 고생했어!”

“이걸로 KBC 드라마 침체라는 말도 쏙 들어가겠구만!”

“역시 오지한이야.”

“오지한을 캐스팅한 것도 다 지연을 통해서라면서? 이게 다 유 PD 덕이야. 잘했어!”

저렇게 호들갑 떨면서 상기된 얼굴로 본인을 칭찬하는 걸 보면 작품이 잘 만들어진 모양이다.

워킹 데드나 다름없는 얼굴인 철왕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활짝 웃었다.

창백한 안색에 제대로 씻지 못해서 덥수룩한 머리와 삐쭉삐쭉 난 수염을 한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를 유발할 수 있는 몰골이었지만 다행히 아무도 그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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