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이익….
지연의 말에 뱀이 머리랑 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지연의 뒤에 있던 데보라는 조금 진정됐는지 신기한 눈으로 물었다.
“지연,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러는 동안에도 데보라의 두 발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지연이 데보라의 말에 대답하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뱀이 펄쩍 뛰어올랐다.
“꺄악! 지연!”
“지연아!”
“누나!”
보고 있던 사람들이 전부 놀라 지연을 불렀다.
지연은 목에 서늘한 감촉이 느껴지자 고개를 내렸다.
어느새 목에 하얀 뱀이 빙 감겨 있었다.
“지연아, 괜찮니?”
“네. 저는 괜찮아요.”
“안 무서워요?”
“어릴 때도 본 적이 있어서.”
“그래서 뱀을 안다고 했군요.”
아니, 진짜 아는 뱀이라서 그런 건데.
하지만 지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뱀이 머리를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가자고?”
끄덕끄덕
그래. 너도 얼마나 답답했으면 직접 네비 역할을 자처했겠니.
지연이 순순히 뱀이 가자는 곳으로 향했다.
“지연아 어디 가?”
“얘가 어디 좀 같이 가자는 거 같아서요.”
“배, 뱀이라구요.”
“동물들이 지연이랑 지한이를 해친 적이 없긴 합니다만.”
“그건 그렇지.”
“네? 그럴 수가 있어요?”
“우리 애들이 좀 대단합니다.”
주민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뱀과의 충격적인 첫만남이 지나자 이제야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된 아이들의 측근(주민, 남 비서)이 기억을 되살렸다.
동물들도 톱스타를 알아보는구나.
데보라는 처음 보는 동물이 지연의 목을 감고 있어도 놀라지 않는 두 사람을 보고 혼자 납득했다.
이해가 잘 되진 않지만 두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데보라 양. 계속 거기 있을 겁니까?”
“아! 저도 갈게요.”
남 비서가 가만히 서 있는 데보라의 정신을 일깨웠다.
세 사람이 남매의 뒤를 따랐다.
지한은 뒤에 있는 사람과 거리를 가늠하더니 지연에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누나. 얘가 뭐래?”
“여전히 얘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더라.”
“그래? 오늘은 왜 나타난 거지.”
“나도 모르겠다. 일단 가자는 데 가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겠네.”
걸어가자 데보라가 안내했던 달빛이 쏟아지는 비밀 장소에는 금방 도착했다.
우리 앞을 막아선 뱀 때문에 얼마 멀리 가지 못해서 그런지 조금 걸었을 뿐인데 작은 호수 앞이었다.
달빛이 쏟아지는 천장.
그 아래 반짝이는 작은 호수.
그곳에 도착한 지연은 하얀 뱀의 이끌림에 따라 달이 동그랗게 떠 있는 호숫가로 향했다.
“누나 조심해.”
“지연아. 조심해야지.”
“지한아. 사장님.”
지연이 걱정된 두 사람이 지연을 불렀다.
사장님이 호숫가로 다가간 지연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두 사람에게 괜찮다고 하려는 순간 달빛이 폭발하듯이 남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천장에 난 구멍으로 달빛이 기둥처럼 들어왔다.
조명탄이 터진 것처럼 밝아진 동굴 내부에 다가오던 주민과 조금 떨어져 있던 남 비서, 데보라가 눈을 감았다.
그러나 지연과 지한은 눈을 감지 않았다.
‘안 부시네?’
세 사람이 눈을 감고, 동굴이 빛나는 것처럼 밝았는데 전혀 눈이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긴장이 풀어질 정도로 따뜻하고 편안한 빛이었다.
지연이 동생을 돌아보고 지한도 누나를 돌아봤다.
[항상 지켜보고 있단다.]
“어?”
“이거.”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다.
상냥한 음성이 남매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지연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구멍 너머로 환하게 빛나는 보름달이 보였다.
[불안해할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어. 너는 잘하고 있으니까. 네가 다른 이의 사명에 얽매이지 않아도 돼.]
이 말을 해 주기 위해서 저 뱀을 보낸 거구나.
천사의 저택에 다녀온 이후로 심란했던 마음을 그대로 꿰뚫어 보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해주는 목소리에 지연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네 어깨에 얹어진 짐을 던 것 같아서 다행이야.]
지연은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달빛밖에 없었다.
할 말을 마쳤는지 빛이 점점 약해졌다.
그리고 언제 동굴 안을 환하게 비췄냐는 듯이 천장에서는 다시 달빛이 은은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주민과 데보라, 남 비서가 몇 발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데보라는 보았다.
동굴을 가득 채웠던 달빛이 사라지기 전, 백금빛으로 빛나는 동굴 속에서 지연과 지한의 머리 위로 광휘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있었음을.
그 장면을 본 데보라가 두 손을 꼭 모았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신에 대한 믿음이 솟구쳤다.
‘오늘 일은 평생 잊지 못할 거야.’
25살의 데보라와 9살의 데보라의 생각이 일치했다.
모험을 하길 잘했다.
데보라가 자신들에게 걸어오는 지연과 지한을 보면서 생각했다.
* * *
어느새 이탈리아에서의 일정이 모두 끝나고 모두 한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공항에는 한국에서 같이 왔던 경호팀과 지한의 스태프들이 네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경호팀이 같이 왔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우리가 관광할 때도 뒤에서 몰래 따라왔다는 거 같았는데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럼 동굴에서 있었던 일도 다 알겠네?
그렇게 묻자 주민이 걱정할 안 해도 된다는 듯이 말했다.
“입이 무거운 사람들이니까 안심해도 돼. 경호원들도 다 지연이랑 지한이 널 좋아하고 있으니까 너희들에게 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거다.”
사장님의 말은 사실이었다.
왠지 지한이랑 날 보는 눈이 열기로 가득했다.
‘부담스러워.’
숨어서 경호해 주는 게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지한이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경호원분들을 보고 몸을 슬그머니 떨어트렸다.
“지연! 지한!”
멀리서 경호원 덩치들에게 둘러싸인 우릴 알아보고 데보라가 뛰어왔다.
출국하는 날을 알려줬는데 배웅까지 하러 올 줄은 몰랐는데.
데보라의 말에 몇몇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는 게 보였다.
지연이 재빨리 입술 위에 검지를 올려 데보라에게 신호를 주었다.
“아.”
며칠 전과 똑같은 실수를 한 데보라가 한 박자 늦게 소리를 냈다.
또 실수했다.
당황해서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는 데보라의 눈동자가 보였다.
모처럼 시간 내서 우리를 배웅해주기 위해 온 사람인데 너무 눈치 줬나?
지연이 손을 내리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데보라 덕에 좋은 관광 했어요. 진짜 평생 못 잊을 거예요.”
“오늘 진짜 고마워요. 채널에 올리기 전에 연락드릴게요.”
“아. 맞다.”
뭐지, 이 반응?
설마 채널에 올리겠다고 한 말을 잊고 있었던 거야?
지연이 눈만 깜빡이자 데보라가 기억하고 있었다는 듯이 당당한 얼굴로 손뼉을 쳤다.
“그냥 올리셔도 되는데 연락해 주신다니 고마워요. 헤헷.”
“뭘요. 우리도 데보라 덕에 좋은 구경했는걸요. 그리고 어찌 됐든 제가 데보라의 역할을 뺏었잖아요.”
“아니에요!”
지연의 말에 데보라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정색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애초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제 잘못이었어요. 오히려 지연 덕에 모두가 제시간에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고 들었어요. 고마워요. 저 때문에 촬영이 지체됐으면 저는 진짜 두 번 다시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을 거예요.”
그 말을 한 뒤 데보라의 얼굴이 편안하게 풀어졌다.
“정말 그날 ‘벤데타’의 오디션을 보기로 한 건 정말 내 생에 다시 없을 최고의 선택이었어요. 덕분에 두 분이랑 이렇게 만나게 됐잖아요. 그리고 좋은 기회도 얻었구요. 그러니 지연도 제 역할을 뺏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녀의 진심을 느낀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보라는 정말 착한 사람이구나.
그리고 강해.
다른 사람이었다면 억울하다면서 주저앉았을 법도 한데 데보라는 그런 일 없이 자신의 실수를 딛고 일어났다.
지연은 데보라 같은 사람이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데보라 우리만 믿어요.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날 거예요.”
“네?”
“누나가 데보라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영상에 데보라가 잘 나오게 부탁할 건가 봐요.”
“아아.”
지한의 말에 데보라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 시간입니다.”
남 비서님이 이제 출국장에 들어가야 한다고 알렸다.
그 말에 데보라가 아쉬운 듯이 눈썹을 늘어트렸다.
“데보라. 다음에는 한국에 놀러와요.”
“정말요?”
“그때는 우리가 데보라를 안내해 줄게요.”
“저, 정말요?!”
지연과 지한의 말에 데보라가 ‘정말요?’만 중얼거리며 눈을 크게 떴다.
귀여운 데보라의 반응에 남매가 입꼬리를 당겼다.
“그럼 잘 있어요.”
“다음에 또 만나요.”
“잘 가요!”
데보라가 등을 돌려 출국장에 들어가는 일행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탈리아에서 많은 일이 일어나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무척 오랜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래 있었던 것 같은데 얼마 안 됐네.”
지한이도 같은 생각 했는지 비행기에 탑승하면서 말했다.
“나도 그래.”
“너희들 한국에 돌아가면 그런 생각도 이제 못할 거다.”
영훈이 며칠 새 더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한창 바쁠 시기에 우리 일정을 빼주기까지 했으니 엄청 고생했을 거다.
그리고 이탈리아에 꽤 오래 있기도 했고.
사장님처럼 파인패드로 업무를 처리한다고 해도 한국에 있지 않은 이상 처리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으니까.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겠지.
“오빠 힘내.”
“형 힘내.”
“…고맙다.”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떠올랐는지 어두운 영훈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남매가 영훈의 옆에서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영훈은 어쩐지 그 위로가 더 서글프게 느껴졌다.
“가면 바쁠 거다. 지한이 넌 시차 적응하기 전에 바로 촬영 들어갈 수도 있어.”
“알고 있어. 그거까지 고려해서 쉬겠다고 한 거야. 조금 힘든 건 내가 감수해야지.”
“그래.”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200. 약속
[일상] 이탈리아 현지민과 떠난 마을 관광♥
지연의 뉴튜브에 또 영상이 올라왔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버스킹 영상으로 지연의 이탈리아 여행에 대한 관심이 높았는데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듯한 영상의 등장에 순식간에 조회수가 올라갔다.
”여기가 그 마을이지?“
“영상에서 봤던 거랑 똑같다.”
“데보라 추천 맛집이다!”
“벌써 사람들 줄 서 있는 거 봐.”
“우리도 빨리 가서 줄 서자.”
이탈리아 남부의 조용한 마을에 사람들이 북적였다.
여행사와 관광부의 빠른 움직임에 마을 사람들은 관광객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없으면서도 기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사람들 때문에 바빠진 건 데보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르바이트하던 데보라는 몸이 열 개여도 부족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어? 데보라다!”
“데보라 언니! 팬이에요!”
“사진 찍어도 돼요?”
“물론이죠. 다만 다른 손님이 기다리고 있으니 자리에 계시면 제가 갈게요.”
“네에.”
관광객으로 온 여자 손님이 꺄르르 웃으며 자리로 갔다.
손님을 자리로 안내한 데보라가 정신없이 움직였다.
“데보라! 맥주 나왔다!”
“가요!”
아델레 아주머니의 말에 데보라가 소리 높여 말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 힘들고 지칠 법했지만 데보라의 활기찬 목소리에 아델레도 덩달아 기운을 냈다.
마을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온 것도, 모두 바쁘지만 기분 좋게 지내고 있는 것도 전부 데보라 덕이었으니까.
“데보라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래. 이제 오디션에만 합격하면 될 텐데.”
“조만간 될 것 같은데? 오늘도 이상한 사람이 데보라한테 명함을 건네주더라고.”
“또? 수상한 놈들은 아니겠지?”
“그건 아닌 거 같던데? 데보라가 명함에 적힌 걸 보고 좋아했었어.”
아델레와 다른 주방 직원이 데보라를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배우가 되고 싶어서 그렇게 고생하더니 이제야 일이 좀 풀리려나 보다.
생각해보면 오지한의 드라마에 출연한다고 한 뒤부터 데보라의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몸살이 나서 촬영을 못 했다고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안타까웠었는데 그게 액땜이 된 거 같았다.
“아주머니 여기 모듬 소시지 하나 있어요.”
“알았다!”
“어이쿠. 얼른 움직여야지.”
데보라를 보며 푸근하게 웃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몰려오는 주문을 처리하기 위해서 주방이 바쁘게 돌아갔다.
“데보라 씨 맞으십니까?”
“네! 부르셨어요?”
서빙하던 데보라가 손님의 부름에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요즘 자신을 찾는 사람이 적지 않았기에 자동반사로 나간 접대용 얼굴과 멘트였다.
“저는 스텔라 에이전시에서 나온 기욤입니다.”
“아. 명함 주시려고요?”
“그렇습니다. 저희 에이전시에서는 페드로 감독님과도 계약을 맺고 있으며,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배우도 여럿 소속되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일하는 중이라서요. 명함 주시면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언제든지 편하실 때 연락을 주십시오.”
“네. 기욤 씨 그럼 맛있게 드시고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