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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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익!”

그녀의 허리와 난간이 부딪쳤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이제 그녀는 덜덜 떨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했잖아!”

“시끄러워.”

“끕.”

루치아노의 말에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무서워.

아빠. 살려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머릿속에는 아빠만 떠올랐다.

“아, 아빠.”

“여기 네 아빠는 없어. 널 구해줄 사람도 없지.”

“여기 사람들이 많잖아! 날 죽이면 너도,”

“너 하나 죽인다고 해서 이 나라에서 나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

“여긴 이탈리아야. 멍청한 여자.”

탕-!

그녀의 몸이 뒤로 쓰러졌다.

컷!

철왕의 목소리와 함께 지연이 눈을 떴다.

지한이 매트 위에 쓰러진 지연에게 다가왔다.

“누나 괜찮아?”

“응. 매트가 푹신해서 괜찮아.”

지한이 손을 내밀었다.

지연이 동생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지연의 곁으로 철왕이 다가왔다.

“지연 씨. 정말 고마워!!”

이런. 이번 일로 또 은인 소리 달고 사시겠네.

“아니에요. 시간이 더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것밖에 안 돼서 죄송해요.”

“아니야 아니야. 진짜 잘했어. 그치?”

“네! 맞아요!”

“최곱니다!”

철왕의 말에 스태프들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호응했다.

“다들 오늘 촬영 고생했어! 이제 집에 가자!”

와아아아아아아!

드디어 집에 간다.

근 한 달 만에 집에 돌아간다는 말에 스태프들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이탈리아에서 마지막 촬영이 끝났다.

* * *

한국에서 온 촬영진들이 떠난 이탈리아 남부는 어쩐지 평소보다 더 조용한 것 같았다.

같이 있던 사람들이 떠나서일까.

유독 조용한 것 같은 거리를 보면서 지한과 지연이 감회에 젖었다.

“우리 진짜 오래 있었다.”

“그러게. 이탈리아에서 이렇게 오래 있을 줄 몰랐는데. 여기에 한 달 넘게 있었으면서 이렇게 편하게 바다를 보는 건 처음인 거 같아.”

“너는 촬영만 했으니까 그렇지. 그래서 이렇게 시간 내서 관광하려고 하는 게 아니겠어? 이대로 가면 아쉬우니까.”

“그러네.”

누나의 말에 지한이 환하게 웃었다.

이탈리아나 한국이나 자신들을 알아보는 사람에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껴서 중무장한 상태였지만 두 사람은 왠지 모를 자유로움을 느꼈다.

이래서 사람들이 해외로 여행을 다니는 거지.

돌아오고 나서 지한이랑 같이 여행을 많이 다녔다고 생각했지만 할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었다.

“지연! 지한!”

그때 누군가가 두 사람을 불렀다.

“쉿. 데보라. 우리 이름 크게 부르지 말아요.”

“아차! 죄송해요.”

“괜찮아요.”

이제는 열이 다 내린 데보라가 싱그럽게 웃었다.

“그럼 이제 제가 두 분을 관광시켜 드릴게요.”

데보라가 가슴을 펴고 말했다.

역시 가이드는 현지인한테 받는 게 제일 좋지?

오늘 그녀는 우리의 1일 가이드였다.

그녀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데보라 이제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데보라가 씩씩하게 말했다.

그날 열에 들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랑 딴판이었다.

평소의 데보라는 활기가 넘치는구나.

“두 분 식사하셨나요?”

“아직 안 먹었어요.”

“좋아요! 그럼 제가 우리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곳으로 안내할게요.”

“데보라의 추천 맛집이라니 기대되네요.”

“역시 그 동네 사는 사람이 추천하는 곳에 가는 게 제일 좋은 거겠지?”

데보라의 말에 지연과 지한이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인의 여행은 먹는 걸로 시작해야지.

먹기 위해서 여행을 가는 게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 모든 건 작은 카메라에 전부 찍히고 있었다.

“저기…그런데 저기 두 분은 왜 말이 없는 거예요?”

데보라가 카메라를 든 채 묵묵히 따라오는 남 비서님과 그 옆에서 우중충한 얼굴인 사장님을 보고 말했다.

“그게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과로에 지친 여진 팀장님이 유나 사진 안 보내 준다고 하셨거든.

사장님은 지금 유나를 못 봐서 침울한 상태였다.

남 비서님은 원래 필요한 말 아니면 말을 잘 안 하시는 분이고.

“데보라 맛집은 멀었나요?”

“금방이에요. 걱정 마세요. 미리 전화해 뒀거든요.”

오오.

준비성이 철저한 가이드의 모습에 지연과 지한이 박수를 쳤다.

그 모습에 신이 난 데보라가 걸음을 재촉했다.

“쨘! 여기가 바로 제가 추천하는 맛집이에요. 디에고! 저 왔어요!”

“어어. 데보라. 왔냐. 뒤에는 네가 말한 손님?”

“네, 맞아요. 잘 부탁해요!”

“우리 가게의 스타인 데보라의 말인데 아무렴. 걱정 말라고!”

디에고라고 불린 팔뚝 굵은 아저씨가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거친 바다 사나이 같은 모습인데 데보라한테 하는 걸 보니 꽤 유쾌한 성격인 거 같았다.

“자, 여기에 앉으세요.”

데보라가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로 네 사람을 안내했다.

자리에 사람들을 앉힌 데보라가 부지런히 움직여 식기랑 반찬을 세팅했다.

어느새 데보라는 쟁반을 들고 네 사람 앞에 음료수 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이게 뭐야.

데보라 당신은 대체.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남매가 데보라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이 가게에서 자랑하는 레모네이드에요. 다른 곳에서는 이런 맛 보기 힘드실 거니까 한 모금 마셔보세요.”

“데보라. 일이 엄청 능숙해 보이네요. 혹시 가족이 하는 가겐가요?”

“이거 혹시 지인이 하는 가게 홍보하려는 거 아니에요?”

지연과 지한이 반쯤 농담을 섞어서 말하자 데보라가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여기서 알바했던 적이 있어서 능숙해 보이는 거예요. 아! 알바한 가게라고 추천한 건 더더욱 아닙니다. 디에고 아저씨 요리는 우리 마을 최고니까요.”

“그럼! 내가 이 마을에서 솜씨가 가장 좋지!”

데보라의 뒤에서 음식을 직접 내온 디에고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198. 달빛 아래

현지인 버프는 대단했다.

“여기가 사진 찍기 진짜 좋아요. 어릴 때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던 곳인데 배경이 엄청 좋죠? 바다와 마을이 엄청 아름답게 나와요.”

사진 스폿이며,

“안녕하세요. 카밀라 아주머니. 여긴 제 친구들이에요.”

“오! 친구들이랑 놀러 나온 거야?”

“네. 멀리서 온 친구들이에요. 그러니까 이거, 이거, 이거, 이거. 선물해주고 싶은데 싸게 해 주실 거죠?”

“이거 참. 데보라 너니까 싸게 해 줄게.”

기념품이랑 가격흥정이며,

“이반 아저씨~! 저희 배 좀 태워주세요!”

“어어. 그래. 알았다!”

배를 얻어 타는 것까지 못 하는 게 없었다.

이 마을에서 데보라가 모르는 사람이 있긴 한 건지.

남매뿐만 아니라 주민과 남 비서까지 데보라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데보라가 이 마을의 인기 스탄가 봐.”

“저런 걸 보고 핵인싸라고 하는 거겠지.”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군.”

그녀 덕분에 여행은 쾌적하기 그지없었다.

먹거리며, 볼거리, 그리고 기념품까지 모든 게 다 좋았으니까.

그때 내가 데보라와 연락처를 교환한 건 신의 한 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했어 그때의 나!

덕분에 이렇게 쾌적한 관광을 즐기는구나!

맨날 자유여행만 하다가 이렇게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니까 순조롭고 좋았다.

발리에서 포상휴가를 받았을 때도 가이드가 있긴 했지만 그땐 스케줄의 연장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행이란 생각은 별로 안 들었다.

지연이 속으로 발리 여행과 이탈리아 여행을 비교하고 있을 때, 데보라가 일행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다들 오늘 어떠셨어요?”

“데보라 덕에 엄청 즐거웠어요. 저녁도 정말 좋은걸요?”

“나도 인정. 딱 제 취향이에요. 여기도 데보라가 아르바이트한 곳인가요?”

“물론이죠. 제가 먹고 일해본 곳이 아니면 추천하지 않아요.”

아무래도 이 마을에는 미슐랭이 추천하는 맛집이 아니라 데보라가 추천하는 맛집이 더 신빙성이 높을 것 같았다.

자랑스럽게 말하는 데보라를 보고 남매가 편안한 얼굴로 웃었다.

“데보라는 모르는 곳이 없네요.”

“마을 사람들도 다 데보라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헤헤. 그냥 어릴 때부터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거든요. 다들 어렸을 때부터 봐 온 좋은 분들이에요. 제가 아르바이트 구할 때도 군말 없이 자기 가게에 와서 하라고 했어요.”

남매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능숙하게 가게에 들어가서 물건을 내올 때부터 알아봤다.

이 마을에서 데보라가 모르는 곳은 아마 없을 것 같았다.

“아무튼 덕분에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사진도 많이 찍고, 배도 잘 탔어요.”

“고마워요, 데보라.”

“잘 먹었습니다.”

“저도 잘 먹었습니다.”

지연과 지한, 주민과 남 비서까지 오늘 하루 고생한 데보라에게 감사인사를 건넸다.

이제 배도 부르겠다 숙소로 돌아가볼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에 데보라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아직 끝이 아닙니다.”

“?”

“?”

“?”

“….”

데보라의 말에 네 사람이 의문을 가질 때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갈 곳이 한 곳 더 남았습니다. 거긴 달이 떴을 때가 제일 예쁘거든요. 오늘이 마침 보름달이 뜨는 날이라서 다행이에요.”

아직 더 갈 곳이 남았나?

도대체 어디길래 달이 떴을 때가 제일 예쁘다고 하는 거지?

“다들 가실 거죠?”

“뭐어. 배도 부르니까 산책할 겸 걷는 건 나쁘지 않은데.”

“데보라. 왜 하필 달이 떴을 때예요?”

“달이 떴을 때만 볼 수 있는 게 있거든요.”

더 아리송해졌다.

지연이 동생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래?”

“이건 당연히 가야지.”

좋아. 그럼 가보자고~!

* * *

데보라가 우릴 안내한 곳은 숲속이었다.

이곳에 올 줄 알았으면 사장님이랑 남 비서님은 먼저 보냈을 텐데.

두 분도 이제 연세가 연세인지라 등산이 힘들지도 모르니까.

“사장님. 남 비서님. 괜찮아요?”

“나 아직 안 죽었다.”

“괜찮습니다.”

생각보다 두 사람이 다 잘 버텼다.

남 비서님보다 의외인 게 사장님이었는데

맨날 책상에 앉아서 서류만 보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체력이 좋았다.

남매의 의문을 느낀 건지 주민이 말했다.

“애 키우려면 체력을 길러야 해.”

“아.”

“그렇구나.”

유나 때문에 운동을 시작한 모양이다.

유나가 복덩어리네 복덩어리야.

한국에 있을 유나를 떠올리며 일행들이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듯 좁은 길을 따라가면서 지연이 물었다.

“그런데 데보라. 이런 곳은 어떻게 아는 거예요?”

“아무리 현지인이라고 해도 여긴 밤에 오긴 좀 위험할 거 같은데. 꼭 밤에 왔어야 했나요?”

두 사람의 말에 앞장서서 가던 데보라가 목을 움츠렸다.

미세한 반응이었지만 지연과 지한이 그 반응을 놓칠 리가 없었다.

왜 저런 반응이지?

의아해하고 있을 때 데보라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요.”

“네?”

“데보라 잘 안 들려요.”

“어릴 때 친구들이랑 놀다가 미아가 됐을 때 발견한 곳이라서요! 거긴 밤에 봐야 예뻐요!”

이런. 어린 시절 모험의 산물이었나 보다.

철없던 시절 쳤던 사고를 입 밖으로 말하게 만든 남매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데보라는 정말 대단했네요.”

“그럴 수 있죠.”

“…제가 어릴 때는 사고뭉치였어요.”

이렇게 된 거 전부 다 까발리기로 결심했는지 데보라가 앞장서서 걸으며 말했다.

“밤에는 어른들이 숲에 가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다들 그렇잖아요? 가지 말라고 하면 가고 싶은 거. 원래 어릴 땐 모험을 떠나고 싶어 하잖아요? 이건 본능이에요!”

뒤에 붙은 말은 변명인 것 같았다.

우리는 웃음을 참으면서 데보라의 말을 들었다.

“아까 사진 찍기 좋다며 안내해 준 곳도 데보라가 친구들과 놀러 다니다가 발견한 곳이라고 했었죠.”

“맞아요. 마을에서 안 가 본 곳이 없을 거예요. 들어가지 말라는 곳에 들어가 본 적도 있고, 밤에 몰래 집에서 나와 폐가를 탐험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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