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그렇다고 여길 외부인이 들어와?
대체 저 할아버지는 뭐 하는 사람이길래 여길 들어올 수 있던 거지?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촬영 때 현지 직원과 함께 촬영장에 들어온 할아버지 아니야?
저 사람 정체가 뭐지?
많은 말이 담겨 있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노신사는 금 하나 가지 않는 얼굴로 서 있었다.
주민이 불쾌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너무 간섭이 지나치시군요. 피아노 정도라면 우리 쪽에서도 알아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겠죠. 저라면 1시간 안에 모든 걸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건 이쪽에서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긴 촬영장입니다. 외부인이 들어오는 건 반댑니다.”
“허허허. 공 사장님도 엄연히 따지면 외부인 아닙니까?”
“저는 관계잡니다만? 여기 투자도 했습니다.”
빠지지지지직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는 곳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팽팽한 두 사람의 신경전에 지켜보던 사람들도 침을 꼴깍 삼켰다.
보던 사람의 위가 쓰려오기 시작할 때, 조연출이 뛰어왔다.
“PD님!”
“어, 어어. 종수야!”
철왕이 반가운 얼굴로 조연출의 이름을 불렀다.
일단 이 숨 막히는 분위기에서 구해 준 건 좋은데 종수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이번에도 같이 작품을 하게 된 종수가 어두운 얼굴로 그의 앞에 섰다.
불길한 미래를 예감한 철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종수야. 무, 무슨 일인데.”
“오늘 출연하기로 한 단역이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뭐!?”
아니 왜?
오늘따라 왜 이런 일이 계속 생기는 거지?
설마 내 불행이 또 발동한 건가?
주연이 유부녀와 불륜 스캔들이 생겨 터졌던 첫 작품과 사고가 나는 바람에 촬영이 중지된 두 번째 작품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철왕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울음이 터지려는 걸 꾹 참고 철왕이 말했다.
“일단 119 부르고. 아니, 이탈리아도 119인가? 아무튼 병원으로 보내.”
“네. 그럼. 촬영은 어떻게 할까요?”
“…쓰러진 배우가 맡은 역이 뭐지?”
“재벌녀입니다.”
“하필 그 역할이냐.”
재벌녀는 지한이 맡은 루치아노가 얼마나 무자비한 사람인지 보여주는 역할 중 하나였다.
루치아노는 상대가 누구든지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았다.
부자든, 정치인이든, 여자든, 노인이든.
재벌녀는 루치아노의 그런 성정을 보여주기 위한 역할이었다.
“PD님 그래도 오늘 현장에 그 사람이 오지 않았습니까.”
울 것 같은 철왕을 보고 종수가 다급하게 대안을 제시했다.
“누구?”
“오늘 지연 씨가 와 있잖아요.”
“아!”
철왕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철왕이 황급히 노신사와 대치하고 있는 주민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모든 스태프가 주민을 보고 있었다.
제발 살려달라는 듯이 바라보는 스태프를 본 주민이 마음속으로 계산했다.
주민이 고민하는 걸 본 철왕이 주민에게 매달렸다.
“제발! 지연 씨가 출연해 주면 안 될까요? 부탁드립니다.”
“지연이는 지금 휴가 중입니다.”
“압니다. 하지만 오늘 촬영이 끝나지 않으면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장소도 다시 빌리고, 제작비도 많이 들 겁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제작비쯤이야.
모자라면 자신이 더 투자하면 된다.
그때 주민의 마음을 흔드는 말이 들려왔다.
“지한 씨 촬영 스케줄도 밀릴 겁니다!”
이건 안 되는데.
오늘 촬영 끝나면 아이들은 며칠 동안 관광하기로 했다.
지금 쉬지 않으면 또 언제 쉴 수 있을지 몰랐다.
게다가,
‘여진이가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해한다며 이탈리아에 더 있다가 오라고 한 아내는 더 이상 없었다.
빨리 돌아와서 유나 얼굴 좀 보게 해 달라는 아내만 남았을 뿐.
본인도 이탈리아의 일정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지한이 일정이 꼬이는 건 사양이다.
“좋습니다. 지연이한테 말해보죠. 출연료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고 실장을 보내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주민이 지연이에게로 향했다.
그 옆을 노신사가 함께했다.
“당신은 왜 따라 오는 겁니까?”
“지연 씨가 출연한다면 당장 의상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쉬운 길을 두고 돌아가지 마시죠. 이것도 1시간 안에 준비하겠습니다.”
노신사의 말에 주민이 발걸음을 멈췄다.
옆을 돌아보니 뺀질거리는 노인의 얼굴이 보였다.
맘에 안 드는 놈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이놈의 도움을 받는 게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
효율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라는 이성과 이놈한테는 지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치열하게 부딪쳤다.
하지만 어느 것이 지연에게 더 이득이 될지는 안 봐도 뻔했다.
좋든 싫든 이놈과 협력해야 하는 일이 자주 일어날 것이다.
노신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주민이 철왕에게 말했다.
“유 PD님! 피아노는 1시간 안에 해결될 겁니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사실상 노신사의 제안을 승낙하는 말이었다.
멀리서 철왕과 소품팀 팀장이 좋아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민이 노신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조금 전과 변함없이 웃는 낯짝이었다.
그 얼굴을 더 보기 싫어서 주민이 등을 돌려 남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데보라는 어젯밤부터 몸이 안 좋았다.
배우가 되기 위해서 오디션을 보고 다녔지만 아직 무명 배우에 불과했기에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했다.
그러던 중 오지한이 촬영하는 드라마에 출연할 이탈리아 배우를 뽑는다는 공고를 봤다.
‘이건 기회야.’
오지한이 누구던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잘생긴 배우 1위.
할리우드 감독들이 데려가려는 배우 1위.
장래가 기대되는 배우 1위를 기록한 전무후무한 배우였다.
그가 크기를 기다렸던 제작사들이 얼마나 많던가.
마벨에서 먼저 선수를 쳐 나온 게 ‘드래곤 엠페러’였다.
그런 배우와 함께 출연할 수만 있다면 데보라도 무명 배우라는 타이틀을 벗어 던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 틈틈이, 집에 와서도 밤늦게까지 대본을 보고 준비했다.
‘데보라 씨. 합격입니다.’
합격 문자가 왔다.
그 문자를 받은 데보라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의상 대여점에서 옷까지 빌려왔는데 하필 오늘 쓰러지다니.
누워 있는 데보라의 옆에서 스태프들이 온도계를 확인했다.
“어때요?”
“39.7도. 열이 꽤 높아요. 당장 병원에 가야 합니다.”
병명은 몸살감기였다.
돈 한 푼 아낀다고 얇은 외투를 입었던 게 잘못일까.
아니면 접시 닦기 알바를 추가한 게 잘못일까.
평생에 다신 오지 않을 기회를 놓치게 된 데보라가 눈물을 흘렸다.
‘꼭 촬영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컨디션 관리를 잘 못 한 것도 자기 잘못이었다.
데보라가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며 덜덜 떨리는 턱을 악물었다.
그때 데보라의 고막에 다정하고 따뜻한 음성이 들려왔다.
“데보라? 괜찮아요?”
“아이린…?”
오지한과 함께 이번에 드래곤 엠페러에 출연했던 아이린이었다.
지연이란 이름이 있지만 외국인이어서 그런지 아이린이라고 부르는 게 더 편했다.
데보라가 힘겹게 부른 이름에 지연이 답했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촬영하지 못해서 아쉬울 거 다 알아요.”
“…흐윽.”
열 때문에 뿌연 시야에서 지연이 천사 같은 얼굴로 말했다.
자신의 심정을 꿰뚫는 말에 데보라가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제가 데보라의 역할을 대신해도 될까요?”
“부탁드려요. 잘, 해 주세요.”
“네. 그리고 이건 제가 미안해서 드리는 제안인데.”
지연의 말에 데보라가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나중에 제 채널에 한번 나와주실래요?”
“…제가요?”
“제가 데보라의 역할을 뺏었으니까요. 뭐라고 해 드리고 싶어서요.”
아이린의 채널에 내가 나올 수 있다니.
제 인생에 이런 기회가 또 올 줄이야.
데보라가 열에 들뜬 얼굴로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할게요. 아이린의 채널 나가게 해 주세요!”
“좋아요. 그럼 치료받고 건강해진 다음에 만나요.”
“네!”
지연이 데보라의 연락처를 받았다.
그 후, 데보라는 신고를 받고 온 구급대원과 함께 사라졌다.
“지연아. 왜 개인 채널에 나와 달라고 했어.”
영훈이 지연의 옆에서 물었다.
“지한이 촬영장에서 누가 실려 갔다는 말이 나와서 좋을 게 없잖아. 그리고 내가 배역을 뺏앗다는 소문이 돌 수도 있고.”
“누가 그런 소릴 한다고.”
그런 말을 한 놈이 있으면 당장 잡아다 팰 것 같은 얼굴이었다.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어서 지연이 웃음을 걸었다.
“어찌 됐든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은 소문이 나게 되어 있어. 그렇다면 이상한 소리가 나지 않게 처리하는 게 좋잖아.”
“그런 일 있으면 회사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니까 지연이 넌 그런 걱정 하지 마.”
“알았어.”
혹시 모를 구설수까지 예방한 지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자신도 촬영을 준비해야지.
대사라면 지한이랑 같이 연습하면서 전부 외웠다.
“메이크업 싫다.”
“어쩔 수 없지. 오늘은 또 파티 씬이니까 엄청 화려하겠네. 아. 의상은 곧 준비될 거래. 피아노도 준비가 끝날 거 같아.”
“알베르토 씨가 일을 잘하네.”
알베르토는 노신사의 이름이었다.
“나는 사장님이 그 사람이랑 손잡고 일할 줄 몰랐다.”
“그건 나도.”
사장님은 노신사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그래도 도움이 되니까 협력하기로 한 걸까.
둘 사이 오간 신경전을 모르는 지연과 영훈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멀리서 서문호가 뛰어왔다.
“지연아. 의상 왔어. 너도 얼른 메이크업하러 가야지.”
“어? 벌써?”
“응. 자, 빨리 가자. 3시에 촬영 시작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해.”
나는 그냥 지한이 촬영하는 거 보러 온 건데.
정말이지 이탈리아행은 여러모로 예상치 못한 일투성이였다.
지연이 발걸음을 옮겼다.
196. 평화를 부르는 것
슥, 스윽
부드러운 붓이 지연의 얼굴 위에서 움직였다.
간질간질한 감각에 지연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나는 왜 여기서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것일까.
지연이 눈동자를 움직여 동생을 돌아봤다.
“지연아, 이제 눈 화장 할 거야. 눈 감아야지.”
“그래. 누나. 설마 나 본다고 눈 안 감은 거야?”
지한이 옆에서 얄밉게 말했다.
저 자식.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게 다 누구 때문인데.
따지고 보면 다 너 도와주려고 하는 거잖아.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보복이라도 하듯이 지한이 메이크업이 다 끝난 얼굴로 싱글벙글 웃었다.
사이좋게 놀림을 주고받는 남매를 보고 코디들이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너희들 뭔가 사이가 좋아진 거 같다.”
“언니. 어딜 봐서요?”
“지연아 입술 칠할 거야. 이제 쉿.”
“남매들은 사이가 좋을수록 잘 싸운다더니. 두 분 사이가 더 좋아진 거 같아요! 사실 우린 두 사람이 언제쯤 남매싸움을 할지 궁금해했거든요.”
아닙니다.
사이가 안 좋을수록 원수같이 싸우는 거예요.
내가 해 봐서 알아요.
돌아오기 전에,
‘이게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회귀 전과 지금의 동생을 비교하는 건 아니었다.
지연이 방금 떠오른 생각을 의식 저편으로 날려보냈다.
“쨘! 다 됐다.”
“어휴. 진짜. 우리가 했지만 진짜 잘됐어. 거울 한번 봐 봐.”
코디의 말에 지연이 눈을 떴다.
화려한 화장 아래에 도도하고 새침해 보이는 얼굴이 드러났다.
오늘 맡은 재벌녀 캐릭터에 찰떡처럼 잘 어울리는 화장이었다.
‘잘했는데?’
짧은 시간 동안 캐릭터 컨셉을 확인하고 화장을 했을 코디들에게 지연이 인사했다.
“고마워요, 언니들. 저 때문에 고생이 많았어요.”
“아니야. 무슨. 오히려 너 덕분에 우리가 산 거지.”
“맞아요. 지연 씨 아니었으면 며칠 더 고생했을지도 몰랐다구요.”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지 막내 코디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연의 얼굴을 감상하던 지한이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다. 누나. 이제 옷 갈아입으러 가야지.”
“그래. 그나저나 사장님이 진짜 옷 다 쓸어왔어?”
“보면 알 거야.”
사장님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 의상을 구해 온다고 했는데 안 그래도 바쁜 사람 더 바쁘게 한 건 아닌가 몰라.
지연이 주민을 걱정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촬영장이 열리는 호텔로 무수히 많은 행렬이 이어졌다.
연락받은 퍼스널쇼퍼들이 상품을 들고 모였다.
“흠. 일단 부드러운 색상은 제외하도록 해. 악세사리는 전부 화려한 걸로. 구두굽은 8cm 이상.”
“알겠습니다.”
주민의 지시하에 상품들이 걸러졌다.
“지한이가 블랙 계열 슈트를 입고 진한 화장을 했으니 화면에 잡혔을 때 한쪽이 죽으면 안 돼.”
“사장님. 지연이는 1회성 캐릭터라 이 장면 이후로는 나오지 않을 텐데 그렇게 화려하게 해도 될까요?”
“이미 지연이가 출연하기로 한 이상 주목받지 않을 순 없어. 그럼 지한이랑 같이 잡히는 구도에서 시청자들의 눈을 확 사로잡을 수 있게 화려하게 꾸미는 게 나아.”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