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사장님도 ‘음성’이라는 말을 들었을 텐데 그거에 관해서는 안 물어보시는 건가?
지연이 주민을 돌아봤다.
“왜 그래. 역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사장님 아까 그 ‘음성’이라는 말에 대해 선데요.”
“됐다.”
주민이 지연의 말을 끊었다.
딱 잘라 말하는 모습에 지연이 물었다.
“안 궁금해요?”
“지금 이렇게 들어봤자 지연이 네 마음만 불편하겠지. 네가 마음 편히 말할 수 있는 때가 오면 그때 말해주렴.”
그 말을 끝으로 주민은 피곤할 테니 호텔에 가는 동안 눈 좀 붙이라고 말했다.
억지로 담요를 둘둘 만 지연이 주민을 올려다봤지만, 그는 지연의 눈에 손을 올리며 눈을 감으라고 했다.
“…흐흣.”
“얼른 눈 감아. 손바닥 간지럽다.”
“네에.”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는 것 같았다.
노인을 만나 심란했던 마음이 차츰 진정되어 갔다.
사장님이랑 계약하길 잘했어. 천만다행이야.
돌아오고 나서 가장 잘한 선택이 지한이를 버리지 않은 것이라면 두 번째로 잘한 선택은 사장님과 계약한 것이라고 꼽을 수 있었다.
과거의 선택을 칭찬하며 지연이 눈을 감았다.
* * *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침대로 다가왔다.
침대 옆에 선 존재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지연이 웃음기를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 왔어?”
“안 잤어?”
천천히 눈을 뜨니 동생의 얼굴이 어스름하게 보였다.
천사의 저택에서 오자마자 밥도 먹지 않고 곯아떨어졌다.
아마 예상치 못한 얘기를 들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모양이었다.
저녁을 안 먹을 거란 말에 사장님이 걱정했지만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했는지 방으로 들어가서 푹 쉬라고 해 줬다.
“미안. 내가 깨웠나 봐.”
“아니야. 피곤해서 잠시 낮잠을 잔 거야.”
누나의 말에 지한이 쓰게 웃었다.
딱 봐도 핑계였다.
지한은 오늘 하루 종일 정신이 딴 곳에 가 있었다.
누나가 식당에서 본 노신사를 따라갈 때부터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오늘은 NG도 많이 내서 오죽하면 현장에 있는 제작진들이 전부 나답지 않다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에고고고. 일어나야지.”
지연이 몸을 일으키자 지한이 지연의 등을 받쳐주었다.
“더 누워있지.”
“낮잠 잔 거라니까.”
“낮잠을 무슨 이 시간에 자.”
해가 어둑해진 시간이었다.
열린 문틈으로 들어온 빛에 드러난 누나의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촬영하고 온 나보다 더 피곤해 보이다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누나 무슨 일 있었지.”
“무슨 일은.”
“누나가 말 안 해주면 사장님한테 가서 물어볼 거야.”
지한이 물러서지 않겠다는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동생의 얼굴을 본 지연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나한테 말 못 할 일이야? 나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누나 동생인데?”
“지한아.”
“이럴 때 가족이 필요한 거잖아. 힘든 일은 나누는 게 가족 아니야?”
퇴로조차 막아버리는 동생의 말에 지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그 일을 들은 지한은 깜짝 놀랐다가, 심각해졌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었구나.”
“너도 놀랐지?”
“어. 우리한테 일어난 일이 다른 사람한테도 있었다는 데 놀랐어. 조반니라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더 좋게 바꿔야 하는 건가?”
“아마도?”
너무 거창한 얘기에 지한이 눈을 깜빡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세상을 바꿀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럴 능력도 없어. 나는 그냥 지금처럼 연기하고 누나랑 인절미랑 모짜랑 알콩달콩 잘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거야.”
지한이 쾌활한 얼굴로 말했다.
당당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하는 동생을 본 지연이 뿌듯해했다.
역시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키웠던 보람이 있구먼.
그래. 세상을 구하는 건 다른 사람한테 맡기자.
그런 건 희생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다.
우리 한 몸 건사하기 바쁜데 누굴 챙긴다고.
“좋아.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고 우린 우리지. 거창하게 세상을 더 좋게 바꾼다고 말하는 건 모르겠고 우린 우리 갈 길을 가면 되는 거 아니겠어?”
“맞아. 우린 우리가 하고 싶은 거 하자.”
“그래그래. 내 동생 잘 생각했어. 누가 키웠는지 모르지만 아주 자주적으로 잘 컸네.”
“누나가 키웠지.”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지연이 인절미나 모짜한테 하듯이 동생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동생의 머리가 인절미가 핥은 것처럼 헝클어졌지만 지한이는 누나의 손길을 잠자코 받아들였다.
한참을 쓰다듬고 쓰다듬 당하면서 무거운 이야기를 털어낸 지연이 동생과 마주 보고 앉았다.
“지한아.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뭔데?”
천사의 저택에서부터 줄곧 생각했었다.
내 사람들한테 비밀을 털어놓자고.
오늘과 같은 일이 있을 때, 그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서운해하지 않도록 미리 말해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장님한테는 우리가 목소리에 대해 듣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한이한테는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말하고 싶었다.
심호흡한 지연이 동생을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나 사실 회귀했어.”
말하고 보니 너무 장난 같았다.
지연이 다른 문장을 고민하고 있을 때 아무렇지 않은 듯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아.”
“…응?”
“안다고.”
“어떻게…?”
평생 무덤까지 안고 갈 거라고 생각했던 비밀을 털어놨는데 상대방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반응하자 지연은 황당했다.
허무한 것 같기도 하고, 내 말을 바로 받아들이는 게 좋기도 한데.
뭐지? 이 복잡미묘한 기분은?
“다른 사람은 잘 모르는 거 같은데 누나가 작품 고르거나 다른 작품 평가하거나 그럴 때 드러나는 게 있어.”
“내가?”
“응. 이건 500만 간다. 이건 1000만 안 되는데. 이 작품 똥망한다. 이렇게 말했잖아. 그건 딱 봐도 결과를 아는 것 같은 말인걸.”
“아니 그래도.”
그렇다고 내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그렇게 순순히 받아들이면 내가 뭐가 되냐.
이때까지 계속 비밀로 하고 있어서 어떨 때는 너한테 미안하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그렇게 고민한 게 다 억울했다.
어쩔 줄 몰라서 울상이 된 누나의 얼굴을 보고 지한이 씰룩이는 입가를 숨기지 못했다.
그걸 본 지연의 눈이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지한이 재빨리 다른 증거들도 뱉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은 모를 거야. 나는 누나를 어릴 때부터 봤잖아.”
“그래서.”
“누나가 데스노트라는 걸 작성했을 때도 기억하는걸. 나중에 같은 제목의 만화책이 나왔었지?”
그건, 할 말이 없군.
“월드컵 경기를 맞췄던 것도, 올림픽 결과를 맞혔던 것도 누가 도박했는지, 누가 마약을 했는지 다 알았잖아.”
그것도 할 말이 없네.
“가끔 다른 드라마를 보고 ‘이건 없었는데. 내가 바꾼 건가?’라고 말하는 것도 들었는걸.”
“….”
이렇게 들어보니 안 들킬 거라고 생각했던 게 용하군.
가족이라고 너무 긴장을 풀었나?
동생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자신의 말실수를 들은 지연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그렇게 말했었니?”
“아니. 집에서만 그랬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안 그러던데? 영훈이 형이랑 미나 누나랑 같이 살 때도 두 사람이 있을 땐 그런 말 한 적 없으니까 안심해도 좋아.”
다행이네.
혹시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그랬으면 내 머리를 깨려고 했는데 안 그래도 되겠어.
얼굴을 감춘 누나를 보고 조심스럽게 얼굴을 가린 지연의 손을 떼며 말했다.
“누나. 나는 누나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믿어. 회귀를 했든 전생을 기억하든 빙의를 했든 다 믿으니까 그런 걸로 고민하지 마.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누나 동생이고 누나 편이야.”
“지한아.”
“그러니까 예전에 내가 어땠든 전부 다 잊어줘.”
지한의 말에 지연이 동생과 눈을 마주쳤다.
”누나가 회귀하기 전에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미안해. 사과할게.”
“아니야. 네가 왜 미안해.”
네가 그런 선택을 한 건 내가 잘못해서인걸.
지연의 말에 지한이 고개를 저었다.
“누나 처음 반응을 봤을 때 뭔가 느낌이 왔어. 내가 잘못한 게 있는 거지?”
“…너는 그때 일을 다 기억해? 유치원 다닐 땐데?”
“누나도 다 기억하잖아. 그리고 우리한텐 이 선물이 있다는 걸 잊었어? 웬만한 건 다 기억하고 있어.”
지한이 소매를 걷어 아직도 선명한 붉은 자국을 꺼내 보였다.
자신과 누나의 팔에 새겨진 흔적이자 축복이었다.
그 자국과 동생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지연이 막힌 숨을 토해내듯이 깊은숨을 뱉었다.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너한테 다 털어놓을 걸 그랬다. 나 바보 같았지?”
“누나도 엄청 고민했을 거라는 거 알아. 다 이유가 있었겠지, 안 그래?”
지한이 다 이해한다는 듯이 누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서 회귀 전 연을 끊었던 동생이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착한 놈이었다.
진작 말해 볼걸.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누나?”
“어?”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어느새 방울방울 맺힌 눈물이 지연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뭐야. 나 왜 울지?”
“갑자기 왜 울어.”
“몰라. 나 안 슬픈데.”
갑작스러운 누나의 눈물에 지한이 당황하며 이불로 지연의 눈물을 닦았다.
지연은 자기 눈에서 흐르는 눈물의 이유를 몰라 멍하니 지한이 눈물을 닦아주는 걸 받고만 있었다.
처음 보는 누나의 어리숙한 모습에 지한은 가슴이 콕콕 찌르는 듯이 아팠다.
아마 누나가 회귀하기 전의 일 때문에 우는 거겠지.
그때 내가 어땠길래 누나가 이렇게 자신이 우는 이유도 모른 채 눈물을 흘리는 걸까.
“나 진짜 괜찮은데.”
“그래. 알았어.”
“진짜야.”
“그래.”
지연이 계속 변명하듯이 괜찮다고 말했지만 누가 봐도 괜찮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지한은 왜 자신이 우는지 모를 만큼 오랫동안 무언가를 삼켜왔을 누나를 위해 계속해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마 누나의 눈물에는 자신의 지분도 있을 것이다.
돌아오기 전 누나와 자신은 어떤 사이였을까.
이렇게 갑자기 눈물을 터트릴 정도면 분명 좋지 않았을 거다.
지한은 알 수 없는 과거이자 미래의 자신을 탓하며 조용히 누나의 눈물을 닦았다.
“…미안.”
“아니야. 누나가 왜 미안해.”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해야 했었는데.”
과거의 오지한에게 하는 말이었다.
지금은 닿을 수 없는 먼 과거의 자신.
똑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었다.
누나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만 있다면 덜 답답할 텐데.
지한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누나의 말을 받아주었다.
“괜찮아. 내가 더 미안해.”
“아니야. 내가. 더.”
“그럼 서로 미안한 걸로 해. 그럼 쌤쌤이지?”
“뭐야. 아저씨 같아.”
지한의 말에 지연이 울면서 웃었다.
조금 진정된 것 같은 지연을 보고 지한이 누나를 품에 꼭 안아주었다.
어렸을 땐 누나가 자신을 꼭 안아주었는데 이제는 누나가 제 품에 쏙 들어왔다.
“누나. 나는 누나가 내 누나라서 좋아. 아마 그때도 누나가 내 누나라서 좋아했을 거야.”
“정말? 회귀 전의 동생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럼. 그 동생도 오지한이잖아. 오지한이 누나를 좋아하지 않을 리 없는걸.”
오지한은 누나를 좋아한다.
지한이 그 사실을 마치 칸트의 정언 명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회귀 전과 회귀 후의 동생이 다른 존재임을 알면서 지연은 우습게도 그 말을 듣고 안심했다.
“고마워.”
“그래서 이제 다 울었어?”
“응.”
동생을 얼굴을 본 지연이 옅게 미소 지었다.
지한이 지연을 다시 침대에 눕혔다.
“누나 괜찮으면 돌아오기 전에 내가 어땠는지 말해 줄 수 있어?”
“들어서 뭐하게.”
“그래도.”
지한의 말에 지연이 머뭇거리며 입을 벙긋거렸다.
이내 지연의 입에서 회귀 전의 일들이 흘러나왔다.
지한은 밤새 누나의 말을 들으면서 머릿속에 과거의 자신을 상상했다.
밤새도록 남매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다.
192. 버스킹
지한이한테 비밀을 털어놓은 뒤, 지연은 주민에게도 둘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럴 줄 알았다.”
태연한 주민의 대답에 지연은 또다시 숨겼던 게 허무해졌다.
내 주위 사람들은 전부 무신경한 사람들밖에 없는 걸까.
아니면 다들 착한 사람들이라 그런 걸까.
뭐가 됐든 이렇게 쉽게 받아들일 거면 난 그동안 왜 이 사실을 숨기느라 고생한 거지.
“어쩐지 평범한 거 같지 않더라니. 신의 목소리를 들었단 말이지?”
“사장님은 별로 안 놀라시네요.”
“놀라긴 했는데 너희들이 워낙 대단해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혹시 너희들 초능력도 쓰니? 그러면 조금 놀랄 거 같은데.”
“그런 건 없어요.”
단지 조금 비슷한 능력이 있다면 동물들이 뭘 말하는지 느낌으로 아는 것밖에 없다.
그건 초능력이라고 하기 좀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선물의 능력이라고 해 봤자 상태창에 <경험치 +500%>나 <숙련도 3배>, 또는 <잠재력 EX>로 표기될 만한 게 다였다.
진짜 아무 능력 없음.
남들보다 더 빨리 배우는 게 답니다.
“그럼 됐다. 난 또 뭐라고.”
“다른 사람들은 충분히 놀랄 법한 일인 거 같은데.”
“너희들 행보를 보면 그보다 더한 게 있어도 놀랍지 않아.”
사장님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내가 회귀했다는 걸 말해도 되겠는데?
지연이 동생을 돌아봤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겠다는 듯이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더 말할 게 있어요.”
“그래. 뭐니. 혹시 초능력이 아니라 마법을 쓸 줄 아는 거니?”
“그게 아니라요. 제가 사실은 미래에서 돌아왔거든요.”
“…뭐?”
이건 생각도 못 했는지 주민의 두 눈이 커졌다.
뭔가 사장님을 놀리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조금 전 무덤덤한 반응과 다르게 깜짝 놀란 얼굴을 보니 뭔가 뿌듯했다.
‘이거지. 역시 비밀을 밝히면 상대방이 놀라줘야 제맛이지.’
지연의 입꼬리가 만족한 듯이 올라갔다.
아니 그런데 신이라는 존재보다 내가 미래에서 돌아왔다는 게 더 놀라운 거야?
보통 사람이라면 신을 만났다는 걸 더 놀라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지연이 혼자 어느 것이 더 놀랄 이야기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주민이 허공을 바라보며 회상하듯이 말했다.
“그러면 이때까지 지한이 작품을 골랐던 게, 전부?”
“어떤 작품이 잘될지 알고 있어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