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이 세상에는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들이 나타나곤 했습니다.”
노신사의 말에 지연이 동공이 흔들렸다.
누가 봐도 자신을 겨냥해서 하는 말이었다.
자신도 시간을 돌리고, 뭐든 배울 수 있는 재능을 선물로 준 존재를 신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신의 음성’이라고 말하는 존재가 나타나니 표정을 관리하기 힘들었다.
지연의 목이 꿀렁거렸다.
“누가, 어디서, 왜 선택받는지는 모릅니다. 그걸 알고 있는 존재는 신밖에 없으시겠죠. 신의 음성을 들은 갑작스럽게 세상에 나타나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그 얘기를 왜 저한테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참지 못한 지연이 입을 열었다.
지연의 발뺌에 노신사가 부드럽게 웃었다.
“모르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노인의 눈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지연을 보고 있었다.
지연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저 어느 순간 그들은 나타나고, 이 세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들 덕에 사람들은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죠. 약이라든지, 음악이라든지, 그림이라든지요.”
“그 말은 위인 중에 신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 있다는 건가요? 꽤 재밌는 발상이네요.”
“그렇죠? 저도 재밌다고 생각합니다.”
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지연도 노인도 알고 있었다.
지연은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이며 노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하지만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 확인하지 않았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 가문은 예전부터 신의 음성을 듣는 자들을 모셔 왔습니다.”
집안 대대로 나 같은 사람을 모셨단 건가?
어쩐지 내가 목소리를 들었다는 걸 확신하는 것 같더니 이미 나 외에도 그런 사람들을 만났던 기록이 있던 거였어.
“우리는 그들의 행보를 지원하고 기록하며 그들이 사명을 이룰 수 있게 도왔죠. 처음 할아버지께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습니다. 제가 누군가를 모셔야 한다는 게 싫었거든요.”
이런 대저택의 도련님으로 자랐을 그가 누군가를 모셔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반항할 법했다.
지연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이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그런 사람을 꼭 찾으라고 하는데 이 넓은 땅에서 어떻게 그런 사람을 찾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새 지연이 처음 경계하던 것도 잊고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노인의 가문의 얽힌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웠다.
그러니까 날 찾아서 해코지하려는 게 아니었구나.
조금 안심한 지연이 노인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자 그가 어린 날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반항했던 일이나 가문의 기록을 보면서 자신은 그렇게 누구 뒤치다꺼리를 하며 살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던 일을 늘어놓았다.
“할아버지는 한눈에 보면 알아볼 거라고 했습니다. 누가 신의 음성을 들은 자인지 그를 보면 알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신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신께서 알려주실 거라고 했습니다.”
뭔가 판타지 소설에서 나오는 신관이나 무녀와 비슷한 사람들인 건가?
그래서 신의 존재를 믿고, 그들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찾아내 모셔 왔다고 하는 거고.
“그리고. 오늘 저는 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눈가가 주름진 노인의 시선이 지연을 향했다.
“신의 음성을 듣는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휠체어에 앉은 노인이 고개를 숙였다.
190. 대죄(大罪)
고개를 숙인 노인의 정수리를 보았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지연은 더 이상 발뺌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절 어떻게 찾으신 거죠.”
“손자 덕분입니다.”
“손자분이요?”
“네. 제 손자가 오지한 군의 팬입니다. 이번에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가 마벨의 새 히어로가 되었다며 좋아하길래 같이 봤을 뿐인데 거기서 당신을 찾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지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렇게 찾을 수도 있는 거구나.
그의 손자가 지한이의 팬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연기를 할 생각이 없었다면 오늘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아니지. 애초에 손자가 먼 유럽에서 지한이의 팬이 된 것도 집안 내력(?)의 영향이 있었을지도.
저쪽은 나 같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것 같으니까.
“절 어떻게 찾았는지 알겠어요. 그런데 저는 이때까지 잘살고 있었고, 지금도 잘살고 있어요. 여기서 새롭게 누군가의 지원이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아요. 그러니 절 도와주지 않아도 됩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이미 당신의 옆에 훌륭한 조력자가 붙은 것 같더군요. 오늘도 그 조력자랑 같이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노인의 말에 지연은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을 주민이 떠올렸다.
이탈리아에 온다고 했을 때부터 무슨 일이 있으면 누르라고 버튼을 품에 꼭 안겨 주었던 사장님이었다.
사장님은 이미 우리한테 단순한 사장님 그 이상의 존재였다.
다른 사람은 필요 없었다.
지연의 눈빛을 본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푸근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당신께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을 겁니다. 그저 당신이 하는 일을 돕게 해 주십시오.”
“제가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해도요?”
“그래도 옆에 있게 해 주십시오. 살면서 저희의 도움이 필요한 날이 왔을 때 저희가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 도울 수 있게 해 주시면 됩니다.”
“제가 뭘 해 드려야 하나요?”
“그런 건 없습니다.”
“정말 저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으신가요?”
“그렇습니다.”
거짓말.
세상에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없으면서 도울 수 있게 해 달라고?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 같은 사람을 대대로 모셨다고 하기에는 가문이 쌓은 부와 영향력이 적지 않아 보여.’
당장 이 저택만 봐도 그렇다.
이렇게 거대한 저택을 가지고, 식당에서 바로 찾아온 것도 그렇고, 도움이 필요할 때 말하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돈도 힘도 있어 보이는데 이런 사람들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날 돕겠다고?
지나가던 개도 안 믿을 소리를.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지연을 보고 노인이 말했다.
“의심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대가 없이 누군가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당신과 같이 극히 드문 사람들 빼고요.”
“제가 왜 드문 사람인 건지 모르겠지만 앞의 말은 맞아요. 저는 관계는 서로 주고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일방적으로 주고받는 관계는 싫어요. 호구 취급당하는 건 사양입니다.”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 단 한 번도 대가 없이 남을 도와준 적이 없다고 확신하십니까?”
노인이 지연을 지긋이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정말 대가 없이 누군가를 도와준 적이 없는지 물어보는 듯했다.
노인의 눈빛을 받은 지연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신의 음성을 듣는 자들은 자신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기술의 발전이든, 치료 약의 개발이든, 아니면 훌륭한 작품 같은 것으로 당신들은 큰 대가 없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더 나은 삶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아마 그래서 신께서 당신들을 선택한 것이겠죠.”
“그것과 이건 다르죠.”
지연의 말에 노인이 온화하게 웃었다.
“당신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죠. 당신들이 베푸는 것이 얼마나 큰지 모르고 아주 작은 것을 받고 당신들의 모든 것을 베풀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대가가 어떤 것이든 남들은 당신이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할 겁니다.”
머릿속에서 몇몇 사람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일방적인 도움이 아니야.
나는 그저 그게 나랑 지한이한테 도움이 돼서 선택한 것뿐이야.
그 외에 다른 것도,
‘지연 씨 정말 감사합니다. 제 억지를 들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지연 씨 덕분에 제 새끼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어요.’
‘지연아 사랑해. 우리 곁에 와 줘서 고마워.’
‘선배님 덕이에요.’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들 때문에 지연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들이 떠오르자 연말 무대를 하면서 마주쳤던 사람들도 생각났다.
‘꼭 살리자.’
이번에는 돌아오기 전처럼 쓸쓸한 최후를 맞게 두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했던 사람들이었다.
노인의 말에 지연이 반박하지 못했다.
”당신들은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기 전에 가장 먼저 가까이 있는 자들에게 손을 뻗었습니다. 예를 들어 가족이나 친구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다가 점점 더 많은 사람을 도왔죠.”
“….”
지연의 미간이 불쾌한 듯 일그러졌다.
다 잊은 줄 알았던 기억들이 노인의 말에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잊고 있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갔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는 당신들의 선의를 배신하는 자들이 나오곤 했죠.”
본인의 말이 지연을 불편하게 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노인은 계속 입을 열었다.
불편해도 이것은 그들이 알아야 하는 일이었다.
“신의 축복이 함께함과 동시에 신께선 당신들에게 시험을 내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가까운 이들의 배신을 겪더군요.”
“그래서요?”
“미리 사과드리자면 당신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
“부모가 친가와 연을 끊고 오직 동생만 가족으로 여기시는 것 같더군요. 그런 선택을 했던 이유는 그들이 먼저 당신을 배신하는 행동을 한 게 아닙니까?”
꾸욱
지연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당신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움직임의 중심에 동생분이 계시더군요.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에게만 선의를 베푼다는 사실을요. 오늘 함께 온 조력자도 당신을 만나고 나서 거대한 부를 쌓았더군요. 그 외에도 당신의 선의는 소수의 인원에게만 향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말에 지연은 표정 관리하기 힘들었다.
대가 없이 도와줬던 일들.
가장 먼저 손을 뻗었던 가까운 자들.
…내 선의를 배신했던 사람들.
돌아오고 나서 잊고 가슴 깊이 묻어놨던 기억들이 튀어 올라 지연을 괴롭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바보같이 당하고 있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걸림돌이 되던 부모를 떼어내고, 날 조롱하던 이들을 처음부터 배제했다.
두 번 다시 이용만 당하지 않기 위해서 경계하고 사람들을 거르고, 그중 지한이와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전해주고.
그렇게 살아왔다.
“최근에는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어 보였습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 같더군요.”
그만해.
최근에 있었던 마음가짐의 변화까지 간파하는 노인을 지연이 적대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더 이상 내 신경을 건드리지 마.
지연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요. 당신이 나를 조사했다는 건 알겠습니다. 내 비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도 알겠고요. 그런데요? 그게 뭐 어쨌다고요. 지금 나에게 그런 말을 떠벌리는 이유가 뭡니까? 순순히 내 도움을 받아라? 뭐 이런 뜻입니까? 대가를 바라지 않겠다고 하면서 내 과거를 들먹이면 제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어이가 없군요. 지금 이 말을 듣고도 내가 순순히 당신의 도움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합니까.”
지연의 말투가 날카로웠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가시를 세우는 고슴도치처럼 지금 지연은 자신을 위협하는 상대에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날 선 지연의 반응에 노인이 자신은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듯이 두 손을 들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요? 아무 대가 없이 도움을 받아들이라고 해 놓고 그다음에 사람 뒷조사를 한 걸 구구절절 말하는 사람을 보고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자신을 경계하는 지연을 보고 노인이 침울한 얼굴을 했다.
“불편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런 말을 했던 이유는 당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신들은 상냥하고 선해서 이용당하기 쉬우니까요. 저희는 그런 당신들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당신들이 많은 사람을 행복할 수 있게 옆에서 돕는 것. 그것만 바랄 뿐입니다. 그게 바로 저희의 사명이니까요.”
떠올리기 싫었던 기억까지 떠올리게 만들어 놓고 보호하기 위해서라니.
이게 바로 병 주고 약 준다고 하는 거겠지.
지연은 머리끝까지 분노와 원망이 차올라 그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저들은 누가 신의 음성을 들었고, 그들의 행보가 어떻게 됐는지, 신은 뭘 원하는지 나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지금은 참자.
지연이 크게 숨을 들이쉬고 뱉었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지연이 눈을 떴다.
“바로 믿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그 사명이란 말. 조금 더 자세히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습니다. 단순히 사명이라는 말로 당신을 설득하기 어렵겠죠.”
노인의 말에 지연이 그를 지긋이 바라봤다.
“저희가 그 사명을 따르는 이유는 저희가 과거에 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수행하는 것만이 저희가 속죄받을 유일한 방법입니다.”
노인의 얼굴이 아픈 상처를 헤집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 * *
속죄?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조건 없이 따른다고 했을까.
속죄라는 말에 지연이 잠자코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먼 과거 저희는 대죄를 저질렀습니다. 신은 저희에게 당신들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주셨지만, 시간이 지나자 다른 마음을 먹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지연은 저들이 자신을 이용하지 않을까 경계했던 일이 과거에 있었다는 말을 듣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이미 과거에 그러한 일이 일어났음을 털어놓은 노인이 말을 이어서 했다.
“오만했던 선조들은 신께서 당신들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준 이유를 망각하고 자신들이 신에게 선택받았다며 당신들을 이용했습니다. 그들이 개발한 기술을 뺏고, 작품을 헐값에 사들이며 그들의 모든 것을 뺏었습니다. 당신들은 그 모든 영광과 부가 자신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임을 모르고 죽어갔습니다.”
노인이 참담한 얼굴로 말했다.
“애초에 신이 우리에게 그들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준 것은 그를 모셔 이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서였는데 오만했죠. 자신들이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착각했으니. 결국 우리는 벌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이 끝낼 때까지 끝나지 않는 벌을요.”
신의 뜻을 왜곡하고 오만과 탐욕을 부렸다.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닿으려 한 자들처럼 저들은 신의 분노를 받아 버렸다.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의 분노를 받은 자들은 불신과 오해가 싹터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노인의 선조들이 받은 벌은 어떤 것이었을까.
“신의 분노를 받은 저희 가문은 그때 한 번 멸망했습니다. 선조들은 모두 알 수 없는 일로 죽었죠. 사고, 재해, 병, 암살 등. 모두가 죽어 나가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우리가 신에게 벌을 받았음을.”
노인이 참담한 얼굴로 말했다.
어린 시절, 그 얘기를 할아버지에게 전해 듣고 겁을 먹어 울음을 터트렸을 정도였다.
“영문도 모르고 사람들이 죽어갈 동안 신께서는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내려보내지 않았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이 세상에는 암흑기가 찾아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세상은 황폐해졌죠. 그 모든 것은 저희의 잘못이었습니다.”
노인이 직접 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짙게 어려 있었다.
이 세상을 망가트렸다는 어마어마한 죄책감.
신이 그들에게 내린 벌은 그 죄책감이 아닐까?
“가문의 모든 이가 죽고 딱 한 명만 살아남았습니다. 그가 혼자 남았을 때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을 기록하고, 평생 속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요. 그렇게 살아남은 이는 죽을 때까지 죄를 뉘우치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잊지 않도록 그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후대에 전달했습니다.”
“….”
“그 이후로 기적처럼 신께서 다시 자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이를 내려보내셨죠. 저희는 그들을 모시고 그들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것만이 저희가 망친 이 세상을 원래대로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그러니 부디.”
노인이 머리를 숙였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 그저 날 돕게 해 달라고 몸을 굽혔다.
“저희가 당신을 돕게 해 주십시오.”
그 모습을 본 지연도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일단. 알겠어요.”
그들의 죄로 인해서 많은 목숨이 사라졌다.
그 죄를 어떻게 다 갚을 것인가.
그들이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세상의 뒤에서 몸을 숨기며 살아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조건 없이 날 돕게 해 달라고 하는 이유도.
아직 이들을 온전히 믿을 순 없지만… 지연은 일단 이들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하면 되는 건가요?”
“항상 주위에 있겠습니다. 언제든지 말만 하시면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겠습니다.”
약간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겠지만 저들의 말을 들어보기로 한 지연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좋아요. 필요하면 부를게요. 그럼. 그.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조반니. 조반니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앞으로 도움이 필요하면 부를게요, 조반니.”
지연의 허락을 받은 노인이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두 손을 모았다.
“감사합니다. 당신의 앞길에 신의 축복이 가득하길.”
191. 비밀
천사의 저택이 멀어졌다.
나처럼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들과 신이 그들을 선택하는 이유, 저들이 도와줄 수 있는 일, 그들의 역사를 들었다.
“지연아 정말 안에서 아무 일도 없었어?”
“네.”
“정말이지?”
“그렇다니까요.”
지연이 조반니와 만나고 돌아왔을 때부터 주민이 지연의 몸을 살피며 괜찮냐고 물었다.
어디 하나 다친 곳은 없었지만, 지연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해서 주민도 다른 이들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3층에 올라가기 전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사장님이 왜 자꾸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보는지 이해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