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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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이 주민에게 시선을 보내자 자신에게 뒷일을 맡기려 한다는 걸 눈치챈 주민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알았다. 은주 실장에게 말해서 최대한 편한 일정으로 잡아볼게. 그 외에는 이탈리아에서 쉴 수 있게 해 주마.”

“와아. 고마워요, 사장님.”

“역시 사장님이야.”

이 녀석들.

자신을 이용해 먹었음에도 밉지 않은 남매를 보고 주민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걱정이 사라져서인지 아까부터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지배인이 와인을 들고 왔다.

갑자기 웬 와인?

‘사장님이 시켰어요?’

지연의 시선에 주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시킨 사람이 없는데 지배인이 와인을 가져오자 남 비서가 나섰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이 와인을 시킨 적이 없습니다.”

“다른 테이블에 있는 신사분이 이탈리아에 온 손님을 위해 드리는 작은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가게에서 제일 좋은 와인입니다. 편하게 드십시오.”

모두의 잔에 루비 같은 와인을 따라준 지배인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하지만 테이블에 있던 이들은 지배인의 말에 모두 얼음이 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사장님. 창가입니다.”

남 비서의 말에 지연과 지한, 주민의 시선이 창가로 향했다.

세월을 맞아 빛바랜 머리칼을 한 노신사가 시선이 마주치자 근사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아한 걸음으로 테이블에 다가온 노신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모시러 왔습니다.”

영훈에게 초대장을 건넸다던 노신사가 틀림없었다.

“참고로 제 주인님은 절대 오타쿠가 아닙니다.”

…우리 말을 다 들었나 보다.

딸꾹!

지한이가 옆에서 딸꾹질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탈리아 호랑이가 찾아왔다.

* * *

식당까지 찾아온 그를 보고 결국 그의 주인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지한이는 촬영이 있어서 따라오고 싶어도 따라올 수 없었다.

‘아 뒷담은 하지 말걸.’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의 침묵이 무거웠다.

다른 나라라고 너무 쉽게 생각했어.

아직도 머릿속에서 ‘제 주인님은 절대 오타쿠가 아닙니다.’라는 말이 맴돌았다.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린 지연이 최악의 첫인상을 남긴 것 같아서 몸을 떨었다.

“여깁니다.”

노신사의 말에 지연과 주민, 남 비서까지 모두 차에서 내렸다.

모두 차에서 내리자 뒤따라오던 경호원까지 차에서 내려 주민과 지연을 둘러쌌다.

노신사는 그 모습을 보고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뒷담에다가 대놓고 경계하고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이네.’

이 정도는 예상했다는 걸까?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까 식당에서 했던 말이 찔리기도 해서 지연은 노신사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우와.”

시선을 돌리니 주위에는 물과 녹음이 어우러진 멋진 정원이 보였다.

정원사의 손길이 닿은 정원은 겨울임에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저희 정원사가 솜씨가 좋습니다.”

지연의 감탄을 들은 노신사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커다란 정원 곳곳에 닿은 관리의 흔적을 보니 저렇게 말할 법도 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노신사가 일행들을 안내했다.

저택으로 향하는 동안 정원 곳곳에 놓인 천사의 조각상이 보였다.

“사장님 여기 천사 조각상이 많아요.”

“그래. 꽤 운치가 있는걸.”

이러면 안 되는데 정원을 보니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 지연의 반응을 보고 노신사의 허리가 더욱 펴졌다.

“이곳입니다.”

지연의 앞에 고풍스러운 저택이 드러났다.

“천사의 저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중세 유럽, 귀족이 살았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고풍스러운 저택에 지연이 입을 벌렸다.

아무래도 날 초대한 사람은 절대 오타쿠나 그런 쪽은 아닐 것 같았다.

189. 천사의 저택에서 온 초대 (4)

노신사는 ‘천사의 저택’이라고 불린 곳을 안내했다.

저택을 들어가자 보인 커다란 그림.

곳곳에 장식된 조각상들.

겨울임에도 싱싱한 꽃들이 꽂혀 있는 화병까지.

천사의 저택은 겉모습처럼 내부도 화려했다.

하지만 우리 목적은 저택 관광이 아니지 않은가.

“아까부터 계속 상관없는 곳만 보여주고 있군요. 그래서 우릴 초대한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쉽게 올 수 없는 곳이라 안내를 드렸는데 지루하셨나 봅니다.”

노신사의 말에 주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영문도 모를 곳에 와서 관심도 없는 걸 보여주고 있으니 주민의 심기가 좋을 리 없었다.

노신사는 주민을 잠시 살피더니 몸을 돌렸다.

“주인님은 2층에 계십니다. 따라오시죠.”

그의 뒤를 따라 2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가 오른쪽으로 향하자 넓은 응접실이 보였다.

주인이 2층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주인이 오는 건가?

지연이 노신사에게 물었다.

“여기 있으면 되나요?”

“네. 다른 분들은 여기에 계시면 됩니다.”

다른 분들?

그 불길한 어휘를 들은 주민이 다급하게 말했다.

“우리 다 같이 보는 게 아닙니까?”

“주인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지연 씨뿐입니다.”

너희들은 주인을 볼 자격이 없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노신사의 시선에 주민이 반발했다.

“당신의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지연이와 단둘이 만나게 할 순 없습니다.”

“저희가 오지연 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없습니다.”

“저희가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여기까지 경호원들을 들어올 수 있게 허락한 것만으로 꽤 많은 걸 양보해 드린 겁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만남에 공주민 씨의 허락이 필요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주민을 보고 노신사가 그와 시선을 부딪쳤다.

“필요해요. 사장님 허락. 사장님은 예전에도 지금도 우리의 보호자니까요.”

지연이 또렷한 시선으로 노신사를 바라봤다.

사장님이 저렇게 나오는 건 전부 날 걱정해서 그런 거다.

이때까지 나랑 동생을 묵묵히 챙겨주고 부모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게 해 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사장님은 그런 말을 해도 돼.

지연의 눈빛 속에서 주민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따라가지 않겠다는 것을 느낀 노신사가 대답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앞으로 할 얘기를 저분이 들어도 된다면 같이 가셔도 됩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사장님이라면 괜찮아요.”

“정말입니까? 주인님께서 하실 말씀은 ‘음성(音聲)’에 관한 것입니다만. 그 얘기를 공주민 씨와 같이 들어도 될지 모르겠군요.”

노신사의 말에 지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음성…그러니까 목소리라고?

저 사람의 주인은 목소리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야?

아니, 그 전에.

내가 목소리를 들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저 말은 내가 목소리를 들었다는 걸 확신하는 말이야.

이 세상에서 목소리에 대해 아는 사람은 나랑 지한이 외에는 없는 줄 알았는데.

“지연아? 왜 그래.”

지연의 반응이 심상치 않아 보이자 주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저 사람이 말한 음성이 도대체 뭐길래 지연이가 이렇게 반응하는 거지?

주민이 지연을 등 뒤로 감추고 노신사를 노려봤다.

“당신 지금 지연이한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계속 옆에서 보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 주인님과의 대화에 공주민 씨가 끼어들어도 되는지 물어봤을 뿐입니다.”

“음성이 뭡니까. 그게 뭔데 지연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예요.”

“글쎄요. 오지연 씨가 그 사실을 공주민 씨에게는 말하지 않았나 봅니다. 지금 이렇게 화를 내시는 걸 보니 공주민 씨는 그게 뭔지 모르는 것 같군요.”

노신사의 도발에 주민이 발끈했다.

분하지만 노신사의 말이 맞았다.

지연이 이렇게 반응하는 걸 봐서는 뭔가 있는 게 분명한데 차마 이 자리에서 물어볼 수 없었다.

‘그게 뭐지. 음성? 목소리가 뭐 어땠다는 거야. 지연이 목소리를 말하는 건가?’

혼자 머릿속으로 추리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시선을 따라 내려가자 자신의 소매를 잡은 하얗고 가녀린 손이 보였다.

“사장님 저 혼자 들어갈게요.”

“! 지연아.”

주민의 부름에 지연이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그게 뭐길래 혼자 간다는 거야.

지연이가 혼자 품고 있는 비밀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지연이 운이 좋다고 여겼지만, 주민은 지연을 보고 가끔 미래를 알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지연이가 말해주지 않는다면 자신이 먼저 캐낼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혼자 보내야 할 줄 알았으면 미리 물어볼 걸 그랬어.’

지연을 혼자 보내야 함을 느낀 주민이 노신사를 노려봤다.

“당신. 지금 지연이를 협박한 거라면 내가 가만히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저희가 오지연 씨를 협박할 일은 없을 겁니다.”

“지금 이 상황을 만들어 놓고요?”

초대장이며 저택에 반쯤 끌려온 것이며 전부 그쪽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나.

주민이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노신사를 비웃었다.

속에 능구렁이 수백 마리는 키우고 있는 저 사람의 말을 따라야 한다니.

“신께 맹세하죠. 절대 오지연 씨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때까지 웃는 낯으로 능청스럽게 굴던 노신사가 처음으로 진지한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어찌 됐든 지금은 저 사람의 말을 따라야겠지.

주민이 소매를 잡은 지연의 손을 떼서 꼭 잡아주었다.

“무슨 일 있으면 소리 질러.”

“알았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움직이지 않는 얼굴 근육을 움직여서 겨우 웃어 보였다.

궁금한 게 많을 텐데도 묻지 않고 자신을 걱정하는 주민이 좋았다.

그래서 그에게 비밀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정도였다.

‘이번 일이 끝나면 사장님한테도 말해야지.’

지연이 숨을 들이쉬고 노신사 앞으로 걸어갔다.

“그럼 다른 분들은 여기 계십시오. 곧 메이드가 차를 대접하러 올 겁니다.”

노신사와 함께 지연이 응접실을 나섰다.

응접실에 남은 주민의 옆으로 남 비서가 다가왔다.

“사장님 경호원들을 보낼까요?”

“지금은 일단 대기하지. 하지만 지연이가 벨을 울리면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도록 위치 정도는 파악하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남 비서가 경호팀과 대화했다.

이윽고 경호원 2명이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후우.”

“지연이는 괜찮을 겁니다. 똑 부러지는 아이잖습니까.”

“그래. 그렇지.”

어른스럽고 어릴 때부터 무슨 일이 있으면 혼자 척척 잘 해내는 아이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낯선 곳에 혼자 보내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민이 지연이 나간 응접실 문을 뚫어지도록 노려봤다.

* * *

노신사의 뒤를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니 그건 사장님을 떼어 놓기 위해서였나?

지연이 노신사의 등을 째려봤다.

등 뒤에서 지연이 어떤 시선을 보내고 있는지 모르는 노신사가 곧 세월의 흐름이 멋지게 새겨진 문 앞에 섰다.

똑똑

“오지연 씨를 모셔왔습니다.”

방문을 알린 노신사가 지연을 돌아봤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신에게 맹세할 때는 정색하더니 지금은 또 아까처럼 웃는 낯이었다.

정말 속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지연이 노신사를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책냄새가 가득했다.

높고 넓은 벽을 가득 채운 책장을 보니 여긴 서재인 것 같다.

그곳에서 커다란 창문 앞에서 지연을 기다리고 있는 이가 보였다.

거동이 불편한지 휠체어에 앉아 있는 흰머리의 노인이 지연을 보고 푸근하게 웃었다.

“천사의 저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내가 이 저택의 주인이자 당신을 초대한 사람입니다.”

그가 편하게 앉으라는 듯이 손을 들어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지연이 호흡을 가다듬고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의자에 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지연이 입을 열었다.

“오지연이라고 합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과는 달리 지연의 눈은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자신에게 시간이 더 있었다면 이렇게 무례하게 그녀를 초대하지 않았을 텐데.

“우선 사과를 드려야겠군요.”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지연이 대답하지 않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 조금 더 정중하게 초대하고 싶었습니다. 제게 시간이 있었다면 한국으로 직접 찾아가 얼굴을 뵙고 인사를 드렸을 겁니다.”

이 저택의 주인이면서 그는 자신을 낮추고 있었다.

뭐야.

지연이 상대방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눈살만 찌푸리고 있을 때 그가 손자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신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뜬금없는 물음에 지연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였다.

음성과 관련해서 대화하고 싶다더니 이건 날 떠보기 위한 말인가?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지연이 의아한 듯 바라보자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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