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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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러니까 아까부터 뭐가 자꾸 제 덕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투자가 들어온 게 저랑 무슨 관련이 있,

-투자자가 지연의 출연을 조건으로 유럽의 고성을 제공하겠다고 했어요. 어차피 지연이 아이린으로 출연하는 게 확정된 이상 지연의 출연을 걸 필요는 없는데 말이죠. 하하하. 누군지 모르지만, 지연의 대단한 팬인가 봅니다.

…네?

루카스 감독의 말에 지연이 입을 떡 벌렸다.

내 출연을 조건으로?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고마워요. 덕분에 지연의 최후가 멋지게 그려질 거 같아요.

“감독님, 저 죽나요?”

-아. 얼른 시나리오 수정하러 가야겠어요. 하하하하. 지연이 이렇게 좋은 투자를 가져왔는데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없죠.

“감독님?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을,”

-그럼 지연 조만간 할리우드에서 다시 봅시다.

“감독님? 감독님?!”

원하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니면 대본을 수정하러 가야 해서 정신이 없는 건지.

루카스 감독은 지연의 애타는 부름에도 답하지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공허한 외침을 하던 지연이 멍한 얼굴로 말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래?”

아무래도 루카스 감독님한테 사정을 듣는 건 힘들 거 같다.

그런데 누가 내 출연을 조건으로 유럽의 고성을 지원하겠다고 한 거지?

사장님인가?

지연의 손가락이 화면을 움직여 주민의 연락처를 터치했다.

* * *

지연이와 통화를 끝낸 주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남 비서 들었나?”

“네. 옆에서 들었습니다.”

초대장에 적힌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서 급박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마벨에 들어왔다는 투자. 그쪽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이 타이밍에 지연이의 이름을 걸고 투자가 들어온 게 우연은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주민은 불쾌해졌다.

이건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촬영장에 와서 초대장을 건네준 것이며 마벨에 투자를 한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초대를 받아들이라는 압박으로 느껴졌다.

‘답답하군.’

주민이 끝까지 채워져 있던 단추를 풀었다.

상대방이 적의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무작정 받아들이기에는 찝찝했다.

“사장님. 이탈리아에서 촬영 허가가 빨리 나온 것도 누군가가 손을 쓴 것일지도 모릅니다. 현지 직원들의 태도가 여주인공으로 지연을 고려한다는 말이 나온 이후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지연이도 자기가 하고 싶은데 스케줄이 안 따라 줘서 지한이한테 대신 추천했다고 했어. 그럼 애초에 현지에서 허가가 빨리 나온 것도 지연이 때문이라는 거군.”

“네. 아마도 초대장을 보낸 사람이 뒤에서 손을 쓴 거겠죠.”

도무지 원하는 걸 알 수가 없군.

저쪽에서는 지연과 관련된 것에 조건 없는 지원을 하고 있다.

그 지원들이 초대를 쉽게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 * *

지연이 루카스 감독과 한 통화 내용을 주민에게 전달한 뒤, 주민이 지연을 회사로 불렀다.

한창 바쁠 때라 그런가?

사장님 얼굴이 뭔가 안 좋아 보이는데.

“사장님 무슨 일 있어요?”

“지연아, 이탈리아에 가야겠다.”

“이탈리아요?”

갑자기 웬 이탈리아?

바쁜 연말을 보낸 지연은 1~2개의 광고 촬영 외에는 3월 초까지 쉴 예정이었다.

그런데 주민이 그 일정을 전부 미루고 갑자기 이탈리아에 가야 한다는 소릴 했다.

“사장님 왜 갑자기 이탈리아에 가야 하는데요? 거기서 뭐 하나요?”

이탈리아면 지한이가 촬영하는 곳인데.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전날 자기 전에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혹시 그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지한이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지연의 얼굴이 확 굳어서 주민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사장님 혹시 지한이한테 무슨 일 생긴 거예요?”

“그런 거 아니야.”

“정말요?”

“그래. 지한이 지금 숙소에 잘 있대.”

지연의 물음에 주민이 단호하게 말했다.

사장님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지한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 모양이다.

지연이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그래도 이탈리아에 가야 하는 이유를 몰라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지연의 시선을 느낀 주민이 자세한 이유를 설명했다.

“누군가가 지연이 널 이탈리아에 초대했어.”

“초대요? 어. 혹시 저 거기서 화보촬영이나 CF촬영 그런 거 하나요?”

“아니야. 말 그대로 널 순수하게 초대한 거야.”

이탈리아에 지인이 있었던가?

“누가요?”

“그건 아직 확인 중이야.”

뭐야, 누가 초대했는지도 모른다는 말이야?

그런 초대가 어딨어.

아니 어제부터 계속 영문을 알 수 없는 일만 생기네.

누군가가 내 출연을 조건으로 드래곤 엠페러에 장소를 제공하겠다고 하질 않나 이탈리아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날 초대하지 않나.

자신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서 지연이 답답한 마음에 얼굴을 찌푸렸다.

“사장님, 거기 꼭 가야 해요?”

“지연아. 루카스 감독이 전화해서 말했다고 했지. 누가 네 이름을 거론해서 투자했다고.”

“네. 감독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마 그 투자자가 널 보고 싶어 하는 거 같아.”

“사장님은 저한테 초대장을 보낸 사람이 그 투자자인 거 같아요?”

“나도 확실한 건 몰라. 하지만 뭔가 타이밍이 묘해서.”

주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사장님이 갑자기 날 부른 거구나.

내가 어제 전화한 걸 듣고 그 사람이 이탈리아로 날 부른 사람일 거로 추측한 거야.

설마 날 보자고 마벨에 투자한 건가?

도대체 그렇게까지 해서 날 보자고 할 이유가 뭐지?

“사장님은 그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해서 날 보고 싶어 하는지 알아요?”

“나도 지금 그걸 모르겠어.”

상대방에 대해서 무엇 하나 확실하게 아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이쪽의 사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 뭐 때문에 절 불렀는지 궁금하기는 하네요. 저 혼자 오라는 말은 없었죠?”

“그래. 초대장에는 받는 이와 시간, 장소만 적혀 있었어.”

“가 봐요. 설마 절 어떻게 하겠어요. 아무런 접점이 없는 사람을 초대해서 수작을 부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번에는 내가 직접 널 따라갈 거다.”

“사장님이 있으면 든든하죠. 이왕 간 거 지한이 얼굴도 보고 잘됐네요.”

지연이 애써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주민이 지연을 보고 뒷말을 삼켰다.

아마 초대에 승낙하지 않으면 지한이의 촬영에 불이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지연이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88. 천사의 저택에서 온 초대 (3)

1월의 이탈리아는 쌀쌀하고 우중충했다.

비가 꽤 자주 내린다는 말이 맞는지 공항 밖에는 먹구름이 가득 끼어있었다.

그 날씨가 심란한 내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도대체 누가 뭐 때문에 날 초대한 걸까.

지연이 복잡한 얼굴로 입국장을 나설 때 익숙한 한국어가 들렸다.

“누나!”

모자를 푹 눌러쓴 인영이 지연을 보고 달려왔다.

둘 다 목도리에 모자에 마스크까지 중무장한 모습이었지만 서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동생의 얼굴을 본 지연이 이탈리아행이 결정된 이후 처음으로 밝아졌다.

“지한아. 네가 여기 왜 왔어? 촬영 안 하고?”

“촬영장이랑 안 멀어. 누나가 오는데 내가 와야지.”

“밥은 잘 먹었어? 얼굴이 조금 상한 거 같은데.”

“아니야. 나 밥 잘 먹었어. 영훈이 형한테 물어봐도 좋아.”

동생을 보자마자 얼굴부터 살폈다.

볼살이 조금 내린 거 같은데 잘 먹은 게 맞나?

아니면 촬영이 많이 힘든가?

얼굴 곳곳을 살피던 지연의 손을 지한이 잡았다.

“누나 여기서 이러고 일을 게 아니지. 우선 나가자.”

“그래.”

누나의 손을 잡은 지한이 옆을 확인했다.

지연에게 정신이 팔려 그제야 주민과 남 비서를 확인한 지한이 미안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잘 지내셨죠?”

“그래. 이제 내가 보이는 모양이다.”

“하하하하하. 남 비서님도 여전히 잘 지내신 거 같구요.”

꾸벅

남 비서가 대답을 대신해서 고개를 숙였다.

“일단 호텔로 가자.”

“그래. 사장님 얼른 가요.”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서 들뜬 건 알겠지만 조심해야지. 널 알아보는 팬들이 많다며.”

“네에.”

대답은 했지만 지한이는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공항에 나왔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저렇게 해도 지한과 지연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중무장해서 그런 걸까?

“지한이 촬영이 몇 시부터지?”

“2시부텁니다.”

“밥 먹을 시간은 있겠군.”

“네.”

지한의 일정을 들은 주민이 제일 먼저 밥 생각부터 했다.

그가 보기에도 지한의 볼이 조금 갸름해진 것 같았다.

일단 밥부터 먹이자.

* * *

호텔에서 짐을 푼 일행들은 남 비서가 예약한 식당으로 향했다.

옆에서 계속 먹이는 두 사람 때문에 볼이 빵빵해진 지한이 열심히 턱을 움직였다.

우물우물

꿀꺽

“그래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초대를 받았다고?”

“응. 그쪽에서 날 보자고 거액의 투자까지 한 것 같아.”

지연의 말에 지한이 입안에 가득 차 있던 고기를 씹어 삼키고 말했다.

“그런데 그거 꼭 가야 해?”

“응? 아니 초대장에 내 이름으로 투자까지 했는데 안 가기는 좀.”

“초대장 보낸다고 꼭 가야 할 건 없잖아. 상대방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누나 출연을 조건으로 투자가 들어온 건 그냥 돈 많은 팬일 수도 있잖아.”

지한의 말에 주민과 지연의 머리 위에 느낌표가 떠 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렇지?

그냥 타이밍이 좋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잖아?

지연과 주민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누군지 밝히지도 않는 사람을 굳이 만날 필요가 있어?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러네.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지?”

“뭘 어째. 안 보면 그만인걸.”

지한이 태평하게 말했다.

“누나 앞으로 섭외나 제의가 들어와도 그걸 다 들어주진 않잖아?”

“! 그렇지.”

“그런데 뭐가 걱정이야. 그냥 넘겨 버려. 누나가 가기 싫다는데 그쪽에서 뭐라고 하겠어?”

지연이 점점 지한의 말에 설득됐다.

“나는 왜 초대장을 보낸 사람이랑 투자를 한 사람이랑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그러게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이게 다 타이밍이 묘해서 그렇다.

구구절절 맞는 말에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괜히 왔네.”

“그래도 난 누날 봐서 좋아. 이왕 이탈리아까지 온 거 관광하면서 쉬어. 누나 고생 많았잖아.”

“네가 힘들게 촬영하는데 옆에서 노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뭐 어때. 누나가 여기 출연하는 것도 아니잖아. 쉴 땐 쉬어야지. 그러고 보니 우리 유럽 여행은 많이 못 한 거 같은데 이번 기회에 이탈리아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아.”

“맞아. 이탈리아라. 트레비 분수 가보고 싶어.”

지한의 말에 지연이 솔깃해하며 말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끌리는 것 같았다.

“관광은 재밌을 거 같은데….”

지연이 머뭇거리며 뒷말을 삼켰다.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아서 주민이 부드럽게 말했다.

“지한이가 저렇게 말하는데 어쩔 수 없지.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만나자고 내가 답장할게.”

그렇게 말하는 주민의 얼굴도 편안해 보였다.

뭔가 속이 후련해 보였다.

사장님도 그동안 마음고생 하셨구나.

“그래도 괜찮을까요?”

“지한이 말대로 정체를 밝히지 않은 사람의 초대에 우리가 응할 필요는 없지.”

“혹시 거절했다고 상대방이 화를 내면 어떡해요.”

“지연이 너를 꼭 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화를 내지 않을 거야.”

혹시나 지한이 촬영에 지장을 준다면 내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고.

만약에 상대방이 촬영 허가를 걸고 나올 거라면 촬영팀을 전부 복귀시키고 세트장을 크게 만들어서 해결하면 된다.

그래. 저쪽에서 원하는 대로 끌려다닐 순 없지.

갑작스럽게 진행된 일에 나답지 않게 지레 겁을 먹어버렸다.

원하는 게 있다면 저쪽에서 굽히고 나올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알았어요.”

“그래. 볼일이 있다면 또 찾아올 거야. 여기 온 김에 관광도 하고 편하게 쉬어.”

주민의 허락에 지한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지연에게 고기를 내밀었다.

“자, 누나. 이제 해결됐지? 이제 마음 편하게 고기 먹어. 피곤할 땐 고기가 최고야.”

“너도 많이 먹어. 안 본 사이 살이 좀 빠진 거 같은데.”

“누나가 보기엔 살이 좀 빠진 거 같아?”

“응. 볼이 홀쭉해졌어.”

남들이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실제로 몸무게가 1kg 정도 빠졌다.

하지만 지한이랑 같이 산 지 20년이 넘어간 지연이기에 알아볼 수 있던 미세한 차이였다.

“안 다치게 적절히 스턴트맨이랑 같이 씬을 조절하는데 몸을 많이 움직여서 좀 빠졌나 봐.”

“밥 많이 챙겨 먹어.”

“영훈이 형이 먹는 건 잘 챙겨줘.”

영훈 오빠가 옆에 있으니까 지한이가 밥을 잘 못 먹을 거란 생각이 들진 않지만 그래도 살이 빠진 모습을 보니 걱정됐다.

“촬영은 어디까지 됐어?”

“벌써 반 찍은 거 같아. 여기 공무원들도 꽤 협조적이고 배우들도 합이 잘 맞아. 유 PD님이 신나서 촬영하고 있어.”

“잘하고 있다니 다행이다. 단순하게 계산하면 한 달만 더 있으면 끝나겠네?”

“아마도?”

어느새 테이블에는 초대에 관한 것도 잊고 서로의 근황에 관해 떠들었다.

그러다가 초대장을 보낸 주인에 대해 추리하기 시작했다.

“내 추리에 의하면 그 사람은 남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사람이야.”

“흐흣. 그럴지도 모르겠네. 혹시 히키코모린가?”

“다른 사람을 시켜서 초대장을 보낸 걸 보면 돈 많은 오타쿠일지도?”

“하하하. 지한아. 갑자기 왜 오타쿠라고 생각한 거니?”

“심부름꾼을 집사 차림으로 보냈잖아요. 요즘 세상에 드라마나 영화 찍는 것도 아닌데 누가 집사로 꾸며서 심부름시켜요. 그러니 집사 캐릭터를 좋아하는 오타쿠가 분명해요.”

지한의 장난스러운 말에 테이블의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이탈리아에 올 땐 걱정이 한가득이었는데 지한이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니까 누나도 사장님도 걱정하지 말아요. 방구석 오타쿠는 밖에서는 힘을 쓸 수 없다구요.”

“그래. 지한이 네 말이 맞아.”

“고마워. 덕분에 마음 편하게 관광할 수 있겠다. 지한이 너도 촬영 다 끝나면 같이 관광 좀 하다가 갈래?”

“좋지. 그런데 누나 그때까지 있으려고?”

“뭐, 어때.”

사장님이 다 알아서 해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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