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마지막 스케줄이 끝났다.
몇 주간 이어진 강행군에 녹초가 된 출연진들이 전부 힘없이 무대에서 내려왔다.
“으어어.”
“끝났다.”
다리에 힘이 풀려 부축받는 이들도 보였다.
매니저들이 다가와 가수들을 챙겨갔다.
무대에서 내려온 지연이 복잡한 대기실에서 누군가를 찾았다.
“하나 언니!”
“? 왜?”
하나를 찾은 지연이 싱긋 웃으면서 폰을 내밀었다.
“무대 끝나면 전화번호 주기로 했잖아.”
“아, 맞다.”
“지연아 나도.”
“하나 번호만 필요한 거야?”
“내 번호는 안 필요해?”
“지연 언니 나는?”
“당연히 언니들이랑 지아 번호도 받을 생각이었지.”
지연의 말에 KARINA 멤버들이 지친 몸도 잊고 웃으면서 번호를 교환했다.
KARINA 멤버들은 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작년에 소속사와 문제가 있어서 고생했지만, 계약 종료 후 각자의 길을 걷게 돼도 그룹을 해체하지 않았던 멤버들이었다.
의리도 있고 사생활로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항상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라 오래오래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그럼 지연아 푹 쉬어!”
“다들 잘 가요. 다음에 또 봐.”
KARINA 멤버들이 멀어져갔다.
지연은 그 후로도 KARINA 멤버들 외에도 미리 눈여겨봤던 몇몇 가수들과 번호를 교환하는 데 성공했다.
‘할 수 있어. 막아 보자.’
구해야 할 인물들과 번호 교환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지연이 주먹을 꼭 쥐고 다짐했다.
“지연아 우리도 얼른 가자.”
“응.”
지연이 다른 가수들과 번호를 교환할 때까지 옆에서 기다려준 은주가 지연을 데리고 가 옷을 갈아입혔다.
추워 보였던 무대 의상을 벗고 따뜻한 김밥이 된 지연이 마스크를 끼고 은주의 뒤를 따랐다.
본인도 피곤했을 텐데 내 볼일이 다 끝날 때까지 옆에서 챙겨주다니.
매니저라서 한 일이어도 고마웠다.
“언니. 새해 복 많이 받아.”
“지연이 너한테 처음으로 그 말을 들어서 영광이다.”
“아닌데? 처음은 시청자분들인데?”
“그렇게 되나? 그건 일 때문에 한 거고, 사적으로는 내가 처음이야. 그렇지?”
“맞아. 언니가 처음이야.”
지연의 첫 새해 인사를 자신이 받았다고 우기는 은주 언니가 귀여웠다.
막 실장 달았을 때는 조금 예민하고 까칠했었는데 이제 바쁜 일이 다 지나가고 나니까 다시 예전처럼 장난도 치는 은주 언니로 돌아왔다.
밴이 있는 주차장으로 가자 누군가가 자신들의 밴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지연아.”
“어? 사장님.”
밴 앞에 있던 사람은 공 사장과 남 비서 아저씨였다.
이 시간에 두 사람이 여긴 어떻게….
지금 여기 사람들이랑 차랑 엄청 몰려서 오기 힘들었을 텐데.
힘든 길을 뚫고 온 주민을 보고 지연이 눈을 깜빡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고생했다.”
늦은 시간에 사장님이 직접 와서 해 준 말이었다.
가슴 한편이 뭉클했다.
지연이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사장님 여기까지 왜 왔어요?”
“왜긴. 수고했다고 해 주려고 왔지. 그리고 이제 2013년이잖아. 새해 복 많이 받아. 이 말도 해 주려고 왔어.”
굳이 여기까지 와서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직접 와서 그 말을 해 준 사장님의 마음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새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같이 시작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지연이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사장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도 건강하시구요.”
“건강하라고 하니까 내가 꼭 나이 든 거 같잖아.”
“사장님도 이제 반백살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이 녀석이.”
지연의 말에 주민이 슬쩍 흘겨봤다.
장난기 가득했지만 지친 기색이 보이는 지연의 얼굴을 보고 울컥하던 것도 금세 가라앉았다.
“제 무대 봤어요?”
“그래. 잘 봤지.”
“어땠어요?”
“최고지.”
주민이 지연의 어깨를 토닥였다.
보기 훈훈해서 좋긴 하지만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었다.
“아직 밖에 사람이 많습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얼른 가야 합니다.”
“사장님 이제 가셔야죠.”
은주 언니의 말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주차장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부러 늦게 나왔는데 여전히 많은 사람이 주차장 주위에 모여 있었다.
주변 상황을 확인한 주민과 지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은주가 차 문을 열었다.
지연이 먼저 올라타 자리에 앉았는데 주민이 뒤따라 올라타 맞은 편에 앉았다.
“사장님 같이 타고 가요? 사장님 차는요?”
“너 데려다주고 가려고. 은주 실장. 내 차 맡겨도 될까?”
“사장님 차는 제가 회사에 가져다 놓겠습니다. 저도 회사에 가서 봐야 할 일이 아직 남았거든요.”
“그래. 너무 늦게까지 있지 말고. 은주 실장도 고생했으니 오늘은 일찍 들어가고 내일 오후에 출근해. 마음 같아서는 하루 정도 쉬라고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미안해.”
“괜찮습니다. 그럼 들어가세요. 지연아 너도 고생 많았다. 새해 복 많이 받고 집에서 푹 쉬어.”
“응. 언니 잘 가. 새해 복 많이 받구.”
지연이 은주에게 손을 흔들었다.
인사를 받은 은주가 문을 닫고 장훈에게 신호를 보내자 차가 출발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지연이 주민에게 물었다.
“사장님도 집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유나가 기다리고 있잖아요.”
“유나 지금 자. 그리고 와이프도 너한테 가 보라고 했어.”
“여진 팀장님도요? 여진 팀장님도 오늘 바쁘지 않아요?”
주민의 아내이자 가수 2실 소속인 이여진 팀장은 유나의 두 돌이 지나고 회사에 복귀했다.
그럼 유나는 가정부한테 맡겨 놓은 건가?
팔불출인 두 사람이 유나를 혼자 두고 늦게까지 일하다니.
그래도 유나 혼자 집에 있으면 쓸쓸할 텐데 두 분 다 일찍 집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사장님 저 안 데려다줘도 돼요. 집에 일찍 들어가세요.”
“너 데려다주고. 지연이 너. 눈이 벌써 풀렸는걸.”
“아니에요.”
“아니기는.”
차에 올라타 따뜻한 히터 바람을 쐬니까 잠이 쏟아지는지 지연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아까보다 눈을 깜빡이는 게 현저히 느려진 지연을 보고 주민이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우우웅-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렸다.
반쯤 잠에 취한 지연이 그 소리에 정신을 조금 차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남 비서님 폰에서 나는 소리였구나.
“편하게 받아요, 남 비서님.”
이 새벽에 누가 남 비서님한테 연락했을까.
그 사람은 잠도 없나.
우리 남 비서님 쉬게 내버려 두지.
그런데 남 비서님은 언제 쉬지?
항상 멀쩡해 보였는데 사실 남 비서님은 사이보그였나?
반쯤 꿈나라에 간 덕에 지연의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지연이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좌우로 털었지만 가물거리는 시야를 되돌릴 순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지연이 고개를 꾸벅거리고 있을 때 남 비서가 작은 목소리로 주민에게 귓속말했다.
“사장님.”
“무슨 일이야.”
“고 실장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고 실장이?”
“네. 누군가가 지연이 앞으로 초대장을 주고 갔다고 합니다.”
고 실장을 통해서 초대장을 전달하다니.
남 비서에게 직접 전화한 걸 보니 뭔가 보고할 만한 상황이라고 생각한 거 같은데.
주민이 꾸벅거리고 조는 지연을 쳐다봤다.
그 대단한 체력을 가진 지연도 스케줄이 끝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졸음에 빠졌다.
예전에 지한이랑 같이 스페셜 무대를 준비했을 땐 이렇게 지치지 않았는데 지한이가 없는 지연이는 다른 때보다 더 빨리 지쳤다.
역시 가족의 힘인가?
집에 가서 혼자 있을 지연을 생각한 주민이 남 비서에게 물었다.
“지금 확인해야 하나?”
“아무래도 초대장을 보낸 주인이 꽤 대단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빨리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회사로 가야 할 것 같군.”
“그동안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남 비서의 말을 들은 주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은편에서 지연의 고개가 아래로 기울고 있었다.
이 무대를 위해서 지난 한 달 동안 지연이 고생한 걸 안 주민이 안쓰러운 얼굴로 지연의 담요를 상체까지 꼼꼼히 덮어 주었다.
“장훈 매니저.”
“넵, 사장님.”
“지연이 집에 데려다주고 우린 다시 회사로 가지.”
“알겠습니다!”
“쉿. 지금 지연이 자니까 작게 말해.”
“…네.”
장훈이 백미러로 주민을 힐끔거리면서 히터를 조금 더 켰다.
187. 천사의 저택에서 온 초대 (2)
잠에 든 지연을 집에 무사히 데려다준 주민은 다시 회사로 향했다.
이미 새벽인 시간이지만 탑엔터의 불빛은 아직도 꺼지지 않았다.
“어? 사장님 왜 다시 오셨습니까.”
“김 실장은 왜 아직 있나.”
“하하하. 광고 문의가 계속 들어와서 정리 중이었습니다.”
방송가 연말 시상식이 끝나니 여기저기서 광고 문의가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특히 신인상을 탄 배우들은 아직 몸값이 낮을 때 써먹으려고 여기저기서 제의가 들어오고 있었다.
고생하는 직원을 본 주민이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그럼 수고해.”
“네. 사장님도 일찍 퇴근하십시오.”
“자네도 적당히 하고 내일 해. 어차피 오늘 안에 정리하기 힘들어.”
“하하하하하. 네.”
김 실장이 손에 커피를 든 채로 다시 배우 2실로 올라갔다.
로비에서 만난 김 실장을 뒤로하고 사장실에 들어간 주민이 책상 앞에 있는 소파에 앉자 남 비서가 맞은편에 섰다.
“남 비서도 피곤할 텐데 앉아서 해.”
“감사합니다.”
남 비서가 앉자 주민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연락이 왔다고.”
“네. 이탈리아에 있는 고 실장에게서 온 연락입니다. 오늘 지한이가 촬영 중일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촬영장에 나타나서 지연이 앞으로 초대장을 건네주고 갔답니다.”
“촬영장에 외부인이 들어왔는데 지한이도 아니고 지연이한테 초대장을 보냈어?”
“네. 한국에 있는 지연에게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촬영 허가를 내준 직원과 같이 왔다고 합니다.”
갑자기 촬영장에 나타나서 초대장을 줬다.
지연이 지금 한국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촬영장에 찾아왔다는 건 다른 의도가 있는 건가?
일단 공무원이랑 같이 올 정도면 그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물인 거 같은데.
주민이 검지로 팔걸이를 톡톡 건드렸다.
“남 비서는 초대장의 주인이 꽤 대단한 사람인 거 같다고 했지.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초대장을 주고 간 사람은 정장 차림에 조금 연세가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고 실장은 영화 속에서 본 집사와 느낌이 비슷하다고 하더군요. 그런 사람을 하수인으로 둘 정도라면 지위가 꽤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사처럼 보이는 노신사라. 뭔지 몰라도 초대장을 준 사람의 주인이 꽤 권력이 있는 사람이겠어.”
“그럴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누굴까?
귀족 아니면 재벌?
“초대한 사람의 이름은 뭐라고 하던가.”
“보낸 이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뭐? 그럼 지금 누가 편지를 보냈는지 모른다는 말이야?”
“네. 고 실장이 혹시나 해서 봉투를 뜯어봤는데 거기에는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초대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고 싶군.”
“고 실장이 찍어 보낸 사진이 있습니다. 보여드리겠습니다.”
남 비서가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영훈에게서 받은 사진을 열었다.
주민이 사진 속 초대장을 살폈다.
중세 귀족들이 주고받았던 편지처럼 봉투는 실링 왁스를 이용해서 봉인되어 있던 흔적이 보였다.
편지지며 필체며 전부 고급스러워 보였다.
왁스 위에 찍힌 문양은 금박을 입혔는지 왁스와 다른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문양을 자세히 살핀 주민이 남 비서에게 물었다.
“이 문양 뭔지 알겠나?”
“꽃…인 것 같습니다.”
“이 문양을 상징으로 쓰는 가문이 있는지 알아봐.”
봉투를 보자마자 느낌이 왔다.
이건 귀족의 초대장이다.
그쪽에서 갑자기 왜 지연이한테 관심을 가지는 거지?
주민의 미간이 좁아졌다.
“초대를 거절하면 어떻게 될 거 같나?”
“촬영 허가를 내준 직원과 함께 왔다는 건 거절할 시 지한이 촬영에 불이익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남 비서의 말에 주민이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정중히 초대장까지 보냈으니 지연이를 위험하게 할 거 같진 않은데. 하아, 이거 원. 정체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하군. 일단 누가 보냈는지부터 확인하지.”
“최대한 알아보겠습니다. 지연이 스케줄은 조정할까요?”
“일단은 그대로 둬. 상대방이 누군지 파악하고 나서 일정을 조정해도 늦지 않아.”
“네.”
“그럼 나머지 일은 이따가 하지. 지금은 이만 들어가야겠어.”
“알겠습니다.”
주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 비서가 주민의 뒤를 따랐다.
방을 나서는 주민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 * *
다음 날.
며칠간의 피로를 몰아내듯 푹 잔 지연이 아이들을 품에 안고 침대 위에 늘어져 있었다.
우우웅-
끄웅
…왜애액
평화로운 시간을 방해하는 진동 소리에 지연의 옆구리에 붙어 있던 인절미와 모짜가 투정을 부렸다.
셋만의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지연이 투정을 부리는 아이들을 달래면서 남은 손으로 폰을 찾았다.
“여보세요.”
-지연! 잘 지냈나요?
“루카스 감독님?”
갑자기 감독님이 무슨 일이지?
지연이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감독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도 잘 챙기셔야 해요.”
-하하. 저는 매년 검사를 받고 있습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역시 할리우드 유명 감독이라서 그런가.
의료비가 비싸다는 미국에서 건강검진을 매년 받아도 부담이 없나 보다.
가벼운 신변잡기를 떠들고 나서 루카스 감독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보다 지연에게 전화한 건 고맙다고 말하기 위해서예요.
“저한테요? 왜요? 제가 감독님께 인사를 받을 일을 한 게 없는데요.”
갑자기 감사 인사를 전하는 루카스의 말에 아리송한 얼굴로 되물었다.
회사에서 나 몰래 감독님한테 신년 선물이라도 보냈나?
아니면 사장님이 2편에 투자금을 더 냈나?
여러 가지 가능성을 추측해보던 지연은 스피커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투자가 들어왔어요. 동시에 유럽에 있는 고성을 촬영 장소로 제공하겠다고 하더군요.
“정말요? 축하드려요. 감독님 연출하시기 더 편하겠네요.”
-하하하. 그렇죠. 이게 전부 다 지연 덕이니까요.
“저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