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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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랑 같이 무대 위에 올라갈래?”

“음…. 아니야. 나는 역시 연기가 더 좋아.”

지연의 말에 진지하게 고민한 지한이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

나는 연기 하나만 하는 것도 바쁜데 이것저것 다 잘 하는 누나가 대단했다.

“또 내가 대단하냐느니 그런 생각 하고 있었지.”

“역시 누난 대단해.”

“너 잊은 건 아니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도 할 수 있다는 거.”

지연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손목에 있는 붉은 자국을 가리켰다.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선물이 자신들의 손목에 감겨 있었다.

“하하하하하하.”

“웃지만 말고.”

“할 수 있어도 나는 연기만 할래.”

“연기랑 노래하는 걸 구분하지 마. 연기 때문에 작곡까지 배웠잖아. 언젠가 연기 때문에 노래까지 하게 될 날이 올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연기를 하려면 만능이 되어야겠는걸?”

“기대할게 천재 만능 엔터테이너 오지한씨.”

“그게 뭐야.”

누나의 너스레에 지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누구지?”

“오늘 누구 오기로 했던가?”

갑자기 울린 초인종 소리에 지한과 지연이 서로를 마주보고 눈을 깜빡였다.

둘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인터폰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2012년의 시작을 함께 한 이들의 얼굴이 나와 있었다.

[Hello! Dear Friends!]

“케이티!?”

“케이티잖아?”

[케이티 조금 진정해.]

“로드리오다.”

“로드리오까지?”

멀리서 새로 사귄 친구들이 날아왔다.

175. 선물

갑자기 찾아온 친구들이지만 지연과 지한은 거절하지 않고 두 사람을 집으로 들였다.

촬영이 끝난 지 고작 4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남매의 뒤를 따라 집에 들어온 케이티와 로드리오가 양손 가득 들고 온 짐을 내려놓았다.

“이게 다 뭐예요?”

“두 사람 다 캐리어 가득 뭘 들고 온 거예요?”

“갈아입을 옷이랑 세면도구랑 선물이랑 챙겨왔지.”

“저도 마찬가집니다.”

재워줄 생각도 안 했는데 짐을 싸들고 왔단 말인가.

두 사람 조금 뻔뻔해진 거 같은데.

지연이 조금 허탈하게 웃자 케이티가 애교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비행기만 10시간 넘게 타고 왔는데 재워 줄 거지?”

“장시간 비행 때문에 조금 피곤하군요.”

“두 사람 다 갑자기 찾아와서 재워달라고 하는 거예요?”

“생일에는 서프라이즈가 최고잖아.”

“케이티가 깜짝 놀라게 해 줘야 한다고 하더군요.”

“로드리오는 안 말렸어요?”

“다들 생일에는 서프라이즈가 좋다고 하던걸요.”

누가 로드리오에게 잘못된 상식을 알려 준 거 같은데.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르고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케이티나 진지하게 누군가에게 속아 넘어간 것 같은 로드리오나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어쩔 수 없지.

저 둘 보고 잘못했다고 할 순 없지.

어쨌든 날 축하해주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니까 당사자로서 받아줘야지 어쩌겠어.

“방 안내해 줄게요. 지한아 너는 로드리오가 머물 방 안내해 줘.”

“알았어. 따라와요.”

“케이티는 날 따라오면 돼요.”

“응!”

“감사합니다.”

영화 찍을 때도 우리 집에 자주 오더니 한국에 와서도 결국 똑같이 우리 집에서 묵는구나.

그때야 연기에 대해 조언을 얻고 싶다고 해서 편하게 오라고 했지만 영화를 다 찍고 나서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걸.

불청객이지만 같이 영화를 찍은 동료이자 모처럼 마음이 맞는 친구기에 지한과 지연이 두 사람을 환영했다.

잠시 후, 짐을 풀고 편안한 옷차림이 된 두 사람이 거실로 걸어왔다.

“새삼 느꼈지만 한국은 정말 멀어.”

“예전에 한국에서 전쟁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까 전혀 전쟁의 흔적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에? 예전에 여기 전쟁이 있었어? 언제?”

“약 60년 전입니다.”

“그거 밖에 안 됐단 말이야? 여기 오면서 고층 빌딩 엄청 많던걸?”

“저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은 아직 가난한 나라인줄 알았거든요.”

“그렇게 생각하는 외국인들이 많더라고요.”

“아직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도 많을걸?”

“그건 그렇습니다.”

로드리오의 말을 들은 남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한국을 후진국이라고 생각하는 외국인들이 많으니 이런 반응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두고 봐라 조만간 K콘텐츠의 시대가 올 테니까.

그때 가서도 한국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지 보자고.

“그런데 두 사람이 진짜 여긴 어쩐 일이예요?”

“아까도 말했잖아. 두 사람의 생일을 직접 축하해 주기 위해서지!”

“7월 16일이 지연의 생일이라면서요? 미리 축하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진짜 내 생일 때문에 온 거야?

고작 한 번 같이 촬영했던 내 생일 때문에 일부러 비행기를 타고 찾아왔다고?

“저번에 지연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7월이 생일이라고.”

“맞아! 그때 기억해 뒀지. 로드리오한테 지연의 생일 때 같이 한국 가지 않겠냐고 했는데 흔쾌히 함께해줬어.”

“아니, 그.”

“지한의 생일도 다음 달이지?”

“지한의 생일 선물도 챙겨 왔으니 걱정하지 마시죠.”

“어어. 고마워요.”

외국에서는 생일 때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고 그러는 건가?

이게 바로 아메리칸 마인드?

지연과 지한이 어리둥절하며 눈앞에 있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진짜 그거 말고 다른 이유는 없어요?”

“물론, 우리 영화 때문에 온 것도 있지. 우리 곧 영화 개봉하잖아.”

“영화 때문에요?”

“영화 홍보 일정이 다가오면 영화 홍보를 위해서 막 다른 나라 돌아다니면서 홍보하잖아.”

“홍보는 미국에서 먼저 하는 게 아닌가요?”

할리우드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서 배우들이 내한 하는 걸 보긴 했지만 원래 미국에서 먼저 홍보하는 거 아닌가?

지연이 고개를 기울이며 동생을 돌아봤다.

너는 나보다 이쪽 업계에 대해 더 잘 알잖아.

“나도 홍보는 잘 몰라. 그동안 홍보 일정에서 빠졌잖아.”

누나도 잘 알지 않냐는 듯이 지한이 눈썹을 늘어트리며 대답했다.

나도 널 따라다니면서 봐서 알긴 아는데, 막상 내 일이 되니 당황스러워 쳐다본 거야.

“이번에 지연과 지한의 나라에서 먼저 홍보를 할 예정인가 봐. 무려 동시 개봉이니까.”

“영화 주역이 지한과 지연이니 한국에서 먼저 홍보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응! 그래서 지연의 생일 축하도 할 겸 시차도 적응할 겸 이렇게 찾아왔어!”

아아. 동시 개봉하면서 한국 먼저 홍보하기로 한 거구나.

어느 순간부터 할리우드가 한국 영화시장을 주목하기 시작했으니까.

한국 영화시장이 커지기도 했고, K팝이나 할리우드에 진출한 배우들이 늘어나기도 한 만큼 할리우드에서도 한국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영화 흥행의 시험대로서 한국 시장을 살피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아마 지한이랑 내가 한국인인 것도 홍보 일정에 영향을 줬겠지.’

어찌 됐든 두 사람이 한국에 온 이유도 알았다.

홍보 일정도 있지만 내 생일 때문에 겸사겸사 일찍 한국에 들어온 모양이다.

“헤헤. 에이바한테 어차피 한국에 갈 거 지연의 생일에 맞춰서 가고 싶다고 조르길 잘 한 거 같아. 두 사람 다 너무 보고 싶었어.”

천진난만한 케이티의 말에 지연이 잠시 말을 잃었다.

고작 3개월 동안 같이 촬영을 했을 뿐인데 이렇게 생일을 축하해 줄지 몰랐다.

나도 꽤 오래 활동을 했지만 내 생일이라고 직접 찾아와준 사람은 사장님 가족들이랑 소속사 사람들을 제외하고 처음이었다.

케이티는 진짜 날 친구라고 생각하고 생일을 축하하러 와 준 거구나.

어쩐지 가슴 한 편이 간질간질했다.

“와 줘서, 고마워요. 케이티.”

“뭘. 우린 친구잖아. 그치?”

“네. 맞아요.”

이번 생에 처음으로 사귄 친구가 외국인일 줄 몰랐는데.

지연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도 지연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서 영화 홍보 일정보다 일찍 들어왔습니다. 휴가 삼아서요.”

“두 사람 다 일은 없어요?”

“영화가 개봉하면 들어갈 수 있는 작품이 달라질 거라고 에이바가 말렸어.”

“저는 들어오는 역할이 다 잘생긴 회사원이나 바람둥이 역할이여서 거절했습니다.”

마벨 히어로 시리즈물에 출연했다는 것만으로도 출연할 수 있는 작품이 달라지긴 하지.

로드리오도, 배우로서 이미지가 고정되는 걸 피한 건 잘한 선택이다.

“그래서 지연! 내가 서울에서 어디를 갈지 미리 찾아봤어.”

“예?”

“나 경복궁이란 데 가 보고 싶어. 로드리오도 한번 보고 싶대.”

“한국의 전통 건축이라고 하더군요. 좋은 경험일 거 같습니다.”

케이티와 로드리오가 신이 나서 지도를 펼쳤다.

어, 어?

케이티 그건 뭐야. 어디서 구해 온 거야.

로드리오는 내 생일 축하해 주기 위해서 홍보 일정보다 일찍 한국 온 거라며.

그런데 왜 관광을 즐기러 온 것처럼 보이는 거지?

지도를 펴 갈 곳을 고르는 두 사람을 본 지한이 누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누나. 생일은 그냥 핑계고 놀러온 게 아닐까?”

“나도 지금 그럴 거 같단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어.”

한국에 온 외국인 친구들이 관광지에 관심을 가지는 건 나쁘지 않았지만 어째 이용당한 기분이 들었다.

* * *

지연과 지한은 한국에 놀러온 친구들을 데리고 서울 이곳저곳을 다녔다.

의외로 선글라스만 낀 케이티와 로드리오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다만 우리가 문제였지.

어디서나 눈에 띄는 두 사람 덕에 우리는 분장까지 하며 따라다녀야 했다.

“이거 너무 예쁘다. 하나만 살까?”

“케이티 가지고 싶으면 내가 사 줄게요.”

“으으응. 아니야. 이런 건 내가 직접 사야지. 지연 이거 어때? 이거 더 예뻐. 저게 더 예뻐?”

기념품 부채를 보고 어떤 무늬가 더 예쁜지 고민을 하는 케이티가 마냥 귀여웠다.

지연이 철부지 동생처럼 고민하는 케이티를 보고 직접 선물을 골라줬다.

“케이티라면 다 잘 어울리겠지만 여기 하얀 바탕에 매화가 그려진 건 어때요?”

“너어무 예뻐. 이거 할래!”

“그래요.”

지금은 여름이니까 부채를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지연이 지갑을 들고 가서 부채를 계산하는 케이티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봤다.

“샀어?”

“응. 저기서 지금 계산 중.”

“쇼핑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어느 나라 사람이라도 다 똑같구나.”

케이티와 지연이 물건을 고르는 동안 한 발자국 떨어져서 지한은 로드리오랑 한 발자국 떨어져서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지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딴짓을 했던 두 사람을 쳐다봤다.

그 시선을 느낀 두 사람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앗! 저기 케이티 나온다.”

“케이티 다음으로 갈 곳은 어디였죠?”

“한강! 한강에 가 보고 싶어. 내 친구들이 거기서 맥주를 마셔야 한대.”

“저는 아직 미성년자라 마실 수 없지만 가요! 한강. 한강에서는 맥주에 치킨이죠.”

“맥주랑 치킨. 꼭 먹고 싶군요.”

“얼른 가자! Let’s Go!”

케이티를 선두로 세 사람이 걸어갔다.

하여간 다음에도 이렇게 나 몰라라 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지연이 피식 웃으며 세 사람을 따라갔다.

* * *

나도 한강에 온 적은 많이 없는데 앞서 가는 세 사람은 여기 자주 와 본 것처럼 거침없이 걸어갔다.

한강에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여름이라서 더 많은 걸까?

조깅하는 사람, 강아지와 산책을 나온 사람, 돗자리를 펴고 치맥을 즐기는 사람 등 이런저런 사람들이 한강 공원에 와 있었다.

“사람 진짜 많다.”

“지한아 얼굴 잘 가려. 분장했다고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누나도.”

지연과 지한이 서로의 상태를 점검했다.

“저기 봐! 배가 있어!”

“유람선이라는 겁니다. 한강에도 배가 다니는군요.”

“우리 저기 가 보자.”

“케이티. 천천히!”

또 케이티가 달려나가기에 지연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 쟤는 길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저렇게 겁도 없이 돌아다닌대?

“이거 타도 돼요?”

“케이티 유람선을 타려면 티켓을,”

“네. 케이티 로렌스님 확인했습니다. 입장하시면 됩니다.”

“?”

뭐야, 케이티 들킨 거야?

아니지. 잠깐만. 확인했다고?

입장이라니.

지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멀뚱히 서 있자 케이티가 지연의 손을 잡아끌었다.

“케이티,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자. 지연은 날 따라오기만 하면 돼.”

지연이 케이티에게 붙잡혀 유람선을 오르면서 당황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지한이와 로드리오가 흐뭇한 얼굴로 천천히 뒤를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둘의 얼굴을 보고 지연이 드디어 자신을 빼고 세 사람이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언제부터예요?”

“응? 뭐가?”

“언제부터 세 사람이서 짜고 이걸 준비한 거예요?”

지연의 말에 케이티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지만 옆에서 얼굴이 뚫을 듯이 쳐다보는 지연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미 여기까지 온 걸로 서프라이즈는 성공했다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케이티가 지연의 눈치를 보고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모두랑 같이 준비한 거야.”

모두?

지한이랑 로드리오까지 셋이서 이 모든 걸 다 준비했다고?

도대체 언제부터?

“이거 우리만 한 거 아니야. 지연의 사장님이 도와줬어.”

사장님까지!?

어쩐지 내 생일인데 올해는 당일까지 조용하더라니.

작년까지만 해도 한 달 전부터 호들갑 떨었던 사장님인데 조용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이번에는 앨범이랑 영화 때문에 바빠서 그냥 넘어가는 줄 알았지.

“쨘! 도착!”

케이티가 두 팔을 벌리며 지연을 돌아봤다.

꽃다발과 조명으로 꾸며진 갑판에 놓여 있는 하얀 스크린이 보였다.

사이사이 놓인 테이블 위에는 내가 활동했던 사진들이 고화질로 뽑혀 세워져 있었고, 포스트잇이 한가득 붙여진 보드판이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들이 그곳에 있었다.

“사장님. 영훈 오빠. 미나 언니.”

“어서 와 지연아. 놀랐지?”

“우리가 너한테 안 들키려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이게 다.”

“여어. 우리 오 선녀님. 이제 왔어?”

“승우 아저씨. 선녀님이 뭐예요.”

“뭐긴 뭐야. 지연이 네 별명이지.”

탑엔터 식구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나랑 지한이를 어릴 때부터 봐 오던 삼촌, 이모들이었다.

다들 바쁠 텐데 어쩐 일로 여기 다 모인 거야.

지연이 괜히 퉁명스러운 생각을 했다.

“주인공이 거기 서서 뭐 하나. 빨리 와. 배고프다.”

“누나. 일단 앉아. 배 출발할 거야.”

“응.”

어느새 다가온 지한이 지연을 빈 자리로 안내했다.

울음을 참느라 목이 멘 지연이 힘들게 대답했다.

아직 볼 게 많은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하나.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에 네 사람이 차례대로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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