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9 (179/296)

“어디까지 써야 하지?”

지연이 하는 고민은 지한의 걱정과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너무 쓸 게 많아서 어디까지 적정 수위를 유지하며 쓸 것인가가 고민이었다.

“너무 딥다크한 건 안 돼. 이건 노래니까.”

내 경험을 가지고 쓰라면 쓸 수 있겠지만 대중음악이니까 대중의 취향을 반영해야 했다.

아무래도 내 경험은 대중과 조금 동떨어졌단 말이지.

역시 다른 사람들이 적절히 공감할 만한 가사를 써야겠다.

그러려면 역시 이별이 제일 대중적이긴 한데 아쉽게도 나는 지난생과 이번 생 통틀어서 전부 모쏠이란 말이지.

“진짜 은주 언니 말대로 밖에 나가서 사람이라도 좀 만날 걸 그랬나?”

그런데 그 당시에는 나랑 만날 만한 사람이 전부 10대밖에 없었는데 아무리 내가 몸이 어려졌다고 해도 10대랑 사귀는 건 좀 아니잖아?

법에 걸리는 게 없다는 건 알지만 양심에 걸린다고.

“아우으으으. 모르겠다. 일단 생각나는 대로 다 써 보지 뭐.”

이 중에서 다들 좋아할 만한 게 나오지 않겠는가?

지연이 결심을 한 듯 펜을 잡고 가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지연의 손놀림과 함께 종이 위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창문 틈 사이로 빛이 보여

또 똑같은 하루가 시작되고 있어

다시 또다시 달이 뜬 낮이 시작돼

웅크린 내 작은 공간을 달빛이 들어왔어」

종이 위로 지연의 기억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 * *

지한의 걱정과 지연의 우려와 무색하게 지연이 줄줄이 들고 간 가사는 호평을 받았다.

지연의 앨범을 준비하는 이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평가받은 가사는 몇 개의 자잘한 오타와 단어 수정 외에는 전부 통과됐다.

“지연아, 가사 너무 좋다! 역시 빌보드 작곡가랑 같이 작업하던 짬밥 어디 안 가는구나.”

지연이 가져온 가사를 확인한 은주가 감탄했다.

“언니는 군대도 안 갔다 왔으면서 짬밥이란 단어를 다 쓰네.”

“내가 군대는 안 갔어도 애들 군대 위문공연 따라간 것만 해도 백 번이 넘는다.”

하긴 은주 언니가 있는 가수 2실에는 걸그룹들이 더 많으니까.

의도치 않게 됐지만 가수 1실은 보이그룹이, 가수 2실에는 걸그룹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한이가 생각보다 꽤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금방 가져왔네.”

“지한이가?”

은주의 말에 지연이 옆에 앉은 동생을 돌아봤다.

누나의 시선에 지한이 뜨끔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너 그랬어?”

“아아니. 그냥. 누나 쓰는 거 봤는데 표정이 너무 딱딱하길래 잘 안 풀리는 줄 알았어.”

동생의 말에서 자신에 대한 걱정을 알아차린 지연이 어릴 때처럼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아니야.”

“자, 자. 회의실에서 남매간의 우애를 과시하는 행동은 그만!”

은주가 딴 길로 새는 아이들을 막았다.

아차. 어쨌든 앨범 제작 회의였지.

이거에 집중하자.

“자, 그럼 가사도 나왔겠다. 이제 녹음만 남았네.”

“응.”

“지연아, 앨범 타이틀 곡 제목은 뭐야?”

은주의 말에 회의실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지연의 입으로 향했다.

지연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

새 앨범의 타이틀곡 제목이 정해졌다.

174. 뜻밖의 손님

과 <가을 바다>를 더블 타이틀로 하는 지연의 정규 3집 앨범이 순조롭게 제작되고 있었다.

“지연아 ‘밤을 건너’ 할 때 끝을 조금 더 길게 빼 보자. 아련함은 유지하고.”

-네.

황 팀장의 지시를 들은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지연은 탑엔터 지하에 있는 녹음실에 와 있다.

벌써 앨범 제작을 시작한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리고 오늘은 앨범 제작 과정 중에서 가장 오래 걸린다는 보컬 녹음이 있는 날이었다.

“오케이.”

-끝났어요?

“어. 끝났어. 이야. 역시 지연이랑 작업하면 빠르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네가 더 고생했지. 이제 나와도 돼.”

-네.

제작 과정 중 가장 오래 걸리는 녹음이었지만 그것도 지연의 앞에서 부질없는 말이었다.

황 팀장이 뿌듯한 얼굴로 헤드폰을 벗고 방음 부스에서 나오는 지연을 보았다.

‘역시 우리 회사의 보배, 보컬 천재인 지연이야. 지연이는 역시 가수를 해야 해.’

성적이 부진하던 탑엔터에 구세주가 내려왔다.

그 구세주는 이전에도 여러 번 회사를 구해주었다.

황 팀장이 푸근하게 지연을 보고 있을 때, 지한이 방음 부스에서 나온 지연에게 생수를 건넸다.

“고생했어. 밖에서 듣는데 너무 좋더라.”

“고마워. 진짜 좋았어?”

“응. 이때까지 들었던 곡 중에 제일 좋았어. 나는 누나가 발라드랑 잘 어울릴 줄 몰랐는데 잘 어울리더라. 자, 어서 물부터 마셔.”

금방 끝냈다고는 하지만 부스 안에서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기에 목이 타던 참이었다.

동생이 준 생수를 까 시원하게 원샷한 지연이 ‘캬~’하는 소리를 내었다.

전화를 하고 막 들어오던 영훈이 맥주를 마신 것처럼 시원한 탄성을 낸 지연을 보고 한 소리 했다.

“지연아 너는 애가 캬! 가 뭐니 캬! 가.”

“왜?”

“아니, 꼭 술 마신 거 같잖아.”

“그게 어때서? 영훈 오빠. 나도 이제 21살인데. 나 술 마셔도 되는 나이잖아.”

“그래도 술은 자제하자.”

“나도 술 별로야.”

“마셔봤냐?”

“안 마셔도 알아.”

영훈이 잠시 지연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으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집에서 같이 지냈던 적도 있었고, 스케줄을 따라다니기도 했었지만 아이들은 술, 담배 같은 것에는 일절 시선을 주지 않았다.

“황 팀장님. 지연이 녹음은 끝났습니까?”

“어. 오늘은 끝났어.”

“이제 남은 일정이 얼마나 되죠?”

“이대로라면 다음 주에 보컬 녹음이 끝날 거 같은데?”

황 팀장의 말에 영훈이 곰곰이 스케줄을 생각했다.

제일 큰 고비인 보컬 일정이 일찍 끝났으니 뮤비 촬영 일정을 넉넉하게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뮤비 촬영 일자를 넉넉하게 잡고, 편집이랑 이런 거 다 따져도 9월이 되기 전에 끝날 거 같은데.”

“시간 넉넉해서 좋은데 왜? 9월 되기 전에 다 끝나면 좋지.”

“너만 컴백하는 거면 우리도 별걱정 안 하지. 메시아도 같이 하니까 문제야. 그쪽은 일정이 촉박하거든. 너를 먼저 컴백시키면 화제가 다 너한테 집중되니까 문제지. 넌 음악 방송 1-2주만 활동할 예정인데, 그래서 더 걱정이다.”

“메시아 쪽은 왜 바빠?”

저번에 봤을 땐 열심히 하는 거 같았는데 무슨 일 생겼나?

지한과 지연이 영훈의 입만 바라보고 있을 때 조금 전 지연의 녹음을 저장한 황 팀장이 대신 대답했다.

“녹음이 좀 오래 걸릴 거 같아. 아린이랑 엘리가 감기 기운이 있더라고.”

“맞아.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려 버렸거든.”

“저런.”

“어쩌다가요?”

남매의 말에 영훈이 옅게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성적에 대한 압박이지. 솔직히 회사에서 기대를 많이 한 것도 있지만 성적이 예상보다 안 나온 것도 사실이니까. 애들이 그걸로 부담을 많이 느낀 거 같더라. 무리해서 연습하다가 몸살 온 거 같아. 아린이랑 엘리 말고 다른 애들도 살짝 힘든 기색이더라고.”

“활동 끝나고 휴가 줬을 텐데 그때 좀 쉬지.”

“그때도 제대로 못 쉬고 따로 연습했다고 하더라.”

아이돌 데뷔 연령이 점점 어려지다 보니 메시아 애들은 맏언니를 제외한 대부분은 17, 18살이었다.

힘들게 데뷔했는데 기대한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혹사시킨 것 같았다.

쉴 때 제대로 쉬어야 일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건데.

아직 어려서 그런가, 멘탈과 체력관리가 잘 안 된 모양이다.

“이번 메시아 앨범에 있는 노래 다 좋던데.”

“나도 알지. 그런데 메시아 저번 앨범도 다 좋다고 했잖아. 그런데 기대한 만큼 성적이 안 나왔으니 애들이 많이 실망했던 것 같더라.”

“회사 사람들이 실망한 건 아니고?”

“우리도 조금 실망하긴 했지. 하지만 애들한테 부담을 준 적은 없어.”

“애들이 얼마나 남들 시선에 민감한데. 부담 안 줘도 다 알아차리지. 애들 너무 눈치 주지 마, 오빠.”

“난 안 그랬다.”

“황 팀장님두요. 저도 봐서 알아요. 애들 다 잘 할 수 있어요.”

“나도 안 그랬다, 지연아.”

후배를 지키는 지연의 태도에 영훈과 황 팀장이 시선을 피하며 변명했다.

아니 난 가수실 소속도 아닌데 왜.

영훈이 살짝 억울해했지만 현명하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보다 녹음 끝났으니까 5층 회의실로 가야 해.”

“나 할 거 아직도 남았어?”

“누나 오늘 스케줄 이게 다인데. 이거 끝나고 우리 집 가는 길에 와플 가게 들르기로 했는데.”

“걱정 마. 시간 많이 안 뺏을 거니까. 와플 가게는 내가 데려다줄게.”

영훈 오빠가 데려다준다면야.

녹음실에 남아있는 황 팀장에게 인사를 하고 셋이서 5층으로 향했다.

* * *

회의실에는 영훈 오빠 말고도 영훈의 팀인 서문호가 와 있었다.

“어? 호 오빠다.”

“호 형. 안녕하세요.”

“얘들아 안녕.”

이전에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을 찍을 때 지원 나왔던 호를 본 아이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호의 맞은편에 앉은 남매가 이 자리를 만든 영훈에게 대답을 촉구하는 시선을 보냈다.

“형 빨리. 무슨 일인데.”

“우리 또 스케줄 들어온 거 있어?”

“그것도 있지만 해줄 말도 있어서. 작년이랑 올해 너희들이 바쁘게 일한 거 때문에 우리가 반성할 게 많았어.”

“무슨 반성?”

“솔직히 너희 둘 관리하는 데 인원이 너무 부족했지. 지연이 너 한 명이 움직여도 10명이 넘는 스태프가 붙어야 하는데 지한이랑 같이 활동하는데 고작 3-4명이서 관리하던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

영훈의 말대로 지한이와 내 인지도를 생각하면 같이 움직이는 스태프가 너무 적긴 했다.

“내년이면 지한이도 이제 20살이야. 20살을 기점으로 많은 게 달라진다는 거 알지?”

“알지.”

한국은 20살을 기준으로 성인 취급을 하니까.

아역배우들의 전환점이기도 하고, 이런저런 변화가 생기는 게 바로 20살이었다.

나는 뭐.

작년에 드라마 활동을 하면서 이미지를 많이 바꿨지.

“이때까지는 너희 둘이 번갈아 활동해서 3-4명으로도 큰 무리가 없었지만 이제는 달라. 너희 둘 다 같이 활동하기도 했고, 신경 쓸 것도 많고, 지연이 네가 연기자로도 활동하는 이상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끄덕끄덕

영훈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앞으로 은주 팀장이 실장이 돼서 지연이 네 가수와 배우 활동을 전격적으로 서포트할 거야.”

“알았어. 그럼 앞으로 영훈 오빠는 내 관리 안 하는 거야?”

“나는 지한이 전담이야. 새로 생길 가수 3실 은주 실장이 지연이 네 담당, 배우 3실 소속인 내가 지한이를 전담하고, 전담 매니저도 한 명 더 붙을 거야. 앞으로 실장급 한 명이랑 일반 매니저가 한 명, 총 두 명의 매니저가 너희들 스케줄을 관리하기로 했어.”

“그럼 호 오빠는 영훈 오빠랑 함께 지한이를 담당하겠네?”

“그래. 지연이 넌 은주 팀장 아래에 있는 장훈이가 붙을 거야.”

“장훈이 형이라면 안심이지.”

그 형이라면 누나한테 해가 되는 일을 하진 않을 테니까.

지한이 장훈을 떠올리며 허락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식으로 발령 나기 전에 너희들한테 미리 말해주는 거야. 우리도 얘들한테 인수인계 중이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호 형. 잘 부탁해요.”

“우리 지한이 잘 부탁해요, 호 오빠.”

“그래.”

새로 합류한 팀원의 얼굴을 익히는 시간이 지나자 영훈이 또 다른 소식을 꺼냈다.

“아! 애런한테서 연락 왔다. 후속작업이 곧 끝날 거 같다더라. 이번 달 내로 내부 시사회가 있을 예정이래.”

“CG작업이 좀 걸렸네.”

“작업할 게 많잖아. 이것도 일찍 끝난 거래.”

“와우.”

역시 할리우드 스케일.

“아마 8월에 개봉할 예정인데 그때 영화 홍보 일정 나왔대.”

“알았어. 바쁘겠네.”

“비행기 많이 타야겠네.”

“그래. 그러니까 너희도 체력 관리 잘 해. 특히 지연이 너. 너는 컴백 일정도 같이 있으니까 더 신경 쓰고.”

“알았어.”

“근데 형. 그 전에 우리 일정 하나 더 있잖아.”

“일정? 아.”

“헐. 영훈 오빠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내가 설마 잊었으려고.”

그런데 왜 눈을 못 맞추죠?

영훈 오빠 날 봐.

내 눈을 똑바로 보라고.

“에헤이. 지연아. 나 못 믿어? 나 진짜 기억하고 있었어.”

“영훈 오빠. 옐로우카드야.”

“레드카드 안 줘서 고맙다….”

영훈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삐질 흘러내렸다.

* * *

하마터면 영훈의 목숨이 위험할 뻔했던 ‘그’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녹음을 하는 동안 어느새 여름이 다가왔고, 그 말인즉, 여름에 태어난 아이들의 생일 역시 다가왔다는 말이었다.

다시 말해 지연의 생일이었다.

지연과 지한의 생일은 전부 여름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회사로 모여드는 선물에 탑엔터 직원들이 제일 바쁜 때 중 하나였다.

“생일 선물 금지 목록 확인 했지?”

“네! 카페에 올라온 거 확인했습니다!”

“택배로 오는 생일 선물은 전부 확인하고 편지지는 확인하고 전부 모아둬.”

“알겠습니다!”

지연의 생일이 3일 앞으로 다가왔기에 모두가 바쁘게 움직였다.

탑엔터 직원들도 바빴지만 팬 카페 역시 축제 분위기였다.

카페 배너에는 D-3이라고 지연의 생일까지 남은 시간이 카운트되고 있었다.

-세상에 벌써 지연이 생일이라니.

└그것보다 우리 애가 벌써 21살이래요!

└그럼 지연이 이제 술 먹을 수 있는 거임?

└술이라니!!

-지연이 생일 조공 물품 봤어요?

└그중에 내가 갖고 싶은 것도 있던데

└너 바라기 속마음 나왔다.

└└앗ㅎㅎ

└지연이 커스텀 마이크 말하는 거 맞지?

└└마즘!! 커스텀 마이크 너무 예쁘더라. 크림색에 펄 들어가서 완전 예쁨!

└└이 마이크 꼭 써야 한다. 지연이 컴백 앨범 기다린다!

└└곧 나올 거라던데!

└└나오기만 해라. 소장용, 감상용, 보관용까지 3개 산다!

└└난 5개

└└난 10개

└└100개 가즈아!

└└└여러분 경매 하는 거 아닙니다ㅋㅋㅋㅋㅋㅋㅋ

지연이가 가수 활동을 할 때부터 팬이었던 이들은 지연의 컴백을 기대하고 있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연기를 병행해 TV에서 자주 볼 수 있던 것도 좋았지만 역시 지연이는 무대 위에서 노래할 때가 가장 빛난다고 생각하는 팬들이 더 많았다.

“누나. 다들 누나 컴백 기대하고 있나봐.”

“커스텀 마이크를 준비할 줄 몰랐는데.”

“마이크 예쁘다. 누나랑 잘 어울릴 거야.”

“마이크 색이 이번 앨범 컬러랑도 비슷해서 잘 맞을 거 같아. 물론 그게 아니어도 들고 올라갔을 거지만.”

“이럴 때 보면 나도 가수가 되고 싶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