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우리 애들은 다 착하지. 다른 회사 애들 말이야. 이번에 메시아 인사시키러 갔다가 트집 잡는 애들이 얼마나 많던지.”
이쪽 업계가 그런 게 심하긴 하지.
군대 똥군기 못지않은 곳이 연예계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지들은 군대도 안 갔으면서 어디서 그런 걸 배워온 거야?’
진짜 이상한 기합을 주면서 길들이기 하는 것들이 이 바닥에 널리고 널렸다.
아마 메시아 애들도 그런 애들한테 고생 좀 한 거 같은데 다음 앨범에서 보란 듯이 성공해줬으면 좋겠다.
“아무튼 그런 일 때문에 일부러 너랑 컴백일 가까이 둔 거야.”
“그렇구나. 어차피 메시아 애들이랑 나랑 1위 경쟁을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 거지?”
“그것도 그렇지.”
은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시선에서 당연히 내가 1위 할 거란 믿음이 보였다.
‘너 지연이잖아.’라고 하는 듯한 눈빛에 지연이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좋아. 이번에도 내가 뭔가 보여주지.”
“그래! 그렇게 나와야 지연이지!”
“가보자고~!”
“그래. 가보자!”
“나도 같이 가!”
세 사람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복도에 서서 만세를 했다.
기합을 넣은 세 사람이 회의실에 입성했다.
* * *
회사에서 후배들의 사정 아닌 사정을 들은 지연의 의욕적인 자세에 지연과 메시아의 앨범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제 데뷔 2년 차. 만으로는 1년도 채 되지 않은 메시아는 지연의 지원에 용기를 얻었는지 다시 의욕적으로 다음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흠. 저번이랑 분위기가 완전 다르네.”
“그러게. 저번이 카리스마 있고 강한 분위기였다면 이번에는 여리고 아련한 느낌인데?”
“맞아. 쎈언니에서 갑자기 사연 있는 여자가 되어 버렸어.”
“푸핫. 쎈언니라니.”
지한이 독특한 지연의 표현을 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 나도 모르게 또 미래의 유행어를 써 버린 건가?
하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지연은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왜? 맞잖아.”
“진짜 누나는 어디 가서 그런 표현을 배워오는 거야.”
미래에서.
지연이 진실을 말할 수 없어서 속으로 삼켰다.
그런 지연을 보고 겨우 웃음을 참은 지한이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
“그런데 이 곡. ‘외로움에 질식할 거 같은 여자’를 그린 곡 말이야. 누나랑 안 어울린다.”
“왜?”
“누나한텐 항상 우리들이 있잖아. 그러니까 누나랑 가장 안 어울리는 컨셉인 거 같아.”
…글쎄.
지연이 옆에서 앨범 회의 내용에 대해 검토하던 동생의 말을 듣고 시선을 피했다.
지연의 눈은 가사지 위의 글을 보고 있었지만 시선은 조금 더 먼 곳을 보는 것 같았다.
‘아마 지금까지 나왔던 컨셉 중 가장 잘할 수 있을걸.’
외로움에 질식할 거 같은 여자라면 뼈저리게 겪어 봤으니까.
지연이 조용히 가사지만 보고 있을 때, 지한이 대답 없는 지연에 고개를 들어 누나를 보았다.
“누나?”
“…응?”
“아니. 그냥. 됐어.”
“왜? 뭔데.”
“아니. 그냥 누나 뮤비 빨리 보고 싶어서. 콘티는 언제 나온대?”
“다른 곡도 다 나와야 알지. 이제 겨우 4곡 정했는걸.”
“이번에 6곡만 넣는 거 아니었어?”
“맞아.”
“그럼 금방 다른 곡도 정해지겠네.”
지연의 배우 활동에 벼르고 있던 가수실이었다.
막혔던 댐이 터지듯이 지연의 앨범 활동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다가 컴백 날짜가 당겨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런데 고르고 고른 곡들이 하나같이 좋아서 퀼리티도 걱정되지 않았다.
“누나 이번 앨범 뭔가 사고 칠 거 같은 느낌인데?”
“무슨 사고?”
“이러다 한국어로 만든 앨범이 빌보드 가는 거 아니야?”
“매튜도 없는데?”
“매튜 없이도 빌보드 갈 수도 있지.”
생각해보니까 그렇다.
돌아오기 전 빌보드 차트에 오른 대한민국 대표 아이돌 그룹도 영어 가사가 아닌 곡으로 빌보드 HOT 100에 오른 적이 있었으니까.
‘나도 한번 도전해 봐?’
이왕이면 앨범 볼륨도 더 늘려서 8곡에서 10곡 정도로 만드는 게 좋겠지?
어차피 제작 속도는 충분히 빠르니까.
메시아랑 컴백 일짜를 일부러 맞추고 있으니까 10월에 컴백하는 건 바꾸지 않을 텐데 지금 제작 속도는 너무 빨랐다.
이 속도를 보면 앨범 제작 기간을 조금 더 늘리는 게 나쁜 선택은 아닐 거다.
“은주 언니한테 말해 볼까?”
“뭘?”
“앨범 조금 더 본격적으로 만들어 보자고.”
“난 찬성.”
지한이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 가장 든든한 지지자의 동의도 얻었으니 못 먹어도 고다!
173.
앨범 준비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더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싶다는 지연의 의견은 A&R팀에도 환영받았다.
지연의 의견에 따라 앨범은 6곡에서 10곡으로 늘어났다.
지연이 소화할 거라고 생각해 그동안 모아둔 곡이 꽤 되었기 때문이다.
하긴 내가 그동안 활동을 많이 안 하긴 했어.
원래도 작년에 드라마 하나 하고 앨범 활동할 생각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드라마 주연에 할리우드까지.
정신이 없었지.
“진짜 뭔가에 홀린 것처럼 일했네. 나 원래 워커홀릭 아닌데.”
지연의 말에 옆에 앉아 있던 은주와 지한의 시선이 옆을 향했다.
둘의 시선을 느낀 지연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지연아. 넌 누가 봐도 훌륭한 워커홀릭이란다.”
“은주 누나 말이 맞아. 누나 일만 하잖아.”
“나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는데?”
나름 일과 일상의 균형을 맞춘 워라밸을 실천하고 있는데 왜 그런 말을?
작년에는 조금 과하게 일하긴 했지만 그 외에는 적당히 일했다고.
“일 안 하고 다른 걸 안 하니까 그렇지.”
“그림도 그려.”
“누나는 그것도 일이야.”
“지연아 네가 그린 그림으로 헨리 교수님을 통해서 꾸준히 전시회를 열고 있지?”
“응. 교수님이 미국에서 자기 지인들이랑 같이 전시회 하는데 자리 내주고 계시지.”
“덕분에 네 그림 구매하겠다는 문의가 끊이질 않는단다. 우린 엔터 회산데 말이야.”
취미생활이라고 하기에는 지연이가 그린 그림의 가치가 꽤 나간단 말이지.
물론 판매는 HJ미술관에서 대행해주고 있어서 우리 쪽 수익에 잡히지는 않지만
지연의 그림이란 걸 아는 사람들은 회사로 꾸준히 문의 메일을 넣고 있다.
“그래서? 난 취미랑 기분전환으로 그리는 거야. 화가가 본업이 아니라고.”
“일부러 전시 요청 때문에 그린 것도 있으면서.”
“그건 헨리 교수님이랑 관장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린 거야.”
지연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본인이 그렇게 말하면 뭐하나.
매년 그 요청사항을 받아들여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면서
그것도 결국 일이다, 요 녀석아!
“그래그래. 아무튼 이번 앨범에도 지연이 네가 직접 그린 그림으로 카드 만들 거지?”
“응 그냥 작은 메시지 카드랑 거기에 간단한 그림 그려넣을 거야.”
그러니까 네 실력이 그냥 간단한 그림 그린 수준이 아니라니까.
앨범에 있는 포토카드와 매 앨범 들어가는 지연의 손편지와 편지에 그려진 그림.
그걸 얻기 위해서 되파는 놈들과 사는 놈들.
지연은 의뢰받지 않고 그린 자신의 그림의 가치를 과소평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오죽하면 회사에서 그걸 막기 위해서 예약한 사람들에게만 앨범을 팔고 있겠는가.
“거봐. 그런 거까지 신경 쓰는데 워커홀릭이 아니라고? 지연이 넌 워커홀릭이 맞다.”
“이건 내 팬들을 위한 거야.”
“그래. 가수로서 팬들을 챙기는 건 업무의 일환이지.”
“언니는 매니저 일도 아니면서 우리 생일 챙기잖아. 활동기 아닐 때도 집에 가끔 들르면서.”
“지연아, 그것도 다 업무의 일환이야….”
가난한 월급쟁이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난 또 그런 줄도 모르고 우리랑 친하니까 개인적으로 챙기는 건 줄 알았네.
이거 미안하네. 내가 뭔가 지뢰를 밟은 것 같아.
“지연아. 지한아. 너희들이 정말 다른 연예인이랑 다르게 관리하기 엄청 편하고 밖에서 사고도 안 치는 거 정말 좋아. 그런데 인생을 먼저 산 선배로서 말하는 건데 가끔은 밖에 나가서 사람들 좀 만나고 그래라.”
“우리는 여행도 가는데.”
“그거 지한이랑 가는 거 다 안다. 지한이는 그래도 친구들이랑 연락은 하는 거 같은데 지연이 너는 연락할 친구도 없지?”
쿠쿵!
지연의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은주가 지연이 정신 차릴 틈도 주지 않고 후속타를 날렸다.
“지한이 없으면 같이 놀러 갈 사람도 없으면서!”
“!!”
쿠구궁!
“지연이 네 연락처에 있는 사람들도 지한이 덕에 알게 된 사람들이잖아!”
콰가가강!!
은주의 공격에 지연이 K.O 당했다.
언제나 똑 부러지며 어떤 일이 있어서 뚝딱 해결하는 누나가 맥없이 당하는 모습에 지한이 조금 걱정했다.
우리 누나 괜찮으려나?
은주 누나도 참.
팩트 폭격도 적당히 하지.
지한의 시선에 은주가 아차 했는지 다급하게 말을 바꿨다.
“아이고, 내가 뭐하러 이런 말을. 지연아, 미안해.”
“아니야 언니…. 날 생각해서 한 말이란 거 알아.”
“…알아줘서 고맙다.”
“그런데 언니. 다른 사람 만나서 사고 치는 것보단 동생이랑 같이 오순도순 지내는 게 좋지 않아?”
“지연아…그것도 정도껏이지 넌 너무 심해. 솔직히 너 지한이 아니었으면 다른 사람들이랑 만나지도 않았을 거잖아.”
은주가 지연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어떻게 알았지?
그동안 같이 지낸 세월이 세월인지라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도 같지만 내가 이렇게 읽히기 쉬운 사람이었나?
지연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언니….”
“그래.”
“일이나 하자.”
“…그래.”
지연이 씁쓸한 얼굴로 다시 곡을 듣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지한이 누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내가 일중독에 아싸라니.’
팩트는 아픈 거구나.
지연이 뜨거워지는 눈가에 힘을 줬다.
* * *
은주의 말에 정곡이 찔린 탓인지 아니면 부인하기 위함인지 지연은 앨범 제작 과정에 몰두했다.
매일매일 A&R팀과 함께 곡을 고르고 편곡을 확인하고 기획의도대로 앨범을 구성하기 위해서 회의를 했다.
“좋아요. 이걸로 10곡 확정입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데모곡을 고르고 없으면 곡을 구하고, 그렇게 모은 곡들을 편곡까지 마친 A&R팀이 수록곡을 확정받자 모두 박수를 쳤다.
이걸로 한 고비 넘겼다.
“이제 녹음하고 뮤비 찍고 안무 외우는 것만 남았네.”
“안무는 안 짜도 돼?”
“이번 곡은 발라드니까.”
“오케이. 알았어. 그럼 무대 기획이랑 연출만 신경 쓰면 되겠네. 나 음방 활동 하는 거지?”
“어어. 메시아 지원하는 거 때문에 음악방송 해야 해.”
“나 음방 오랜만이야. 작년이랑 재작년은 안 했잖아.”
“너 정도 되면 안 해도 되긴 하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특수하니까 어쩔 수 없지.”
음악방송이라는 것도 결국 앨범 홍보 활동 중 하나다.
지연이 정도라면 SNS 공식 계정과 팬카페에 알리기만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니 굳이 적자를 보며 음악 방송 스케줄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누나 무대 나가면 미나 누나가 좋아하겠네.”
“안 그래도 앨범 기획 들었을 때부터 난리였어. 내 의상 제작할 거라고.”
“미나 팀장님이라면 지금 코디북 다 만들었겠네.”
“아마도?”
예전부터 내 의상은 직접 만드는 걸 선호했으니까.
그럼 이제 곡이 만들어졌으니까 녹음만 하면 되는 건가?
“가사 빨리 써야겠네.”
“누나라면 금방 쓸 거야.”
“지연이 너라면 금방 하겠지.”
이 사람들 나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나도 쉽지 않을 수 있잖아.
아무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날 너무 믿는다니까?
* * *
“끄응….”
지연이 펜 끝을 책상에 톡톡 두드리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톡, 톡, 톡톡, 톡톡톡
책상과 펜이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방문이 열린 틈 사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1명과 2마리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슬그머니 물러났다.
지한이 아이들에게 작게 속삭였다.
“누나가 잘 안 풀리나 봐.”
…왕
…냐아
“작품이 잘 안 풀릴 때도 저런 표정을 한 적은 없었던 거 같은데.”
끄웅
애옥
지한의 말에 동물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연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그동안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지연은 척척 해냈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금 돌아가더라도 지연은 풀이 방법을 아는 것처럼 문제를 척척 풀어나갔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저렇게 혼자 고민하고 있는 걸 보니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역시 누나한테 외로움을 주제로 한 가사를 쓰라는 건 너무 어려웠나.”
누나라면 잘 모르는 외로움에 대해서도 잘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자신은 어릴 때부터 부모의 빈자리에 문뜩 외로움을 느끼곤 했기에 그 경험을 참고삼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누나는 부모의 부재라는 걸로 외로운 적이 없었을 거야.”
누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어 보였으니까.
오히려 엄마와 아빠 이름을 데스노트의 상단에 쓰지 않았던가.
예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누나는 자신이 기억하는 어릴 때부터 부모가 없어도 별로 쓸쓸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정 안 되면 내가 도와줘야겠다.”
왕!
먁!
모짜와 인절미가 지한을 응원하는 듯이 얼굴을 핥았다.
“악. 너희들, 으븝. 아하하. 그만해. 인절미 너 입에서 똥내 나. 모짜 너는 혀 따가워.”
지한의 말에도 둘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몸에 올라탄 둘 때문에 지한이 벌러덩 뒤로 넘어갔다.
지연의 방문 밖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문 밖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도 모른 채, 지연은 안에서 하얀 종이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