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무슨 말이에요?”
“왕웨이, 정확하게는 중국 국영기업을 대상으로 형사고소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에엥?
갑자기 일이 왜 그렇게 되는 거래?
남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옆에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음에도 주인의 반응에 모짜와 인절미가 덩달아 띠용 한 얼굴을 했다.
닮은 넷을 보고 애런과 영훈이 시원하게 웃었다.
“하하하. 둘은 몰라도 됩니다. 다만 앞으로 주민은 조심해야겠더군요.”
“우리 사장님이요?”
“사장님이 뭐 했어요?”
“우리 사장님이 왕웨이에게 한 방 먹여주셨지.”
아이들의 질문에 영훈이 대신 대답했다.
그래. 한 방.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핵폭탄 같은 한 방을 선물해주셨지.
이번 일로 사장님이 가진 힘이 어느 정도 드러났지만 사장님과 같은 편에 있는 이상 위험할 게 없었기에 든든했다.
“그렇구나.”
“우리 사장님 저번 일로 화났나 봐.”
“그래도 당하고 있는 것보다는 낫지. 나는 사장님이 한 방 먹여 줘서 좋은걸?”
“그건 나도 좋아. 저번에는 진짜 누나가 다칠까 봐 심장이 덜컥했다니까.”
다시 그날 있었던 사고가 떠올랐는지 지한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둘을 보고 애런과 영훈은 주민이 무슨 일을 했는지 구태여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어쩐지 맥이 좋아하더라니. 맥도 중국에게 한 방 먹여주려고 하고 있던 걸 몰랐어. 뭐,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됐지만.’
오늘 마벨의 훈련장에 체포 영장을 들고 왔던 이가 애런의 지인인 FBI 수사관 맥 도웰이었다.
지연이 알았다면 ‘끼리끼리 사이언스’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이쪽은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저쪽은 어쩔까.
바다 건너 주민에게 핵폭탄을 선물 받은 인물을 떠올리며 애런이 잔을 들어 미소를 감췄다.
* * *
‘젠장! 일이 어떻게 된 거지?’
중국에 있는 아버지, 리신과 연락을 하고 싶어도 아무런 연락도 되지 않았다.
WW인베스트먼트를 통해서 변호사를 선임하기는 했어도 뭔가 일이 심상치 않게 움직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디서부터지?
뭐가 문제지?
청부살인이라니.
그건 걸릴 일이 없었는데.
“후우. 도무지 입을 열 기미가 안 보이는 군요.”
“제 의뢰인은 그 사건과 관련이 없습니다.”
“됐습니다. 이래서는 끝이 안 나겠군요.”
수사관이 지친 얼굴을 했다.
“잠시 쉬겠습니다.”
그 말을 하고 수사관이 자리를 비우자 변호사가 리쯔웨이에게 작게 속삭였다.
“중국에서 리쯔웨이, 당신을 빼내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그보다 아가씨는 무사하십니까?”
“네. 왕쉬엔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까요.”
변호사의 말에 리쯔웨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변호사가 잠시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하고 나섰다.
혼자 남은 곳에서 리쯔웨이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눈을 감았다.
뚜벅뚜벅
‘변호산가?’
리쯔웨이가 다시 눈을 뜨자 그곳에 주민이 빙그레 웃으며 앉아 있었다.
“안녕?”
“당신!”
탑엔터 공주민 사장이잖아?!
그가 왜 여기에?
커다랗게 떠진 리쯔웨이의 동공을 본 주민의 유쾌한 얼굴로 대답했다.
“할 수만 있다면 중국까지 직접 가서 비웃어주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거긴 면회가 안 되더군. 대신해서 널 찾아왔어.”
“그게 무슨 소리야.”
주민이 구속된 리쯔웨이를 보며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왕웨이 말이야. 생각보다 너무 시시했어. 나는 중국에서 잘나가는 권력자라기에 상대하는 게 어려울 줄 알았거든.”
“감히 위원님께 무슨 짓을 한 거야!”
“저런.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러나. 했지만.”
“크흑. 소국의 사람이 대국의 사람에게 덤비다니 가만두지 않을 거다.”
“내 앞에서 같잖은 말은 하지 않은 게 좋을 텐데. 지금 꼴을 봐.”
주민이 입꼬리를 한껏 말아 올려 리쯔웨이를 비웃어줬다.
“그렇게 대국 대국 하더니 결국 더 큰 나라한테는 꼼짝도 못해서 여기 갇혀 있지 않은가.”
“크흑! 네 녀석, FBI가 우리를 추적한 것도 다 네 짓이지?”
“지금 누가 누구보고 비겁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그저 정당하게 제보를 했을 뿐인데.”
비겁하고 치졸한 짓은 그쪽이 전문 아니던가.
정치며 경제며 문화며 모든 곳에서 깡패짓하는 나라가 그쪽이면서.
“그렇게 대국을 좋아하니 나도 더 큰 나라를 불렀다네.”
“공주민…! 중국에서 널 가만두지 않을 거다. 네가 자랑하는 HJ그룹은 모든 수를 써서 무너트려 주겠어.”
“어이쿠 무서워라. 라고 할 줄 알았나? 그쪽이 지금 그럴 여력이 있을 지나 모르겠네.”
“뭐…?”
자신의 말에 씨익 웃는 주민의 얼굴에 리쯔웨이는 등줄기를 타고 불안이 스물스물 기어오르는 걸 느꼈다.
얼마 전에 느꼈던 감각과 같았다.
뭔가 모르는 것이 자신의 목을 조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네가 그렇게 떠받들어 모시던 왕웨이는 이제 끝이야.”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
주민이 새하얗게 웃었다.
165. 구세주
주민을 기다리며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있던 남 비서는 건물 밖으로 나오는 주민을 보고 자세를 바로 했다.
화면을 끄고 덮개를 덮은 태블릿을 쥔 남 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무사히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생각보다 즐거웠어. 멍청하게 왜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이에게 하나씩 알려주면서 새파랗게 질려가는 얼굴을 보는 걸 보니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더군.”
알게 모르게 중국에게 간접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던 상황이라 이번 기회에 한 방 먹여주니 속이 다 시원했다.
그쪽은 정말이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동안 누나랑 형이랑 친구들이 그 때문에 피해를 본 게 얼마던가.
중국 진출에 소극적이던 HJ그룹도 살짝 타격이 있었는데 다른 곳은 어떻겠는가.
그러게 그놈의 시장규모랑 인건비에 혹하지 말라니까.
중국놈한테 또 연구원을 뺏겼다면서 징징거리던 친구를 떠올린 주민이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사장님?”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애들 보러 가고 싶군.”
“모시겠습니다.”
주민이 차에 올라탔다.
그 옆에 남 비서가 올라타자 운전수가 출발했다.
LA에 있는 아이들 집으로 이동하면서 주민이 눈을 감았다.
조금 전 있었던 리쯔웨이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 * *
목이 졸린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리쯔웨이에게 주민이 입을 열었다.
“미국 대학에는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지. 중국도 그 인재를 노렸을 거야.”
“….”
“인재들을 키워서 국방 정보 같은 걸 빼오는 것도 좋을 테고 말이야.”
“….”
“기술? 좋지. 후발주자로서 선발주자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물론 더 쉽게 기술을 빼오는 지름길이 있다면 그 길을 이용하겠지. 예를 들어 훔친다든가?”
“….”
주민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리쯔웨이의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남자, 도대체 어떻게….
중국에서도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일을 잘 알고 있는 거지?
자신이 한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리쯔웨이를 보고 주민이 차갑게 웃었다.
“너희는 날 몰랐지. 내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누구를 움직일 수 있는지, 어떤 패를 쓸 수 있는지 말이야.”
주민의 말에 리쯔웨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들던 건 다 그 탓이었나?
“나는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어.”
우리에겐 행운의 여신이 함께하고 있거든.
주민은 지연이 흘러가면서 하는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말 그대로 ‘하나도’ 말이다.
중국의 스파이칩
인재유치 프로그램
산업 스파이
그 밖에도 이런저런 것 전부.
지연이 경고했을 때부터 나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확실히 한국에서는 중국에 있을 왕웨이를 공격하기 힘들었는데 말이지. 생각을 달리하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
“네 말대로 우리가 소국이라서 안 되면 다른 대국을 불러오면 되는 거겠지?”
“…당신!”
“그래서 덩치 큰 형님을 불렀어. 도와달라고. 집안에 이런 벌레들이 있는데 그 벌레 때문에 옆집에 사는 우리도 힘드니 같이 쫓아내 달라고 했어. 흔쾌히 도와주더군.”
“이건 위원님과는 관련 없는 일이었다. 지연이란 배우와 우리의 개인적인 일이었잖아!”
어이없네.
자기들은 한국에서 일할 때 잘 안 되면 정치나 경제를 이용해서 압박하거나 보복했으면서.
이제 와서 역으로 당하는 입장이 되니 자신들이 한 걸 생각도 안 하고 억울하다고 하고 있었다.
이걸 지연이식으로 표현하면 뭐라고 하더라?
“내로남불.”
“뭐?”
“네가 하는 짓이 꼭 내로남불이라고.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딱 그짝 아닌가.”
주민의 말에 리쯔웨이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이 어디 가서 이런 취급을 받아봤겠는가.
왕웨이의 아랫사람으로서 그보다 높은 위치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항상 대우를 받았다.
비록 위원님의 딸인 왕쉬엔을 보필하면서 하인 같은 취급을 받긴 했지만 중국에서 자신은 왕웨이라는 제후를 모시는 가신이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미국에서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이번 일로 강하게 나올 생각인 거 같으니 알아서 하라고.”
“일을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왕쉬엔 때문에 중국과 미국이 부딪치게 됐다는 걸 알면 위원님은 정말 끝일지도 몰랐다.
그 사실만 숨기면 돼.
그것만 숨기면 위원님이 이 위기를 넘기실지도 몰라.
주민과 협상하기 위해서 리쯔웨이가 입을 열려고 할 때, 주민이 먼저 입을 뗐다.
“왕웨이가 생각보다 미움을 많이 받았더군.”
“원래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시기질투하는 자들이 많은 법이다. 그보다,”
“주석 줄을 잡았다고 너무 날뛴 거지. 언제까지 주석이 왕웨이를 봐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주석님이?”
주민의 말에 리쯔웨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주석님이 위원님을 버리셨다고?
믿고 있던 끈이 썩은 동아줄이었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리쯔웨이의 얼굴에 절망이 피어올랐다.
‘사실은 이쪽은 주석을 전혀 모르지만.’
굳이 주석까지 갈 필요가 있겠는가?
바로 위에 사람에게 꼰지르면 되지.
그것도 죄를 뒤집어씌우게 하면서 말이다.
마침 왕웨이가 인재유치 프로그램과 산업스파이 쪽과 관련이 있어서 다행이었어.
그걸 빌미로 왕웨이를 쳐낼 수 있었다.
“이럴 수가. 주석님이. 위원님을….”
“그럼 힘내라고.”
마지막 희망을 잃어버린 리쯔웨이를 두고 주민이 등을 돌려 나왔다.
눈에 거슬리던 놈들을 치워버리고
FBI에 빚을 하나 지워두고
중국의 활동에 제약을 걸었다.
‘이번 일로 얻은 게 많아. 역시 우리 복덩이들이야.’
* * *
“사장님 도착했습니다.”
“벌써 도착했다고?”
잠시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만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다.
기다리고 있던 일을 처리해서 긴장이 풀린 걸까.
주민이 잠에서 깨기 위해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사장님이다.”
“오셨어요?”
먕
왕!
차에서 내리자 아이들이 정문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애들이란 말인가.
훈련이 힘들었는지 애들 얼굴이 홀쭉해졌다.
“너희들 밥은 잘 챙겨먹고 있는 거니?”
“사장님 누가 한국사람 아니랄까봐 안부 인사를 밥 먹었냐는 얘기로 하는 거예요?”
“누나랑 저 살 많이 안 빠졌는데.”
“그런데 볼이 왜 홀쭉해.”
“아닌데. 그대로예요.”
“사장님. 우선 안으로 들어가시죠.”
명절에 오랜만에 본 손주들 챙기는 할머니처럼 지연과 지한의 이곳저곳을 살피는 주민을 남 비서가 말렸다.
“그런데 사장님 아까 애런이 사장님보고 무섭다고 했는데 왜 그런 거예요?”
“사장님, 왕웨이 혼내줬다면서요?”
주민을 둘러싸고 아이들이 종달새처럼 쫑알거렸다.
“일단 들어가서 밥부터 먹고 얘기하자. 너희들 밥 먹었니?”
“사장님 오신다고 해서 아직 안 먹었어요.”
“애런이랑 영훈이 형도 기다리고 있어요.”
“이런. 내가 너무 늦었구나.”
“아니에요.”
“사장님 오신다고 해서 갈비찜 준비했어요.”
“정말?”
밥 얘기로 훌륭하게 관심사를 돌린 주민은 그날 저녁 결국 지연과 지한의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먹이는 데 성공했다.
* * *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사장님이랑 영훈 오빠는 우리가 더 이상 다른 일에 신경 쓸 일 없다고 해서 정말 든든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호주에 있다.
“컷! 오케이!”
메가폰을 잡은 루카스 감동이 오케이 사인을 내리자 찰랑이는 물 위에 놓인 새하얀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지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연이 긴 옷자락을 잡으며 걸어나와 영상을 확인했다.
“이 분위기 그대로 다음 씬도 할 수 있겠나?”
“네, 감독님.”
“좋아.”
루카스 감독이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지연을 선택하길 잘했다.
그때 그 영상을 보길 잘했다.
이 시나리오를 완성하길 잘했다.
“지연! 너무 멋졌어. 완전 여신님이야.”
“물 먹어서 무겁겠다. 누나 빨리 옷 갈아입자.”
“그렇게 많이 먹은 것도 아닌데.”
“아직 날이 추우니 감기 걸릴지도 모릅니다.”
“로드리오까지.”
“허허허. 배우들끼리 사이가 좋으니 잘됐구만. 로드리오의 말대로 감기는 조심해야지. 갈아입고 오게.”
기 싸움이 없는 촬영현장이라니 얼마나 좋은가.
훈련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4명의 배우를 중심으로 스턴트팀까지 화기애애했다.
다른 스태프 역시 자신의 이름 덕인가 모두 제 할 일 하는데 집중했다.
“아이고 지연아! 얼른 옷 갈아입자.”
“겉옷만 젖었는데.”
“그래도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