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조용히 케이티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눈을 감았던 케이티가 눈을 뜨자 지연은 그녀가 연기를 시작할 준비가 됐음을 알 수 있었다.
‘괜찮은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해서 눈동자가 어지러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배역에 몰입하는 순간 그런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과연 오디션을 그냥 통과한 건 아닌가 보네.
그럼 이제 케이티가 생각한 ‘리사 오닉스’가 어떤 사람인지 한번 볼까?
리사 역에 몰입한 케이티를 보고 흥미로워하면서도 겉으로는 차가운 아이린 화이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인간, 용케 날 찾아왔군.”
케이티와 아이린의 첫 만남은 마벨에서 그 왕쉬엔이란 배우와 겨뤘던 바로 그 장면.
왕쉬엔은 그 장면을 생각하면서 ‘인간 같지 않은 존재’를 연기했던 것이었다.
그걸 보고 나도 그 장면을 토대로 보여줬지.
루카스 감독은 지연의 연기를 보고 대사를 일부 수정할 정도로 마음에 들어 했다.
지연이 초월적인 무언가를 연기하자 리사에 몰입해 있던 케이티는 깜짝 놀랐다.
흠칫!
눈앞의 존재를 본 케이티가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뭐지?’
손 하나 움직이지 못하겠어.
어딘가에 묶여있는 것도 아니고 지연이 초능력을 써서 자신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리사가 된 케이티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존재를 보고 압도된 것이었다.
지켜보고 있던 지한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고, 로드리오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당신이…이곳의 주인입니까?”
“그렇다.”
“저는, 리사 오닉스입니다.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내 앞에 서 있는 용기를 봐서 들어주지. 날 찾아온 이유는?”
잠깐의 여흥일까.
위대한 존재가 내린 자비에 리사가 침을 삼키고 말했다.
“에반 골드는 황제가 될 겁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거짓도 진실도 아니었다.
이것은 예언.
신의 뜻을 들은 이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리사의 말에 아이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위험해!’
본능적으로 리사가 몸을 뒤로 움직였다.
자신의 말이 위대한 존재의 심기를 건드렸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앞에서 감히 내 동생의 이름을 입에 올린 건가.”
공기가 무거워진 것 같았다.
갑자기 중력이 몇 배로 늘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이건 연기야. 대사를 해야 해. 그러니까 다음 대사는….’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나가려고 하는데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음 대사가.
짜-악!
“아.”
“자! 여기까지.”
지한이 적절한 타이밍에 박수를 치며 끼어들어 흐름을 끊어냈다.
조금 전까지 무형의 기운에 속박된 것처럼 눈 하나 깜빡이지 못하던 케이티가 마법이 풀린 것처럼 막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영화는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신인이라면서요.”
로드리오가 조금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약한 소리나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나지 않는 그로서는 드문 반응이었다.
축 처진 귀랑 꼬리가 보이는 것 같아서 조금 귀여웠다.
카리스마와 남성미가 넘치는 그의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었지만 이미 지연의 머릿속에서 ‘로드리오=허스키과’로 분류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우리 누나 영화는 처음 맞아요. 본업이 가수니까요.”
“정말이지 신은 불공평하군요. 노래도 잘 하시면서 연기도 잘 하다니.”
“가수면서 연기도 잘 하는 사람은 저 말고도 있지 않나요?”
“…지연은 그중에서도 규격 외입니다.”
“하아…맞아요. 나 같은 건 지연의 발톱의 때만도 못할 거야.”
진이 빠졌는지 축 처진 케이티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괴감에 빠졌는지 땅굴을 파고 들어갈 기세였다.
지한이 그런 케이티를 달래며 말했다.
“케이티 연기 잘하던걸요? 우리 누나 앞에서 계속 NG내던 배우도 있었어요. 케이티는 마지막까지 훌륭하게 연기했잖아요. 진짜 리사 오닉스 같았어요. 멋져요.”
“에엣? 그, 치만. 마지막에.”
“진짜 잘했어요. 우리 누나 이래봬도 연기경력이 무려 12년이라구요.”
“예에에!?”
“12년이면 지한과 거의 같지 않습니까.”
“맞아요! 누나가 나한테 연기 가르쳐주면서 같이 시작했으니까.”
“지연이 지한을 가르쳐줬다구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폭탄에 케이티와 로드리오의 머릿속이 폭격을 맞은 대지처럼 초토화됐다.
그러니까 지연이 연기경력이 12년이나 되는 베테랑인데 심지어 할리우드 유망주인 오지한을 직접 가르쳤고.
아아니. 이게 아니지.
애초에 오지한 첫 연기 데뷔가 7살이라고 하지 않았어?! 한국에서지만!
그때 지연의 나이가 몇 살이었지?
그래봤다 10살도 안 됐을 텐데 그 나이에 누굴 가르쳤다고!?
심지어 그게 오지한!?
“이런 너무 충격이었나?”
“한국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어째 이 말만 하면 다들 같은 반응인 거 같아.”
“왜 아니겠어. 이름도 없는 꼬맹이가 할리우드 연기 천재 배우를 가르쳤다는데.”
“응? 왜? 누나도 천재잖아.”
“천재는 무슨. 전부 치트키 덕분이지.”
“아닌데.”
지한이 자신의 실력을 과소평가하는 지연을 보고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남매간에 오간 대화에 케이티와 로드리오가 멍한 얼굴로 둘을 바라봤다.
‘이 천재들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일반인으로서 천재의 대화를 따라가기 어려웠다.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지연이 동생에게 신호를 보냈다.
“알았어. 그럼 로드리오! 다음은 우리 차례예요.”
“네…!”
무언가 각오를 한 로드리오가 주먹을 불끈 쥐고 지한을 보았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잊은 지한이 유쾌한 얼굴로 로드리오를 마주 보고 앉았다.
휴우. 삐질 뻔했는데 잘 넘겼다.
* * *
짧은 순간 온 힘을 다해 펼친 연기에서 아직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두 사람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대단해….”
“이게 말로만 듣던 오지한의 연기.”
“지한도 대단하지만 지연도 대단합니다.”
스크린으로 보던 것도 대단한 압박이 느껴졌는데 실제로 보니 더했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케이티와 로드리오가 허공을 보면서 어딘가 몽롱한 시선을 했다.
“우리가 저런 사람들이랑 같이 연기를 해야 하다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저런 사람들과 연기를 같이 할 수 있는 게.”
시무룩해 있던 케이티가 로드리오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로드리오는 무섭지도 않나?
역시 로드리오도 이 정도 연기는 가뿐한가 봐.
“전혀 가뿐하지 않습니다.”
“헙! 내가 지금 생각을 입 밖으로 냈던가?”
“아닙니다. 그저 케이티의 얼굴에 다 드러납니다.”
“진짜?!”
케이티가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때 고생한 두 사람을 위해 간식을 가지러 간 지연과 지한이 거실로 돌아왔다.
“케이티? 얼굴을 왜 더듬고 있어요?”
“거울 갖다 줄까요?”
“아! 그게 로드리오가 저는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난다고 해서.”
“아하. 그거 말이죠.”
“케이티는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나는 편이긴 하죠.”
지연의 말에 케이티가 울상을 지었다.
표정 관리도 하나 하지 못해서 어떻게 배우라고 할 수 있겠어.
에이바가 어딜 가나 얕보이지 않게 신경 쓰라고 했는데.
“배우로서 감정표현이 풍부한 건 좋은 일이지. 그치, 누나?”
“응. 표정도 연기의 한 갈래니까.”
자칭타칭 연기천재들의 말에 케이티가 입을 작게 벌렸다.
“케이티 연기도 좋았지만 역시 표정연기도 좋았지.”
“저, 정말요?”
“확실히 표정이 풍부하니까 대사가 더 잘 전달되는 느낌이었어요.”
“그렇구나.”
에이바는 내 이미지랑 맞지 않는다면서 항상 무표정하게 있으라고 했는데.
풍부한 감정이 드러나는 표정 덕에 칭찬을 받을 줄이야.
케이티가 어딘가 묘한 느낌이 드는 심장 위에 손을 얹었다.
“로드리오도 좋았어요. 연기가 섬세하던걸요? 표정도, 손짓도 톤도 전부 의도해서 한 거죠?”
“네. 어떻게 하면 조지 브레이커는 용의 대적자니까요. 인간이면서 용과 닮은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계속 고민했습니다.”
“모범생 같아요.”
“전부 계산해서 연기하다니. 쉽지 않을 텐데. 대단해요.”
케이티와 지한이 순수한 얼굴로 로드리오를 칭찬했다.
모두의 칭찬에 로드리오의 손이 살짝 까딱였다.
둘의 표정이 조금 풀린 걸 본 남매가 간식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그제야 편하게 음료와 간식을 즐길 수 있었다.
우물우물
“그런데 아까 지한이 한 말 사실이에요?”
당분이 들어간 케이티가 지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가요?”
“지연이 지한에게 연기를 가르쳤다는 거 말이에요!”
“아. 그거요?”
케이티의 질문에 로드리오까지 귀를 쫑긋 세웠다.
아니 세운 것처럼 보였다.
지연은 입가에 부스러기를 달고 있는 케이티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한이가 처음 연기할 때 갑자기 현장에서 캐스팅됐거든요. 그래서 그때 잠시 가르쳐줬어요.”
“그거 말고도 어릴 때 누나가 연기를 놀이처럼 가르쳐줬어요.”
“연기를 놀이처럼?”
“과연 어릴 때부터 연기에 익숙하게 했단 말이군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미간을 좁히는 케이티와 반대로 로드리오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고수의 비법처럼 보이는 말에 케이티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떻게요?”
“뭐가요?”
“그 연기놀이라는 거 말이에요. 어떻게 하는 거예요?”
“저도 배우고 싶습니다. 두 사람의 수련법.”
“수련법이라니,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닌데.”
“우리 누나 대단하죠? 우리 누나가 못하는 연기는 없어요!”
엣헴!
지한이 두 사람 앞에서 마음껏 지연을 자랑했다.
그동안 우리 누나 연기 잘 한다고 말해도 믿어주지 않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
한국에서는 드라마 2편을 연달아 하면서 누나의 연기 실력에 대해서 사람들이 드디어 주목하기 시작했지만 미국은 아직이었다.
더 많이, 더더더 많이!
사람들이 우리 누나 연기 실력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대단해요. 아직 어린데 벌써 연기 폭이 넓다니.”
“혼자서는 어려웠을 텐데. 아니. 지금 지한의 말을 들어보니 어릴 때도 아무렇지 않게 해낸 것 같군요. 어떻게 경험해보지 못한 다른 사람을 연기할 수 있는 거죠?”
“상상이죠.”
물론 돌아오기 전에 있었던 경험 덕도 있지만.
그런 건 이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없는 내용이니 상상력을 기르라고 할 수밖에.
“캐릭터를 상상하는 거죠. 어떤 성격이고,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 그러면 그 사람을 구상하기가 쉬워져요.”
“구상이요?”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케이티와 로드리오가 학생이 된 것처럼 지연의 말을 경청했다.
“성격이 제일 먼져죠. 성격을 토대로 하나씩 쌓아나가는 거예요. 왜 이런 성격이 됐을까.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 습관이나 버릇은 어떻게 될까. 같은?”
“성격. 토대. 습관. 버릇.”
“흐아아. 그런 걸 다 생각하면서 한단 말이에요?”
로드리오가 당장 필기라도 할 것처럼 지연의 말을 따라했고, 케이티는 머리에 쥐가 난 것처럼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로드리오. 아까 연기할 때 하나씩 다 디테일하게 설정하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걸 보니 연기를 꽤 좋아하나 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알려주는 보람이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또….”
“흠. 그렇군요.”
“우와.”
“나는 그럴 때 이렇게….”
지연이 팁을 늘어놓고 케이티와 로드리오는 그것을 뼈에 새길 것처럼 경청하며, 지한은 옆에서 자신의 경험을 풀어놓았다.
그렇게 4명의 배우들은 연기를 공통분모로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갔다.
161. 올가미
한 명의 주연의 자존감을 북돋아주기 위해 집으로 배우들을 초대했던 날 이후, 4명의 배우들의 사이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한! 연! 이번 주도 놀러가도 돼?:p]
[얼마든지.]
[그럼 저도 가겠습니다.]
[로드리오도 환영이야.]
그들은 서로 훈련이 없는 날에도 주기적으로 지연과 지한의 집에 모여서 연기 연습을 하기도 했다.
로드리오의 표현을 빌리자면 천재들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생긴 건 쿨하게 생긴 이탈리아계 미남인데 의외로 열혈파였다.
특히 동생이랑 붙는 씬에서 끈질기게 달라붙어 한 번 더 하자고 할 땐, 지한이도 주춤하며 물러설 정도였다.
“누나 메신저 봤어?”
“응. 처음에는 케이티 기 좀 살려줘서 리사를 어떻게 연기하는지 보려고 했는데 이제는 저 둘 너무 적극적이야.”
“이게 다 누나 때문이야.”
“나도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자. 우리 영화 잘될 거야.”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같이 연기를 주고받으면서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을 더 갈고닦게 되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좋은 점까지 흡수한 덕분에 초대한 날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달라졌다.
“그래도 꽤 재능있나 봐. 조금만 가르쳐줘도 금방 배우는 걸 보니까.”
“그러니까 오디션에 통과했겠지. 루카스 감독이 아무 배우나 쓰는 게 아니잖아.”
“하긴. 감독님 거장이었지. 그리고 까다롭고.”
“응. 까다롭다 하니까 생각났다. 우리 대본 또 수정됐대.”
“또? 이번엔 어디야?”
“에반이 물을 싫어하는 거에서 무서워하는 걸로.”
“아아. 감독님…!”
지연의 말에 지한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바뀐 부분은 누나랑 같이 분석하면 금방 적응할 수 있지만 이번이 벌써 23번째 수정이었다.
처음에는 세세한 부분의 디테일이 잡혀가는 건 좋다고 생각해서 받아들였는데 어째 뒤로 가면 갈수록 에반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든가, 좋아하는 색, 친구들에 대한 생각, 자주 입는 옷 같은 자잘한 것들까지 수정해버렸다.
“도대체 감독님이 생각하는 에반은 어떤 사람일까.”
“하이틴 드라마에 나올 것 같은 인기인인데 사연이 있는 사람.”
“솔직히 에반이 당근을 싫어하는 건 별로 의미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 그런데 그런 것까지 다 중요하게 생각하시나 봐.”
“다음에 감독님이랑 같이 할 때는 대본 수정은 최소한으로 해 달라고 할 거야.”
“그래도 안 한다는 소리는 안 하는구나.”
지연의 말에 지한이 입을 내밀고 누나의 시선을 피했다.
“대본…좋으니까. 그리고 연출도 내 취향이야.”
“그건 나도 그래.”
지연이 동생의 등을 토닥였다.
누나의 토닥임을 받으며 지한이는 생각했다.
솔직히 대본, 환경, 배우 전부 다 좋았다.
누나랑 같이하는 것도 좋고, 케이티랑 로드리오도 좋은 사람이었다.
같이 연기에 관해서 대화하는 사람은 크리스 외에는 잘 없었는데 같은 관심사가 있는 친구가 생긴 것 같아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