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망할 거 일찍 망하면 좋잖아?
“남 비서. 여기랑 여기 끝내버려.”
“알겠습니다.”
자, 그러면.
댐을 무너트려 볼까?
원래 댐은 아주 작은 균열 때문에 무너지는 법이다.
* * *
바쁘고 바쁜 연말이 지나고 고생했던 탑엔터 언니 오빠들이랑 인사를 나누고 나니 벌써 1월의 반이 지나버렸다.
2012년이 이렇게 빨리 찾아오다니.
처음 7살로 돌아갔을 때만 하더라도 언제 커서 망할 집구석을 벗어나나 생각했었는데 시간 참 빨랐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미국에 와 있다.
그동안 많이 벌긴 벌었는지 우리는 재작년 LA에 별장을 구했다.
지한이가 할리우드에서 촬영한 게 얼만데 조금 더 일찍 사야 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나도 우리가 미국에 별장을 살 만큼 돈을 벌 줄 몰랐는걸.
통장이 얼마나 넉넉하던지 생각보다 꽤 좋은 별장을 구했다.
므에에에옹
“어이구. 우리 모짜 왔어?”
미국 한번 오겠다고 장거리 비행에 갖가지 검사까지 한 모짜가 지연의 옆으로 걸어왔다.
우리의 축복 중 하나인지 나이가 들어도 건강했던 모짜랑 인절미도 장시간 비행과 검사에는 당해내지 못했다.
한동안 액체라도 된 것처럼 소파에 축 늘어져 있던 모짜였는데 이제 좀 움직일만한지 옆에 와서 치대고 있었다.
찹찹찹찹
거실 한쪽에서는 인절미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물도 마시고 간식도 잘 먹는 걸 보니 인절미도 이제 완전히 회복한 모양이다.
그때 2층에서 지한이가 내려왔다.
“찾았어?”
“응. 다행히 창고 한쪽에 있더라.”
물건을 찾으러 올라갔던 지한이 손에 바비큐 그릴을 들고 나왔다.
오늘 오기로 한 손님 덕분에 창고에 있던 걸 꺼내왔다.
“누나 오늘 같은 날 테라스 열면 춥지 않을까?”
“LA잖아. 이 정도면 충분하지.”
1월이라도 LA는 한국보다 따뜻했다.
바비큐 그릴 옆에 있으면 괜찮을 거다.
그래도 추우면 핫팩 좀 뜯어주지 뭐.
“슬슬 준비할까?”
“나도 도와줄게.”
“고맙게 도움을 받을게.”
“다른 사람은 괜찮다고 사양하던데.”
“그거야 지한이 넌 몸값이 아주 높은 대스타님이시니까.”
“그게 뭐야. 여기선 그냥 누나 동생이라고.”
“그래. 내 동생. 우선 이것 좀 씻어줄래?”
“푸흡. 알았어.”
약속 시간까지는 조금 남았지만 지금부터 준비해도 괜찮겠지.
미국식으로 준비해도 되지만 역시 한국의 맛을 보여주는 게 좋겠지?
냥냥!
컹!
“얘들아 절로 가 있어.”
“너희들 부엌에 들어오면 누나가 혼낸다?”
지한이 그렇게 말해도 지연이 지금 요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안 반려냥과 반려멍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진짜 얘들을 어쩌면 좋지?”
“어쩌겠어. 말 잘 들으면 먹을 것 좀 주지 뭐.”
떼어놓는 걸 포기한 지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갖가지 재료들을 씻고 다듬은 지한이 찬장에서 아이들 간식을 꺼냈다.
“지한아. 이제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애들이랑 가서 놀고 있어.”
“혼자 할 수 있겠어?”
“뭘. 시간은 넉넉하잖아? 오래 끓일 건 거의 없으니 이것만 하고 나도 거실로 나갈게.”
“알았어. 너희들 간식 먹자. 따라와.”
지한이가 모짜와 인절미를 데리고 거실로 향했다.
푹 끓여야 하는 요리를 불 위에 올려둔 지연이 손을 씻고 거실로 향했다.
잠시 동생과 함께 반려동물과 놀아준 두 사람은 신나게 놀고 벌러덩 널브러져서 자는 둘을 두고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가자 누군가가 아이들의 집 앞에 섰다.
삐익-
“왔나 보다.”
“내가 나가볼게.”
“같이 나가.”
지연이 손을 씻고 물기를 닦았다.
동생과 함께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자 커다란 꽃다발이 눈앞을 가렸다.
“새 작품 축하해.”
꽃다발 너머로 크리스가 환하게 웃었다.
“크리스!”
“크리스 씨.”
<바이러스>에서 지한과 함께 호흡을 맞췄던 배우가 오랜만에 아이들 집에 찾아왔다.
152. 경고
크리스를 테라스로 안내하고 준비했던 요리를 하나둘씩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미국에 와서도 평상을 포기할 수 없던 나는 한국에서 가져오지 못하는 대신 테라스에 넓은 테이블과 의자를 준비해 두었다.
“이야. 여긴 언제와도 멋지네.”
정원이 한눈에 보이는 테라스와 곳곳에 배치된 화분들.
푹신한 의자와 한쪽에서 구워지고 있는 바비큐.
기다란 테이블 위에 뷔페처럼 놓인 갖가지 음식들.
테라스에 앉아있는 크리스는 마치 조촐한 파티회장이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한국식 인사를 한 세 사람이 각자 젓가락과 포크를 들었다.
이미 자리를 잡고 앉은 모짜와 인절미는 각자 밥그릇에 머리를 처박고 허겁지겁 사료를 먹고 있었다.
“크리스가 마지막으로 왔을 때가 2007년이었나요?”
“아마 그때쯤일걸? 내가 슈퍼히어로가 되기 전이고, 네가 남우조연상을 받기 전이었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내 가슴밖에 안 오던 꼬맹이였는데.”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예요.”
가슴 언저리에 손날을 세워 가늠하는 크리스를 보고 지한이 부끄러워했다.
그때 내 동생 키가 얼마만 했더라.
일 년에 10cm 가까이 키가 크던 때여서 정확히 가늠이 안 되네.
대충 150~160 사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불과 몇 년 전이잖아. 너희들 진짜 빨리 컸구나.”
“원래 애들은 일찍 크는 법이죠. 남의 애는 더 빨리 크고요.”
“남의 애?”
“크리스가 애 낳아서 키워보면 알 거예요. 본인이 직접 키워보면 빨리 큰다는 소리 못 할걸요? 하루하루가 전쟁이라고요.”
“봐 주라. 나는 아직 연애를 더 하고 싶다고.”
처음 만났을 때고, 저번에 만났을 때도 크리스는 애인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알기로 애인이 꽤 자주 바뀌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전부 상대방이 크리스의 유명세만 보고 접근한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한이 넌 누가 고백하거나 그런 적 없어?”
“누나!?”
지연의 말에 지한이 배신감 어린 얼굴로 작게 경악했다.
“누나 나 사람 함부로 만나고 그러지 않아.”
“호오? 그 말은 누군가 고백한 적이 있다는 거구만.”
“그래그래. 연애할 때가 됐지.”
“크리스. 놀리지 마요.”
“연애 선배로서 조언을 해 주자면 누군가와 연애했던 경험도 전부 네 연기에 도움이 될 거야.”
끄덕끄덕
지한은 놀리는 것 같은 얼굴로 능글맞게 말하는 크리스보다 옆에서 같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지연이 더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누나도 연애는 안 하면서!
연상이 타입이라고 다 거절했잖아!
그런데 왜 누나보다 나이가 많은 형의 고백을 어린 애랑 사귈 수 없다며 거절했지?
물론 그때 누나는 미성년자였으니까 같은 또래가 아니면 나도 반대긴 했지만
어찌 됐든!
누나는 내 편 아니야!?
“내 동생. 삐졌니?”
“누가.”
“하하. 지한은 항상 지연에게 약하다니까. 너무 그러는 것도 안 좋아.”
“됐어요. 우린 이래도 잘 지냈다고요.”
“그래. 그렇긴 하지.”
진짜 나이 터울 얼마 안 나는 친남매치고는 둘은 싸움이 드물었다.
자신이 기억할 때만 해도 둘의 다툼 이유는
아픈데 말 안 하고 숨기기.
추운데 옷 얇게 입고 나가기.
호구 취급 당하고 오기.
정도였다.
‘진짜 사이가 좋네.’
크리스가 동생의 입에 고기를 집어 먹여주는 지연을 보며 생각했다.
됐다. 그냥 쟤들이 특이한 거지.
저런 거 보고 괜히 잘해보려고 동생한테 전화했다가 또 화만 낼 거다.
고개를 털어 잡념을 쫓아낸 크리스가 화제를 바꿨다.
“너희들 드디어 슈퍼히어로가 되는구나.”
“넹?”
“정확하게는 지한이만 슈퍼히어론데.”
“조금 더 일찍 됐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리벤져스에서 같이 활약했을지도 모르잖아?”
크리스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리벤져스 촬영이 이미 끝났댔지?
지금은 후반 작업 중일 거다.
CG가 안 들어간 장면이 거의 없을 테니 후반 작업도 길어지겠지.
내 기억에 의하면 언제였더라? 중간고사 끝나고 개봉이었던가?
동기들이 시험 스트레스를 풀겠다고 영화 보러 갔던 게 기억났다.
“내가 리벤져스가 되면 크리스가 리더예요?”
“나는 그냥 말만 리더지. 다들 스틸맨을 더 좋아하는걸.”
“그럼 이름뿐인 리더인 거예요?”
“그렇긴 하지만 너무 딱 잘라 말한 거 아니야? 나도 상처받는다고.”
“슈퍼 솔져인 캡틴이 이 정도 말에 상처받을 줄 몰랐네요.”
“나도 사람이라고. 슈퍼 솔져는 사람 아니냐. 너도 이제 슈퍼히어로가 되면 알겠지만 히어로들은 모두 완벽하지 않다고.”
그건 맞는 말이지.
남들보다 특출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사람이 아닌 건 아니니까.
아!
“미안하지만 크리스. 우린 드래곤이에요, 사람이 아니라고요.”
“윽.”
“그럼그럼. 미개한 인간과 종족이 다르다고요.”
“이거 미개한 인간이라서 미안하게 됐구만.”
크리스가 삐진 척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다 큰 어른이 애 앞에서 그러지 맙시다.
처음 봤을 때만 하더라도 다정한 교회 오빠 같은 인상이었는데 지금 보니까 명절에 조카들한테 장난치는 막내 삼촌 같은 느낌이었다.
얼굴 그렇게 쓸 거면 다른 사람한테 넘겨.
“뭐. 캡틴은 다른 인간들보다 나으니까 봐줄게요.”
“뭐어어?”
지연의 장난스러운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던 셋이 서서히 웃음을 멈췄다.
“아아. 매일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 너희들이 계속 미국에 있으면 안 돼? 그럼 이렇게 자주 놀러 올 텐데.”
“자주는 무슨. 크리스, 봉찬호 감독님 작품에 출연할지도 모른다면서요?”
“? 어디서 그 소식을 들었어? 비밀리에 만나고 있었는데.”
아, 아직 기사로 안 나왔나?
돌아오기 전에 워낙 유명해야 말이지.
한창 대학생 시절을 만끽하고 있을 2학년쯤엔 애들이 전부 리벤져스, 설국기차 얘기만 하고 다녔었지.
덕분에 영화를 잘 모르는 나도 어떻게 리벤져스의 캡틴이 설국기차에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만 미래 정보를 말해버리고 말았네.
“한국에서는 봉찬호 감독의 차기작에 주목하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지연의 말에 크리스가 잠시 기억을 되짚더니 이내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이 나도 어쩔 수 없지. 봉찬호 감독의 영화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뭔가 크리스가 우리나라 감독 영화에 출연한다고 하니 신기해요.”
“나도 할리우드에서 너 같은 어린애에 동양인이 잘 활동하고 있는 게 신기해. 사실 유명하잖아. 할리우드의 인종차별.”
그런 할리우드에서 웬만한 배우 못지않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두 아이들을 보면서 크리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천재란 바로 이 애들을 두고 하는 말일 거다.
특히 지연은 듣기로는 영화계 쪽에서도 꽤 주시하고 있던 가수였는데 이번에 연기까지 재능이 있다는 것이 알려져 다들 놀라고 있다고 했다.
지연의 캐스팅과 함께 발 빠르게 움직이는 퀸즈를 보면 이미 그쪽에서는 알고 있었던 거겠지.
뭐, 나도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 크리스, 봉찬호 감독님 영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곧 엄청 바빠지는 거 아니에요? 얼마 전에도 뭐 촬영했다고 한 거 같은데 그렇게 바쁘면서 우리한테 자주 놀러 오고 싶다고 한 거예요?”
“어쩔 수 없잖아. 불러주는 곳이 많을 때 열심히 일해야지. 마벨 시리즈를 하고 있는 동안 다른 걸 하지 않으면 이미지가 고정되어 버린다고.”
“그건 맞는 말이죠.”
배우로서 이미지가 고정된다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튼 내 출연은 긍정적으로 검토 중일 뿐이지 아직 확정 난 게 없으니까 너희들 걸 보여줘.”
“예?”
“이렇게 갑자기요?”
“드래곤이라니 엄청 멋있을 거 같잖아! 부자랑 이중인격 박사님이랑 살벌한 누님보다 훨씬 대단하지 않아?! 용이잖아 용! 히어로 중에 제일 강하겠지?”
크리스가 아이처럼 들떠 말했다.
용을 좋아하는 건 동서양을 막론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남자들이란 생물은 강하고 멋진 것에 눈이 돌아가는 건가?
아이들이 공룡을 좋아하는 이유가 아마 그런 거였던 거 같은데 크리스는 동심을 지켜온 훌륭한 어른이었구나.
“용! 용! 용!”
“아아. 그만해요!”
“다음부터는 크리스 부르지 말자.”
“앗 안 돼! 아니, 안 부르더라도 용은 보여주고 가!”
어우. 진짜.
내가 다음에 한 번 더 돌아가는 일이 있으면 절대 크리스를 집에 초대하지 않을 거다.
“크리스, 해 줄 테니까 그만해요. 이러다가는 누나가 진짜 앞으로 크리스 초대 안 할지도 몰라요.”
“그래.”
원하는 걸 얻어낸 크리스가 떼쓰는 걸 멈췄다.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던가.
“그럼 지한이가 보여줘.”
“응? 내가? 같이 안 하고?”
“나는 저번에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준 적 있잖아. 이번에는 지한이 차례.”
“알았어.”
누나의 말에 동생이 용이 될 준비를 했다.
어느새 다 먹은 접시들을 한쪽으로 치운 지연과 크리스가 진지하게 연기를 관람하기 위해서 자세를 바로 잡았다.
머릿속에 준비해 뒀던 에반 골드를 불러온 순간 지한이 천천히 눈을 떴다.
* * *
쉬이이익!!
어디선가 다급한 것 같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아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높고 빠르게 뱉은 울음소리에 무의식에 가라앉아 있던 지연의 의식이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왔다.
‘뭐지. 나는 분명 술에 취해 뻗은 크리스를 동생과 함께 손님방에 넣어두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의식이 깨어난 지연의 눈꺼풀이 서서히 들렸다.
눈을 뜨니 오랜만에 보는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신선세계의 풍경.
지연의 주위로 오색구름들이 평온하게 떠 있었다.
자신의 시간을 돌리고 선물까지 줬던 존재가 있는 곳이야.
“여긴 갑자기 왜….”
마지막으로 온 게 벌써 몇 년 전이었다.
동생이랑 무슨 일 있던 것도 아니고 선물로 준 능력에도 문제가 없었던 것 같은데 여긴 왜 온 거지?
지연이 여기 온 이유를 추리하고 있을 때 옆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