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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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아니 이게 무슨!

영훈이 뭔가 억울한 표정으로 눈썹을 모으자 애런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제가 한국어를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한 덕에 영훈의 영어 회화가 늘어서 다행이죠?”

“…애런. 한 대 때려도 됩니까?”

“하하하. 그럼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다들 푹 쉬시죠.”

영훈에게 한 대 맞기 전에 애런이 잽싸게 호텔 방을 나섰다.

저, 저, 저!

한 대 때렸어야 했는데!

“고 실장. 혹시 애들 연기 촬영한 거 있나?”

“넵! 있습니다.”

“좋아. 그럼 우리만 다시 보지. 애런에게는 보여주지 말게.”

“! 네, 사장님!”

지연과 지한의 연기를 못 봤다며 애런이 억울해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안 물어봤잖아?

영훈과 주민이 짓궂은 얼굴로 웃었다.

* * *

계약도 맺었겠다, 차기작이 할리우드 영화로 확정된 지한과 지연은 다음 촬영 때까지 용에 관한 공부와 반려동물과 함께 보내기를 실행하기로 했다.

Dragon E, 아니. 짧게 말해서 용제(龍帝)라고 부르자.

아무튼 이 용제의 세계관에서는 신화와 관련된 용들이 꽤 나온다.

알아두면 캐릭터에 대해서 더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런데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왜애애애애옹!!

“미안해.”

애앩

“미안하다.”

우리 집 반려냥님의 심기가 몹시 좋지 않은 것 같군.

미국에 다녀왔더니 잔뜩 토라져서 모짜가 등을 돌리고 있었다.

지연의 옆에는 지한이 인절미의 화를 풀어주려고 어화둥둥 하고 있었다.

하긴 발리 갔다 오면 다 같이 놀자고 했는데 발리에서 오자마자 거의 바로 미국에 다녀와야만 했다.

없는 동안 비서실 언니 오빠들이 돌봐주긴 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애초에 약속을 한 대상은 우리들이니까.

“저기 모짜야.”

탁, 탁

지연의 부름에 모짜는 대답도 없이 꼬리만 내리쳤다.

이거 단단히 삐진 모양이네.

등을 돌리고 있는 노오란 치즈 한 덩이를 보던 지연이 결심을 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 같이 미국 갈래?”

“누나?”

쫑긋!

왕!

지연의 말에 모짜뿐만 아니라 인절미도 솔깃한지 고개를 들었다.

“누나 그래도 돼?”

“될 걸? 이번에 사장님이 퀸즈랑 재계약하면서 더 좋은 조건으로 했다고 했어. 그러니까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같이 가면 좋겠다. 솔직히 촬영 스케줄 보면 비는 날도 꽤 있잖아. 그때마다 심심했는데. 그리고 애들 걱정도 되고.”

“그러니까 같이 가자는 거지. 이번에는 너랑 나 둘 다 같이 해외에서 촬영하는 거잖아.”

남매의 대화를 알아들은 모짜와 인절미가 기분이 슬슬 풀리는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게 보였다.

아, 진짜.

얘들 어쩌면 좋아.

기분이 바로 반영되는 정직한 꼬리를 가지고 있는 동물들을 보면서 지연과 지한이 웃었다.

“어디 보자.”

지연이 모짜를 안아들었다.

잘 먹고 잘 놀았는지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이 말랑말랑하고 보드러운 감촉.

품 안에서 녹아내릴 것 같은 느낌.

아차! 이거에 정신이 팔리면 안 되지.

“우리 모짜. 어디 아픈 데 없지?”

“언니가 보기에는 어디 아파 보이진 않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미국 가기 전에 병원 한번 갈까?”

냐악!?

모짜가 당황해서 지연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 모짜가 도망치지 않게 지연이 품에 꼭 안았다.

“안 돼. 너 우리랑 같이 가려면 검사 해야 해. 어허. 하여간 누굴 닮아서 병원 가는 걸 이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아니야.”

“알아. 내 동생은 검사도 잘 받지. 어디 아픈 데도 없고. 잘했어 잘했어.”

“그럼. 누구 동생인데.”

컹!

콧대를 높이는 지한을 보고 인절미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짖었다.

그런 인절미를 보고 지한이 말랑말랑한 양 볼을 잡고 늘렸다.

“모짜가 병원 갈 때 너도 같이 가서 검사 받아야 하는 거 알지?”

아왕왕!?

냐아앙….

깜짝 놀라는 인절미를 보고 모짜가 동정하는 시선을 보냈다.

난생 처음 가는 해외여행인데 애들이 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

“너희들 싫으면 바로 얘기해.”

지연의 말에 모짜와 인절미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

잠시 둘이 냥냥냥 왕왕왕 짖더니 남매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갈래?”

“너희만 괜찮으면 같이 가고 싶어.”

냥!

왕!

긍정의 대답을 한 아이들이 남매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온몸에 고양이와 개의 털이 묻었지만 지연이와 지한이는 아랑곳 않고 모짜와 인절미를 품에 안은 채 뒹굴었다.

밖에는 시린 겨울바람이 불었지만 아이들과 같이 있는 집안은 따뜻하기만 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한 첫 해외여행 겸 촬영에서 그들은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151. 각자의 움직임

LA에는 별장들이 많다.

그런 별장들 속에 유독 거대해 보이는 저택이 있었다.

중세 귀족들이 살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닌 것 같은 커다란 저택과 넓은 정원, 엄중한 경비.

한 폭의 그림 같은 곳이지만 내부에서는 겉과 달리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악!! 악!!!!!!”

쾅! 쨍그랑! 째쟁!!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비명을 지르는 여성의 목소리는 다 쉬어 갈라졌고, 그녀의 난동으로 인해 방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한동안 난동을 부리던 그녀는 더 이상 부술 것이 없자 행동을 멈추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하악, 하악.”

고운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엉망이 되었고, 돈 들여 관리받은 손톱은 난동을 부리느라 큐빅이 떨어지고 칠이 벗겨져 있었다.

이 저택의 주인인 왕웨이의 금지옥엽이자 중국의 떠오르는 여배우인 왕쉬엔은 며칠 전에 있었던 굴욕을 잊을 수 없었다.

“그 계집애…!”

자신을 보고 힘내라고 말하던 지연이 떠올랐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얼굴로 동정도, 분노도, 한심함도 담기지 않은 무감정한 표정을 짓던 그 얼굴이 떠오르자 왕쉬엔은 일평생 겪지 못한 감정으로 치를 떨었다.

그것은 수치심이었다.

그것은 분노였다.

그것은 질투였다.

“내가 더 완벽해. 내가 더 아름다워. 내가 더 아이린에 잘 어울린다고.”

그때 말하지 못했던 변명이 왕쉬엔의 입에서 계속 흘러나왔다.

‘…지금 보여준 것만 봐서는 그저 예쁘고 오만한 상류층 자제 정도로밖에 안 느껴지는군요. 그저 우아하고 누군가를 경멸하는 것만 보여줘서는 절대 다른 존재를 연기할 수 없습니다.’

머릿속에서 루카스 감독이 했던 말이 계속해서 재생되었다.

이제껏 누군가가 자신의 연기를 보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적 있었던가.

연기 선생도 이럴 땐 어떻게 표현하면 되는지 어떤 얼굴을 해야 화면에 예쁘게 보이는지만 가르쳐 줬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은 중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배우가 되었다.

“나도 할 수 있어. 걔가 보여줬던 것처럼 인간 같지 않은 존재를 연기할 수 있다고. 그저 조금 무뚝뚝한 얼굴로 대사 좀 했다고 아이린 역을 맡다니. 이건 분명 뭔가가 있는 거야.”

부정과 분노를 오가며 왕쉬엔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찌나 주먹을 꼭 쥐었던지 손바닥에 붉은 초승달이 새겨지고 있었지만 왕쉬엔은 난생처음 겪는 패배에 어쩔 줄 몰랐다.

결국 왕쉬엔은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아악!!!!!!! 악!!!!!!”

그녀의 방 밖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은 또다시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에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 * *

“…그래서 지금 아가씨께서는 LA에 있는 별장에서 심신을 다스리고 있으십니다.”

보고를 마친 리쯔웨이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기다렸다.

지금 보고를 받은 이는 자신의 뜻대로 일이 되지 않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중국에서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보고받은 이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의 관자놀이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쉬엔은 실패를 겪은 게 처음이라 힘들겠지.

“제가 잘 보필하겠습니다.”

-그래야지.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듯한 그의 말에 리쯔웨이의 허리가 더욱 숙여졌다.

-그나저나 황룡과 백룡. 둘 모두를 뺏기다니. 황룡은 황제의 상징이다. 내겐 아들이 없고 오지한을 밀어낼 배우를 미리 준비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백룡까지 빼앗기다니. 그건 안 돼.

용 중에서도 황룡과 백룡은 더더욱 귀하게 여겨지는 용이었다.

황제를 상징하는 황룡

천제를 모시는 백룡

모두 황제와 관련이 있는 용들이었다.

그런 걸 중국의 속국인 한국인에게 뺏기다니.

누가 준 적도 없건만 왕쉬엔의 아버지, 왕웨이는 그 배역을 소국에게 뺏겼다고 생각했다.

뼛속까지 중화사상에 물들어 있는 왕웨이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투자 건 그대로 진행해.

“예? 이대로 진행하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래야 우리가 검열을 할 수 있지 않겠나.

“아. 알겠습니다.”

검열이야말로 중국이 자국민들을 통제하는 수단 중 하나.

이것으로 얼마나 많은 인민들의 생각을 원하는 대로 이끌었던가.

-그리고…만약이라는 게 있을 수 있으니까.

“만약…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러니 쉬엔에게 언제든지 배역에 들어갈 수 있게 준비해 두라고 말해.

“알겠습니다.”

왕웨이가 저렇게 말한다면 그 만약은 꼭 이루어질 것이다.

그는 기회를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직접 만드는 자였으므로.

리쯔웨이는 화면 너머에 있으면서도 대인의 기세를 풍기는 왕웨이를 보고 마음 깊이 새겨진 복종을 다시금 되새겼다.

* * *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와 가수를 두고 있는 탑엔터.

그 탑엔터의 꼭대기는 오늘도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연말에 안 바쁜 곳은 없지만 다른 업계보다 몇 배는 더 바쁜 연예계.

덕분에 탑엔터는 오늘도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지연과 지한의 사진. 사랑하는 아내와의 결혼사진. 그리고 아직 어린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사진까지.

주민의 책상은 넓고 기다란 만큼 곳곳에 사진이 놓여 있었다.

겹겹이 쌓인 결재 파일이 바쁜 연말을 대변하는 듯했다.

“저쪽에서는 투자를 그대로 진행해서 시나리오에 간섭하려고 하겠지.”

“저희 비서팀에서도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고 나왔습니다. 게다가 지한이와 지연이는 각각 골드 드래곤과 화이트 드래곤입니다. 용이라면 환장하는 중국인데 무려 황룡과 백룡입니다. 저쪽에서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하여간 용에 미친놈들 같으니라고.”

좋아하는 숫자는 8.

좋아하는 색은 붉은색.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깡패짓을 일삼는 미친 국가.

그것이 바로 중국이었다.

지들 마음에 안 든다고 제재하는 건 일상이었다.

값싼 인건비와 거대한 시장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인 중국은 세계 이곳저곳에 투자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영화산업이었다.

“가뜩이나 이런저런 영화에 투자하면서 시나리오에 간섭하던 이들입니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영화가 나왔는데 쉽게 포기할 리 없습니다.”

“그래. 그놈의 중국 자본이 문제지. 그놈들 돈만 들어가면 뭔 놈의 영화가 뜬금없이 쿵푸를 보여주거나 중국 절경이 나오거나 해. 중국인 이외의 동양인의 이미지는 또 어떻고.”

그놈들이 다른 아시아인에 대한 이미지는 다 망쳐놓았다.

도대체 시나리오를 보는 눈이 있긴 한 건지.

시나리오도 모르는 것들이 손을 대서 영화를 망쳐놓기 일쑤였다.

독이 든 성배.

언젠가 지연이 표현했던 말 그대로였다.

“처리는?”

“계약할 때 이미 투자에 대해서도 말해 놓았습니다. 그쪽에서도 아무런 조건 없는 투자를 환영하는 것 같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투자한 돈보다 그쪽에서 돈이 더 많으면? 애초에 투자를 하는 것 자체가 간섭을 허용하는 행위가 된다.”

“사장님께서 투자하신 돈이 상당히 불어나서 저희도 투자금으로는 크게 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아예 손도 못 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남 비서의 말에 주민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래. 자본이라면 이쪽도 밀리지 않는다.

‘여기 잘될 거예요.’

‘사장님. 나중에는 우리 손 안에 작은 컴퓨터를 들고 다닐 거예요.’

‘여기 망할 건데.’

‘사장님 당분간은 어디 투자하시면 안 돼요. 미국에서 큰일이 있을지도 몰라요.’

‘음. 여긴 뭐더라?’

‘전기차, 드론, AI, VR. 또 뭐였지? 4차 산업혁명 주력 산업이.’

지연이 흘려가면서 하던 말.

밥먹으면서, TV를 보면서 무심코 내뱉은 말.

일하고 있을 때 옆에서 힐끔 보고 중얼거린 말.

그 모든 것을 놓치지 않았다.

‘중국은 어마어마한 시장을 가지고 있단다. 인건비도 싸지. 다들 중국에 공장을 만드는 걸 고려하고 있어. 지연아, 넌 어떻게 생각해?’

‘하지만 믿을 수 없잖아요. 마음만 먹으면 자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기업이라도 망하게 만들어 버리니까요.’

그쪽에서 일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사업과 정책을 이해가 아닌 감정에 따라서 정하다니.

이거 원 주식시장 증시보다 더 예측하기 어렵지 않은가.

“왕웨이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투자회사 이름이 뭐라고 했지?

“WW인베스트먼트입니다.”

“우선 그쪽이 움직일 수 없게 발부터 묶어볼까.”

주민이 그 말을 하면서 살벌하게 눈을 빛냈다.

“졌으면 곱게 물러날 것이지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들어주는 것도 신물이 난단 말이지.”

남 비서가 조사해온 서류를 살폈다.

주민이 책상을 두드렸다.

왕웨이의 비자금을 마르게 하는 게 좋겠지.

투자회사를 망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간단했다.

“투자가 망하면 되는 거지.”

지연이 해 준 얘기 중에 써먹을 만한 것이 있었다.

‘여기 망할 건데.’

그중 일부가 WW인베스트먼트가 투자했다고 한 목록에 있었다.

언제 망할지 모르지만 그 시기를 미리 당긴다고 해도 상관없는 거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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