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 (156/296)

“걱정 마.”

“지연아 물 좀 마실래?”

“고마워, 오빠.”

이쪽도 신경 쓰라고!

자신은 아예 안중에 두지 않고 자신의 연기를 준비하는 지연을 본 왕쉬엔이 분한 듯 이를 악물었다.

“이제 지연의 차례군. 좋은 연기 보여주세요.”

“네. 감독.”

자신을 선택한 이가 루카스 감독이라고 들었다.

저 재수 없는 대륙 배우에게 한 방 먹여줘야지.

지연이 중앙으로 걸어갔다.

왕쉬엔의 옆을 지나치면서도 지연은 그녀에게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봐주겠어!’

심통이 난 왕쉬엔이 팔짱을 끼고 가운데로 걸어나간 지연을 지켜봤다.

“후우.”

연기에 들어가기 전 지연이 묵직한 호흡을 뱉었다.

머릿속으로 아이린을 떠올렸다.

용이란,

하늘과 땅, 바다를 오가며 이 세계를 지켜보며 땅 위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을 지켜보는 존재.

세상을 굽이 살피며 인간에게 지혜를 전해주던 위대한 존재.

그 옛날 인간들은 용을 보고 신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용이다.’

지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흠칫!

그녀와 눈이 마주친 자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저 내려다보는 연기였는데, 연기가 분명한데

마치 지연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니, 저걸 사람이라고 하는 게 맞을까?

“인간, 용케 날 찾아왔군.”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모두 갑자기 몸이 무거워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짓눌리는 것 같다.

등골이 오싹했다.

“내 앞에 서 있는 용기를 봐서 들어주지. 날 찾아온 이유는?”

잠시 인형처럼 가만히 있던 지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지금 내 앞에서 감히 내 동생의 이름을 입에 올린 건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지만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의 기분이 좋지 않다고.

꿀꺽

루카스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녀의 기분을 반영한 듯 회의실 안에 있는 공기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의 심기를 상하게 한 죄로 아이린의 앞에 있는 존재는 그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야했다.

“그만!”

루카스 감독의 외침에 아이린이 지연으로 돌아왔다.

“그만하면 충분합니다. 과연 프랑수와의 광고는 허투루 찍은 게 아니군요.”

“저도 잘 봤습니다. 다만 그때 보여줬던 여신과는 다르게 조금 더 무자비한 모습이군요. 저희가 생각하는 용의 모습이 바로 그런 겁니다.”

“에이몬드, 잘 봤군.”

자신이 상상했던 이미지 그대로를 재연할 줄이야.

그 광고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

아무리 CG가 발전해도, 아무리 촬영장비와 기술이 새로 개발된다고 하더라도 시나리오를 현실에 재현하는 것은 배우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지연은 자신의 상상 속에 있는 캐릭터를 충분히 현실로 만들어 줄 수 있는 훌륭한 배우였다.

“고생해준 두 배우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이린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 결과는 말 안 해도 아시겠죠? 여기 있는 지연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아이린에 잘 어울리는 존재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칫.”

왕쉬엔이 작게 혀를 찼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그녀의 팔은 지연이 보여준 연기에 돋아난 소름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으니까.

“왕쉬엔 씨가 보여준 아이린 역시 대단했습니다. 우아하고 아름답고 오만했죠.”

결과가 나왔어도 루카스의 칭찬은 왕쉬엔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를 드러내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지금 보여준 것만 봐서는 그저 예쁘고 오만한 상류층 자제 정도로밖에 안 느껴지는군요. 그저 우아하고 누군가를 경멸하는 것만 보여줘서는 절대 다른 존재를 연기할 수 없습니다.”

“…!”

왕쉬엔이 반박하려고 입을 벙긋거렸지만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자존심 강한 그녀라고 할지라도 이 정도로 확실한 차이를 보고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지연은 ‘인간 같지 않은 존재’를 잘 연기해주었습니다. 덕분에 인간의 외형을 한 용의 존재를 두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이는 영화에도 도움이 되겠죠. 감사합니다.”

짝, 짝짝짝

짝짝짝짝짝

루카스 감독의 말을 기점으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이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연의 압승이었다.

“이겼네요.”

“당연하지.”

애런의 말에 주민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 철없는 아가씨는 자신이 충분히 ‘인간 같지 않은 존재’를 연기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지연이 보여준 것처럼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해 주는 존재감.

그건 포식자에게 느끼는 피식자의 본능이었다.

멋진 연기를 보여준 지연에게 루카스가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아이린 화이트’”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루카스 감독님.”

150. 따뜻한 겨울여행

오지한과 오지연과의 계약은 무사히 끝났다.

애런은 오늘 있었던 일로 마벨에게서 유리한 계약을 따낼 수 있었고, 마벨 측은 다른 배우들보다 더 유리한 계약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거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군.”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게.”

“어쩔 수 없지. 다들 중국 시장에 눈이 돌아가 있으니까.”

“하여간 사업하는 것들이란.”

“영화 찍는 건 돈이야.”

“하지만 흥행을 보장하는 건 이야기의 힘이지.”

오래된 친구 사이인 두 사람이 각자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서로를 째려봤다.

그렇게 잠시 대치하는 것 같던 두 사람이 이내 표정을 풀고 입가에 웃음을 걸었다.

“하여간 자네한테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

“그런 나한테 시나리오 좀 달라고 무릎 꿇고 빌던 건 누구더라?”

“내가 언제 무릎까지 꿇었다고.”

“작업실에 맨날 전화 걸었으면서.”

“자네가 작품 안 한 지 벌써 3년이야. 어쩔 수 없잖나.”

“작품이란 게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

티격태던 두 사람이 어깨를 들썩였다.

잠시 대화가 뚝 끊겼다.

두 사람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회의실에 앉아 있던 두 배우를 떠올렸다.

‘오지한.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그런 배우가 나올 줄이야.’

‘이번에 촬영하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지연은 뜰 거야. 그 전에 미리 점찍어 놔야겠군.’

각자 생각을 하던 두 사람의 머릿속에 조금 전 봤던 장면이 계속해서 재생됐다.

누가 오래된 친구 아니랄까 봐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아까 봤,”

“조금 전,”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피식 웃은 둘이 말했다.

“자네 먼저 말해.”

“너 먼저 말해보지?”

또다시 신경전을 하려던 것도 잠시 에이몬드가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들었다.

“우리끼리 이래서는 끝도 없겠군.”

“내 말이 그 말이야.”

“좋아. 이번에는 나 먼저 말하지.”

“어디 할리우드에서 제일 유명한 감독님의 말을 들어볼까?”

휴게소에서 마벨의 중요한 책임자와 할리우드에서 손꼽히는 감독이 마주 보고 앉았다.

“그동안 시나리오를 쓰면서 고민한 적이 많았지. 과연 이 시나리오를 현실로 불러줄 이가 나타날지에 대해서.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있었지. 무려 2명이나!”

“그래도 조금 더 찾아보지. 아시아인은 많지 않은가.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동양계 배우들도 많지. 2명밖에 없다고 단정하기에는 배우들이 꽤 많지.

“어찌 됐든 내 눈에 차는 사람은 둘뿐이야. 자네도 보고 감탄했으면서 토 달지 말게.”

“뭐어.”

루카스의 말에 에이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리우드에서 활약하는 동양계 배우들이 있긴 했지만 아이린과 에반 역에 그 둘이 잘 어울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원래라면 백룡인 아이린과 황룡인 에반은 남매사이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건 자네가 둘을 보고 바꾼 건가?”

“맞아. 덕분에 캐릭터가 더욱 탄탄해졌지. 과거 사건에 대한 것도 더 짜임새 있게 쓸 수 있었어.”

“뮤즈가 따로 없군. 어찌 됐든 좋은 의견이었어. 코믹스 쪽에서도 자네 의견이 마음에 든 모양이더군. 캐릭터 설정을 수정하기로 했어.”

시나리오가 먼저 만들어지고 그 이후에 코믹스에 반영되다니.

그런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그만큼 루카스의 시나리오가 대단한 거겠지.

3년 동안 아무런 작품을 만들지 않아도 모두가 그를 기다렸던 건 다 그의 능력 덕분이었다.

“솔직히 아까 나도 놀랐어. 자네가 말한 ‘인간 같지 않은 존재’라는 막연한 느낌을 그렇게 잘 표현할 줄 몰랐어. 사실 막연하게 상상만 했었는데 두 눈으로 직접 그걸 보니 확실히 다르더군. 그런 걸 보고 아마 용이라고 하겠지.”

“지한은 이미 오래전부터 검증된 배우니까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지연은 영상을 보고 확인했지. 자네 프랑수와 광고랑 인어 영상 못 봤나?”

“봤지. 그 오지한이 나왔으니까. 다만 보면서도 약간의 CG는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오산이었군.”

“자네는 하여간 그게 문제야.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믿어.”

“직접 본 거 말고는 되도록 믿지 않는 주의라서.”

“고집쟁이.”

“자네야말로.”

에이몬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오랜만에 친구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보기 좋았다.

나이가 들고 유명해지면서 친구는 점점 과한 명성을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달라붙는 것들이 오죽 많았어야지.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글을 영상으로 제작하는 걸 즐거워하던 친구는 이것저것 간섭하는 것들에 싫증을 내고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다시 시나리오를 쓴다고 한 게 재작년.

‘장래가 기대되는 스타’에 나란히 걸린 지연과 오지한의 사진을 본 이후였다.

“자네의 뮤즈가 그들인가?”

“그래. 보고 있으면 머릿속에 수십 가지의 상상이 떠올라. 그런데 그 어떤 상상이라도 그들이라면 그걸 밖으로 꺼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네 선택이 맞았어. 그들이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아직도 눈앞에 지연이 보여준 아이린이 선명했다.

용이 있다면 그런 존재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CG까지 더해진다면 어떻게 될까.

음향은? 의상은? 배경은?

당장 상상했던 것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자네 어서 빨리 제작 준비 해.”

“아니 시나리오 가져온 지 얼마나 됐다고.”

“가장 중요한 배역이 다 캐스팅되지 않았나.”

“둘밖에 못 했어.”

“에잉. 안 하고 뭐 했어.”

“나머진 너희가 캐스팅한다며!”

또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이었지만 둘 모두 ‘Dragon Emperor’를 빨리 제작하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3개월 안에 촬영 들어갈 수 있겠어?”

“나는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어.”

“그 말. 두고 보지.”

두 사람이 손을 맞잡았다.

* * *

“이번 기회에 퀸즈를 다시 봤습니다.”

“당연히 좋은 의미겠죠, 주민?”

“그렇지 않았다면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일 따윈 없었을 겁니다.”

의도치 않은 불청객이 끼어들었지만 덕분에 마벨과의 계약도, 탑엔터와의 재계약도 모두 무사히 끝났다.

적절한 시기에 퀸즈의 힘을 보여준 덕분일까.

둘 사이의 계약은 서로가 득이 되는 쪽으로 마무리되었다.

애런이 빙그레 웃으며 주민의 뒤를 따라 호텔방으로 들어갔다.

계약을 잘 했어도 자신이 맡은 배우에게 눈도장은 찍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음?”

“이런 제가 너무 늦게 온 모양이죠?”

“아직 저녁인데.”

자신들이 새로 계약을 마무리하는 사이 할리우드를 관광한다고 한 것 같은데.

그 잠깐 사이에 지쳤는지 아이들이 소파에 널브러져 자고 있는 게 보였다.

“아, 사장님 오셨습니까?”

담요를 들고 나오던 영훈이 거실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그래. 고 실장도 애들이랑 같이 관광하고 오느라 수고가 많았어. 아직 비행기 타고 오느라 여독도 다 안 풀렸는데 미팅에, 관광에 힘들었겠군.”

“아닙니다. 애들이 더 고생했죠.”

그렇게 말한 영훈의 얼굴이 퀭했다.

상사 앞에서는 힘들어도 힘들다고 해선 안 되는 법.

사장님도 오셨으니 애들을 깨워 씻긴 다음에 침대에 눕혀야겠다.

영훈이 아이들을 흔들었다.

“얘들아. 씻고 자야지.”

“으응.”

“…이따가.”

“쿠울.”

녹초가 된 아이들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영훈이 난처해하면서 계속 애들을 흔들자 주민이 말렸다.

“됐어. 자게 내버려 둬.”

주민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아이들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오늘 힘들었나 보군. 그런데 체력이 좋은 지연이랑 지한이도 뻗을 줄 몰랐는데.”

“아아. 그거요.”

주민의 말에 영훈이 뭔가 사정이 있는 듯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었다.

그 행동에 주민과 애런의 시선이 영훈에게도 향했다.

대답을 독촉하는 시선에 영훈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사장님 조카분, 도진 군이 아까 지연이 연기를 보고 감명을 받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막 짧게 시나리오를 짜더니 연기해 달라고 보채, 가 아니라. 부탁해서 지연이랑 지한이가 도진 군 시나리오에 맞춰 연기하고 나서 저렇게 퍼졌습니다.”

“이 녀석이.”

“과연 주민의 조카답네요.”

애런이 웃는 낯으로 그렇게 말하자 주민이 잠시 그를 찌릿 째려봤다.

제 조카 때문에 애들이 여독도 채 풀지 못하고 지쳐 퍼졌다는 소리에 주민이 골치가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그럼 이 테이블에 있는 게 도진의 시나리오인가요?”

“맞아요. 지연이 노트 몇 장 찢어서 급하게 쓴 시나리오예요.”

“한글이군요.”

“네. 아! 무슨 내용이냐면,”

“‘옛날옛날에. 인간과 용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애런?! 한글 읽을 줄 알아요!?”

“한글은 또 언제 배웠지?”

능숙하게 한글을 읽는 애런의 모습에 두 사람이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둘의 시선을 느낀 애런이 왜 쳐다보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유능한 에이전트라면 외국어는 필수죠.”

“아니 그렇긴 한데 그, 언제부터 배웠어요?”

“지한과 계약했을 때부터죠.”

그때가 언젠데!

왜 이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거야!

“아니 그럼 그동안은 왜 한 번도 안 썼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