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중국에서 어떤 취급을 받으며 자랐기에 남의 나라 와서 저딴 식으로 행동하는 걸까.
철부지 소녀가 따로 없네.
인터넷상에서도 중국인의 뻔뻔한 낯짝에 대해서 성토하는 글이 몇십 건씩 올라오더니 아무래도 중국인 종특인 모양이다.
아이린 화이트가 동양의 용을 상징화한 캐릭터라 동양인 여성으로 설정이 잡힌 게 자신을 보고 만든 거라고?
감독이 널 어떻게 알고 널 콕 찍어서 캐릭터를 만들었겠어.
그랬으면 진작 널 아이린 화이트 역에 캐스팅했겠지.
“원래 있는 집 자식은 다 저렇게 뻔뻔하냐?”
“도진이 형도 있는 집 자식이잖아.”
“에엑? 나는 저렇게 안 뻔뻔해.”
저런 애랑 비교하면 도진이는 정말 양반이지.
동생들을 보던 지연이 고개를 돌려 애런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돼요?”
“글쎄요. 아직 감독이 안 왔으니까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순 없죠. 우리가 못 참고 나가길 바라는 걸지도 모릅니다.”
저렇게 나오는 걸 보니까 왕쉬엔인가 뭔가 하는 여자를 밀어붙여서 내가 자발적으로 포기하게 하려는 거였나.
사람을 불러놓고 이 정도로 무시하면서 갑자기 끼어든 배우를 밀어주는 모습을 보여주면 기분 나쁘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도 될 정도긴 하지.
지연이 맞은편에서 계속 자신이 출연한 작품을 언급하며 PR을 하고 있는 왕쉬엔을 보았다.
“애런, 쟤 연기 잘 해요?”
“그럴 리가요. 중국에서 찍은 드라마만 3편, 영화가 5편 찍었다던데 들어본 적 없습니다.”
“지한이 넌 쟤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어?”
“모르겠는데. 우리 회사는 중국 진출에 대해서 소극적인 편이잖아.”
알지. 왜 모르겠어.
그게 다 내가 일찍이 사장님한테 귓속말한 덕분인걸.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중국은 신뢰할 수 없는 곳이라고 말해줬지.
“그래도 지연이 너랑 같이 아시아 대표 미녀 스타 목록에 있는데.”
옆에서 스마트폰으로 검색하고 있던 영훈이 왕쉬엔에 대한 정보를 찾아서 말해줬다.
그 말을 들은 지한이랑 도진이 불쾌한 얼굴로 반박했다.
“형. 저딴 얼굴이랑 지연이 누나 얼굴이랑 비교하는 거야?”
“너무해. 어떻게 저런 성형미인이랑 우리 누나를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있어. 미나 누나한테 다 이를 거야.”
“왜 나한테 그래. SNS에 올라와 있는 거 찾아본 건데.”
괜히 욕을 먹은 영훈이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튼 갑자기 찾아와서 난동을 부리는 저 중국인 여자와 곤란한 얼굴을 하면서도 말릴 생각을 하지 않는 마벨 측 인물들.
맞은편에서 그 모든 광경을 보고 있는 우리들.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기분이다.
여기 오면서도 내가 반드시 캐스팅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무조건 이 배역 따내야겠어.
저런 애랑 내 동생이 같이 촬영하게 할 수 없지.
“애런 감독 측에서는 절 꼭 캐스팅하고 싶다고 했었죠?”
“맞습니다. 마벨 측에서도 딱 잘라서 말하지 못하는 걸 보니 감독이 캐스팅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게 사실인 모양입니다.”
애런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나섰다.
“이 시나리오를 쓴 사람은 루카스 감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감독이 주인공 에반 골드와 아이린 화이트에 대해서는 오지한과 지연을 반드시 지명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어떻게!”
“이래 봬도 퀸즈 에이전시 소속이라.”
“퀸즈?!”
“그 CIA보다 더하다는 퀸즈?”
도대체 할리우드에서 퀸즈의 이름이 어떤 식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일까.
어쩌다가 CIA보다 더하다는 악명을 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제작사마다 스파이라도 심는 거야?
지연과 지한이 애런을 묘한 눈으로 보고 있을 때 그는 당당한 태도로 마벨 측을 몰아세웠다.
“루카스 감독은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제작사와 계약 조건에 에반과 아이린의 캐스팅은 전적으로 감독의 권한으로 명시되어 있을 텐데요.”
“….”
와. 이 사람들 봐라.
그럼 지금 캐스팅 권한도 없으면서 쟤를 이 자리에 부른 거야?
“지금 당장 루카스 감독을 보고 싶습니다.”
“그건.”
“이미 약속 시간이 꽤 지나지 않았나요? 혹시 감독에게 미팅시간을 잘못 알려준 건 아니겠죠?”
“….”
와아. 진짠가 봐.
뻔뻔한 놈들 봐라.
치사하다 정말.
“아니면 제가 직접 연락드려도 됩니다만.”
비즈니스 미소가 걸려 있는 애런의 얼굴에 기가 죽은 저쪽에서 감독을 부르겠다고 뛰어갔다.
오오. 애런.
훌륭한 협박술이었어.
* * *
“크흠!”
연락을 받고 온 루카스 감독이 불편한 얼굴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마벨 측을 쳐다봤다.
아무리 미국에서 제작사가 갑이고 영화감독이 을이라지만 루카스 정도 되는 감독이라면 말이 다르지.
그는 어느 제작사를 가도 환영받는 스타 감독이었다.
하물며 디지니와 마벨 스튜디오 상부에게 히어로 프로젝트를 하나 맡길 정도로 신뢰받는 감독.
그러니 시나리오 각색과 함께 캐스팅 권한까지 계약서로 명시 받은 거겠지.
“자, 이제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겠군요.”
마벨 측에서 나온 인물들이 애런을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그러게 누가 투자랑 관객 수에 눈이 멀어서 감독 몰래 일을 일으키래?
“안녕하세요, 왕쉬엔이라고 해요.”
“와….”
“배우하려면 저 정도는 해야 하는 거야?”
“저 정도로 뻔뻔한 거면 배우 말고 다른 걸 해도 될걸.”
“손님으로는 절대 받고 싶지 않은 타입이야.”
차례대로 도진, 지한, 지연 순으로 이어지는 말에 나란히 앉아있던 이들이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분명 여기 있는 두 사람을 캐스팅한다고 했을 텐데. 지금 이 자리를 만든 건 다 이유가 있는 거겠죠? 론?”
“감독, 캐스팅에 대해서 뭐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건 무슨 상황입니까.”
“검증되지 않은 배우를 쓰는 데 리스크가 있어서요. 여기 있는 왕쉬엔은 중국에서도 작품을 8개나 한 베테랑 배우입니다.”
와. 진짜.
저렇게까지 편들어 주고 싶냐?
그놈의 중국 자본이 뭐길래.
“그 문제라면 이쪽도 할 말이 있군요. 최근 지연이 출연한 작품을 보셨는지? 성적은 아십니까?”
“작품? 지연이라면 가수 아닙니까? 연기를 한 적이 있습니까?”
그래도 그쪽에서 캐스팅 제의까지 넣었으면서 너무한 거 아니야?
아니면 한국이란 작은 나라에서 낸 결과 따위는 무시해도 좋다 이건가?
모처럼 지한이랑 같이 들어온 제의고, 할리우드에서도 유명한 제작사라고 해서 긴장했는데 이딴 놈들이라니.
긴장한 게 다 아깝다.
“당신들은 래먼쇼도 안 봤나 보군요. 최근에 유명해진 동영상을 보긴 한 건지? 그걸 봤다면 여기서 내 캐스팅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았을 거요.”
화가 난 것 같은 감독의 반응에 왕쉬엔도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는 게 보였다.
그러나 눈빛을 보건대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루카스가 결단을 내렸다.
“그쪽에서 그렇게 자신하니까 어디 한번 두고 봅시다. 당신들이 주장하는 저 배우와 내가 캐스팅한 배우. 둘 중 누가 더 아이린에 적합한지.”
149. 인간 같지 않은 존재
루카스 감독의 말에 상대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아마 연기 대결을 한 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정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이거 딱 봐도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 맞지?
내가 이래 봬도 좀 꼬인 사람이라서.
순순히 배역을 넘길 생각은 없었는데 저쪽에서 저렇게 나오니 전투의지가 더더욱 불타올랐다.
“제 시나리오의 주인공들은 인외의 존재들입니다. 아이린 역시 용이라는 건 알고 계시겠죠? 제 시험은 간단합니다. 지금 내 앞에서 ‘인간 같지 않은 존재’를 연기해 주십시오.”
감독의 요구는 합당했다.
용은 신화 속 존재.
그런 존재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감독이 말한 대로 ‘인간 같지 않은 존재’를 연기해야 했다.
“누가 먼저 하시겠습니까?”
“저는 나중에 할게요.”
“이런, 이쪽에서도 나중에 하려고 했는데. 먼저 했다가는 제대로 된 연기를 못 보여 줄 것 같아서 말이지.”
잠자코 있던 사장님이 웃는 얼굴로 도발을 시전했다.
도발은 효과적이었다!
왕쉬엔인지 뭔지 하는 여자가 발끈해서 테이블을 내리쳤으니까.
“그쪽이야말로. 내 연기를 보고 쫄아서 도망가지나 말라고!”
아이고 왜 그리 화를 내는지 모르겠네.
“힘내세요.”
지연이 웃는 얼굴로 받아쳤다.
“우와. 지연이 누나도 한 성깔 하는구나.”
“나는 사장님도 무서운데.”
“쉿. 들리겠다.”
“하하하. 이거 덕분에 지연이 전력을 다할 모양입니다.”
지한과 도진, 영훈 세 사람이 의심스러운 눈길로 애런을 돌아봤다.
설마 이걸 계획한 건 아니겠지?
아까 저쪽에서 CIA 어쩌구저쩌구 하던데 진짜 일부러면 어떡하지?
셋이 머리를 맞대고 속닥이고 있을 때 루카스 감독이 손뼉을 마주 쳤다.
짝!
“그럼 순서는 뽑기로 정하고, 다들 따라오지. 론. 카메라를 준비해 주게. 두 배우 모두 실전이라고 생각하고 임해주길 부탁드립니다.”
“네, 감독님.”
“알겠습니다.”
“그럼 전 카메라 가져 오겠습니다.”
안 그래도 찔리는 게 있던 론은 루카스의 요청에 잽싸게 방을 나섰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자의 머릿속에는 상대방을 어떻게 하면 확실하게 꺾을지로 가득 차 있었다.
* * *
뚜벅뚜벅
이동하는 동안에는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왕쉬엔의 옆에 리쯔웨이가 붙어서 그녀에게 귓속말을 하는 것이 보였다.
“…프랑수와 광고에서 오지한과 함께 미의 신을 연기한 적 있습니다. 아마 그 경험을 가지고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나도 여신이라면 연기해 본 적 있어.”
“네. 아가씨 쪽이 더 유리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아가씨는 서왕모 역을 맡으셨으니까요. 하물며 서왕모는 최고위 여신. 기품과 아름다움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역할이죠.”
“좋아. ‘인간 같지 않은 존재’라, 시나리오에서도 용은 신과 같은 존재라고 했으니까 충분해.”
두 사람이 전략을 수립하는 사이 어느새 연기를 보여줄 장소에 도착했다.
마벨에서 빌려준 대기실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메라를 가져온 론이라는 사람과 또 다른 정체 모를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런. 거물이 왔군요.”
애런의 말에 모두 귀가 쫑긋했다.
지연이 대표로 애런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군데요?”
“마벨 스튜디오 제작 책임자인 에이몬드 트란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저 사람의 말 한마디로 마벨의 모든 영화가 제작된다고 할 수 있죠.”
오오? 꽤 높은 사람이잖아?
그의 등장에 멋대로 왕쉬엔을 부른 이들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이 보였다.
“회사 내에서 재밌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들어서 왔습니다만 그 일이 손님이랑 관련된 일인 줄 몰랐네요.”
“히익!”
“론. 이따가 내 방으로 와서 설명해야 할 겁니다.”
에이몬드의 말에 카메라를 들고 있던 론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게 보였다.
일을 너무 성급하게 치르셨구만.
보아하니 책임자의 허락 없이 멋대로 캐스팅에 관여한 모양인데 안 들키고 모든 일을 해치울 수 있다고 생각한 거라면 한심한 놈이군.
그냥 내버려둬도 이쪽이 유리하겠지만 나는 저쪽에게 확실하게 실력 차를 보여주고 싶어서.
“감독님 카메라도 왔는데 언제 시작하나요?”
“이거 시간을 뺏었군요. 에이몬드 지켜봐주겠나?”
“재밌는 일에는 빠질 수 없지.”
그 말에 에이몬드가 의자를 가져와 자리를 잡았다.
이쪽으로 시선을 한번 주며 눈을 깜빡이는 게… 한번 해 보라 이건가?
우리 편을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겠지?
“왕쉬엔 님. 이번이 기횝니다. 차라리 이렇게 된 거 저 두 사람에게 왕쉬엔 님의 실력을 보여줘서 합당하게 배역을 따내는 게 좋습니다.”
“좋아. 확실하게 보여주지.”
리쯔웨이의 말을 들은 왕쉬엔이 기합을 넣었다.
* * *
“왕쉬엔. 당신 먼접니다.”
“좋아요.”
왕쉬엔이 지연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싱긋-
‘힘.내.세.요.’
지연이 웃는 얼굴로 방금 했던 말을 다시 한번 해 줬다.
‘Fighting(힘내세요)’이라고 말한 지연의 입 모양을 읽은 건지 왕쉬엔이 울컥한 얼굴을 했다.
처음에 봤을 땐 사진보다 훨씬 나은 얼굴이기에 조금 주춤했지만 지금 보니 성격이 아주 더러웠다.
얼굴 예쁜 애들은 다 그 값을 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두고 봐. 절대 안 져.’
지연에 대한 적의를 불태운 왕쉬엔이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았다.
아빠가 붙여준 비서 겸 매니저인 리쯔웨이가 분석해준 아이린을 떠올렸다.
‘저번에 촬영했던 서왕모 역을 떠올리십시오. 인간을 초월한 미모, 모든 이들에게 경배받는 위치, 지고의 보물을 지닌 여신을요. 아가씨께서는 이미 그런 존재를 연기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인간 같지 않은 느낌은 어떻게 하면 줄 수 있을까.
지난번에 촬영했던 드라마에서 맡았던 서왕모 역할도 자신의 외모 덕에 맡을 수 있었다.
그때 알았다.
‘웬만한 미모를 가지고 있다면 어떤 연기든 다 할 수 있어!’
비록 그 방향이 남들과 조금 다르다고 할지라고 자신의 외모를 이용해 먹는 걸로는 중국에서 왕쉬엔을 따를 자가 없었다.
인간 같지 않음을 보여주는 건 간단했다.
내 미모는 이미 천상계에 있으니까!
왕쉬엔이 연기를 시작했다.
“이래서 인간은.”
왕쉬엔이 연기하는 아이린이 도도하게 고개를 들었다.
한순간에 인간을 경멸하는 눈빛을 보인 왕쉬엔을 보고 우리를 따돌렸던 제작진과 루카스의 눈빛이 바뀌었다.
‘표정연기가 일품이군.’
자신의 얼굴을 어떻게 쓰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수십, 수백, 수천 번 연습해서 만든 거겠지.
그것만으로도 루카스는 왕쉬엔의 첫인상을 조금 수정해 줄 용의가 생겼다.
“호오.”
루카스의 옆에 앉은 에이몬드 역시 작게 감탄했다.
일방적인 대결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상대방이 꽤 분발했다.
“지금 누구에게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인간. 네 분수를 알아라!”
잠시 누군가의 대사를 듣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린 왕쉬엔이 화가 난 얼굴로 소리쳤다.
“감히 에반을 건드려? 인간 주제에!”
“좋아. 거기까지.”
루카스의 말에 연기하던 왕쉬엔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나리오 분석이라면 리쯔웨이의 특기.
날 첫 주자로 내세운 건 실수였어!
‘어때?’
왕쉬엔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지연을 돌아봤다.
“누나 힘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