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지한을 직접 볼 수 있다니!
이번 기회에 오지한과 인연 좀 만들어 볼까?
“스태프들이 소란스럽더라니.”
“이러면 정작 드라마 출연하는 우리가 밀리는 거 아닌가요?”
조금 전까지 지연과 같이 있던 승우와 서진이 걸어오면서 약한 소리를 하는 게 들렸다.
하지만 없는 소리도 아닌게 주위의 스태프들의 시선은 남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승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딜 가나 시선을 받는 아이들이니 어쩔 수 없지.’
회사에서도 익숙하게 본 모습이었다.
그냥 포기하면 편했다.
“지한아. 나도 마실 거.”
“네, 아저씨!”
지한이 승우를 보고 다시 손을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136. 떡밥
얼마 만에 나온 인기 드라마인가.
1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시청률 기록에 <내 호위무사는 여대생> 방영 시간이 되자 시청자들이 하나둘씩 TV 앞으로 모여들었다.
[내호생 불판]
5분 전!
-내가 진짜 본방 달리는 게 얼마만인지ㅜㅜㅜㅜㅜㅜ
└저도 아내의 복수 이후로 처음임ㅠㅠㅠㅠㅠㅠㅠ
-오늘도 광고가 길구나!
-내가 55인치 tv를 산 이유는 오늘을 위해서다^^
-광고 개길어.
-언제 끝나ㅠㅠㅠㅠ
높아진 화제성만큼이나 늘어난 광고에 시청자들이 불평을 하면서도 채널을 돌리지 않았다.
오프닝이야 이전 화와 다를 바 없을 텐데도 채널을 돌리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1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대작 드라마의 힘이었다.
-왕님 언제 광고 찍었지.
└조선시대 왕이었던 내가 현대에서는 CF스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미쳤냐곸ㅋㅋㅋㅋㅋ
-다들 드립 봐.
└소싯적 씽크북 좀 하셨나봄ㅋㅋㅋㅋ
-시작한다!
길어지는 광고에도 즐기는 경지에 오른 시청자들이 오프닝에 정신을 차리고 몸을 바로 세웠다.
지난 화에서 흑운대장이라는 무시무시한 놈을 만났어도 왕은 오늘도 뺀질거리면서 저잣거리에 나섰다.
“전하는 왕이면서 왜 이리 밖을 나돌아 다니시는 겁니까?”
“하하.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당연히 내 아이들이 잘 지내는지 봐야 할 게 아닌가.”
“그러니까 그 능구렁이 같은 영감한테 맨날 지고 사는 겁니다.”
“능구렁이라니. 김중근 대감은 그런 사람이 아닐세.”
아니기는.
궁 안이나 궁 밖을 조금만 돌아다녀 봐도 안다.
김 대감이 왕을 손아귀에 쥐고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선의 주인이 이 씨가 아니라 김 씨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니 김중근 대감의 착취에도 백성들은 어디에도 하소연하지 못했다.
“밖에 나오면 좋습니까?”
“좋지. 좋다마다.”
“백성들이 전하를 욕하는데 뭐가 좋습니까? 호굽니까?”
“호구는 또 무슨 말인가?”
“그런 게 있습니다. 아무튼 욕먹는 걸 좋아하신다는 건 자알 알겠습니다.”
비아냥거리면서도 재희는 왕의 옆에 수상한 자가 접근하진 않는지 주의를 기울였다.
며칠 전에 본 그놈은 분명 왕을 알고 있었다.
솜씨를 보면 분명 왕을 해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방패로 내세워 그의 검 앞에 저 멍청한 왕을 내세웠을 때도 왕을 베지 않고 그 앞에서 검을 멈추는 걸 본 재희가 고심했다.
‘목적이 뭘까. 도대체 뭘 확인하고 싶었던 거지? 아아아 됐어. 내가 알 바냐. 나는 그냥 돌아가는 것만 생각하자.’
호위무사로 일하는 것과 저번에 암습에서 구해준 은혜로 왕이 무엇을 원하냐고 했을 때 재희는 자신을 이곳에 오게 만든 검의 행방을 요구했다.
분명 그 검 때문에 내가 영문도 모르는 조선시대에 떨어지게 된 거다.
지금은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었다.
왕에게 검의 외향을 자세히 말해 준 재희는 이 검이 있는 위치와 가지고 있는 자에 대해서 알아봐 달라고 했고 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재희를 왕이 불렀다.
“이보게, 신 무사.”
“그렇게 부르지 마시죠. 저는 무사가 아닙니다.”
“그래. 대학생이라고 했던가? 그 성균관에서 일하는 이들과 비슷한 직책이랬지?”
“맞습니다. 그들처럼 학문을 갈고닦는 건 아니지만 몸 쓰는 걸 갈고닦고 있었죠.”
“허허. 그대가 말하는 건 정말 신기해. 꼭 상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것들이 아닌가. 이럴 땐 그대가 뭐라고 했던가. 헐? 실화냐? 어떤가? 잘하지 않았는가?”
그러면서 자신이 한 말을 반복하며 허허실실 웃는 왕을 본 재희가 한숨을 쉬었다.
저딴 놈이 왕이라니.
내가 진짜 필요한 게 있어서 옆에 붙어있지 아니었으면 당장 버렸다.
“너무 그러지 말게나. 그래! 나도 그대의 이야기에 보답해서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 해 주지. 옛날 옛적에 말이야.”
“무슨 전래 동홥니까? 갑자기 무슨 옛날 얘기를 하려고 하십니까?”
“똑똑하고 착한 아이가 하나 있었어.”
“거 내 얘기를 들은 척도 안 하네.”
재희가 투덜거리며 왕의 말을 들었다.
“그 아이에게는 형이 하나 있었는데 그 형은 이 세상에 모든 악을 똘똘 뭉쳐 만든 자였지.”
“옛날 이야기 주제에 설정 한번 과하네요.”
“어느 날 똑똑하고 착한 아이는 그 형이 하는 짓을 몰래 훔쳐보았다네.”
“훔쳐보는 주제에 착한 아이라니.”
왕이 한마디씩 할 때마다 추임새를 하듯 태클을 걸었지만 재희는 그가 하는 얘기에 솔깃 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 형은 뒤뜰에서 어린 새의 목을 비틀고 있었네.”
“…!”
뜬금없이 이어진 얘기에 재희가 고개를 홱 돌려 왕을 돌아보았다.
갑분 잔혹 동화!?
-헐!?
-헐!?!
└님들 왜 갑자기 다 헐만 하심? 근데 나도 헐.
-대군님 무슨 일이야. 떡잎부터 노란 애였어?!
-너무 무서운 것ㅠㅠㅠㅠㅠㅠㅠㅠ
지켜보고 있던 시청자들도 놀라고 화면 속 재희도 놀라고 있을 때.
왕은 다른 이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자신이 하던 말을 계속 이었다.
“그때 똑똑하고 착한 아이는 형의 본성을 알았다네. 형이 마냥 순수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그 뒤로 아이는 집안에서 동물들이 하나씩 죽어갈 때마다 형의 짓이라고 생각하게 됐지. 처음에는 작은 동물들이었다네, 그 다음은 덩치가 큰 가축, 그 다음은…어린 하인들이었지.”
미친 이거 전형적인 사이코패스 얘기 아니야?
재희가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은 팔뚝을 쓸었다.
조선시대에도 사이코패스가 있었구나.
그것도 동화로 만들어질 만큼.
“그 누구도 그 짓이 형이 한 짓이란 걸 몰랐어. 동생을 제외하곤. 동생은 사람까지 죽인 형이 두려워 똑똑함을 숨겼다네. 왜냐하면 형이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왜요?”
“형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부모가 후계를 형이 아닌 똑똑하고 착한 동생에게 넘기려 했기 때문이지.”
그래서 동생을 죽이려고 한 건가?
역시 제 자식이라도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구나.
“부모는 동생을 후계로 키우려 했고, 형을 멀리 떨어진 절로 보냈다네. 그리고 부모님은 몇 년 후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지.”
“그 사고도 불의의 사고가 아니라 그 형이 손을 쓴 것 같네요.”
“그 동생도 그리 생각했다네.”
왕이 이야기에 몰입해 심각한 얼굴로 말하는 재희를 보고 싱긋 웃었다.
“그래서 동생이 생각했지. 이대로 있다가는 나도 형에게 당할 수 있구나! 동생이 은밀히 힘을 키우기 시작했지.”
“상황판단력이 좋은 동생이네요.”
“내가 똑똑하다 하지 않았는가.”
“네에네에. 그래서요. 그 다음은요?”
“동생이 드디어 형이 한 짓을 드러내기 위한 꼬리를 잡았다네.”
그 말을 하는 왕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얼굴은 장난스럽게 옛 전래동화를 말해주는 것 같았지만 그의 눈은 오랫동안 억눌러온 분노와 슬픔, 두려움, 그리고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마치 자신이 알고 있던 왕이 아닌 것 같은 눈빛에 재희가 흠칫했다.
“동생은 형이 한 짓을 전부 밝히고 그를 벌할 생각이야.”
왠지 전래 동화가 아니라 왕의 본인의 얘기 같았다.
무거워진 분위기에 재희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 지어내신 이야기죠?”
“…맞아. 내가 전부 지어냈지.”
다시 허허롭게 웃으며 대답하는 왕의 얼굴을 본 재희가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던 것을 풀었다.
-그냥 지어낸 얘기는 아닐 듯
└지어낸 얘기는 아님2222222
└지어낸 거 아닌 거 같은데333333333333
오랜 시간 드라마를 봐 오면서 갈고닦았던 추리력으로 시청자들이 왕과 대군의 과거를 추측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두 사람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 * *
“크흑!”
“이보게 신 무사 괜찮나?”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말라고.”
재희와 왕은 마을에서 떨어진 사당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구경하던 왕이 어느 한 물건에 꽂혔고, 왠지 모르지만 그 물건을 판 상인의 뒤를 쫓아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는 왕의 의견을 따르다가 정체 모를 자들에게 습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게 다 앞뒤 안 가리고 놈들 뒤를 쫓아가던 왕 때문이다.
진즉 내 말대로 몸을 숨기거나 미행을 포기했으면 자기 때문에 내가 몸 다칠 일도 없지 않았겠는가.
아무튼 내가 다친 건 다 이 멍청한 왕 때문이다.
겨우 상인과 한패인 놈들에게 칼침을 맞은 것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재희가 속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미안하네. 다 나 때문에.”
“이것쯤이야 침 좀 바르면 되긴 한데.”
“보통 이 정도로 칼에 베였으면 침 좀 발라서 될 게 아니다만.”
아픈 와중에도 허세를 부리는 재희를 보고 왕이 드물게 태클을 걸었지만 재희는 상처를 천으로 꼭 묶어 지혈을 하면서 왕을 향해 물었다.
“갑자기 그놈을 왜 쫓자고 하신 겁니까.”
자신 때문에 큰 상처를 입은 재희를 본 왕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에 있던 물건을 보여주며 대답했다.
“이 문양 때문이지.”
작은 함의 바닥에는 검은 모란 꽃 한 송이가 찍혀 있었다.
날인 같은 문양에 재희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그 문양이 어떻다는 겁니까?”
“그건,”
왕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문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자신을 쫓고 있는 자들이 분명했다.
왕도 상처 입은 재희도 조용히 하고 있을 때 그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사당에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벅, 저벅
삐거억, 삐걱
낡은 판자가 움직이는 소리와 정체 모를 이의 발자국 소리.
재희는 부상당한 몸으로 검을 틀어쥐고 있었고, 왕은 침을 꼴깍 삼켰다.
두 사람이 숨어있는 공간 입구를 바라보고 있을 때, 문이 서서히 열렸다.
“흡!”
재희가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챙!
그러나 재희가 휘두른 검이 괴한에게 손쉽게 가로막혔다.
얼마 전에 봤던 검은 옷 입은 놈이랑 비슷한 실력을 가진 낯선 인물에 재희가 또 한 번 검을 휘두르려고 할 때 괴한이 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이, 뭐.”
“늦어서 송구합니다, 전하.”
“?”
“아니다, 제때 와 주었다.”
“전하?”
영문을 모를 상황에 재희가 통증을 참느라 찡그린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뭐임? 이건 또 뭐임?
└왕님도 뭐 있는 것 같은데
└뭐야 내 햇살순수왕님 돌려줘요.
└└미안 난 차분냉정왕님 취향인 것 같다.
-아니 김 대감도 알고 보면 중간보스였는데, 최종 보스로는 갑자기 승우 형이 나오질 않나 왕님은 또 뭔갈 숨기고 있다고!?
└하하하. 파도파도 끝이 없구나. 그래 갈 때까지 가보자!
└님 진정해요. 어디까지 가시려구요ㅋㅋㅋㅋㅋ
└└이렇게 된 거 회상씬으로 왕님 어린 시절 풀어줘야 한다.
└└재희 썰도 풀어줘야함
└└└아니 끝이 없네ㅋㅋㅋㅋㅋㅋㅋ안 되겠다. KBC 연장 50화 더 해 줘여
넘쳐흐르는 떡밥에 시청자들이 아우성치고 있을 때, 드라마는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고 진행되었다.
평소 모습은 어디 가고 한 나라의 왕다운 위엄을 보이고 있는 그에게 시선을 주자 그가 가라앉은 얼굴로 재희에게 말했다.
“그대에게도 이제 말해줄 때가 되었군.”
“무슨.”
“내 본심을 말일세.”
어찌 된 일인지 모르지만 저 사람은 일단 왕이 불러서 온 사람인 것 같다.
왕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믿어도 될 사람인 모양이고,
왕은,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왕과 눈앞에 있는 왕은 전혀 다른 사람 같지만,
어찌 됐든 지금은 더 이상 왕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어라.’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왕이 위험한 상황이 지나갔다고 생각되자 재희의 몸이 서서히 기울었다.
“재희!”
왕이 자신을 불렀다.
‘내 이름 알고 있었네.’
맨날 신 무사, 신 대학생이라고 부르더니.
가끔 이름을 부르는 것도 맨날 신재이나 신재휘나 신쟁이 같은 엉뚱한 이름을 말하더니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네.
재희는 점점 가물어지는 시야 속에 왕의 도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고 누군가의 품에 단단히 안겼다.
‘설마 나 받아준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첫 만남부터 누군가에게 시비 털리거나 허술한 모습만 보여주던 이가 이렇게 빨리, 단단히 자신을 받아줄 리가 없지 않은가.
헛걸 본 게 틀림없다.
재희가 눈을 감았다.
137. 저도 갑니다
KBC 조정실.
오늘 조정실 내부는 묘하게 들떠 있었다.
그거야 <내 호위무사는 여대생>이 40%를 넘길 거라고 확실시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달달달달
촬영장에서 아무리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우쭈쭈하며 자존감 회복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있다지만 천성은 어쩔 수 없는지 철왕이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 옆에는 ‘내호생’ 이전에는 조정실 오는 일이 드물었던 드라마국 국장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넘었습니다!”
“어디어디.”
“예쓰!!!”
철왕과 국장이 재빨리 시청률 기록표를 살폈다.
종수가 빠르게 시청률 기록을 단체 채팅방에 올렸다.
기록표를 두고 머리를 맞댄 두 사람 눈에 숫자 세 개가 눈에 들어왔다.
40.7%
앞으로 남은 회차는 7화.
이제 시청률이 오르는 속도가 처음보다 확연히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남은 회차와 13화 만에 40%를 넘긴 시청률이 더 큰 목표를 노리게 만들었다.
“유 PD! 어디서 이런 보물이 나타났어! 하하하하하.”
국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철왕의 등을 탕탕 두드렸다.
“이대로 50%까지 가자고!”
“저기 국장님 그건 좀.”
“왜 안 돼?”
“가, 가겠습니다.”
모처럼 나온 대작에 눈이 돌아간 드라마국장을 보고 철왕이 기세에 밀려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