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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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해진 배역을 뺏는 건 말이 안 돼.’

내가 알기로 그 배우는 오디션을 통해서 들어온 배우다.

열심히 노력해서 딴 배역을 다른 누구도 아닌 같은 회사 사람한테 뺏긴다고?

지원은 못 해줄망정?

“언니. 가자.”

지연이 차가운 얼굴로 일어나자 분장실 스태프들이 후다닥 정리하고 지연이 일어날 수 있게 해 줬다.

의상을 갈아입지도 않았는데 벌써 적을 상대하는 신재희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서 분장실 팀장과 스태프를 지연을 응원했다.

“재희 씨 파이팅!”

“칼 든 미친년을 보여주세요.”

끄덕

자신을 재희라고 부르며 응원하는 스태프들을 뒤로한 채 지연이 분장실을 나섰다.

* * *

“감독님 우리 알파 아시죠? 에이스의 메인보컬.”

“네. 압니다만….”

“하하하. 사실 우리 알파가 연기도 잘 하거든요.”

“예에.”

철왕이 대답은 했지만 미심쩍은 듯이 팀장의 옆에 서 있는 알파를 바라봤다.

갑자기 찾아와 배역을 교체해 달라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거기에 아이돌을 끼워 넣는다?

물론 아이돌 중에서도 연기를 잘하는 친구가 있긴 했다.

하지만 지연과 같은 괴물이 아니고서야 첫 연기부터 잘하는 이는 드물었다.

연기 연습을 시켰다고 하는데 과연 그게 오디션까지 열어서 캐스팅한 배우를 밀어낼 정도가 될까?

“사실 우리 우빈이가 오디션에 가서 잘했다는 얘길 듣긴 했는데 그래도 아직 이름 없는 신인이라 걱정이었거든요. 하물며 ‘내 호위무사는 여대생’ 이게 지금 센세이션 아닙니까. 이런 상황이 부담됐는지 우빈이가 연기하기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우리 알파를 데려온 것 아닙니까.”

“허….”

“…친.”

소속사 팀장이라는 놈의 개소리에 주변에서 엿듣고 있던 스태프들이 참지 못하고 욕을 뱉었다.

오디션으로 뽑힌 우빈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배역을 준비했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출연하지 않는 장면이었음에도 촬영장에 나와 다른 배우의 연기를 살폈고, 대본리딩에서도 다른 스태프와 매니저들 사이에 끼어 진지하게 연기를 분석했다.

아직 매니저도 없어서 촬영장에 혼자 오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액션 배우들에게 없는 돈으로 카페음료를 사 와 배움을 청하기도 했다.

그런 배우였는데 뭐라고?

누가 봐도 소속사에서 인기가 많은 알파에게 우빈의 배역을 뺏아 주려고 하는 게 눈에 보였기에 모두가 환영하지 않는 손님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 PD님. 뭐 하세요?”

모두가 황당함 반 분노 반으로 불청객을 쳐다보고 있을 때 그들에게 시원한 사이다를 내려줄 여신이 내려왔다.

134. 갑질에는 갑질이 제 맛

“어어. 지연 씨.”

난감해하던 상황에서 지연이 나타나자 철왕이 소눈같이 촉촉한 눈으로 지연을 쳐다봤다.

아니, 누가 감히 우리 소듕한 PD님을 괴롭혀?

지연이 우리들의 누렁이를 괴롭힌 사람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못 보던 분들이시네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여기 에이스 알파의 매니저이자 CU엔터의 김대승 팀장이라고 합니다.”

“아하! 우빈 씨 소속사 분 맞으시죠? 응원하러 오셨나 봐요.”

지연의 천진난만한 물음에 김대승 팀장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너도 소속사 신인이 열심히 따낸 배역을 남 주려니까 양심에 찔리지?

“크흠. 그런 게 아니라.”

“아니에요? 그럼 여기 왜 오셨어요?”

“저는 PD님이랑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요?”

능청스럽게 철왕과 대화할 거라며 다른 이들을 배제한 김대승 팀장을 본 지연의 눈에 서늘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지연이 은주에게 손짓했다.

“언니 내 폰 좀.”

“여기! 사장님한테 연락하게?”

은주의 말에 지연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걸로는 부족하지.”

지연의 말에 괜히 자신의 등이 오싹해진 은주가 팔을 쓸며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은 왜 널 건드려서 쯧쯧쯧.”

“무슨 소리야. 날 건드린 건 아니잖아?”

“네가 있는 드라마에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 거잖아. 따지고 보면 맞는 말 아니야?”

“그러네.”

지연이 철왕을 데리고 다른 스태프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떨어지는 김대승 팀장과 고개를 숙인 손우빈 앞에 건들거리며 서 있는 알파를 번갈아 보았다.

* * *

CU엔터 김대승 팀장은 갑자기 나타난 지연에 잠시 걱정했지만 철왕과 둘만의 자리를 만들자 곧 자신감에 가득 찼다.

‘두 번 망한 PD 구워삶는 건 일도 아니지.’

철왕은 지금 잘나가는 드라마 메인 연출답지 않게 무척 소심해 보였다.

알아보기에는 이번 작품도 진동현 PD와 탑엔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유약해 보이는 철왕의 모습에 대승은 곧 뱀처럼 그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PD님. 갑작스러운 요청에 많이 당황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해합니다. 저희도 이러고 싶진 않았습니다.”

“예에.”

“그런데 지금 ‘내 호위무사는 여대생’이 무척 잘나가지 않습니까. 그리고 흑운대장은 사실상 주인공들과 직접적으로 대치하고 위협하는 존재 아닙니까.”

“배역을 잘 분석하신 것 같네요.”

“하하하. 우리 애들이 들어가는데 잘해야죠. 그런데 그런 중요한 배역을 우리 회사 연습생이 맡게 돼서 제가 잠도 못 잘 정도로 걱정했습니다.”

“연습생이요?”

아무리 엑스트라를 전전했다지만 우빈을 연습생으로 격하해서 말하는 김대승 팀장의 말에 철왕이 눈을 크게 떴다.

우빈 씨는 연습생이 아닌데.

프로필을 봐도 꽤 많은 작품에 출연한 사람이었다.

연기도 안정적이고.

매일 촬영장에 나와서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의 연기를 보며 배역을 분석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래도 저희 엔터 소속인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마침 알파도 연기 연습 좀 했고, 개인 팬도 많은 애라 부득이하게 알파의 다른 스케줄을 포기하고 이렇게 데려왔습니다.”

너흴 위해서 우리가 이 정도까지 손해를 봤다.

그렇게 말하며 빚을 지우는 듯한 화법에 철왕이 흔들렸다.

“그러니까 우빈이 대,”

띠링!

마지막 쐐기를 박으려는 찰나 어떤 소리가 대승의 말을 잘랐다.

철왕이 안도한 얼굴로 자신의 폰을 꺼내들었다.

[PD님 그놈 말 듣지 마세요.]

[하고 싶은 말 다 하셔도 돼요.]

[PD님한텐 우리들이랑 제작진들이 있잖아요!]

[지지 마세요. 아셨죠? 하팅!(응원하는 토끼 이모티콘)]

지연에게서 온 메시지를 본 철왕이 감동받은 얼굴로 한참을 문자를 들여다봤다.

철왕이 계속 휴대폰 화면만 보고 있자 대승이 미간을 찌푸리며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PD님?”

“아, 실례했습니다.”

대승의 말에 철왕이 감정을 추스르고 고개를 들었다.

철왕의 눈빛은 한결 단단해져 있었다.

“흑운대장 역은,”

“PD님!”

드디어 철왕의 입에서 흑운대장 역의 행방이 정해지려는 찰나 또 중요한 순간을 방해받은 대승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철왕은 자신에게 달려오는 종수를 보고 안심이 된 얼굴이 되었다.

“종수야. 무슨 일이야?”

“지금 투자자님이 도착하셨답니다.”

“그래?”

종수의 말에 철왕이 투자자가 온 곳으로 향했다.

‘거의 다 넘어갔는데!’

대승이 아쉬운 얼굴로 멀어지는 철왕과 종수의 뒤를 따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투자자한테 잘 보이면 CU엔터에게도 알파에게도 좋은 일이라 생각하며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오셨습니까, 사장님!”

“어서 오세요!”

스태프들이 깍듯한 자세로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옆에 아까 자신을 긴장하게 만들었던 지연도 있었다.

저러는 걸 보니 결국 지연도 투자자 앞에서 아부하기 바쁜 한낱 연예인에 불과하군.

대승이 지연의 행동을 보고 깎아내렸다.

그렇게라도 해야 다시 지연을 만났을 때 다신 긴장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신도 투자자에게 인사를 하러 알파를 데리고 이동했다.

‘탑엔터 공주민 사장이잖아?!’

투자자의 얼굴을 본 대승이 화들짝 놀랐다.

탑엔터에서 투자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오늘 오기로 한 투자자가 공 사장이었단 말인가?

갑자기 나타난 같은 업계 대표에 대승이 긴장하며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공 사장님. CU엔터 김대승 팀장입니다. 여기는 에이스의 알파구요.”

“안녕하십니까!”

두 사람의 인사에 주민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을 본 대승이 식은땀을 흘렸다.

‘뭐지? 왜 저렇게 보는 거지?’

주민의 눈이 마치 노리던 목표가 나타난 것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 * *

주민이 김대승 팀장을 그렇게 노려보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사장님 언제 와요?]

[빨리 오시면 안 돼요?]

[아니다. 빨리 오다가 사고 나면 큰일이니까 조심히, 천천히 오세요(손을 흔드는 토끼 이모티콘)]

뭔가 빨리 오길 바라는 것 같은 지연의 문자에 주민이 남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 당장 지연이 촬영장에 무슨 일 있는지 알아봐.”

“네, 사장님.”

그리고 유능한 남 비서는 촬영장에 있던 일을 빠르게 알아왔다.

“지금 CU엔터에서 흑운대장 역을 교체해 달라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갑자기 배역을 교체해 달라고? 흑운대장 역을 맡은 배우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그 배우가 CU엔터 소속입니다. 같은 회사인 에이스 알파에게 배역을 넘기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드라마가 잘될 것 같으니까 끼어들겠다? 같은 회사 소속 배우의 역할을 뺏어서?”

“네. 그리고 알파는 CU엔터 이사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들이 우리 지연이 드라마에 빨대 좀 꽂아보겠다고 이러는 거란 말이지?”

“꽤 높은 확률로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남 비서의 분석이라면 거의 확실하겠지.

주민이 최근에 팔불출적인 면모를 많이 보여줘서 그렇지 그는 원래 재벌가의 일원이며 냉정한 사업가였다.

그런 그에게 이딴 일로 시비를 거는 놈은 처음이었다.

정확하게 주민에게 시비를 건 것은 아니라 드라마의 인기에 편승하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주민은 자신이 투자까지 한 드라마에 이런 식으로 끼어드는 것이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촬영장까지 얼마나 남았지?”

“5분 내로 도착할 예정입니다.”

“KBC드라마 국장이랑 CU엔터 유 대표에게 연락 넣어.”

“알겠습니다.”

주민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을 느낀 운전기사는 예정보다 이른 시각에 도착했다.

촬영장에서 주민을 기다리고 있던 지연이 제일 먼저 달려갔다.

“사장님 왔어요?”

“오셨습니까, 사장님!”

“어서 오세요!”

“안녕하십니까!”

주민을 보고 근처에 있던 모두가 인사를 했다.

종수와 다른 감독들의 지시에 각자 원래 예정됐던 일을 하고 있다가 손을 멈추고 다가왔다.

공 사장이 왔으니 지연의 말대로 CU엔터 일이 해결되겠지.

그런 기대를 담고 모두가 주민의 곁으로 다가왔다.

“모두 열심히 일하는데 찾아와 죄송합니다. 우리 드라마 시청률이 잘 나왔다고 하는데 제가 선물을 안 드릴 수가 없어서요. 그런데…KBC의 영웅인 분들 분위기가 왜 이렇게 안 좋습니까. 지연이 넌 또 왜 분장을 하다 말았어?”

“분장 중이었는데 밖이 소란스러워서요. 안 나올 수가 없더라고요.”

“그랬어?”

김대승에 대한 주민의 적의가 +1 상승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지금 어딨니?”

“유 PD님 데리고 저쪽에 있어요. 우리 촬영해야 하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PD님까지 데려갔어요.”

“그랬구나.”

“지금 여기 다들 모여 있는 이유가 PD님 걱정돼서 모여 있는 거예요.”

“제작진분들이랑 사이가 돈독하다고 하더니 사실인가 보네.”

“저기 있는 우빈 씨도 같이 분장하러 가야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어요.”

지연이 우빈을 가리키자 알파 때문에 주눅 들어 있던 그가 화들짝 놀랐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보자 김대승인가 뭔가 하는 놈에 대한 적의가 더욱 치솟았다.

“사장님, 우빈 씨랑 같이 하면 안 될까요? 저 우빈 씨랑 진짜 열심히 합 맞춰봤거든요. 오늘 촬영장 오자마자 무술감독님이랑 같이 동선 확인해 볼 예정이었는데.”

“걱정 마. 우빈 씨랑 같이 연기할 수 있게 해 줄게.”

“사장님만 믿어요.”

신뢰가 담긴 아이의 눈빛을 보고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주민의 눈에 이쪽으로 다가오는 철왕과 김대승인지 뭔지 하는 놈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공 사장님. CU엔터 김대승 팀장입니다. 여기는 에이스의 알파구요.”

“안녕하십니까!”

“안녕 못 합니다.”

“!”

주민의 첫 마디에 김대승 팀장의 몸이 굳었다.

대뜸 보자마자 안녕 못 하다니.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주민의 모습에 김대승 팀장이 분위기를 풀어보려 하하 웃었다.

“하하하. 드라마 시청률도 잘 나왔는데 공 사장님께서 기분이 안 좋으실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눈치가 없습니까? 당신들 때문이지 않습니까.”

직설적으로 쏘아붙이는 주민의 말에 대승이 멈칫했다.

“내가 직접 투자하고 내 배우들이 출연하고 내가 캐스팅을 완료한 드라맙니다. 당신이 뭔데 끼어드는 겁니까.”

“저어. 그게 저희는 끼어드는 게 아니라.”

“세 치 혀로 벗어날 생각 하지 마시죠. 내가 호구로 보입니까?”

불쾌한 듯 주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신들의 속내를 정확하게 꼬집는 주민의 말에 대승이 반박하려 했으나 차마 나서지 못했다.

자신을 보는 주민의 눈빛이 몹시, 매우, 엄청 사나웠기 때문이다.

♬♪♪

“어, 그.”

“받아보시죠.”

“네에.”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에 대승이 당황하자 주민이 어서 받으라고 명령했다.

“여보,”

-야 이 새끼야!!!!!! 너 어디서 뭐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사, 사장님?

-너 지금 ‘내호생’ 촬영장이야? 아니라고 해!!!

“내호생 촬영장 맞습니다….”

-이 미친!!!!! 너 지금 당장 튀어와. 안 오면 너 죽여 버릴 줄 알아!!!!!!!!

잔뜩 화가 난 CU엔터 유 대표의 전화에 대승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김대승의 불행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김 팀장님. 받아보시죠. KBC 드라마국장님이십니다.”

조연출인 종수가 김대승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미 유 대표와의 통화에 정신이 반쯤 나간 대승이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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