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들어볼까?’
‘응. 그러자.’
두 사람이 빠르게 합의를 나누고 은주가 철왕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우리 지연이가 드라마에 출연해 줬으면 한다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대본은 들고 오셨습니까?”
“여기 시놉이랑 16화 대본입니다.”
“16화면 벌써 대본이 다 나왔다는 말인가요?”
“그게. 예전에 저랑 같은 작품을 했던 최 작가가 차기작으로 구상했던 작품입니다. 작품이 엎어지면서 만들어지진 못했지만 그래도 완성한 대본입니다.”
아마 철왕이 망했다고 했던 작품을 같이 했던 작가인가 본데.
대본에 써져 있는 이름이 낯선 걸 보면 그 이후로 방송계에 복귀를 못 한 모양이다.
받아든 시놉을 빠르게 훑었다.
‘시간여행물? 타임리프물?’
뭐든 현대에 살던 대학생이 가상의 조선시대에 가는 것이 흥미로웠다.
퓨전사극과 시간여행의 조합인가?
이 시대에는 꽤 신선한 소재였다.
빠르게 내용을 훑은 지연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재밌네요!”
지연의 평가에 초조하게 보고 있던 철왕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1단계는 통과한 것 같았다.
이제 대본에 흥미를 느낀 지연이 출연해 주겠다고 하면 됐다.
첫 고비를 넘긴 철왕이 밝은 얼굴로 지연의 대답을 기다렸다.
“PD님은 제가 무슨 역할을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신재희’ 역입니다.”
신재희는 극중 대학생이었다가 조선시대로 넘어간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고작 한 작품 나온 날 뭘 보고 여자주인공을 시켜?
지연과 은주가 깜짝 놀랄 눈으로 철왕을 보았다.
“지금 절 여주역에 캐스팅하겠다고 하신 건가요? 다른 배우들도 많은데 왜 하필 저예요?”
“지연씨 연기력이 좋다는 사실은 방송국 사람들이면 전부 다 알고 있습니다. 동생분처럼 NG없이 모든 씬을 찍으셨다면서요?”
소문이 빠른 방송계이다 보니 철왕도 그 사실을 들은 것 같았다.
“우리 지연이가 연기를 좀 잘 하긴 하죠. 그거 때문에 컴백 활동까지 늦춰졌으니까요.”
은주가 자식자랑을 하는 부모처럼 호호 웃으며 철왕의 말에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경계하던 사람이 내 얘기에 금세 봇물 터진 듯 얘기하는 것 봐라.
언니 그만 좀 해.
여기 비즈니스 자리잖아.
지연이 옆구리를 콕콕 찌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은주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큼, 지연이가 연기는 잘 하지만 아직 배우로서의 인지도는 부족할 텐데요?”
“하지만 팬덤 규모도 크고 팬들의 연령층도 다양하죠. 인지도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굳이 그렇게 따지자면 다른 아이돌가수를 써도 될 텐데요?”
“그게. 요즘 슈퍼노바 민혁 때문에 그쪽이 좀 시끄럽습니다. 그거 때문에 예능이며 드라마며 전부 비상이 걸려서. 민혁 때문에 지금 아이돌뿐만 아니라 배우 쪽도 난립니다.”
“아.”
“아.”
은주와 지연이 비밀스럽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언니 이거 아마.’
‘응. 거의 확실하게 우리 탓일 듯.’
다른 때 같았으면 민혁의 계약해지와 함께 사그라질 일이었다.
하지만 민혁이 자신을 건드린 걸 우리 사장님이 알아버린 탓에 후속기사가 끊이지 않고 나오고 있었다.
하루하루 밝혀진 소식과 소송진행 상황까지 알려지고 있는 판이니 여론 탓에 사법부에서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들었다.
그걸 본 다른 학폭 피해자들이 하나둘씩 학폭, 일진 사실을 폭로하면서 연예계가 지금 학폭미투로 시끄러웠다.
당장 오늘만 해도,
[가수 효정. 과거 학교폭력 논란]
[아이돌 데뷔를 막아주세요. 아이돌 연습생 학폭논란]
[연예계 흔든 학폭 미투. 트라우마 앓는 피해자들]
[[시사한줄]연예계 학폭 미투]
같은 기사가 줄줄이 올라왔다.
미래에서는 ‘프로듀서104’ 같은 프로그램에 나와서 밝혀질 일이 지금 밝혀지기도 하고, 대형 기획사 출신이 연습생들에 대한 제보도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방송국이며 소속사며 전부 갑자기 들이닥친 학폭논란에 크게 몸살을 앓고 있었다.
물론 우리 회사는 면접에서부터 그런 애들을 거르기도 했고, 저번에 사장님한테 미리 말해서 한 번 더 점검하기도 해서 아무런 문제없이 넘어갔지만.
나 때문에 촉발된 일이 이렇게 돌고 돌아서 여기까지 왔나?
여태 세계구급 사건들은 전부 예정대로 터져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앞으로는 행동에 더 주의해야겠다.
“그것만이 아니라 저에겐 지연이 꼭 필요합니다!”
지연이 아니면 안 된다며 철왕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또 길바닥에서 했던 것처럼 무릎을 꿇고 이마를 찧을 것 같은 철왕에 은주가 당황하며 철왕을 일으켰다.
이 아저씨 진짜 왜 하필 나냐고?
이유를 설명해 주라고.
“제발 저한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도대체 무슨 기회를 달라는 거예요?”
“저에게 가호를 내려주세요!”
이게 뭔 소리야?
지연이 은주를 돌아보자 은주도 지연을 돌아봤다.
두 사람 모두 철왕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이러지 말고 천천히 설명해 보세요.”
“지연이 행운의 여신이라는 말을 듣고 왔습니다! 제가 새 작품을 하기 위해서는 행운이 필요합니다!”
지연만 설득하면 과거에서 벗어나 도약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 작품을 지연과 함께하는 것.
그것만이 자신이, 최 작가가 살아남을 유일한 길이었다.
철왕이 바닥에 엎드린 채로 구구절절한 자신의 사연을 읊었다.
랩처럼 빠르게 흘러나오는 그의 과거에 은주와 지연은 말릴 생각도 못하고 그의 과거를 다 들어야만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도 넘어지고, 뒤로 넘어져도 코피가 터지며 기껏 힘겹게 연출을 잡으면 매번 뜻밖의 사고가 터진다고요?”
“네.”
이 사람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이렇게 운이 안 따를 수가 있어?
이 사람 굿이라도 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지연과 은주는 이제 측은한 시선으로 철왕을 바라봤다.
“사실 작품이 연달아 문제가 생겼을 때 모든 게 다 제 탓인 것 같았습니다.”
불륜 스캔들을 터트린 남주 역의 배우와 조명을 제대로 설치하지 못해서 다른 장비까지 망가트린 스태프를 뭐라고 나무랄 수 없었던 게 다 그 탓이었다.
철왕이 이제는 흡사 눈물까지 흘릴 태세로 지연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제발 꼭 출연해 주세요.”
“절 주연으로 써도 괜찮으시겠어요?”
“올 초에 주요 배역을 전부 아이돌로만 쓰고, 첫 배역을 주연으로 맡은 아이돌도 있는데 지연씨가 왜 안 되겠습니까.”
아 하필 그 드라마를 방송한 게 KBC였지.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지연의 결정만 남았다.
“어떻게 할래?”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휴가 스케줄은 나 혼자 짠 게 아니니까.
지한이한테도 물어봐야 하고.
그리고 대본도 아직 다 안 읽어봤고.
결말을 어떻게 할지도 궁금해.
용두사미로 끝나면 그만큼 허무한 게 없으니까.
지연에게서 희망적인 답을 들은 철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허리를 숙였다.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부디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에. 최대한 빨리 연락드릴게요.”
철왕이 촉촉한 눈으로 지연을 바라봤다.
나보다 나이 많으신 분이 과하게 허리를 숙이고 감사하는 걸 보는 게 마음이 편하지 않다.
사실대로 말하면 많이 부담스러웠다.
“그럼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에.”
은주의 대답에 갑작스러운 미팅이 끝나고 원하는 답은 아니지만 답이 나올 가능성을 확인한 철왕도 기분 좋게 자리를 뜰 수 있었다.
하지만 철왕이 지연을 보면서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것처럼 쭈뼛대고 있었다.
‘뭐지? 여기서 바로 답을 해 달라고 하는 건가?’
알 수 없는 행동에 지연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철왕이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면 안 되겠습니까?”
변태 같은 말에 은주가 팔을 들어 지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사람 도와줘도 될까?
지연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철왕을 쳐다봤다.
“하하. 처음 보는 사인데 실례겠죠?”
“네.”
“하하하하하하.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은주의 대답에 얼굴이 빨개진 철왕이 다급히 자리를 떴다.
사라지는 철왕을 보는 두 사람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봤다.
“저러다가 또 넘어지는 거 아니야?”
“아, 넘어졌다.”
말하는 순간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넘어지는 철왕을 본 지연이 심각한 얼굴로 고민했다.
‘손 한번 잡아 줄 걸 그랬나?’
눈앞에서 목격한 철왕의 불행에 지연은 돌아온 뒤 처음으로 미신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28. 내가 당신을 구원해 주겠소.
주간회의에 철왕의 이야기가 거론됐다.
“KBC가 다른 곳에 비해서 많이 사정이 안 좋은 모양이야.”
“사극 이미지를 벗기 위해서 새로운 도전도 많이 한다고 아이돌을 많이 썼습니다. 그 여파로 추정됩니다.”
“최근에 예능국에 많이 밀리기도 했습니다. 오죽하면 KBC는 사극과 예능이 이끈다고 하겠습니까.”
“지상파라는 말도 다 옛말이지. 이제는 지상파도 많이 죽었어.”
주민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렇게 고고한 척 온갖 갑질을 일삼던 지상파의 몰락이 기꺼웠다.
하지만 지연이 그쪽에 들어간다고 하면 얘기가 달랐다.
그쪽에서 딱 집어서 지연을 찾는 걸 보면 지연에 대한 얘기가 새어나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PD의 요청을 우리가 들어줘야 하는 이유는?”
“아직까지는 지상파 출연이 메리트가 있습니다.”
“게다가 지연을 주연으로 쓰겠다고 했습니다. 몸값이 몇 배로 상승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번에 KBC에 빚을 지게 해 둔다면 나중에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예능이나 음방 때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팀장과 실장들이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어찌 됐든 저 콧대 높은 것들에게 이번에 빚을 만들어 두는 건 나쁜 생각이 아니긴 했다.
“그럼 들어주지 않았을 때의 잃는 건 뭐지?”
“지연의 주연 데뷔가 미뤄질 수 있습니다.”
“좋은 대본을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단가? 메리트에 비하면 별거 없군.”
“예전에 사람극장을 찍은 덕분에 KBC와 사이가 썩 나쁘진 않습니다.”
실무진들의 얘기를 들은 주민이 책상을 두드렸다.
생각할 때마다 나오는 주민의 습관이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이 주민의 대답을 기다렸다.
“좋아. 리스크는 거의 없고 메리트가 크다면 한번 해 볼 만하지. 좋아. 고 실장. KBC와 연락해 보도록.”
“넵.”
“그 전에 지연이가 하고 싶은지 물어보는 거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이제 실장을 단 영훈이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말했다.
“좋아. 이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
“네. 이번에 알타이르의 컴백준비가….”
* * *
영훈이 오랜만에 아이들 집으로 찾아왔다.
이제 실장이 된 영훈이 반질반질한 얼굴로 들어와 부엌에 이것저것 집어넣고 있었다.
“오빠. 뭐 해?”
“어. 김치랑 반찬 좀 넣어두려고.”
“갑자기?”
“며칠 전에 집에서 보내줬거든.”
“아항.”
영훈 오빠 어머니가 보내주시는 반찬이 맛있긴 하지.
같이 살 때는 우리도 같이 나눠 먹었는데 영훈 오빠가 미나 언니랑 결혼하고 나가 살면서 어머니표 반찬도 자주 못 먹게 됐다.
오빠랑 언니가 나가면서 가장 아쉬운 점 중 하나였는데 가끔 이렇게 영훈 오빠가 올 때 챙겨오곤 했다.
“그래서. 반찬까지 싸 들고 온 이유는?”
“누나. 그거 아닐까? 어제 갑자기 나타나서 석고대죄한 PD님 있다며.”
“그건가?”
아이들이 얼른 진실을 말하라는 것처럼 영훈을 째진 눈으로 쳐다봤다.
뒤통수가 따가워진 영훈이 하하 웃으며 아이들을 거실 소파에 앉혔다.
“지한이 네 말이 맞나 봐.”
“영훈이 형. 다 들켰어.”
“…예나 지금이나 너희들은 너무 눈치가 빠르다니까.”
“본인이 티가 나는 걸 탓하시죠.”
“오빠는 매니저 하길 잘했다.”
“너희들 앞에서는 웬만한 연기론 힘들걸?”
연기로는 대한민국에서 한 손에 꼽는 아이들이 하는 말에 영훈이 울컥해서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회의 때 다들 뭐래?”
“어쩌긴 리스크는 적고, 얻는 건 많으니까 당연히 오케이지.”
“그렇구나.”
“지연이 넌 어때? 하고 싶어?”
“흐음.”
지연이 고민하고 있을 때 지한이 인절미를 쓰다듬던 걸 멈추고 지연이에게 물었다.
“누나 그거 재밌어?”
“응. 재밌어.”
“그럼 그냥 해.”
“하지만 우리 휴가는 어쩌고. 은주 언니가 지금 찍고 있는 드라마도 조기종영할 거 같다고 하던걸? 그렇게 되면 거의 바로 촬영 들어갈 거고, 우리 여름휴가는 그대로 바이바이라고.”
“그거 하고 가면 되지. 드라마 끝나고 가도 서핑은 충분히 탈 수 있을걸? 그리고 편성 미뤄질 수도 있잖아.”
만약을 대비한 지한이 충분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한의 말에 지연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가?
“누나 솔직히 말해. 뭐가 문제야?”
“그냥. 연기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주연을 맡겠다고 하면 나올 반응들이 신경 쓰이는 거지.”
“시청자들? 아님 관계자들?”
“둘 다.”
“에이. 뭘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래. 누나답지 않게.”
“그러게. 지연이 너는 네 팬들만 신경 쓰면 된다며.”
“드라마는 뭐랄까. 책임지는 게 다르잖아. 노래하면 내 팬들만 보고 하면 되는데 내가 주연을 맡게 되면 제작진들 생계도 신경 써야 하고 아무튼 그래.”
“내가 아는 오지연은 그런 애가 아닌데.”
영훈의 말에 지연이 입을 삐죽이며 쳐다봤다.
“내가 어떤 앤데?”
“어떤 애긴. 우리 지연이는 생각이 깊고, 배려심도 넘치지.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잘 해 주고, 밖에 있는 이들은 신경도 안 써.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는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고, 해야 하는 일은 반드시 해내고 말지.”
영훈의 입에서 나오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정의를 듣자 지연이 눈을 깜빡였다.
뭐랄까.
영화 속에 나오는 히어로를 묘사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저런 사람이었나?
“맞아. 누나는 정도 넘치고 고집도 있지. 그러면서도 상냥하고 용기를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야.”
“알았으니까 그만해라. 내 손발 다 없어지겠다.”
“흐흣.”
지연이 흘겨보자 지한이 이제 그만 해야겠다며 웃음을 흘렸다.
이 사람들이 내 얼굴에 금칠을 해 주는 걸 보니 아예 시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모양이군.
16화까지 완결이 나와 있던 대본을 떠올린 지연이 곰곰이 생각했다.
‘신재희’라는 캐릭터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꼭 해보고 싶긴 했다.
그래. 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언제는 내가 주변 눈치 보고 일했냐.
“알았어. 할게.”
“조오아써!!!”
지연의 말에 영훈이 파이팅 포즈를 하며 튀어 올랐다.
지한이 잘했다며 누나의 다리를 톡톡 토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