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음과 함께 성이 흔들리는 것처럼 조명이 잠시 깜빡였다.
화면 너머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저벅, 저벅
발자국 소리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화면이 깨지는 것처럼 영상이 비추고 서서히 갈라졌다.
마치 문이 열리고 짐승이 우리에서 풀려난 것처럼 갈라진 화면 사이로 지연이 걸어 나왔다.
…와아아아악!!!
잠시 지연의 분위기에 압도된 팬들이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지연의 등장과 함께 반주가 시작되었다.
♬I’ve waited a long time
for a moment like this♬
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첫 소절과 함께 팬들이 비명을 질렀다.
지연이 부른 첫 소절은 랩이었다.
122. 아시아투어 (3)
[지연 ‘Release’ 미친 무대!]
[컴백 지연. “오랫동안 기다린 팬들에게 보답하고 싶어”]
[지연 ‘Release’ 이래서 해방이다.]
[1년 만의 컴백. 스무 살 지연이 보여주는 성숙한 무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지연의 컴백 쇼케이스에 대한 반응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뜨거웠다.
└지연이 미모 무슨 일이냐.
└미쳤다 미쳤어. 저 세상 미모.
└릴리즈라니. 봉인되었던 미모를 해방하는 건가!
└바라기들 다 죽이려고 작정했나 봄
└└이게 맞다.
└봉인해제! 카드캡쳐 지연 출동!
└└앜ㅋㅋㅋㅋㅋ미쳤나봐
연바라기 일동들은 기사 사진에도 굴욕 없는 미모에 연신 사진을 저장하며 흘러나오는 떡밥을 주워 먹기 바빴다.
그동안 공백기를 보상이라도 하듯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연의 스케줄에 조금 걱정되기도 했으나 7년 동안 아무런 사고 없이 관리했던 탑엔터를 믿었다.
정확하게는 탑엔터의 사장이자 남매의 카페에서 네임드로 활동하고 있는 공 사장을 믿은 거지만.
팬들은 공식 스케줄표에 나와있는 지연의 음방활동이 고작 3주밖에 되지 않아 아쉬워하는 한편 그 이후로 이어진 콘서트에 일정에 설레하며 빨리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모두의 생각을 읽은 듯 시간은 빨리 흘렀다.
* * *
공연 시작까지 꽤 많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른 시각부터 팬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존잘님이 포토카드를 나누고 있었고, 공식 굿즈가 있음에도 팬들은 삼삼오오 준비해온 팬 제작 물품을 주고받았다.
“해수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해수가 고개를 돌렸다.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소희와 서림이 뛰어왔다.
“너희 왜 오늘 이렇게 늦었어.”
“미안미안. 차가 너무 막히지 뭐야.”
“오늘같이 중요한 날 차를 타고 오면 어떡해?”
“그럼 어쩌냐. 콘서트 다 보고 나서 지하철 타고 갈 자신 있음?”
“지하철 타면 되지. 너는 그럼 운전할 체력이 남을 거 같냐?”
“안 되면 대리 부르지 뭐.”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이 된 해수와 친구들이 사소한 것으로 티격거렸다.
학생일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에 해수와 소희, 서림이 피식 웃었다.
“야 됐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어딨어?”
“맞아. 빨리 가서 굿즈 받아야지.”
“그래. 내가 뭐 때문에 오늘 연차 썼다고 생각하는 거냐.”
“나는 오늘 연차 쓰는데 눈치 보이더라.”
“왜?”
“아니 우리 팀만 해도 연차 쓴 사람이 나 말고도 2명인 거야!”
“소희 너희 팀 인원이 몇 명인데?”
“한 8명? 10명? 정도 되려나?”
“그런데 그렇게 많이 썼다고?”
반에서 1등하던 똑똑한 소희는 대학도 좋은 곳으로 가고 대기업에 합격했다.
오랫동안 보던 친구기도 하고 같은 지한이 지연이 팬이기도 한 소희의 합격에 해수와 서림이 두 팔을 들고 환호했던 기억이 있다.
대기업이다 보니 소희의 팀 인원도 많다고 들었는데 그런 인원 중 거의 반에 가까운 수가 연차를 썼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용케 연차 사용 허락받았다?”
“어쩌겠어. 나는 무려 한 달 전부터 얘기했다.”
“한 달 전이면 티켓팅하던 날?”
“그 전날.”
“아니 넌 티켓팅 실패하면 어쩌려고 전날부터 연차를 썼어?”
“됐으니 다행이지. 그동안 우리가 간 지연이 콘서트만 해도 몇 번이냐.”
“크. 알지알지. 지연이 일본 투어 때 따라다녔던 거 기억남?”
“그때 알바 했던 돈 다 털어서 지연이 따라다녔잖아. 내 인생에 제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함.”
“해수 넌 대학 인서울 한 게 제일 잘한 일 아니야? 와 나 그때 지연이랑 지한이 볼 거라고 해수가 모평 상위 20% 안에 든 거 보고 깜짝 놀랐잖아.”
“그걸 보고 나 더 열심히 했잖아. 인간이 못 할 일은 없더라.”
“정말?”
“맞아. 해수 너보고 우리도 열공했잖아.”
“어쩐지 이것들이 전부 성적이 잘 오르더라니.”
자신을 보고 그런 거였구만.
서로에게 자극을 받았다는 사실에 세 친구가 시시덕거렸다.
“아무튼 나는 오늘 너희랑 함께해서 좋다. 내일은 혼자지만.”
“치사한 것. 양일 다 되다니.”
“너도 좋은 컴 쓰던가.”
“크흑. 다음 월급날에 컴 바꾼다.”
“해수 이 나쁜 기지배. 두고 보자.”
월급을 받아서 거의 다 지연이와 지한이의 굿즈 사는 데 쓰는 해수가 첫 월급과 그다음 월급을 아껴서 고사양 데스크탑을 맞췄다는 소식에 소희와 서림이 걱정했지만 다 필요 없는 걱정이었다.
첫날만 겨우 성공한 자신들과 달리 올콘을 뛰는 해수를 보고 분한 듯 두 사람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음 달 내 월급 전부 올인한다.’
‘해수가 맞춘 컴 사양이 뭐였더라?’
친구들이 고민할 때 공연장 안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소리가 고막을 덮쳤다.
둥-둥-!
“와아. 리허설 소리 들려.”
“대박. 벌써부터 너무 좋아.”
새 컴퓨터에 대한 생각도 잠시 금세 머리를 가득 채운 콘서트 생각에 해수와 친구들이 걸음을 빨리했다.
그때 어딘가를 보고 해수가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굿즈 부스 보인다!”
“어디!”
“나 먼저 간다!”
“치사하게!”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끈끈한 우정을 자랑하던 세 친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각기 굿즈를 파는 부스로 뛰어갔다.
* * *
하나둘씩 자리를 찾아간 팬들이 설렘으로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입구에서 받은 굿즈가 너무 예뻤다.
특히 응원봉이 너무 예뻤는데 스노우 볼 같은 것 안에 보석처럼 세공된 ‘J’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고 알파벳 위에 커다란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
지연을 상징하는 마크였다.
손에 받아 든 굿즈를 소중하게 쥐고 앉은 팬들이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옆에 앉은 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번 굿즈도 완전 마음에 들지 않아요?”
“진짜 탑엔터 진행은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맞아요. 제가 한때 다른 아이돌을 파긴 했었는데 거긴 팬을 거의 ATM기 취급을 하더라니까요.”
“세상에. 저는 이쪽은 지연이가 처음이에요.”
“아, 그러시구나. 아무튼 탑엔터가 확실히 굿즈 디자인은 잘 뽑죠.”
“그거 아세요? 우리 굿즈 지연이가 디자인한 거라는 소문이 있어요.”
“미친…!”
본업 천재에 부업인 화가로서의 실력 역시 세계구급인 우리 지연이가 디자인한 굿즈라니.
어쩐지 로고부터 심상치 않더라니.
확실한 사실이 아닌 소문이었지만 이미 뇌 속에서는 지연이 직접 만든 굿즈라고 치환한 팬이 떨리는 손으로 영롱한 굿즈를 받들었다.
같은 연바라기라는 사실만으로 내적친밀감을 MAX 찍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존잘님들의 굿즈와 탑엔터에서 만든 공식 응원봉을 보고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파앗!
팬들이 전부 입장하자 공연장 조명이 일시에 꺼졌다.
“아, 이제 시작하나 봐요!”
“드디어!”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지연의 콘서트가 시작되었다.
파바바바밧!
관객들이 들어오고 나서 잠시 어두워졌던 조명이 일시에 폭죽을 터트리듯이 켜졌다.
밝아진 조명 아래에 검은색 큐브가 놓여있었다.
길어지는 침묵에 관객들이 자신의 심장 소리가 다 들릴 것 같다고 생각할 무렵 큐브가 빛을 내며 갈라졌다.
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악!!!!
높은 데시벨의 비명이 반, 군대에 온 것 같은 묵직한 함성이 반이었다.
여성 솔로 가수치고는 여성 팬들도 많은 지연의 팬덤답게 높고 낮은 음성이 지지 않고 부딪치며 들려왔다.
일렉트릭 음향이 공연장 내부를 꽉 채울 때 지연이 핸드 마이크를 들고 입을 열었다.
[♬I’ve waited a long time
for a moment like this
무너트려 날 가로막고 있는 문
부숴! 던져! 버려!♬]
잡아먹을 것 같은 날카로운 시선에 팬들이 전율하며 응원봉과 슬로건을 흔들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불빛들을 보며 지연이 돌출 무대로 걸어가며 노래를 불렀다.
[♬불쌍하게 보지 마
날 동정하지 마
그런 편협한 시선은 OUT♬]
돌출무대에서 관객들과 눈을 마주치고 손을 잡아준 지연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지연과 손이 스친 팬은 감격에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주저앉으려고 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안전요원이 다가왔으나 그 팬은 다시 굳건히 일어나 응원봉을 더욱 열정적으로 흔들었다.
[♬당당하게
고개 들어
이게 바로 나야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지♬]
점점 고조되는 반주에 팬들이 노래를 함께 따라 불렀다.
K 민족의 고유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떼창이었다.
[♬Let U Free
Let Me Free
날 보는 시선에 맞서 싸워
날 가두려 하지 마
Wha-ooh-oh!♬]
시원하게 치고 나오는 고음에 관객들이 함성을 질렀다.
빠른 비트에 강렬한 멜로디인 ‘Release’ 는 안무도 격렬했으나 지연은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라이브를 소화했다.
‘이게 바로 라이브의 맛인가!’
콘서트에서 지연의 라이브를 본 이들이 하나같이 콘서트에 오지 못한 이들을 놀릴 때 속으로 부들부들 떨었던 일부 관객들은 왜 그런지 알 것 같다며 정신을 놓고 응원봉을 쥔 팔만 빠르게 흔들었다.
간주에 이어지는 댄스 브레이크와 스크린에 비춰지는 지연의 도발적인 표정을 보고 관중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함성을 지르는 것밖에 없었다.
[♬부러워? 내가 좀 예뻐
보이니? 내가 산 가방
질투해? 내가 잘나서
어쩌겠어
어쩌겠어
이게 바로 나야.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지♬]
화려한 조명과 불꽃이 무대 위를 수놓았다.
* * *
새 앨범 타이틀부터 시작한 히트곡 메들리에 관객들이 환호하며 소리를 질렀다.
처음부터 대놓고 달리자는 곡리스트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방 뛰었다.
어느새 3곡을 마친 지연이 숨을 고르며 오프닝 멘트를 했다.
[후우. 여러분 즐거우셨나요?]
네에에에에에!!
지연의 물음에 목이 터져라 관객들이 대답했다.
그 기세에 지연이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까지 카리스마 넘치게 무대를 했던 사람은 어디 가고 갓 스무 살 귀여운 청년이 서 있었다.
지연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손을 흔들었다.
[금요일 저녁인데 다들 오는 거 괜찮았어요?]
괜찮아!!!!!
[괜찮다니까 다행이에요. 사실 제가 콘서트 준비하기 전에 여러분들을 위해서 매니저 언니한테 부탁한 게 있어요.]
지연의 말에 팬들이 궁금해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데뷔 이후에 제가 처음으로 1년 정도 쉬었는데요. 이렇게 오래 공백기를 가진 적은 처음이잖아요.]
그 말에 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연을 파서 좋은 점은 다른 이들과 달리 공백기가 적다는 것이었다.
무리한 스케줄을 잡지 않는 대신 꾸준히 활동했는데 덕분에 팬들은 매년 행복하게 덕질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 콘서트에서 어떻게 하면 팬 언니 오빠 동생들에게 오랜 기다림에 대한 보답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지연의 말에 다들 흐뭇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띠고 소리를 질렀다.
내 새끼가 이렇게 팬들을 생각한다!
본업도 잘하는데 팬들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있으니 지연의 팬으로서 파는 보람이 넘쳤다.
가슴을 뻐근하게 만드는 지연의 팬 사랑에 관객들은 모두 터져 나오는 함성을 감출 수 없었다.
남색 손수건을 팔목에 묶고 밤하늘에 있는 별이 땅에 내려온 것처럼 반짝이는 응원봉을 본 지연이 배시시 웃었다.
[매니저 언니한테 조언을 구했더니 팬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걸 보여주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우와아아아아아악!!!!!!!!
지연의 대답에 함성이 커졌다.
왕성한 활동만큼 히트곡도 많은 지연인지라 콘서트에 모든 곡을 담기 힘들었다.
보고 싶은 무대는 많았으나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고, 해가 갈수록 늘어나는 히트곡에 보고 싶은 무대를 보기는 요원했다.
그런데 이번에 보고 싶어 했던 공연을 드디어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팬들의 함성이 점점 높아졌다.
[이거 정말 오랜만에 공연하는 거 같은데. 다들 좋아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지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스크린에 하얀 달이 떴다.
조명이 푸르게 변하고 창백하게 분장한 댄서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스산한 멜로디가 시작되었다.
첫음절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노래에 관객들이 빠르게 응원봉을 흔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매년 할로윈 시즌만 되면 거리 곳곳에서 들리는 명곡, 백귀야행의 구미호 곡인 ‘Red Heart’가 시작되었다.
[♬그대 잘 있나요.
날 두고 혼자 떠난 그대♬]
댄서들 사이에 잠시 모습을 감춘 지연의 위로 조명이 쏘아졌다.
지연의 머리 위로 뾰죡한 한 쌍의 귀가 솟아나 있었다.
매번 카페나 팬페이지에서 지연의 구미호 버전에 대한 금손의 팬아트들이 유행했지만 지연은 야속하게도 한 번도 콘서트나 다른 공연에서 구미호 분장을 하고 불러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20살이 되자마자 머리에 쫑긋한 귀 머리띠를 하고 나타난 것이다.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자 팬들은 또다시 함성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악!!!
어떡해!! 너무 좋아!!
꺄아아아아!!
밴드 버전으로 편곡된 지연의 ‘Red Heart’ 공연에 팬들은 잠시도 앉을 틈 없이 자리에서 또다시 뛰기 시작했다.
아련하지만 유혹적인 시선으로 지연이 팔을 뻗어 허공에 손짓했다.
[♬다정한 손길로
다친 나를 보듬어 주었죠.
우리 다시 만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