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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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잘 알아보고 한 거 맞아?”

“응. 여기 계약서도 가져왔어.”

“어디 봐봐.”

다온이 한길의 손에 들린 계약서를 뺏어 빠르게 훑었다.

“나도 계약하기 전에 변호사님 만나고 갔단 말씀! 날 멍청한 이한길이라고 생각했다간 곤란하다고.”

“여기 평판은 어때?”

다온이 한길의 말을 무시하고 물었다.

입을 삐죽인 한길이 다온의 말에 대답했다.

“나도 잘 몰라서 여기저기 뒤져봤는데 나쁘진 않은 거 같아.”

“흠. 그래. 뭐. 일단 나도 알아볼게. 모델 에이전시라면 선배들도 알고 있는 곳이 있을 거니까. 그런데 여기 이름은 왜 이래. 허수아비?”

“대표님이 허수아비를 보고 모델업계에 뛰어들 결심을 했대.”

“왜 하필 허수아비야.”

“나도 몰라.”

다온과 한길이 희희덕거리며 지하철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한영이 회사 로비에서 나오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고 있었다.

* * *

한길의 모델로서 성장하고 있을 때, 다온 역시 회사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새로운 브랜드 런칭을 할 겁니다. 이전과는 다른 고급라인으로 진행할 거고 브랜드 런칭쇼도 열 예정입니다.”

제니스의 본부장이자 다온이 커피를 쏟았던 최악의 첫만남을 가졌던 민호는 똑부러지고 제 할 일도 잘하는 다온에게 점점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그녀의 디자인이 아까워 새로운 브랜드 런칭이라는 기회를 기획하기도 했고, 밤늦게까지 일하는 다온에게 커피를 들고 사가기도 했다.

“다온씨 여기 이 스케치부터는 모델이 따로 있었나보죠?”

“아! 뮤즈가 생겨서요.”

“뮤즈라. 혹시 접니까?”

민호의 장난스러운 농담에 다온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서 뮤즈가 자신은 아닐 거라고 직감한 민호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다온 씨. 바쁘신가요?”

“아! 아닙니다. 무슨 일이세요, 최 팀장님?”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다온을 구해 준 건 한영이었다.

잠시 다온 씨를 빌리겠다는 한영의 말에 민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온 다온이 한영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무것도요. 그저 다온 씨가 곤란해 보여서요. 회사에서 사적인 관계를 가지는 건 추천하지 않습니다.”

“아. 저 본부장님이랑 아무런 사이 아니에요.”

“본부장님도 그런 생각인지는 아무도 모르죠. 아무튼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만한 일은 안 만드는 게 좋습니다.”

“넵.”

무뚝뚝한 한영의 말에서 자신을 향한 걱정을 느낀 다온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구해주는 것이 목적이었는지 한영은 곧바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팀장님!”

떠나려는 자신을 붙잡는 목소리에 한영이 다시 몸을 돌렸다.

“한길이. 모델 에이전시랑 계약했어요. 허수아비랑요.”

“그걸 왜 저한테 말하는 거죠?”

“그냥. 팀장님이 혹시 궁금해하실까 봐요.”

“그렇군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온이 허리를 꾸벅 숙이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떠난 자리 뒤로 홀로 남은 한영이 다온의 말을 곱씹었다.

“허수아비라. 좋은 곳을 골랐네.”

한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118. 끝났다.

그 뒤로도 다온은 계속해서 틈만 나면 한영에게 한길의 근황을 전했다.

“요즘 3팀 신입이 우리 팀에 너무 자주 오는 거 같은데.”

“혹시 우리 팀장님 디자인 훔쳐보려고 왔나?”

“호들갑 떨지 마세요. 다들 이번에 자기 옷 몇 벌 올려야죠.”

“흐잉. 팀장님. 하지만 저는 고급라인은 조금 힘들다고요.”

“힘든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세요.”

떠들썩한 팀원들을 다독인 한영이 손을 움직였다.

한영이 펜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디자인 스케치가 한 장씩 뚝딱 완성됐다.

이렇게 각자의 위치에서 모두가 분발하고 있을 때, 예나 역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유다온의 디자인을 훔쳐오세요.”

“그걸로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뭐긴요. 이번에는 유다온에게 표절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달아줘야죠.”

제니스의 경쟁업체인 헤븐 코리아에서 이사직을 맡고 있는 아빠의 도움으로 제니스의 새로운 브랜드 런칭 소식을 알게 된 예나는 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쪽 본부장이 유다온을 아끼고 있다는 소문도 들었겠다, 유다온의 디자인이 새 브랜드 런칭쇼에서 나오는 건 거의 확실해 보였다.

그럼 그걸 망쳐 줘야지.

사람들이 다 보는 곳에서 두 번 다시 이쪽에 발도 못 들이게 해 주겠어.

창문에 비친 예나의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

‘이번 공모전도 다온이가 대상 받겠지?’

‘교수님이 제니스에 다온이 추천했대!’

‘와 나도 제니스 가고 싶었는데.’

학창시절부터 자신이 받았어야 할 주목을 모두 가져가버린 다온을 지켜봐왔다.

별 볼 일 없는 세탁소집 자식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그까짓 디자인 나도 만들 수 있어!

유다온 너만 없었으면 내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단 말이야.

비뚤어진 원한이었지만 이제껏 잘나가는 패션디자인 회사 중역을 부모로 둔, 외모면 외모, 배경이면 배경, 실력이면 실력,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던 예나에게 다온은 눈엣가시였다.

유다온을 만나고부터 탄탄대로였던 제 인생이 조금씩 삐걱거렸다.

다온의 디자인 노트를 보고 받은 충격은 예나의 인생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네 자린 전부 내 거야.”

곱게 단장 받은 손톱이 말아 쥔 주먹 안으로 사라졌다.

* * *

-한예나 ㅈㄴ웃기네. 그게 왜 네 자리야.

└곱게 자라서 세상을 뭔지 모르는 듯

└다온이도 말했잖아. 공주처럼 살아온 애가 있다고

└과제로 낸 디자인도 100퍼 아빠 도움 받았을 듯

└└그것은 합리적 의심

-아니 지연이 디자인 뭐임.

└언니 왜 대한민국에는 안 내 줘요?

└우리도 입고 싶어요!

└옷 내놔!

└텍마이머니!

└언니 최한영 컬렉션 내 주세여! 젭알!

└의류 회사들 뭐하냐. 우리 언니 디자인으로 옷 안 내 주고.

화면에 잠시 공개된 지연의 디자인이 또다시 화제에 올랐다.

매 화 전개될 때마다 지한의 모델포스와 함께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하는 것이 지연이었다.

이번에는 얼핏 화면에 잡힌 지연의 디자인이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지한, 모델 포스 철철.]

[오지한, ‘친구 이상, 연인 미만’에서 선보인 모델 워킹.]

[순둥이 모습을 벗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델이 된 오지한]

[‘저 옷 어디서 살 수 있어요.’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지연이 디자인]

[지연이 직접 그린 디자인, 관계자 발언 ‘지연의 디자인 감각은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급’]

이런 반응이다 보니 내놓으라는 회사에서 지연의 디자인에 관심은 안 가질 수 없었다.

특히 <친구 이상, 연인 미만>에 협찬을 한 의류회사에서는 뜻밖의 횡재에 입이 함지박하게 벌어졌다.

지연의 디자인을 사용할 수 있을지 탑엔터와 협상 중이라고 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아마 조만간 지연의 통장에 새로운 명목의 입금내역이 생길 것 같았다.

* * *

회사로 숨어든 도둑 때문에 다온은 큰 위기를 겪게 된다.

헤븐 코리아에서 다온의 디자인을 빼앗아 똑같은 날에 쇼를 선보일 예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제니스에서는 패닉에 빠졌다.

“당장 유다온 씨가 디자인한 의상을 빼야 합니다.”

“이제 와서 그 빈 자리를 채우기에는 시간이 촉박해요.”

“유다온 씨 한 명 때문에 우리가 표절 회사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순 없어요.”

그때 디자인 1팀 팀장인 한영과 본부장인 민호가 다온의 편을 들어주었다.

“피해자는 우립니다. 이대로 지고 들어갔다간 헤븐 코리아측에서 또 무슨 수를 쓸지 몰라요.”

“유다온 씨는 유능한 디자이너입니다. 시간에 맞춰서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두 사람 덕분에 다온은 반격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다온 씨. 표절 논란이 있는 그 디자인보다 더 좋은 디자인을 만드세요. 나머지 작업은 제가 도와주죠.”

“저기. 그걸 왜 1팀장님이. 다온 씨 팀장은 접니다만.”

“그럼 3팀장님도 도우세요.”

“네? 네에.”

그렇게 모두의 도움으로 브랜드 런칭쇼까지 무사히 왔지만 이번에는 모델이 문제였다.

예나의 방해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열리게 된 패션쇼장에서 다온의 의상을 맡은 모델들이 갑자기 계약해지를 통보한다.

알고 보니 헤븐 코리아 측에서 손을 쓴 것.

“진짜. 징글징글하다.”

“다들 시간 없어.”

모두가 황당하게 서 있는 동안 민호가 나섰다.

“다온 씨. 인수 씨, 해남 씨. 옷 입으세요.”

“네?!”

“그럼 어떡합니까. 이분들 데리고 가 주세요.”

“넵!”

카리스마 넘치게 현장을 지휘한 민호의 말에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1팀장님. 팀장님도 도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한영도 민호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고 메이크업을 받으러 이동했다.

“본부장님 그래도 사람이 부족합니다.”

“몇 명이나 부족하죠?”

“3명입니다.”

“연락되는 에이전시에 모두 전화한 거 맞습니까?”

“네.”

민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다온의 초대장을 받아 무대 뒤를 구경하고 있던 한길이 손을 들었다.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민호가 한길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다온의 소꿉친구이자 방해꾼.

이전에 봤던 것보다 확실히 달리진 눈빛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무대에 서실 수 있습니까?”

“네.”

“그래도 아직 2명이 부족합니다.”

“본부장님도 오르시죠.”

“좋습니다.”

도발하듯이 말한 한길의 말에 민호가 자신도 모르게 발끈하며 받아들였다.

“나머지 한 명은 어떻게 합니까?”

“제가 2명 몫을 하죠.”

“펑크나면 다온 씨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곤란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무대 위에 오르는 것만 생각합시다.”

이로서 빈자리를 모두 채웠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패션쇼가 시작됐다.

-ㅋㅋㅋㅋㅋㅋㅋㅋ결국 막판에 다 모델로 서는 거야?

└지한아앜!!! 지연아앜!!!!

└우리애들 모델워킹도 쩔어!

└다른 애들은 조금 어색해 보이는데 둘은 완전 천상 모델임

└개멋있어! 으아아아악!! 얘들아 날 가져!

└본부장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나는 본부장님 편이었는데 이건 어쩔 수 없어요.

제니스의 새 브랜드 런칭쇼는 성황리에 끝났고, 기자들의 반응을 봐도 제니스의 압승이었다.

* * *

“그거지!!”

“그러취!!”

헤븐 코리아에 대한 고소장이 접수되고 유다온을 괴롭히던 한예나와 그녀를 안하무인으로 키운 한예나의 아버지는 경찰에 출두하게 된다.

기사들이 대서특필하게 되고 이 사건으로 인해 다온의 디자인이 더욱 유명해지게 된다.

“캬! 하여튼 남의 걸 훔치는 놈들은 콩밥 좀 먹어야 한다니까!”

“맞아맞아. 누가 내 디자인 훔쳤다? 아주 그냥 사람 구실 못 하게 머리채를 다 뜯어놓을 거야.”

“미나야. 머리는 좀.”

“왜! 감히 내 디자인을 훔쳐!?”

“어어. 진정해. 미나야. 캄 다운!”

집에서 최종회를 보고 있던 영훈이 과몰입하는 미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유도했다.

“후-하-후-하.”

“저기 우리 애들 나온다.”

“훕!?”

영훈의 말에 미나가 고개를 번쩍 들어 화면을 바라봤다.

쇼를 마치고 혼자서 2인분 몫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 동생을 보고 한영이 동생을 찾아가 말했다.

“고맙다. 네 덕에 다온 씨도 제니스도…그리고 나도. 무사히 쇼를 끝낼 수 있었어.”

정말 오랜만에 듣는 누나의 감사 인사에 한길이 눈을 크게 떴다.

“네가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을 거야.”

“…누나.”

“이젠 정말 다 컸네.”

한영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얼마만에 보는 누나의 웃는 얼굴인지.

어릴 때처럼 웃어주는 누나의 얼굴에 한길이 울컥했다.

차갑게 위장한 가면 아래에 자신이 알고 있던 누나의 얼굴이 드러나자 한길은 그동안 누나가 얼마나 혼자 외로웠을지, 힘들었을지 이해할 수 있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어리광만 부려서.”

“아니야. 누나가 더 미안해.”

뺨을 타고 흐를 것 같은 눈물을 고개를 들어 참았다.

듬직한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는데 여기서 어린애처럼 울 수 없었다.

그때 한길의 머리를 한영이 쓰다듬어줬다.

“무대 위에 선 네 모습 잘 봤다. 정말 멋졌어.”

“…앞으로도 계속 멋진 모습만 보여줄게.”

“예전처럼 철없는 모습을 보여줘도 괜찮아. 너는 내 동생이잖아.”

“항상 말썽만 치는 동생이지만.”

“말썽을 부리든 사고를 치든 네가 내 동생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야.”

남매는 드디어 해묵은 감정을 풀었다.

누나를 시작으로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한 한길이 다온이 있는 옥탑방으로 날듯이 뛰어올라갔다.

“유다온!”

“아, 깜짝이야!”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올라온 한길을 보고 다온이 화들짝 놀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길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온을 와락 끌어안았다.

“다온아. 고마워.”

“뭘. 내가 더 고맙지. 네 덕에 내가 만든 옷이 무대 위에 설 수 있었잖아.”

“내가 무대 위에 올라갈 수 있었던 건 네 덕이었어.”

“그럼 반반씩 고마워하자.”

“아, 진짜. 유다온 못 말린다니까.”

런칭쇼를 방해하려는 세력도 잘 물리치고, 능력도 인정받고, 이제는 정말 새로운 에이스로 발돋움한 다온이 옆을 돌아봤다.

혼자였다면 결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다.

“야. 최한길.”

한길이 자신을 부른 다온을 돌아봤다.

“앞으로도 계속 나와 함께해 줄래?”

의미심장한 다온의 말에 한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진지한 다온의 눈을 본 한길이 탁 막힌 숨을 토해내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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