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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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버스 안에서 여기저기 치인 다온이 도착한 곳은 유명 디자인 회사.

이 회사에 오기 위해서 각종 공모전과 스펙,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야 했다.

남들처럼 어디 놀러가지도 못하고 대학 다니는 동안 스펙 쌓기에 집중한 결과 조기졸업과 함께 다온은 유명 브랜드 회사의 디자인팀에 입사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으어어어.”

“다온 씨 왔어?”

디자인 3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광경은 흡사 전쟁터 같았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선배들은 힘없이 누워있었고 책상 위에는 원단 샘플, 패턴, 디자인 스케치들이 가득했다.

초토화된 곳에서 다온이 죽어가는 듯 꿈틀거리는 선배들을 두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일단 선배들부터 깨우자.

핫세븐이 구비되어 있는 탕비실로 향하며 다온이 오늘 하루도 의지를 불태웠다.

선배들과 상사들의 심부름을 하고 이리저리 움직인 다온의 회사생활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다온아 오늘은 이제 퇴근해.”

“그치만 어떻게 저 먼저.”

“흐. 흐. 우리도 퇴근할 거야.”

“그래. 내일이 품평횐데 잠 좀 자야지. 안 그럼 발표 못 해.”

“넵!”

상사들의 배려에 다온은 오랜만에 일찍 퇴근할 수 있었다.

또각, 또각

“으어어어.”

늦은 저녁 시간에 집으로 향하는 다온이 좀비 같은 소리를 냈다.

“나는 언제 내 디자인으로 옷 만들어보나.”

디자인팀에 입사했지만 아직 자신의 디자인으로 옷을 만들어 보지 못한 다온이 심부름 하느라 뻐근한 어깨를 두드리며 집으로 걸어갔다.

“어? 지금은 사람이 별로 없네.”

아침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던 편의점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저녁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나? 어휴. 뭐 가 봤어야 알지.”

취직을 하면서 회사 근처에 자취방을 구했기 때문에 여기 편의점에 가는 건 처음이었다.

“라면이나 사 갈까.”

딸랑

“어서 오세요.”

사장으로 보이는 중년 아저씨의 인사를 받으며 편의점에 들어온 다온이 라면을 골랐다.

딸랑

“어? 한길이 너는 또 여기 왜 왔냐.”

“사장님 하하. 그게 말이죠. 제가 집 열쇠를 두고 왔더라고요.”

“집 열쇠? 그걸 왜 두고 가.”

“알바할 때 입었던 조끼 안에 넣어두고 깜빡했지 뭐예요.”

“너는 인마 생긴 건 멀끔하게 생겨서 왜 그리 덜렁대는 거야.”

사장님과 알바생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대화에 다온이 눈치를 봤다.

지금 나가서 계산해 달라고 해야 하나?

조금 더 기다릴까?

“됐고, 열쇠 찾았으면 얼른 가 봐라.”

“옙!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휴. 대화 끝났나보다.

눈치를 보던 다온이 코너에서 몸을 돌려 계산대 앞으로 걸어갔다.

“계산해 주세요.”

편의점을 나가려고 문손잡이에 손을 올린 한길은 왠지 모르게 자신을 잡아끄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화면에 잡힌 한길의 얼굴이 슬로우 모션으로 느리게 움직였다.

그의 시야에 컵라면을 계산하고 있는 여성의 옆모습이 잡혔다.

피곤에 찌든 단정한 얼굴에 한길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여성의 얼굴 위로 익숙한 실루엣이 겹쳐졌다.

‘너는 왜 이렇게 덜렁대냐?’

‘어휴. 넌 나 없으면 어떡할래?’

‘나 너네 집에 공부하러 가도 돼?’

‘이한길!!’

한길은 눈앞에는 어느새 어린 시절 자신의 옆을 지켜주던 한 소녀의 모습이 서 있었다.

* * *

-만났다!!!

└와. 여주랑 남주랑 드디어 만난 거임?

└지금 보니까 완전 그거네. 어릴 때 만났던 첫사랑.

└근데 왜 드라마 제목이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인 거임?

└나도 몰라.

└좋게 헤어졌나보지.

└└└이 세상에 좋은 헤어짐이란 없다.

└└└뭐야, 모쏠이 아니란 말인가요?

└└└죽창!죽창!죽창!

└└└└만남도 없기 때문이다.

└└└└└앗….

└└└└└슨생님….

└└└└└죄송합니다. 선생님. 오인사격 했습니다.

└개웃기넼ㅋㅋㅋㅋㅋ

드라마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 벌써부터 밝혀지는 두 사람의 연결고리에 이런저런 추론을 했다.

어릴 때 헤어졌던 소꿉친구 또는 첫사랑을 다시 만나서 이어지는 것은 드라마의 클리셰가 아니던가.

-난 왜 저런 소꿉친구 없음?

└몰랐음? 우리 지한이 CG임

└아! 그렇구나.

└└그렇긴 뭘 그렇구나얔ㅋㅋㅋㅋㅋㅋ

└오지한 학교 안 다녀서 그럼. 초등학교 중퇴져?ㅋ

└└뭔 솔임. 우리 지한이 검정고시로 다 패스했는데

└└그래봤자 검정고시 출신ㅋ

└방구석 찐따 상대해주지 맙시다.

└ㅇㅇ지한이보다 잘난 게 없어서 그럼

└무시해.

이제는 다 큰 어른이 되어 만난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고 손가락을 가리켰다.

“너, 설마. 이한길?”

“맞아.”

오랜만에 만난 소꿉친구에 두 사람이 반갑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온의 얼굴에서는 피로를 찾아볼 수 없었고, 한길의 얼굴에서는 여러 감정들이 드러났다.

편의점을 나선 두 사람이 길을 걸었다.

“너 여기서 아르바이트하냐?”

“어. 너는 이 근처 살아?”

“응. 회사가 근처라서.”

“벌써 회사를 다녀?”

“내가 좀 유능한 인재잖냐.”

“무슨 일 하는데?”

“패션디자이너. 뭐. 아직 신입이라 잡일만 하고 있어.”

“디자이너라 잘 어울려. 어릴 때부터 너 손이 야무졌잖아.”

“그래. 그 덕에 네 바지도 엄청 꿰매줬지. 너 아직도 남의 집 담 타고 다니냐?”

“내 나이가 몇인데 그래. 그때야 어릴 때 했던 거고 이제는 남의 집 담 타다가 바지에 구멍 내고 그러지 않아.”

회상 장면이 짧게 이어졌다.

“너 또 바지에 구멍 냈어?”

“헤헤. 다온아. 나 이거 좀 기워주면 안 돼?”

“또?”

“엄마가 또 옷 찢어먹으면 1시간 동안 무릎 꿇고 손들고 있으랬단 말이야.”

“어휴. 줘봐.”

세탁소 집 딸답게 손재주가 좋았던 다온이 구멍 난 한길의 바지를 꿰매주었다.

아직 어리지만 작은 손으로 한 땀 한 땀 바지를 꿰매는 다온의 모습을 한길이 조용히 지켜봤다.

“자! 다 됐다.”

“고마워! 다온이 너 진짜 잘한다. 크면 내 신부 할래?”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그런데 너 이거 어디서 구멍 낸 거야?”

“담 타다가 못에 걸렸어.”

“너 내가 그러지 말랬지!”

짜악!

다온의 야무진 손이 한길의 팔뚝을 내리쳤다.

“앗! 따가워.”

“너 한 번만 더 남의 집 담 타봐!”

“너희 집 담 타는 것도 아닌데 뭐.”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아, 몰라.”

“이한길!”

아역배우들이 연기한 회상 씬이 사라지고 현시점으로 화면이 전환됐다.

십 년 가까이 지난 후에 만났지만 두 사람은 어제도 만난 것처럼 금세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너는 어릴 때부터 똑 부러져서 뭐든 다 잘 할 줄 알았어.”

“나는 네가 하도 덜렁거리고 다녀서 일도 제대로 못 할 줄 알았는데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을 줄 몰랐지.”

“날 뭐로 보는 거야.”

“뭐로 보긴 얼굴만 반반한 말썽쟁이?”

“아니거든?”

다온이 지친 것도 잊고 한길을 보고 생기가 넘치는 얼굴로 떠들었다.

그 모습을 받아주는 한길의 얼굴에는 편안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아 달달하다.

└나도 한길이! 나도 한길이! 나도 한길이!

└한길아 나도 세탁소 집 딸이야^^

└한길아 기억나? 내가 그때 네 옷에 난 구멍 기워줬잖아.

└다들 무슨 소리세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길아 내가 진짜 세탁소집 딸이야. 기억나니?

└다들 왜 어린 시절 조작당했냐곸ㅋㅋㅋㅋㅋㅋ

한길이 다온의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옥상에 올라간 다온이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한길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

“내일 편의점 와! 네 삼각김밥은 빼놓을게!”

“오케이!”

두 사람의 재회가 끝나고 어느새 다음 날이 밝았다.

“이거 먹고 가! 힘내고!”

“고마워!”

한길이 말해준 대로 미리 빼놓은 삼각김밥을 사 간 다온이 씩씩하게 회사로 출근했다.

‘오늘은 좋은 일이 있을 거 같은데?’

그러나 디자인 3팀에 위기가 찾아왔다.

115. 폭풍전야

“다들 더 남은 거 없어? 이번에 우리 팀이 제출한 디자인이 할당량을 못 채웠어. 다행히 옆 팀에서도 통과된 게 적어서 한 번 더 품평회를 갖는다고 한다. 그때까지 우리 팀도 부족한 디자인을 더 채워야 해.”

“하아. 또 밤새워야겠네요.”

“으어어. 저는 이번에 다 털었어요.”

“그러지 말고. 다들 더 없어?”

“있긴 해도 이번 시즌이랑 안 맞아요.”

“후우.”

디자인 3팀 팀장이 앓는 소리를 하는 팀원들을 보고 눈두덩이를 눌렀다.

며칠 밤낮을 고생했다는 건 안다.

총 3개의 디자인 팀이 있는데 이 중에서 할당량을 채운 건 디자인 1팀밖에 없었다.

그 팀에서 부족한 디자인을 채우겠다고 한 걸 2팀과 3팀이 시간을 더 달라고 해서 미뤘다.

아무리 우리 회사에서 가장 잘나가는 1팀이라고 해도 이대로 밀릴 수 없지 않은가.

“시간이 없다. 다들 더 없어?”

“해보겠습니다. 팀장님.”

“저도 해볼게요.”

“일정이 촉박해. 모레까지 가능하겠어?”

“그건, 좀.”

팀장의 말에 팀원들이 앓는 소리를 했다.

그때 팀장의 시선이 제일 멀리 앉아있는 팀원에게로 향했다.

“신입.”

“네, 넷!?”

“너 혹시 디자인 가진 거 있어?”

“저기.”

팀장의 말에 지목당한 다온이 눈을 요리조리 굴렸다.

“있어, 없어?”

“있습니다!”

무릇 디자이너라면 자신의 디자인을 항상 들고 다니지 않겠는가.

“그래? 가져와 봐.”

“넵!”

다온이 자신의 노트를 가져왔다.

팀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노트를 펼쳤다.

“오오.”

“신입, 아니. 다온이 디자인 꽤 좋은데?”

“그러고 보니 쟤 조기 졸업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맞아.”

“오오오!”

꽤 괜찮은 반응이 나왔다.

“좋아! 유다온 이거 써 보자.”

“! 네!”

팀장의 말에 다온이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제 디자인을 이렇게 빨리 보여줄 날이 올 줄 몰랐다.

다온의 활약으로 위기를 넘긴 디자인 3팀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드디어 품평회 날.

“이 디자인 좋은데요?”

다온의 다지인이 채택되었다.

“한길아 네 삼각김밥이 진짜 행운의 김밥이었나 봐.”

“그래? 잘됐다니 다행이다. 이제 네 디자인 볼 수 있는 거야?”

“물론이지! 이제 디자이너 선생님이라고 불러!”

“오올. 디자이너 온!”

“왜 온이야.”

“성으로 불리는 건 흔하잖아. 디자이너라면 자신의 특색이 있어야지.”

“그렇게. 그럼 앞으로 날 디자이너 온이라 불러라!”

“휘익- 온 선생님!”

다온의 옥탑방에서 소소하게 축하파티가 벌어졌다.

“이런 날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야. 뭐 하게.”

“치킨을 먹어야지! 이런 날 치느님을 영접해야하지 않겠는가!”

“오! 오! 치느님!”

다온이 곧바로 치킨을 시켰다.

“그런데 너 알바하고 사는데 이렇게 돈 써도 되냐?”

“뭐 어때. 너한테 쓰는 건 아깝지 않아.”

빙그레 웃으면서 건넨 다정한 말에 다온이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렸다.

“왜 그래?”

“어? 아니. 잠시. 체했나?”

“뭘 먹었다고 체해? 손 줘 봐.”

한길이 다온의 손을 잡아챘다.

엄지와 검지 사이를 부드럽게 눌러준 한길이 보였다.

고개를 살짝 숙인 탓에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잘 보였다.

다온이 멍하게 파괴력 넘치는 한길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제 괜찮아?”

“어, 응?”

“속이 좀 괜찮아졌냐고.”

“물론이지! 애초에 체한 게 아니라 잠시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그런 거야.”

“그래? 너네 집에 심장병 이력이 있는 사람이 있던가?”

“뭘 물어. 당연히 없지. 아! 심장병 하니까 생각났다. 네 누나는 잘 지내?”

다온의 물음에 한길의 표정이 잠시 딱딱하게 굳었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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